Sermon

아멘 아멘 내가 네게 이르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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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3:5~7
주일오전예배 | 2019-06-02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어느 기업에서 공장을 새로 지었습니다. 공장 사장은 질 좋은 제품을 출시하기 위해 아주 고가의 장비들을 설치했습니다. 이제 공장에서 좋은 제품들이 출시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대를 모았습니다. 공장관계자들은 가슴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런데 기계가 작동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기술자들을 불렀습니다. 여기저기 손을 봤습니다. 하지만 기계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기술자들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기계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공장관계자들은 난감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왔습니다. 그는 자기가 해보겠다며 공장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이 들어간 지 불과 몇 초 만에 기계가 힘차게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전원의 스위치를 올렸지요.” 여러분은 이런 경험 없으십니까? 저는 있습니다. 그것도 여러 번.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영적으로 죽어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적인 전기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듭나셨습니까?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질문에 라고 힘 있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미국 제39대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는 공식 석상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거듭난 크리스천입니다.” 사람이 조금 모여 있는 식당에서 조차 조용히 머리 숙여 기도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대통령이 욕을 먹을 것을 알면서도 공식석상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어느 정도의 하나님의 은혜의 전기에 감전되어야 사람들 앞에서 나는 거듭난 크리스천입니다.”라고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잘 느껴지지 않는 5볼트 10볼트 정도가 아니라 10,000볼트, 20,000볼트의 영적 전기에 감전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어디서나 자신 있게 나는 거듭난 크리스천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반드시 거듭나셔야 합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1. 물과 성령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 여기서 난다는 것은 거듭남, 중생을 말합니다. 이 거듭남은 물과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거듭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아노뗀입니다. 아노뗀은 새롭게, 다시, 위로부터, 처음부터, 태초로부터라는 뜻입니다. 거듭남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새롭게 지음 받는 것입니다. 내 안에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안에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거듭나다는 말이 헬라어로 위로부터 난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은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시작이 하늘입니다. 우리는 출발이 땅이었습니다. 우리는 시작이 세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시작이 죄이었습니다. 우리는 시작이 저주이었습니다. 거듭남은 땅에서 출발한 인간이 하늘에서 다시 출발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저주에서 시작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신분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하늘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거듭남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거듭남은 영적 출생입니다. 거듭남은 육적 출생이 아닙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을 육적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거듭남을 어머니의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것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거듭남은 영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믿어지십니까?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로 믿어지십니까? 예수님이 믿어지시면 여러분 안에서 영적인 출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여러분은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영적인 일입니다. 여러분! 거듭남의 증거를 육적인 것에서 찾지 마십시오. 거듭남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물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물을 세례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례중생론이라고 합니다. 세례가 사람을 중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가톨릭과 일부 루터파 교회에 주장하는 구원론입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임종 직전에 사제가 달려가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영세를 베풉니다. 그러면 그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천국 보내는 예식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세례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언급한 곳은 없습니다.  

세례중생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오해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물은 세례라고 했습니다. 세례는 구원의 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세례를 유효하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세례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있지 세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세례가 중요한 이유는 거듭남이란 영적 사건을 외적으로 공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구원받는 자가 받는 외적 의식입니다.  

만약 세례가 거듭남의 조건이라면 세례 요한 이전의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을 단 한 번도 세례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여호수아, 다윗 같은 사람들은 모두 지옥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세례가 구원의 조건이라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단 한 사람에게도 세례를 주시지 않은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세례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세례가 구원의 요소라면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선생님들, 제가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바울이 세례를 받으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또 세례가 구원의 요소라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고전1:14)라고 말한 것은 이상한 일이 됩니다. 여러분! 세례가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말씀에서 물은 물이 아니라 상징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물은 상징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한 번 먹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물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물은 물이 아닙니다. 7:37-38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물은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는 물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물은 마시는 물이 아닙니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고 할 때 물이 상징입니다. 물은 비유입니다. 그러면 물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물은 말씀을 상징합니다.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고전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으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즉 복음으로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우리는 물로 거듭난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더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거듭남은 성령의 사역입니다. 성령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할 때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말씀이 떨어진 마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든 심령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말은 말씀과 성령으로 난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말씀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말씀을 읽고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전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토리 존슨 박사가 전도 집회를 인도하러 가면서 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날 아침에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오늘 밤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한 심령이라도 구원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목사님은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누구에게 전도를 할까하며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때 여승무원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에게 봉사를 마친 그 승무원은 앉아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 수색이 가득했습니다. 토리 존스 박사는 승무원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신앙적인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러자 승무원은 자기는 크리스천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토리 박사는 성경을 꺼내 읽어주면서, 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을 권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살 수 있습니다.”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스튜어디스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수심이 가득했던 승무원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어느 덧 비행기는 목적지까지 도착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존슨 박사에게 스튜어디스는 이 비행기에서 다시 못 뵈면 저 천국에서 다시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다음 날 아침이었습니다. 존슨 박사는 조간신문을 펼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신문 전면에 탑기사로 비행기 추락사건'’ 다루었는데, 그 비행기에 타고 있는 모든 승객들과 승무원들 전원이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자세히 읽어보니, 그 비행기는 어제 자신이 타고 왔던 바로 그 비행기였습니다. 그 비행기는 존슨 박사가 내린 그 공항을 출발해서 다른 공항으로 가던 도중에 추락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망자 명단에는 어제 비행기 안에서 주님을 영접했던 그 여승무원의 이름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 스튜어디스가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하지만 말씀을 듣고 거듭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2. 육은 육, 영은 영  

