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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자판기는 돈만 넣으면 물건이 나옵니다. 돈을 넣고 500원짜리 음료수를 누르면 500원짜리 음료수가 나옵니다. 700원짜리를 누르면 700원짜리가 나옵니다. 1,000원짜리를 누르면 1,000원짜리가 나옵니다. 500원짜리를 눌렀는데 1,000원짜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자판기는 누른 대로 나옵니다. 아주 편리한 기계입니다. 이 자판기는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가 눌러도 나옵니다. 어른이 눌러도 나옵니다. 여자가 눌러도 나오고 남자가 눌러도 나옵니다. 도둑놈이 눌러도 나오고 착한 사람이 눌러도 나옵니다. 강도가 눌러도 나오고 살인자가 눌러도 나옵니다. 자판기는 착한 사람에게만 물건을 팔지 않습니다. 강도나 도둑에게도 물건을 동일하게 팝니다. 자판기는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또 자판기는 돈을 가리지 않습니다. 훔친 돈을 넣어도 나오고 정직한 돈을 넣어도 나옵니다. 깨끗한 돈을 넣어도 나오고 더러운 돈을 넣어도 나옵니다. 자판기가 “훔친 돈은 받지 않습니다.”라며 판매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자판기는 돈을 가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람을 가리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자판기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려고 하실 때는 사람을 가리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도둑도 복을 구합니다. 강도도 복을 구합니다. 살인자도 복을 구합니다. 착한 사람도 복을 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두에게 동일한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구하는 사람이 그 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주십니다. 의롭고 선한 사람이라도 받을 만한 그릇이 되지 않으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르는 대로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받을 만한 그릇이 될 때 주십니다. 유익할 때 주십니다. 적합해야 주십니다. “하나님 왜 기도했는데 안주세요.”라고 불평하지 마세요. 불평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세요. ‘내가 그것을 받을 만한 그릇이 되는지!’ 하나님은 누르는 대로 나오는 자판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대로 무조건 주시지 않습니다.
고대 시대에 첫째에게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재산을 비롯한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권리가 대부분 첫째 아들에게 승계되었습니다. 이런 첫째에 대한 특권은 성경에도 있습니다. 출애굽기 22:29에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출애굽기 34:19 “모든 첫 태생은 다 내 것이며 네 가축의 모든 처음 난 수컷인 소와 양도 다 그러하며” 또 신명기21:17에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장자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베코라입니다. 베코라는 ‘장자권’, ‘상속권’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태를 열다’는 말에서 온 단어입니다. 태를 연다는 것은 첫째라는 말입니다. 어머니의 태를 연 자에게 주어지는 권한을 장자권 또는 상속권이라고 했습니다.
장자권에는 두 가지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첫째, 아버지의 권위를 공적으로 계승하는 것입니다. 장자는 그 집안 전체를 통솔하는 권위를 가졌습니다. 둘째, 장자는 아버지가 죽은 후에 아버지 재산의 2/3를 차지하게 되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형제들의 두 배의 몫을 갖게 되는 권리입니다. 장자권을 가진 아들에게는 권세뿐만 아니라 부까지 주어졌습니다.
