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계정
코멘트 작성하려면 SNS계정으로 로그인해야 합니다.
2 == 2 ok!
1998년 3월부터 2000년 10월까지 방영이 되었던 서세원의 <좋은 세상 만들기>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정말 재밌었던 프로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나오시는 프로그램입니다. 주로 퀴즈로 진행됐습니다. 이 프로 중에 할아버지가 단어를 설명하면 할머니가 맞추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제한 시간이 있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천생연분”이라는 단어가 주어졌습니다. 할아버지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할머니에게 자신 있게 설명을 하셨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
그러자 할머니도 자신 있게 대답하셨습니다.
“웬수”
할아버지는 기가 막혔습니다. 하지만 다시 급하게 큰 소리로 설명하셨습니다.
“아니, 두 자 말고 넉자.”
그러자 할머니가 다시 대답하셨습니다.
“평생웬수”
할아버지는 천생연분으로 생각하시며 사시는데 할머니는 평생원수로 생각하시며 사신 것 같습니다. 누구 잘 못이죠? 할아버지? 할머니?
한 방송사에서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의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여성의 71.9%가 ‘아니오’라고 대답했습니다. 남성은 46.9%가 ‘아니오’라고 대답했습니다. LG카드에서 30〜40대 기혼남녀 396명을 상대로 같은 질문의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남성의 65.2%가 다시 태어나도 현재의 배우자와 결혼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반면에 여성은 33.3%에 그쳤습니다. 또 결혼을 후회한다는 응답비율에서도 남성은 12.6%인데 반해 여성은 23.7%로 2배 가까이 높았습니다. 이혼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는 응답도 남성은 27.8%이었는데 여성은 43.4%나 되었습니다.
비슷한 설문조사가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결과는 거의 동일하게 남성의 만족도가 여성 보다 두 배 가까이 높았습니다. 반면에 여성의 불만은 두 배 가까이 됩니다. 이런 설문 조사에서 추측해볼 수 있는 사실은 결혼 생활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낫다는 것이 아닐까요? 또 배려, 섬김, 봉사 등의 측면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더 훌륭한 것이 아닐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는 남자는 결혼생활에 좀 더 충실하자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좀 더 충실하세요. 자녀들에게 충실하세요. 결국 남는 것은 가정, 아내 밖에 없습니다. 혼자만 아내를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아내도 남편을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여성들은 남자가 조금 부족하더라도 평생원수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천생연분으로 생각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남편도 아내도 모두 서로를 천생연분으로 생각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아가서는 솔로몬 왕과 시골 처녀인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 중에서 2장 15절은 신부인 술람미 여인이 부른 포도원의 노래입니다.
1. 포도원
포도원은 무엇을 말할까요? 포도원은 2 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포도원은 가정입니다. ‘우리의 포도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입니다.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 두 사람은 부부입니다. 우리의 포도원은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 두 사람의 소유로 된 포도원을 말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 공동 소유로 된 포도원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포도원은 진짜 포도원이 아닙니다. 상징입니다.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이 이룬 사랑과 가정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 포도원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사랑이 꽃피고 있는 자신의 보금자리를 포도 꽃이 피기 시작한 포도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포도원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입니다.
그러면 왜 하필 포도원일까요? 이스라엘 땅에는 무화과 과원도 있고 또 올리브 과원도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자신의 가정을 무화과 과원이나 올리브 과원이 아니라 포도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포도의 달콤함 때문입니다(욜1:5, 3:8). 또 포도가 사람들에게 주는 기쁨 때문입니다. 아모스9:13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파종하는 자가 곡식 추수하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고 했습니다. 사사기9:13에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고 했습니다. 포도는 달콤함과 기쁨의 상징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가정의 행복의 달콤함과 기쁨을 포도의 맛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포도원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포도처럼 달콤한 가정이 되길 바랍니다.
1852년 4월 10일, 미국의 한 시민이 알제리에서 사망했습니다. 그가 죽은 지 31년이 지났을 때, 미국 정부는 그의 유해를 본국으로 이송해 왔습니다. 유해를 실은 군함이 입항하는 순간, 군악대의 연주와 예포 소리가 울려 퍼졌고 대통령과 국무위원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거대한 환영 퍼레이드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환영 퍼레이드의 주인공이 그냥 평범한 소시민이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 토록 전 국민의 관심을 집중하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작사한 단 한 곡의 노래 때문입니다. 그 노래 가사가 미국인들에게 무엇이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메시지와 깊은 감동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 뿐이리”
죽은 사람은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을 작사한 존 하워드 페인이었습니다. 이 노래는 지금까지도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 수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삶의 근본이 되는 '가정의 행복' 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즐거운 나의 집’은 존 하워드 페인이 프랑스 파리의 가난한 방랑자 시절에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며 작시한 노래라는 것입니다. 얼마 되지 않아 이 노래는 유명해졌습니다. 하지만 페인은 여전히 가정도 없이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그가 1851년 알제리에서 친구 C. E. 크라크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의 글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상하다고 들릴지 모르지만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정의 기쁨을 노래하지만 나 자신은 아직껏 내 집이 무엇인지 모르고 지냈소. 앞으로도 몸 둘 곳 없이 떠돌아 다녀야 할지 두렵다오.’
