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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은 믿을 때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6:11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짓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죄를 짓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딜레마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어요. 그런데 죄를 계속 져요. 죽었는데 자꾸 살아나요.
바울도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 쉽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죄 때문에 얼마나 괴로웠는지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2) 이 말씀이 표준새번역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죄 때문에 비참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만신창이가 됐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초대 교회 시대 최고의 사도요 최고의 신학자이며 최고의 설교가이고 최고의 선교사였습니다. 그런데도 죄 때문에 수 없이 갈등을 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죄 때문에 바울처럼 갈등했던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했던 고민이 제 안에도 똑같이 있습니다. 말씀을 알아요. 그런데 말씀대로 정말 잘 안돼요. 말씀과 제가 따로 노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말씀과 제가 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매일 성경을 읽습니다. 매일 기도합니다. 은혜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제가 죄 가운데 있는 것을 발견해요.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아! 나는 안 되는 사람인가?’, 죄 때문에 수 없이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합니다. 듣고 보고 배워도 사람이 정말 안변합니다. 이게 사람입니다. 제가 교회를 40년 다녔습니다. 그런데 정말 조금 변했습니다.
사람은 정말 연약합니다. 매일 죄에 넘어집니다. 그래서 낙심합니다. 실망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후회하시지도 않습니다. 실망하시지도 않습니다. 다 아십니다.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은 결국 우리를 천국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실망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원래부터 질이 좋지 않은 그릇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로마서 11:29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금그릇처럼 변화될 것입니다.
이 시간에 큰 집과 큰 집에 있는 그릇들에 대해 생각하며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 큰 집
바울이 <큰 집>이라고 했습니다. 큰 집은 무엇일까요? 성경 시대 네로 황제의 궁전은 26평방키로 미터라고 합니다. 천안시내가 7평방키로 미터 정도입니다. 네로 황제의 궁전은 역사상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크기입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황제들의 궁전을 보았을 것입니다. 네로의 궁전은 정말 큰 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큰 집은 황제의 궁전일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세상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교회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큰 집은 교회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큰 집이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큰 집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우리 등대교회를 큰 집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에이 사람도 많지 않고 교회가 이렇게 작은 데요.’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교회는 큰 집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큰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큰 집으로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큰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큰 집입니다. 왜 교회가 큰 집일까요?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역대하7:16에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크신 이름이 있는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크신 눈과 하나님의 크신 마음이 있는 곳입니다. 교회는 크신 하나님이 계시는 집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큰 집입니다.
이 세상 어떤 건물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습니까? 아랍에메리트 두바이에 있는 부르즈 할리파는 163층에 높이가 828m입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입니다. 건축비가 15억 달러(1조6천5백억) 들었습니다. 중국 후난성에 스카이시티가 있습니다. 202층에 높이가 838미터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입니다. 올 해 사우디아라비아의 킹덤 타워가 완공 예정입니다. 예상 높이가 1000미터 정도라고 합니다. 완공이 되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될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들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세상 건물에는 사람의 이름이 있을 뿐입니다. 건축회사와 디자인한 사람의 이름이 기록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으로 교회에 거주하실까요? 무한한 사랑과 자비로 거주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한 큰 집입니다.
그것도 교회는 가장 큰 집입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대하6:18에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계시리이까 보소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이 세상에 하나님 보다 더 큰 존재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하나님을 용납할 만한 건축물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을 용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유일하게 용납할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큰 집입니다. 가장 크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가장 큰 집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가리켜 작다고 말하지 마세요. 교회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왕이 거주하는 곳이라면 작고 초라해도 왕궁이 되는 것입니다. 왕이 사는 곳을 작은 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눈에 작을지라도 교회는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세요.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강같이 흘러나오는 큰 집니다.
교회가 왜 큰 집일까요? 하나님이 설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내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10에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경영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데미우르고스입니다. 데미우르고스는 창조자, 창시자, 고안자, 설계자, 계획자, 건축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builder로 번역했습니다. 교회의 설계자는 하나님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설계한 하나님의 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설계한 집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설계한 집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교회의 모형은 성막과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성막과 성전도 직접 설계하셨습니다.
<출35:8-9> 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대상28:19>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이 모든 일의 설계를 그려 나에게 알려 주셨느니라
하나님이 교회를 설계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교회를 어떻게 설계하셨을까요? 작게요? 아닙니다. 아주 크게 설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대규모로 설계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수용할 수 있습니다.