왜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까요?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육이 육 이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육이 다른 것을 낳을 수도 없습니다. 잘 생긴 육이 있습니다. 예쁜 육이 있습니다. 강한 육이 있습니다. 그래도 육은 육입니다. 장동건 원빈 강동원처럼 생겨도 육은 육입니다. 김희애 김태희 전지현처럼 생겨도 육은 육입니다. 아무리 잘생기고 아무리 예뻐도 여전히 사람은 육입니다. 예쁘다고 사람이 여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못생겼다고 사람이 짐승이 되는 것 아닙니다. 작고 못생겼다고 사람을 멸시하지 마세요. 예쁘다고 우러러 보지 마세요. 속사람은 정반대일지 모릅니다. 사람은 모두 똑같은 육일뿐입니다. 육이 절대로 다른 것이 되지 않습니다.  

육은 교육을 시켜도 육입니다. 육은 교화를 시켜도 육입니다. 품위있는 육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점잖은 육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세련된 육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온화한 육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육은 육일뿐입니다. 육이 다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천안시 서북구 청당동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여성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여성이 신고한 이유는 지나가는 아저씨가 자기 애완견에게 개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행인도 경찰도 기가 막혔습니다. 답답했는지 경찰이 여성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그랬더니 여성이 대답했습니다. “애기라고 해야죠!” 경찰은 여성에게 그래도 개는 개입니다.”라고 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사람과 개가 한 집에서 같은 것을 먹고 같이 살아도 사람이 개가 되는 것도 개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사람은 사람이고 개는 개입니다. 개를 사람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하나님은 세상 만물을 종류대로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1:21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이 종이 저 종이 되지 않습니다. 저 종이 이 종이 되지 않습니다. 종은 변하지 않습니다. 배추가 아무리 커도 배추는 배추입니다. 고추가 아무리 자라도 나무가 되지 않습니다. 지렁이가 커서 뱀이 되지 않습니다. 참새가 독수리가 되지 않습니다. 참새는 참새고 독수리는 독수리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납니다. 진화론자들의 이론처럼 지렁이가 뱀이 되지 않습니다. 종은 바뀌지 않습니다.  

육은 육입니다.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것을 입어도 사람은 사람일 뿐입니다. 도를 닦고 수행을 해도 사람이 신이 되지 않습니다.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육은 시작도 육이고 끝도 육입니다. 육으로 시작한 자는 반드시 육으로 마칩니다. 육은 부패하고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사라질 것입니다. 멸망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육으로 시작했습니다. 만약 거듭나지 않으면 육으로 마칠 것입니다. 멸망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성령으로 나면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닮았습니다. 인간에게 난 사람은 인간적입니다. 하지만 영으로 난 사람은 영적입니다. 거듭나셨습니까?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십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십니까? 그러면 성령으로 난 것입니다. 거듭나신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나는 아직 육신을 가지고 있는데 영적인 존재인가요?” 그래도 영적인 존재입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성품이 존재합니다. 인간적인 성품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성품입니다. 육적인 성품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말씀을 들으세요. 찬송을 부르세요. 기도를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거듭난 사람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3. 아멘 아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인류에게 거듭남은 얼마나 필요할까요? 거듭남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인간은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7)고 하셨습니다. ‘거듭나야 하겠다라는 말씀이 영어 성경에는 네가 반드시 거듭나야만 한다.’(You must be born again)라고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뜻의 조동사 must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must는 의무 강제적인 용법입니다. 인류는 거듭나도 되고 거듭나지 않아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거듭나야만 합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래도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요즘 대학에 실용음악과가 인기 있습니다. 음악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모두 음악가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음악적인 재능을 타고 나지 않으면 음악가가 되고 싶어도 될 수가 없습니다. 음악을 즐길 수는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음악적인 재능을 타고 나지 않으면 전문적인 음악가가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제 아이를 화가로 싶다고 생각해봅시다. 인류 화가에게 교육을 받게 하고 화랑에 데려가서 거장들의 그림을 보게 하면 화가가 될까요? 아닙니다. 화가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가 화가로서의 소질과 기질을 갖고 태어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술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나야 합니다. 수학자가 되려면 수학적 재능을 타고 나야 합니다. 과학자가 되려면 과학적 재능을 타고 나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려면 성령으로 나야 합니다.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강한 어조로 말씀하신 곳은 극히 드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대화를 하시면서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을 세 번 사용하십니다(3, 5, 11).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을 공동번역 성경은 정말 잘 들어두어라라고 번역했습니다. 표준새번역성경은 진정으로 진정으로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이 헬라어로 아멘 아멘입니다. 우리는 아멘을 언제 합니까? 기도 끝에, 찬송 끝에, 설교 끝에 아멘합니다. ‘아멘하는 것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간절한 염원입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 아멘을 이어서 두 번 하는 경우가 5번 있습니다.  

<8: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41:1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  

이렇게 아멘을 이어서 두 번하는 것은 아멘하는 사람의 열정, 간절함입니다. 또 강조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끝에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멘 아멘을 말씀 끝이 아니라 말씀 앞에 하십니다. 아주 강한 강조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이 25번 나옵니다. 그 중에 천국, 구원, 영생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 15번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거듭남을 아주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인류는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반드시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반드시 거듭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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