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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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세기 1:4
주일오전예배 | 2019-03-31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창조의 첫날 아침 하나님은 빛을 만드십니다. 빛은 하나님이 만드신 첫 번째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이 빛은 하나님을 아주 많이 닮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빛이라고 증거합니다.  

야고보서 117절에 하나님을 빛들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습니다. 빛은 하나님을 닮은 피조물입니다. 디모데전서 6:16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사람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속에 거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밝은 빛이십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27:1)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시인은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104: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빛으로 옷을 입고 계십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에게서 빛이 나온다고 선언합니다.  

<3:4> 그의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의 손에서 나오니 그의 권능이 그 속에 감추어졌도다    

하나님의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이 사라집니다(42:16). 어떠한 어둠도 그 분으로부터 숨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닙니다. 밤도 대낮처럼 밝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어둠과 빛이 다 같습니다.”(139:12, 표준새번역).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으라는 말을 빛을 믿으라는 말로 대신하셨습니다. 1: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참 빛을 믿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추는 곳입니다(22:5).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빛은 하나님을 너무나 많이 닮은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빛이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닮아갑시다. 그래서 세상을 빛으로 살아갑시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창조의 첫 날 아침 땅이 혼돈하고 공허했습니다. 깊음의 물 위에 두꺼운 흑암이 덮여 있었습니다. 온 세상이 흑암에 뒤 덮여 있었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빛이 있었습니다. 그 빛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이 시간에 빛을 만드시고 그 빛을 보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빛을 보시고 좋아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보시는 하나님  

먼저 빛을 보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빛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빛을 바라보셨습니다.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보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라아입니다. 라아는 성경에 아주 많이 쓰이는 표현입니다. 라아는 보다, 관심이 있다, 유의하다, 알다, 감찰하다, 염려하다, 보호하다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눈으로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자세히 살피는 것입니다.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대충 보는 것이 아닙니다. 쓱 훑어보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봄에 꽃구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을에 단풍 구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세히 살피는 것입니다. 애정을 가지고 깊은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을 보셨습니다. 왜 보셨을까요?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어떤 분을 만났습니다. 아들이 군에 갔습니다. 부모님들이 훈련소 수료식에 갑니다. 장병들이 연병장에 도열해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관중석에 앉아 있습니다. 엄마는 많은 장병 가운데 자기 아들만을 찾습니다. 아들은 많은 부모님들 가운데 자기 부모님만 찾습니다. 엄마는 자기 아들만을 쳐다봅니다. 엄마는 다른 사람의 아들을 보지 않습니다. 아들도 자기 엄마만을 봅니다. 다른 사람의 아들들을 보기 위해 먼 길을 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아들을 보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왜 자기 아들만을 볼까요? 자기가 낳았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아들을 보며 울고 아들은 엄마를 보며 우는 거예요. 왜요? 자기가 낳았으니까요! 자기 자식이니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아주 자세히 살피고 계십니다. 우리의 처지 형편 사정을 살피십니다. 왜요?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항상 보고 계십니다. 여기 보다는 말이 미완료입니다. 동작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과거에도 보셨고 지금도 보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앞으로도 보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이 1장에 일곱 번 나옵니다. 거의 매일 같이 나옵니다. 피조물이 완성될 때마다 나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완성될 때마다 피조물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만드신 피조물을 매일 같이 보시는 분이십니다. 계속 보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상황을 놓치지 않고 보시는 분이십니다.  

제 아내가 아이를 났을 때입니다. 간호사가 아기를 아내의 품에 안겨주었습니다. 아내가 아기를 품에 안고 한참을 보는 거예요. 아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해요. 간호사가 아기를 데려갑니다. 아기가 가는 데로 엄마의 시선이 따라갑니다. 문이 닫힙니다. 더 이상 아기를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은 여기까지입니다. 눈앞에 있는 자식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서 무얼 하든 항상 보십니다. 우리를 따라 다니며 보십니다. 쉬지 않고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만이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빛을 볼 수 없습니다. 간혹 강한 빛이 우리 눈에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은 빛은 볼 수 없습니다. 강열한 빛은 우리 눈을 상하게 하거나 심하면 눈을 멀게 합니다. 사람들은 빛을 볼 수 없습니다. 새도, 동물도, 풀도, 나무도 빛을 보지 못합니다. 이 세상 누구도 빛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빛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빛의 관찰자이십니다. 우리 마음속은 아무도 볼 수 없습니다. 엄마도 아빠도 친구도 우리 마음속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어둠의 빛, 우리 마음의 그늘을 하나님은 보십니다   