큰 집에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착한 사람, 의로운 사람, 겸손한 사람, 온유한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잘난 체 하는 사람, 아는 체 하는 사람, 있는 체 하는 사람, 교만한 사람, 추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과 겸손과 섬김이 있습니다. 반대로 다툼과 시기와 미움도 있습니다. 별의 별 사람들이 다 모입니다. 별의 별 일들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큰 집은 이 모든 사람들과 사건과 감정을 모두 수용합니다. 제가 만약 큰 집에 주인이었다면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다 쫓아냈을 것입니다. 수시로 “야! 너 나가.”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큰 집의 주인은 누구에게나 자리를 주십니다. 누구에게나 방을 주십니다. 겸손한 사람은 더 겸손하길 바라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겸손해지기를 기다리십니다. 교회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다 살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요. 교회는 큰 집입니다. 여러분! 큰 집에 사는 큰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듯 여러분도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시길 바랍니다.
교회는 큰 집입니다. 왜 큰 집일까요? 가장 큰 희생과 헌신으로 만들어진 집이기 때문에 큰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어떻게 만드셨을까요? 말씀으로 만드셨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하늘의 해달별을 만드셨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바다와 땅을 만드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이 당신의 피와 희생으로 만드셨습니다. 사도행전20:28에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의 핏 값으로 세워진 건축물이기 때문에 큰 집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크게 나타나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크게 나타나 있는지 느끼시겠습니까? 우리는 교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묵상하세요. 예수님을 묵상하세요. 교회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은혜를 맛보게 되길 바랍니다.
왜 교회가 큰 집일까요? 그 중요성 때문에 교회는 큰 집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빵집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사람들에게 하늘의 빵을 나누어주십니다. 이 빵은 세상 어디에서도 먹을 수 없는 하늘 양식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빵을 드세요. 이 빵이 진짜 빵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오아시스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사람들에게 하늘의 생수를 나누어주십니다. 이 생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생수입니다. 오직 교회에서만 마실 수 있는 생수입니다. 이 생수를 마시는 사람들은 목마르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시다가 목마르거든 하나님의 샘으로 오세요. 이 샘에서 하나님의 생수를 마시세요. 교회는 하나님의 병원입니다. 교회는 병든 영혼을 치료하는 병원입니다. 이 영혼의 병원에서 여러분의 영혼을 치료하세요. 마귀가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을 병들게 할 때 하나님의 병원으로 오세요. 하나님의 병원에 누우세요. 하나님의 수술을 받으세요. 하나님의 약을 드세요.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이 온전해질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항구입니다. 인생은 항해입니다. 항해 중에 파도와 바람으로 지치거든 하나님의 항구로 오세요.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쉼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천국의 등록처입니다. 사닥다리 위쪽 끝은 하늘에 닿아 있습니다. 아래 쪽 끝은 교회에 닿아 있습니다. 생애를 마칠 때 우리는 천국으로 가야 합니다. 지옥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생애가 끝나기 전에 천국등록소에서 하나님의 생명책에 여러분의 이름을 등록하세요. 교회는 천국의 등록처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큰 집입니다. 교회는 가장 큰 집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지으신 집입니다. 가장 큰 희생을 지불한 집입니다. 하나님의 빵과 하나님의 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과 주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쉼이 있습니다. 여러분! 큰 집에서 하나님의 맛을 보세요. 하나님의 사랑의 맛을 보세요. 하나님의 자비의 맛을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의 맛을 보세요.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의 맛을 본 사람입니다.
<시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어떤 방송사의 <아내의 맛>이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유명인들의 일상에서 느끼는 행복을 다룬 예능 프로그램입니다. 일상 속에서 아내를 통해 느끼는 행복의 맛을 말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여러분! 집에는 아내의 맛이 있습니다. 남편의 맛이 있습니다. 자식의 맛이 있습니다. 부모의 맛이 있습니다. 삶에 맛이 있습니다. 그 맛이 쓴맛이 아니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아내의 맛, 남편의 맛, 자식의 맛으로 행복한 가정이 되길 축복합니다.
삶에 맛이 있듯이 하나님의 맛이 있습니다. 큰 집에는 하나님의 맛이 있습니다. 우리 등대교회가 하나님을 맛이 나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미움의 맛, 시기의 맛, 질투의 맛, 다툼의 맛이 나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의 맛, 섬김의 맛이 나야 합니다. 시기하고 미워하면서 ‘교회가 왜 그래?’라고 말하지 말아주세요. 서로 사랑하세요. 서로 섬기세요. 내 몸에서 하나님의 맛이 나도록 서로 섬겨주세요. 큰 집에는 하나님의 맛이 있어야 합니다.