1. 장자의 은혜를 차지하라
야곱과 에서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에피소드는 장자권에 얽힌 이야기일 것입니다. 두 사람은 쌍둥이입니다. 거의 동시에 출생합니다. 그래도 두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서열이 존재합니다. 에서는 형이고 야곱은 동생입니다.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났지만 에서에게는 장자의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형이 가진 장자권을 너무 갖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장자권을 차지하기 위해 인생을 건 투쟁을 합니다. 첫 번째 투쟁은 엄마의 뱃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창세기 25:22 “그 아들들이 그의 태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고 했습니다. 두 아이가 얼마나 심하게 싸웠는지 엄마가 견디다 못해 하나님 앞에 기도할 정도이었습니다. 둘은 뱃속에서 아주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싸움에서 집니다. 결국 에서가 먼저 태어납니다. 그래도 야곱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태에서 나오면서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온 것입니다. 26절에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경쟁에서 졌습니다. 게임은 끝났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형의 뒤꿈치를 움켜잡았습니다. 야곱의 생애를 살펴보면 삶에 대한 남다른 열심히 있습니다. 쉬지 않고 일합니다. 밤잠 안자고 일합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심상치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두 번째 투쟁은 팥죽 에피소드입니다. 에서는 사냥꾼이었습니다. 들에서 짐승과 사투를 벌이다 보면 기진맥진하기 마련입니다.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는 지쳐서 쓰러지곤 했습니다. 오랜 동안 집을 떠나 있다 보면 집 밥이 그리웠습니다. 집에 돌아온 에서는 집 밥을 게걸스럽게 먹었습니다. 심지어 음식 앞에서 이성을 잃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에서를 보며 야곱은 음식으로 형의 장자권을 살 것을 계획합니다. 형은 팥죽을 좋아했습니다. 야곱은 형이 돌아올 즈음에 팥죽을 맛있게 끓여놓았습니다. 드디어 형이 돌아왔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에서는 아주 지쳐 있었습니다. 배도 너무 고팠습니다. 에서는 음식 앞에서 이성을 잃었습니다. 판단력이 없어졌습니다. 기회가 온 것입니다. 이때 야곱은 형에게 장자권을 팔라고 합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네가 내 형제냐? 어떻게 내 장자권을 팥죽에 팔라고 하냐? 장자권 팔고 사고할 수 있는 것이냐? 나를 우롱하느냐?” 하지만 에서는 이미 판단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 봐라, 나는 지금 죽을 지경이다. 지금 나에게 맏아들의 권리가 뭐 그리 대단한 거냐?”(표준새번역) 판단력을 잃어버린 에서에게 야곱은 맹세를 받은 후에 팥죽을 줍니다. 후에 에서는 아버지 앞에서 야곱이 자신을 속였다고 한탄을 합니다. 제 정신이 돌아와서 보니 자기가 한 짓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입니다(27:36).
세 번째 투쟁은 축복 에피소드입니다. 어느 날입니다. 아버지 이삭이 형 에서를 불렀습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장자의 축복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때 야곱은 어머니와 인생을 건 모험을 합니다. 형으로 변장한 후에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기로 한 것입니다. 들통이 나면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 뻔합니다. 이삭은 단순히 아버지가 아닙니다. 이삭은 제사장이며 선지자이었습니다. 이삭을 속인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속이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에서로 변장합니다. 결국 아버지의 장자의 축복을 받아냅니다.
출생, 팥죽 그리고 축복 에피소드에서 야곱이 장자권의 축복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야곱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에 미친 사람” 야곱은 장자의 축복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겁니다. 장자의 축복 때문에 형을 속입니다. 아버지를 속입니다. 이것 때문에 사랑하는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게 됩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 때문에 숱한 고생을 합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축복에 대한 끈을 놓지 않습니다. 축복에 대한 야곱의 갈망은 얍복강 나루터에서 천사와 씨름할 때 최고조로 나타납니다. 야곱이 천사를 얼마나 끈덕지게 붙들고 늘어지는지 천사가 야곱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천사는 하는 수 없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칩니다. 허벅지 관절을 쳤다는 말은 야곱의 힘을 빼앗았다는 뜻입니다. 이제 야곱의 힘이 끊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이 천사를 붙들고 늘어지는 거예요. 결국 천사는 야곱에게 이렇게 사정합니다. “나로 가게 하라” 그러자 야곱이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않겠습니다.”, “나를 축복해주세요. 그래야 가게 하겠습니다.” 그 경황 중에 나를 축복하라는 거예요. 그래야 놓겠다는 거예요. 야곱의 일생은 하나님의 복 주심을 갈망한 생애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 없이 살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야곱이란 말은 ‘발뒤꿈치, 뒷면, 발뒤꿈치를 잡는다’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남의 뒤를 잡는 사람입니다. 남의 뒤통수치는 사람입니다. 사기꾼입니다. 거짓말쟁이예요. 남을 사취하는 사람입니다. 형을 속였습니다.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앞에 선택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축복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야곱은 인간적인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끝없이 하나님 축복을 갈망했습니다. 야곱의 인생 시작은 형의 뒤꿈치였습니다. 야곱의 인생 시작은 야곱이에요. 얼마나 초라해요. 얼마나 수치스러워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이겼다는 뜻입니다. 수치스러운 이름이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심리학자 로버트 펠드먼 미국 매사추세츠주립대 교수가 서로 알지 못하는 100여명을 2명씩 짝지어 자기소개를 하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평균 10분에 세 번 정도 거짓말을 하더랍니다. 평균이니 더 많이 한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12번의 거짓말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조간신문에 이런 기사 제목이 있었습니다. <한국인 2분마다 1건씩 사기 당한다 “컵라면 하나 익기도 전”> 사기 사건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겠어요.