저의 막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이었습니다. 학교를 잘 다니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 학교를 가기 싫어했습니다. 왜 그런지 몰랐습니다. ‘싫을 수 있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가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걱정이 됐지만 억지로 보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교문에서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하고 학교에 들여보냈습니다. 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서 있었습니다. 아이가 가면서 한 번씩 뒤를 돌아봅니다. 고개를 숙이는 거예요. 그러다가 뒤돌아서 제게로 오는 거예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가기 싫다는 거예요. 하지만 억지로 학교에 들여보냈습니다. 왜 그런지 할 수만 있으면 학교에 따라 들어가 보고 싶어요.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괴롭히는 아이가 있었던 거예요. 아이의 마음에 어둠의 빛이 있어요. 근심의 빛이 있어요. 그런데 부모는 몰라요. 자식의 마음을 몰라요. 자식의 근심을 몰라요. 말을 해도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은 아십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아세요.  

본다는 말은 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빛을 아십니다. , , 별은 넷째 날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빛은 첫째 날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면 햇빛, 달빛, 별빛은 뭐고 첫째 날의 빛은 무엇일까요? 두 빛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성경학자들 간에 여러 가지 논쟁이 있습니다. 그 논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첫째 날의 빛은 영적인 빛이라는 것입니다. 햇빛과는 다른 빛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햇빛과 똑같은 자연적인 빛이라는 것입니다. 둘 중에 어떤 쪽이 맞을까요? 한쪽이 맞는다면 다른 한쪽이 틀릴 것입니다. 또 둘 다 틀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정확하게 아십니다. 왜요?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가장 잘 아십니다.  

어떤 여인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연애를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앞두고 남자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얼마 후에 여자는 다시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남자는 너무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진심으로 여자를 사랑해주었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면 사랑이 깨질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녀는 비밀을 간직한 채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자식을 낳고 행복하게 사는 동안에도 마음 한쪽 구석은 늘 괴로웠습니다. 그렇게 십년이 흘렸습니다. 남편은 한결같이 그녀를 사랑해주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너무나 좋은 남편 앞에서 자신 과거를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남편은 아내의 손을 잡고 웃으면서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남모르는 근심이 있으세요? 마음에 그늘이 있으세요?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 같으십니까? 외로워하지 마세요. 우리 주님이 보고 계세요. 주님이 알고 계세요. 우리 약점, 아픔, 연약함, 불신 모든 것을 알고 계세요. 그럼에도 사랑하세요.  

<103:14>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우리 체질은 진흙입니다. 우리는 진흙으로 만든 흙그릇, 질그릇입니다. 깨지기 쉬워요. 정말 약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염려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다 아세요. 하나님이 깊은 눈으로 여러분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붙드시고 계세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2.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  

두 번째로 좋았더라는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셨다고 했습니다.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좋은 것입니다. 내가 볼 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주어가 가 아닙니다. 내가 볼 때 좋은 것은 나만 좋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에겐 좋은데 다른 사람에게는 불쾌할 수 있습니다. 내가 좋은 것은 이기적인 좋음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좋은 것은 모두가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은 것은 온 세상이 좋은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좋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볼 때 좋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나만 생각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찰스 M. 쉘돈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책이 있습니다. 금요일 아침이었습니다. 헨리 맥스웰 목사는 주일 설교 원고를 마무리하기 위해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허름하게 옷을 입은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은 목사님에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설교 준비로 너무 바빴습니다. 무엇보다도 알지도 못하는 떠돌이 때문에 설교 준비하는 시간을 빼앗길 수 없었습니다. 목사는 그 사람을 돌려보냈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명설교가이었습니다. 항상 설교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교인들 대부분은 맥스웰 목사의 설교에 만족했습니다. 목사의 부인은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자기 남편의 설교를 듣기를 바랐습니다. 주일이 왔습니다. 설교의 주제는 예수님을 따르자는 것이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마지막 찬양을 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누군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사람은 금요일 아침 맥스웰 목사를 찾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자동주조식자기가 발명되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게 된 인쇄공이라고 했습니다. 인쇄술의 발달로 올해만 6명의 인쇄공이 자살했다고 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4개월 전에 죽었습니다. 어린 딸을 아는 인쇄공에 맡기고 일자리를 구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본받는다는 게 과연 무슨 뜻입니까? 여기 계신 분들이 굶주림, 영양실조, 그리고 열악한 주거 환경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모두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른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많은 크리스천이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저의 아내가 죽었던 아파트의 소유주 역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과연 그 아파트 주인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실천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죽어가고 있고 많은 사람이 일거리를 찾기 위해 거리를 헤매고 있습니다. 그들은 피아노나 그림을 집 안에 들일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한 채 매일 매일을 불행과 술 취함, 그리고 죄악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크리스천들은 멋진 집에서 좋은 의복을 입고 사치스럽게 돈을 낭비하며 여름마다 휴가를 즐기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말을 마친 인쇄공은 갑자기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자신의 집으로 인쇄공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극진히 간호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만류에도 일주일 동안 밤을 새다시피 하며 맥스웰 목사는 인쇄공을 간호했습니다. 하지만 인쇄공은 주일 아침 세상을 떠났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주일 예배 후에 앞으로 1년 동안 모든 삶 속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 없이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할 자원자를 모집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 운동의 목적은 그 결과에 상관없이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상황에 처하신다면 하실 만한 행동을 몸소 실천에 옮기는 데 있었습니다.  