2. 큰 집에 있는 그릇들
이 큰 집에 있는 그릇들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큰 집에는 네 종류의 그릇이 있습니다. 금그릇과 은그릇, 질그릇과 나무그릇입니다. 바울은 재질에 따라 그릇을 네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그러면 금그릇과 은그릇은 무엇이고 질그릇과 나무그릇은 무엇일까요? 금그릇과 은그릇은 예수님의 피로 변화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질그릇과 나무그릇은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전자는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키고 후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네 종류의 그릇은 믿음을 등급으로 나눈 것이 아닙니다. 전자는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고 후자는 은혜를 적게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전자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고 후자는 믿음이 작은 사람이 아닙니다. 장로 집사 권사는 금그릇과 은그릇이고 직분이 없는 사람은 나무그릇과 질그릇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네 종류의 그릇은 믿음의 등급이 아닙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질그릇에 비유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질그릇과 목그릇은 성도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바울은 네 종류의 그릇을 다시 둘로 나눕니다. 하나는 귀하게 쓰는 그릇이고 다른 하나는 천하게 쓰는 그릇입니다. 큰 집에는 귀하게 쓰는 그릇이 있고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습니다. 왜 교회에 금그릇과 은그릇만 있지 않고 질그릇과 목그릇도 있을까요? 교회는 세상에 있습니다. 교회는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와 세상을 오고 갑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여러 종류의 그릇들이 섞여 있습니다. 큰 집에는 귀한 그릇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상에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의 정원입니다. 이 정원에는 하나님이 심은 무화과나무가 자랍니다. 감람나무와 포도나무도 자랍니다. 하지만 잡초도 자랍니다. 질경이도 있습니다. 이 정원이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원에 있다고 잡초가 영광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청와대 정원에 나는 잡초가 청와대에 있다고 영광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질경이가 백악관 정원에 있다고 존귀한 것은 아닙니다. 잡초는 어디 있어도 잡초입니다. 청와대 정원에 있다고 잡초가 아름다운 정원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원사는 어느 시점에서 잡초를 뽑아 버릴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정원을 오고 갔습니다. 그가 다니는 큰 집의 주인은 예수님이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 집의 회계이었습니다. 그는 큰 집의 재정을 잘 관리했습니다. 또 재정을 아꼈습니다. 돈을 낭비하는 어떤 여인을 꾸짖기도 했습니다. 아끼는 것은 중요합니다. 가룟 유다는 큰 비의 탁월한 일꾼이었습니다. 하지만 일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가룟 유다는 더 중요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큰 집의 그릇이었습니다. 하지만 금그릇이나 은그릇이 아니라 나무그릇과 질그릇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정원수가 아니라 잡초였습니다. 결국 가룟 유다는 큰 집에서 뽑아져 나갔습니다.
신축한 아파트 정원에는 아름다운 나무들이 심겨 있습니다. 단풍나무 소나무 모과나무 잣나무 등 여려 가지 나무들이 있습니다. 아주 좋은 나무들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들은 지주목이나 말뚝에 묶여 있습니다. 나무가 자리를 잡는 동안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말뚝이 나무를 지탱해줍니다. 정원수는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말뚝은 죽어 있습니다. 말뚝이 없다면 아름다운 정원수는 바람에 쓰러질 것입니다. 죽은 나무가 살아 있는 나무를 지탱해주는 것입니다. 뿌리가 완전히 내려 나무가 자리를 잡으면 나무들은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원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는 죽은 집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죽은 권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죽은 재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목사, 죽은 설교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죽은 자는 잠시 동안 산 자를 지탱해줄 것입니다. 산 자들이 자리가 잡히고 터가 굳어지면 죽은 자들은 버려질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는 죽어 있는 자가 아닌지 수시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큰 집 주인은 손님들을 금그릇이나 은그릇으로 대접합니다.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으로 대접하지 않습니다. 천한 그릇을 대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종들은 질그릇이나 나무그릇을 사용할 것입니다. 주인이 쓰는 그릇은 귀한 그릇입니다. 우리는 귀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신을 질그릇이나 나무그릇으로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아마 있으실 것입니다. 저도 제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수 없이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못난이! 참 못났다.’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출신이 나무그릇이나 질그릇처럼 비천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의 은혜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금그릇과 은그릇으로 변해야 합니다. 변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질그릇 같은 우리를 금그릇으로 바뀌게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으세요. 믿음이 금입니다. 돈이 금이 아닙니다. 세상이 금이 아닙니다. 출세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금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금그릇으로 바꿉니다.
이 금그릇과 은그릇에 붙어 있어야 할 품질보증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깨끗’입니다. 바울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한 그릇이 된다고 했습니다. 주인은 깨끗한 그릇을 쓰십니다. 사람이 스스로 깨끗해질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사람은 안 됩니다.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세요. 십자가가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우리 안에 죄가 올라올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죄 때문에 괴로울 때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그런데 딜레마가 있어요. 십자가가 잘 안 바라봐져요. 자꾸 세상이 바라봐져요. 이것이 인간입니다. 우리 육신의 죄성은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안에 자신을 자책하는 마음, 깨끗해지고자 하는 마음, 탄식하는 마음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있으면 됩니다. 그것이 있으면 여러분은 금그릇과 은그릇입니다. 죄 때문에 넘어져도 조금씩 하나님 앞에 나아가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쓰시는 귀한 그릇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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