여러분! 세상은 거짓투성이입니다. 이 말은 세상이 야곱이라는 말 아닌가요? 이 말은 내가 야곱이라는 말 아닌가요? 세상의 거짓 속에서 거짓말을 하다가 거짓 속에서 죽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세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야곱으로 태어나 야곱으로 인생을 마칠 것입니다. 기독교는 발뒤꿈치가 이스라엘이 되게 하는 종교입니다. 어떻게요? 예수 이름으로요.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우리가 그 이름을 붙들 때 우리의 인생은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으로 인생을 마치지 마세요. 이스라엘로 마치세요. 야곱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갈망하세요. 하나님의 장자되신 예수님의 은혜를 차지하세요.
2. 장자권의 영적 의미
야곱은 장자권을 차지하기 위해 인생을 거는 모험을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끝없이 갈망합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바른 축복관을 가져야 합니다. 야곱은 장자권 축복에 대해 오해를 했던 것 같습니다. 야곱은 장자권을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목적은 선하고 좋았습니다. 하지만 방법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목적만 좋으면 안 됩니다. 방법도 좋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경쟁자와 싸워서 이기면 얻을 수 있고 지면 빼앗기는 것일까요? 죽어라 공부해서 1등하는 학생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맛있는 음식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 세상의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다 가져가겠네요. 가면을 쓰고 변장을 한 후에 대신 축복을 받으면 그 축복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배우처럼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이 최고의 축복을 자지하겠네요.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자권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과의 관계 추구는 없고 오직 축복만 얻어내려고 했습니다.
장자권에는 세 가지 영적 권리가 있었습니다. 첫째, 장자권은 제사권입니다. 장자에게는 제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누구나 예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다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믿는 자는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족장 시대에는 오직 족장만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장자권은 예배권입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가볍게 여겼다는 것은 멸시했다, 경멸했다, 업신여겼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은 ‘가볍게’라는 말을 ‘경홀히’라고 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소홀히’라고 했습니다. 장자권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은 예배를 가볍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에서는 사냥꾼이었습니다. 들에서 짐승을 쫓으며 살았습니다. 말을 타고 들판을 달리는 사냥꾼, 얼마나 신이 나요? 에서는 짜릿한 삶을 살았습니다. 반면에 예배는 고리타분했습니다. 에서는 예배를 멸시했습니다. 소홀히 여겼습니다. 에서에게 예배는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예배의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야곱은 예배의 축복을 알았습니다. 예배의 맛을 알았습니다. 칼 바르트라는 독일 신학자는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요,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중요하고 큰 축복인지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예배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장자권을 가볍게 여겼다는 말은 예배를 가볍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의 에서가 되지 마세요. 이 시대의 야곱이 되세요.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의 맛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의 맛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에게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치세요. 장자권은 예배권입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워털루 전쟁에서 참패하여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찾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 평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언제였습니까?”