이 운동에 일간신문 사장인 노먼이 참여했습니다. 노먼은 사람들이 가장 흥미롭게 보는 권투 시합 기사를 신문에서 뺍니다. 직원들이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노먼은 예수님이 일간신문 사장이시라면 내기 권투 시합 따위의 기사에 3단 반의 지면을 할애하실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로 인해 신문은 팔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신문팔이 소년들에게 팔리지 않은 신문 대금을 물어주게 되었습니다. 노먼은 주일 아침에 발행하던 신문을 발행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주일에 신문을 발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신문사는 위태롭게 됩니다. 교회에서 찬양을 하던 레이첼이라는 사람은 유명한 오페라단 입단을 거절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좋은 목소리를 사용하지 않으실 거라는 확신이 때문이었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슬럼가로 들어갑니다. 교회 청년 중 한 명은 주일 아침에 출장가라는 사장의 명령을 거절했다가 해고당합니다. 어떤 사람은 술을 끊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을 경험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님이 살아계십니까? “이럴 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요?” 신앙생활하시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가 아닙니다. 그 보다 더 높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입니다. 여러분! 내가 보기에 좋은 삶을 살지 맙시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좋은 삶도 살지 맙시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삽시다. “나만 좋으면 되지!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예수님은 무슨 상관이야?”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이럴 때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생각합시다.  

구약 성경의 시작은 좋다입니다. 1장에 좋다가 6(4, 10, 12, 18, 21, 25) 나옵니다. 심히 좋다가 1(31) 나옵니다. 좋다가 일곱 번입니다.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인류의 시작은 더 없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끝이 좋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4:6) 시작은 좋은데 끝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면 과정은 좋았을까요? 과정도 좋지 않았습니다. 시작만 좋았습니다. 왜 시작은 좋은데 끝이 안 좋을까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 보기에 좋은 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자기들이 좋은 것이 아니라 마귀가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자기들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내가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이 내게 안 좋을 수가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이 실상은 내가 좋은 것이 아니라 마귀가 좋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마귀는 말합니다. 네가 좋아야 한다고. 네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과정도 좋습니다. 끝도 좋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곳입니다. 왜요?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사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시작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이 보시기 좋은 곳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곳에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내가 보기에 좋은 대로 해야 할까요? 만약 우리는 우리가 보기에 좋은 대로 한다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쪼갠 것처럼 우리도 교회를 쪼개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것처럼 우리도 교회에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시작이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서로가 서로에게 좋습니까? 우리 모두가 함께 좋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과정에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과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좋은 과정을 거치도록 함께 노력하고 애씁시다. 함께 기도합시다. 그래서 우리의 끝도 좋게 되게 합시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럴 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것이 우리 등대교우들에게 슬로건이 되길 바랍니다. ‘내가 좋은 대로 하겠습니다.’ 이것이 아닙니다. ‘집사님 좋은 대로 하세요.’ 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대로 합시다. 시기 질투 이기심 이것은 마귀가 좋아하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크리스천의 이미지를 빛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1: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빛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빛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여러분! 우리는 빛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빛은 하나님을 닮은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을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세상에 빛이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어효선 씨가 작시한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이란 동요가 있습니다.  

<1절>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 여름엔 여름엔 파랄거예요 /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 파아란 하늘 보고 자라니까요

<2절>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 겨울엔 겨울엔 하얄거에요 /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 하얗게 하얗게 덮인 속에서 /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파아란 하늘이라고 했습니다. 김치경 씨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주님의 마음을 파아란 하늘에 비유하지 않았을까요? 여러분! 우리 주님은 청정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고 살아갈 때 예수님의 청정한 빛이 우리들 마음에 반사가 되어 세상에 청정한 빛이 발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 세상이 파랗게 파랗게 청정한 빛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예수님의 청정한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길 바랍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예수님의 청정한 빛을 발하세요. 그래서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합시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빛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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