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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톨스토이의 <하나님은 진실을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God sees the truth, but waits)>라는 단편 소설의 스토리입니다. 블라디머 마을에 액시노프라는 상인이 살았습니다. 액시노프는 어느 날 장사를 하러 먼 시장으로 떠납니다. 가던 중에 날이 저물어 한 여관에 묵게 됩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요란한 방울 소리를 내며 경찰마차가 달려왔습니다. 경찰은 액시노프의 짐을 수색했습니다. 경찰은 거기서 피 묻은 칼을 찾아냅니다. 지난밤에 옆방에 투숙한 상인이 살해당했다는 것입니다. 액시노프는 시베리아로 유배되어 26년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기에 세미오니치라는 죄수가 들어옵니다. 말하는 것을 보니 26년 전 자기에게 살인 혐의를 씌운 자이었습니다. 세미오니치도 액시노프를 알아봤습니다. 어느 날 액시노프는 감옥을 돌다가 세미오니치가 마루 밑에서 감옥 밖으로 나가는 땅굴을 파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액시노프에게 말합니다. “입 다물고 있어. 성공하면 함께 도망칠 수 있으니까. 만약 입을 열면 너는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액시노프가 말했습니다. “나는 도망칠 생각 없다. 그리고 너는 나를 죽일 필요가 없어. 26년 전에 이미 너는 나를 죽였으니까. 나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할 거야.” 며칠 후 땅굴 파는 사실이 발각되어 죄수들을 심문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실토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액시노프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으리, 저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저의 목숨을 나으리 처분에 맡깁니다.” 결국 그 사건은 미결로 끝이 납니다. 그날 밤 세미오니치가 액시노프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액시노프, 용서해 주시오. 26년 전 내가 그 상인을 죽이고 돈을 훔쳤소. 당신도 죽일 생각이었으나 밖에서 소리가 나서 그 칼을 당신 짐 속에 감추고 창문으로 도망쳐 나왔소. 내일 이 사실을 자백하고 당신은 석방되도록 하겠소. 그리스도의 자비로 나를 용서해주시오.”하며 흐느끼는 것이었습니다. 액시노프도 울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 거요. 어쩌면 나는 당신보다 백 배 더 나쁜 사람일지도 모르오.” 석방 명령이 전해졌을 때 액시노프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마지막 눈을 감았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억울한 삶이 있을까요? 그런데 인류가 이런 억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한 사람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죄와 사망 아래에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고 있는 모든 아픔 괴로움 슬픔 고통은 아담의 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사탄의 음모와 술책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억울하다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왜 하필 나일까요? 왜 내 부모이고 내 자식인가?’ 이렇게 생각해보셨습니까? 모두 죄 때문입니다. 우리는 억울한 인생들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란 무엇일까요? 저는 십자가를 한 마디로 억울함을 푸는 열쇠라고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억울하게 죽으셨습니다. 모든 인생이 억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보다 더 억울한 인생은 없습니다. 여러분! 부활은 무엇일까요? 부활은 그 억울함에 대한 가장 완전한 보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들의 억울함을 푸는 열쇠와 보상입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여러분이 삶에서 당하는 질병의 억울함, 삶의 문제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억울한 일을 만나면 어떻게 하십니까? 항거하십니까? 거부하십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억울한 일은 만나면 거부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억울한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하셨을까요? 거부하셨을까요? 대항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로 나가셨습니다.
<17절>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지시고’, ‘나가시니’라고 했습니다. 시제가 능동태입니다. 누가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워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예수님께서 나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끌려서 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가신 길입니다. 요한복음10:18에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버리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0:32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제자들 앞에 서서 가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억지로 가신 것이 아닙니다. 기꺼이 가셨습니다. 왜요? 죄와 질병으로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자기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아플 때, 괴로울 때, 슬플 때, 포기하고 싶을 때, 너무 고통스러울 때, 길이 안보일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슴에 조용히 떠올려봅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슴에 묵상해봅시다. 십자가에 우리의 아픔을 푸는 열쇠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내 인생의 한을 푸는 매듭이 있습니다. 저는 마음속에 응어리가 지는 일이 생기면 그 자리에 십자가를 조용히 그려봅니다. 마음속에 십자가 그립니다. 그러면 아픈 마음이 녹아요. 속상한 마음이 녹아요. 억울했던 마음이 풀려요. 여러분! 십자가에 내가 당하는 억울함과 슬픔을 못 박읍시다. 주님이 십자가로 여러분의 아픔과 억울함을 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이사야 53:4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말 성경은 “사실 그가 짊어진 병은 우리의 병이었고 그가 짊어진 아픔은 우리의 아픔이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몸의 질병과 마음의 아픔을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 속의 슬픔을 짊어지셨습니다. 여러분의 짊을 예수님께 맡기세요.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실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셋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첫째, 그들은 로마 병사들로 추정이 됩니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께 무엇을 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희롱했습니다.