나폴레옹은 한참 눈을 감고 회상을 하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전투가 치열하던 어떤 주일이었죠. 그때 나는 졸병이었지만 아침에 철모를 벗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눈물을 흘리며 예배를 드린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가 내게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예배에 빠지기 시작하였고 지금 전쟁에서 패배하여 이처럼 유배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둘째, 장자권은 축복권입니다. 아버지 이삭이 축복하면 축복한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축복권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12:1-3>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축복권을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셨고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그 축복권을 아버지 이삭에서 주었습니다. 순리대로라면 이 축복권은 형에게 이어져야 합니다. 야곱은 그 축복권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야곱은 장자권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축복권을 알았습니다.
기독교는 축복의 종교입니다. 구약시대 축복권은 제사장에게 있었습니다. 제사장만이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는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 이름으로 축복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바울서신과 일반서신을 읽어보세요. 사도들은 편지를 시작하며 축복합니다. 편지가 끝날 때 축복합니다. 중간 중간 축복합니다. 축복으로 시작해서 축복으로 마치는 것입니다. 교회를 보세요. 예배가 마쳐질 때 축복합니다. 설교 중에 축복합니다. 기도 중에 축복합니다. 찬양 중에 축복합니다. 계속 축복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축복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축복하세요. 남편을 축복하세요. 아내를 축복하세요. 자녀를 축복하세요. 성도들을 축복하세요. 이웃을 축복하세요. 이 민족 이 나라를 축복하세요. 원망 불평하지 마세요. 원망 불평은 저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축복하는 사람들입니다. 장자권은 축복권입니다. 야곱은 축복권을 사모했습니다.
셋째, 장자권은 약속의 계승권입니다. 성경은 죄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 구속 역사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이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인류 구원의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이삭에게 주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버지 이삭에게 이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약속은 수천 년 후에 이루어질 약속이었습니다. 이 약속은 미래에 대한 보장입니다. 천국에 대한 보장입니다. 야곱은 그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이 받고 싶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1:1-2>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원래대로라면 ‘이삭이 에서를 낳고’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야곱을 낳고’가 되었습니다. 에서는 장자권 속에 있던 약속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알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마세요.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아무리 많이 가져도 사람은 빈 깡통이 되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공허와 무의미에 시달리는 인간의 상태를 존재적 진공상태라고 했습니다. 존재적 진공상태라는 말이 빈 깡통이라는 것입니다. 겉은 멀쩡합니다. 그런데 속은 비었습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입니다.
올림픽 종목 중 400m 800m 계주 경기가 있습니다. 네 사람이 뛰는 경기입니다. 선수들이 아무리 빨리 뛰어도 바통이 없으면 무효입니다. 바통을 들고 뛰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통을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바통을 이삭에게 주었습니다. 야곱은 그 바통을 자신이 받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 바통입니다. 약속의 바통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빨리 뛰고 잘 뛰어도 약속의 바통이 없으면 무효입니다.
장자권은 예배권입니다. 장자권은 축복권입니다. 장자권은 약속 계승권입니다. 장자권은 예수 이름입니다. 즉 장자권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바르게 될 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을 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장자권은 자동판매기가 아닙니다. 야곱은 형의 장자권만 빼앗으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오해했습니다. 하지만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을 때 불행해졌습니다. 도망자가 됐습니다. 집이 있어도 돌아오지 못하는 자가 됐습니다. 가족과 생이별을 했습니다. 왜요? 그것은 장자권이 아니라 장자의 명분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장자의 명분만 얻은 것이지 진정한 장자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이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을 때 진정한 하나님의 장자가 되었습니다.
제비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흥부는 제비 다리를 고쳐주었습니다. 왜 제비 다리를 고쳐주었을까요? 불쌍해서입니다. 놀부도 제비 다리를 고쳐주었습니다. 왜 고쳐주었을까요? 복 받을 생각으로요. 둘 다 제비 다리를 고쳐주었는데 한 사람은 복을 받고 한 사람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동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동기가 선합니다. 한 사람은 동기가 불순합니다. 여러분! 축복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장자권을 차지하십시오. 하지만 그 전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십시오. 영적으로 진정한 장자가 되십시오. 그래서 이 시대에 진정한 장자권을 차지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그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복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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