존 하워드 페인은 이 편지를 쓴 이듬해 50세를 일기로 튀니지의 한 길가에 쓰러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즐거운 나의 집’ 이 노래는 세계적인 노래입니다. 작시된 후 170년 동안 세계 모든 사람들이 부르고 있습니다. 집에 대해 이것 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가 있을까요? 아마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은 집에 대한 행복한 감정에 빠져들곤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 노래를 지은 사람은 단 한 번도 집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집은 있습니다. 그런데 집이 행복하신가요? 포도원처럼 달콤함이 있으신가요? 집은 있는데 집의 달콤함을 느끼지 못하시는 것 아닌가요? 그것은 아내 책임입니까? 남편 책임입니까? 아니면 자식 책임입니까? 내 잘 못은 없나요? 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했습니다. 가정은 모두가 같은 것으로 행복해 합니다. 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너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하나님의 포도원입니다. 가정의 행복은 미리 누리는 천국입니다.
둘째, 포도원은 교회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내로 묘사합니다. 신약성경은 교회를 예수님의 신부로, 예수님은 교회의 신랑으로 묘사합니다. 교회는 영적인 신랑과 영적인 신부가 만나는 곳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신부된 교회 곧 성도를 상징합니다. 솔로몬 왕은 신랑되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포도원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포도원입니다. 우리는 영적 포도원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의 달콤함이 있는 곳입니다.
<암9: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파종하는 자가 곡식 추수하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
여기 산은 가나안 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날이 이르면 산들이 달콤한 포도주를 흘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주시는 꿀처럼 달콤한 사랑이 있는 땅입니다. 가나안 땅은 신약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의 달콤함이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 우리 등대교회가 하나님의 사랑과 달콤함과 기쁨이 넘치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2. 작은 여우를 잡으라
그런데 왜 우리는 포도원에서 달콤한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맛보지 못할까요? 그것은 작은 여우 때문입니다. 작은 여우는 포도원의 훼방꾼입니다. 작은 여우가 포도원을 헌다고 했습니다. 헌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하발’입니다. 하발은 ‘고통을 낳다’, ‘괴로워서 몸을 비틀다’, ‘망치다’, ‘손상시키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포도원을 헌다’는 말은 ‘포도원을 망가뜨리다’는 뜻입니다. 또 포도원을 망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작은 여우는 우리가 포도원의 달콤함을 맛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그런데 술람미 여인은 ‘작은’ 여우라고 했습니다. 큰 여우가 아닙니다. 보통 크기의 여우도 아닙니다. 작은 여우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작은’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작은’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카탄’입니다. ‘카탄’은 ‘적은’, ‘작은’, ‘어린’, ‘의미가 없는’ 등의 뜻입니다. ‘작은’ 여우는 어린 여우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성경은 ‘새끼 여우’라고 번역했습니다. 또 ‘작은’ 여우는 말 그대로 크기가 작은 여우일 수도 있습니다. 큰 여우가 아니라 이 작은 여우가 포도원에 치명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포도원의 울타리는 2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안쪽에는 너도밤나무 울타리가 있습니다. 바깥쪽에는 가시나무 울타리가 있습니다. 사람도 침입하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그래서 짐승들은 들어오지 못합니다. 봄이 되면 여우들이 굴에서 나와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여우는 잡식성입니다. 육식을 하지만 과일도 먹습니다. 특히 포도를 좋아합니다. 작은 여우는 가시 울타리의 작은 틈으로 들어옵니다. 작은 여우는 포도원에서 굴을 팝니다. 그래서 뿌리를 해칩니다. 포도에 꽃이 피면 꽃의 연한 부분을 갉아먹습니다. 열매가 영글기 시작하면 열매를 따먹습니다. 여우는 포도 뿌리에서 열매까지 해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작은 여우는 포도원에 치명적이었습니다.