<요19:2-3> 2.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3.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군인들은 가시나무로 만든 왕관을 예수님께 씌웠습니다.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자색옷은 왕 귀족들이 입던 옷입니다. 손으로 예수님을 때렸습니다. 군인들은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뺨을 때린 것 같습니다(18:22). 여기 때렸다는 말이 미완료입니다. 계속 때렸다는 말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로마병정들이 줄을 서서 돌아가면서 예수님의 뺨을 때렸다고 해석합니다. 한 사람이 때린 것이 아닙니다. 병사들이 줄을 서서 예수님의 뺨을 때리면서 지나갔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을 아주 심하게 조롱하고 모욕했습니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으로 지루했던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을 조롱과 희롱의 놀잇감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군인들의 놀잇감이 됐습니다.
둘째, 그들은 대제사장들일 수도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쳤습니다.
<요19:6>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마26: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예수님은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격 당했습니다. 온갖 멸시와 조롱을 당하신 것입니다.
셋째, 그들은 유대인들일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사형을 요청했습니다(요19:7). 유대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은 로마 병정, 대제사장, 유대인 셋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맡으매’라는 말이 헬라어로 ‘파라람바노’입니다. 파라람바노(παραλαμβάγω)는 “기쁘게 영접하다, 데리고 다니다, 인정하다, 좋아하다, 환영하다, 받아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상대를 아주 적극적으로 데리고 간다는 의미입니다. 상대를 아주 기쁘게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파라람바노는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한다고 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요1:11-12>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1절에 영접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파라람바노입니다. 그러니까 1장 11절의 영접과 19장 17절의 ‘맡으매’라는 말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마음에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맡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넘겨받는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물건처럼 넘겨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내 마음에 모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맡는다는 것은 물건처럼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지 않고 맡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영적으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어린이, 여자, 노인을 포함하면 2만 명이나 되는 숫자입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먹고 사는 문제는 걱정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열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요청을 거절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밥)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수라는 것입니다. 나를 먹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나를 먹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영적 이해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육적으로 본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영적인 눈으로 보셔야 합니다. 육적인 눈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내가 볼 때” 이렇게 말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님을 듣지 마세요. 잘 못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무어라고 말하는지 보세요. 그래야 진정으로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숨겼습니다.
<마28:1-4>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로마 병정들은 부활의 순간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마28:11-13> 11.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대제사장, 군인, 장로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숨겼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루머를 만들어 냈습니다. 예수님을 맡은 사람들은 음모자가 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셨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맡았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물건처럼 맡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마음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내 삶에 주인이 아니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짐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입니다.
고등학교 앨범이 있습니다. 30년이 넘은 물건입니다. 겉표지가 천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지가 묻어 지저분합니다. 버리자니 좀 그래요. 하지만 보지도 않아요. 쓰지도 않아요. 쓸데가 있는 것 같은데 쓸데가 없어요. 거의 10년 정도 한 번도 안본 것 같아요. 이사를 갈 때마다 어딘가에 끼어서 따라와요. 여러분! 예수님이 고등학교 앨범처럼 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먼지가 뽀얗게 앉은 고등학교 앨범처럼 그냥 맡고만 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마음에 진심으로 영접하세요.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십자가가 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됩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드릴 때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부활의 사전적인 정의는 ‘쇠퇴한 것이나 없어진 것이 다시 성하게 일어남’입니다. 영어로 부활은 resurrection입니다. resurrection은 다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rise again). 라틴어에서 온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부활(ἀνάστασις 42회, ἔγερσις - 마27:53, ἐξανάστασις - 빌3:11)의 어의 또한 일어남, 세움입니다. 일반적으로 부활이란 말의 뜻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 또는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적인 부활은 어떤 것일까요? 부활은 다시 죽는 일이 없는 썩지 않을 영체로 다시 살아나는 일을 의미합니다.
<롬6: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고전15: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사회학자인 최태섭 씨의 「억울한 사람들의 나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최태섭 씨는 한국 사회가 억울함의 경기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도 나도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두 억울함을 호소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갑질한 사장님까지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진짜 억울함과 가짜 억울함이 교차하는 ‘불행 배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억울함이 시대정신이 되었습니다. 이 억울한 나라, 억울한 세상에서 우리의 억울함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최태섭 씨는 이런 말을 합니다. “가장 약한 자들의 승리가 나의 승리라는 것을 믿게 될 때 우리들의 억울함을 마침내 해소될 것이다. 우리들이 원하는 것들은 억울함이 너머에 있다.” 아주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강한 자이십니다. 그런데 가장 약자가 돼서 가장 억울하게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영접할 때 예수님의 승리가 내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생명 내 생명, 예수부활 내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부활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부활은 죽음의 극복이다.” 죽을 것 같은 아픔, 질병, 고통, 괴로움 예수 이름으로 극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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