작은 여우는 무엇일까요? 첫째, 작은 여우는 사탄 마귀입니다. 작은 여우가 하는 짓이 마귀와 아주 비슷합니다. 사탄은 반역자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틈을 내는 자, 사이를 가르는 자라는 뜻입니다. 누구와 누구의 틈을 낼까요? 하나님과 사람의 틈을 냅니다. 그래서 신앙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또 사람과 사람 사이를 냅니다. 불화를 조장합니다. 사람을 오해하게 합니다. 그래서 교우들의 사이를 이간질 합니다. 교회는 포도원입니다. 이 포도원은 세상에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여우가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여우들은 양의 탈을 쓰고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 왕이 아름다운 사랑의 포도원을 가꾸었습니다. 포도원에 꽃피는 봄이 왔습니다. 막 사랑의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침입자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신랑과 신부의 틈을 갈라놓았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술람미 여인이 신랑에게 요청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작은 여우를 잡으라” 여러분에게 포도원이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포도원, 마음의 포도원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등대교회는 우리 모두의 신앙의 포도원입니다. 이 포도원에 작은 여우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밤잠 못 자게 합니다. 그때 우리도 신랑되신 주님께 요청합시다. “주님! 우리 포도원에 여우가 들어왔어요. 그래서 우리가 아파요.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포도원에 작은 여우를 잡아 주십시오.”
둘째, 작은 여우는 작은 죄입니다. 큰 죄가 아닙니다. 아주 조그만 죄입니다. 사람들은 큰 죄는 막습니다. 살인, 강도, 간음 등은 하면 큰 일 나는 줄 압니다. 그런데 작은 죄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셔야 합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이 되는 것입니다. 작은 죄가 큰 죄로 자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처음부터 소도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가 처음부터 술에 취하고 도둑질하며 방탕한 것이 아닙니다. 조그만 죄가 아이의 마음에 들어와 아이와 함께 죄가 크게 자라는 것입니다. 큰 죄는 작은 구멍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작은 죄는 작은 구멍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큰 죄로 자랍니다. 어느 날 갑자기 큰 죄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작은 것이 큰 것 보다 더 위협적일 수가 있습니다. 작은 것을 조심하세요. 작은 죄를 조심하세요.
미세먼지는 지름의 길이가 10μm 이하의 물질을 말합니다. 머리카락이 50~100μm입니다. 그러니까 미세먼지는 머리카락 보다 1/5~1/10 작은 크기입니다. 정말 작은 크기입니다. 그런데 초미세먼지는 2.5μm입니다. 미세먼지 보다 1/4이 작습니다. 머리카락의 1/20~1/40의 수준입니다. 이 크기는 코에서 폐로 들어가 폐와 연결된 혈관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입니다. 그러니까 공기 중에 있는 초미세먼지를 마시면 혈관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미세먼지가 쌓이고 쌓이면 각종 피부질환, 호흡기질환, 혈관질환 심지어 정신질환까지 각종 병을 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초미세먼지 농도가 5㎍/㎥ 증가하면 조기 사망률이 7%씩 증가한다고 합니다. 작은 것을 무시하지 마세요. 작은 것이 위협적입니다.
조지 바나(J. Barna)의 「주전자 속의 개구리(The Frog in a kettle)」라는 책이 있습니다. 조지 바나는 이 책에서 개구리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개구리를 물이 뜨거운 주전자속에 넣으면 개구리가 깜짝 놀라 펄쩍 뛰어서 나옵니다. 개구리의 점프력이면 주전자 높이는 얼마든지 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차가운 물이 들어 있는 주전자에 넣고 물의 온도를 아주 조금씩 높이면 개구리는 나오지 않습니다. 개구리는 온 몸이 익어가는 데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결국 개구리는 삶아져 죽고 맙니다. 주전자 속의 개구리는 조지 바나가 현대 사회 문명 속에서 알게 모르게 죄악에 노출되어 사는 크리스천들의 삶에 경종을 울린 비유입니다.
여러분! 농사 중에 가장 어려운 농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포도 농사입니다. 김매기, 가지를 잘라주는 일, 쓸모없는 순과 잎을 따주는 일, 포도에 봉투를 씌워주는 일, 포도 따는 일 등 일 년 내내 일이 없을 없습니다. 다른 농사는 농한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포도 농사는 농한기가 없습니다. 농사 중에 손이 가장 많이 가는 농사가 포도 농사입니다. 일도 가장 힘이 듭니다. 그래서 농사 중에 가장 어려운 농사를 포도 농사라고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 인생의 과원을 포도원에 비유했습니다. 가정을 포도원에 비유했습니다. 교회를 포도원에 비유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포도원 함께 가꿉시다. 우리 신앙의 포도원을 함께 지킵시다. 그래서 우리 포도원에 단 포도즙이 흘러넘치게 합시다. 그 포도즙으로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이전글 | 잠 못 이루는 밤에 만난 예수님 |
---|---|
다음글 | 세상을 축복하는 제사장이 되라 |
코멘트 작성하려면 SNS계정으로 로그인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