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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 “빛이 있으라”

조회수 : 882회

본문 : 창세기 1:3
주일오전예배 | 2019-03-24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산골마을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를 맡고 계시는 목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콩밭에서 잡초를 뽑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잡초가 너무 많아 뽑아도 뽑아도 잘 줄지를 않았습니다. 뽑고 돌아서면 다시 잡초가 자라났습니다. 힘이 들고 짜증스러웠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악마가 다가와서 목사님을 조롱했습니다.  

목사님, 무척 힘드시죠? 이런데도 범사에 감사할 수가 있겠습니까?’  

잠시 생각에 잠기던 목사님이 악마를 향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많은 잡초가 메뚜기처럼 뛰어다니지 않고 한 자리에만 있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악마가 비실비실 힘을 잃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너무 어둡다고 탄식하며 불평합니다. 하지만 탄식하며 불평한다고 그 어둠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더욱 어둡게 할 뿐입니다. 어둠 속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 뿐입니다. 세상의 어둠을 이겨내는 최선의 방법은 그 어둠에서 빨리 나오는 것입니다. 어둠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태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받기 이전 세상 왕 아래 있을 때에 우리의 영적 상태는 혼돈과 공허였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혼돈하고 공허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혼돈과 공허를 경험합니다. 왜 그럴까요? “구원받았는데!” 우리는 아직 육신을 가지고 세상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종 세상의 혼돈과 공허에 우리 영혼이 휩쓸립니다. 혼돈과 공허가 계속 되면 깊음에 빠집니다. 두꺼운 흑암이 덮어버립니다. 흑암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둠에서 나와야 합니다. 어둠에서 나오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빛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빛이십니다. 빛으로 나아가면 어둠은 자연이 물러가게 됩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봄이 왔습니다. 아직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겨울은 봄을 이길 수 없습니다. 봄을 이기는 겨울이 없는 것처럼 빛을 이기는 어둠은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없다고 한탄하면 안 됩니다. 빛이 있습니다. 빛으로 나아가세요.

 

1. 하나님의 창조 해설가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말이 11번 나옵니다. 11번을 빼고 나머지는 모두 모세의 말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모세의 해설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해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말도 모세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모세의 해설이 더 많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자기 마음대로 해설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천지창조 스토리가 문헌으로 전해 내려왔습니다. 또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구전과 문헌을 살폈습니다. 살피고 또 살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해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의 솔리스트이십니다. 모세는 위대한 솔리스트의 해설자입니다.  

모세의 천지창조 해설은 결혼행진곡과 같습니다. 결혼식의 사회자가 오늘의 주인공 신랑 신부 입장하면 결혼행진곡이 딴따다단 딴따다단 딴따다 딴따다 딴따다단연주됩니다. 그러면 신랑과 신부가 입장합니다. 신랑과 신부가 행진하는 동안 결혼행진곡은 계속 연주됩니다. 사람들은 결혼 행진곡을 귀로 듣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그날의 주인공인 신랑 신부를 향해 있습니다. 신랑과 신부를 따라서 고개가 돌아갑니다. 신랑과 신부의 입장이 끝나면 결혼행진곡은 끝이 납니다. 피아니스트가 신랑과 신부를 위해 결혼행진곡을 연주하듯 모세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위한 창조행진곡을 연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모세가 작시한 <창조행진곡>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댄서입니다. 아직 무대에 가수가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백댄서는 이미 무대에 올라와 있습니다. 무대에 음악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음악과 함께 백댄서들은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가수와 가수가 부를 노래를 위한 백댄스입니다. 음악이 끝날 때까지 백댄서들은 춤을 멈추지 않습니다. 간주가 연주될 때 가수는 노래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백댄서들은 춤을 멈추지 않습니다. 음악이 계속 되는 동안 백댄서들의 춤은 계속 됩니다. 가수가 노래를 완전히 마칠 때 백댄서들은 춤을 마칩니다. 주인공은 가수입니다. 창조의 주인공은 하나님입니다. 모세는 백댄서처럼 하나님 뒤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계속 해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댄서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코러스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연주하는 동안 하나님 뒤에서 화음을 넣는 코러스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어떤 사람일까요? 히브리 노예 출신입니다. 물에 버려진 사람입니다. 바로의 공주가 나일강에서 주어다 키운 사람입니다. 다혈질의 사람입니다. 살인자입니다. 도망자입니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말더듬이입니다. 성경 저자 중에 가장 늙은 사람입니다. 모세는 120세에 죽었습니다. 죽기 몇 년 전에 모세 오경을 기록했습니다. 115세 정도에 성경을 기록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렇다면 성경을 기록한 40여명의 저자 중에 최고의 고령자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최고의 해설가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구약 성경의 1/4 이상을 기록했습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의 1/6 이상의 분량입니다. 모세보다 성경을 더 많이 기록한 선지자는 없습니다. 모세는 말 더듬이였습니다. 버려진 아이였습니다. 노예출신이었습니다.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가장 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최고의 해설자가 되었습니다. 성경 저자 중에 최고의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 최고의 해설자가 되었습니다. 성경 기록의 테이프를 끊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모세가 하나님의 최고의 해설자가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창조 기사를 살피고 또 살폈습니다. 기록되어진 말씀을 가지고 씨름을 했습니다. 고민하고 생각하고 묵상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하나님을 위한 진실한 해설가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백댄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코러스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살펴보세요. 묵상해보세요. 고민해보세요. 그래서 모세처럼 이 시대에 하나님의 코러스가 되세요. 하나님의 행진곡이 되어주세요. 세상을 살펴봐야 세상의 들러리 밖에 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들러리는 마귀의 들러리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들러리가 되세요.  

미국 메이저리그에 아주 특별한 야구 해설가가 있습니다. 탬파베이 레이스의 라디오 방송 야구 해설가인 엔리케 올리우라는 사람입니다. 올리우는 한번도 야구 경기를 관람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19년째 쉬지 않고 야구 중계를 해 온 명해설가입니다. 올리우는 시각 장애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는 열 살 때 시청각 장애인 학교에 들어갑니다. 올리우는 장애인 학교에서 야구를 처음 접하고 야구의 세계에 매료됩니다. 그는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뒤 여러 라디오 방송국에 프로야구 해설가로 지원합니다. 하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을 야구 해설가로 받아줄 리가 없었습니다. 올리우는 간신히 어느 마이너리그 팀에서 무보수 자원 봉사자로 첫 야구 해설을 시작합니다.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야구 중계를 할 수 있느냐고요? 그에겐 특출한 재주가 있습니다. 청력과 기억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는 공이 방망이에 맞는 순간, 공이 날아가는 방향을 정확히 예측해 잘 맞은 타구가 우측 담장을 넘어가 그대로 홈런!”, “빗맞은 타구가 안타로 이어집니다.”와 같은 적재적소의 해설을 기가 막히게 해냅니다. 뭣 모르고 중계를 듣는 사람은 그가 한 번도 야구 경기를 보지 못한 시각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의 중계가 생동감이 넘치는 건, 경기 전 선수들과 관계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모든 내용을 머릿속에 저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35년간 야구 선수들의 프로필과 기록, 타구 폼, 팀의 역사 등을 숙지해 인간 야구 백과사전으로 불립니다. 누군가 이 일을 택한 이유를 물으면 그는 오히려 반문합니다.  

보이든 안 보이든 나에겐 야구에 대한 열정이 가득합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하지 않나요?”  

힘들 때마다 올리우는 아버지가 해 준 말을 떠올린다고 합니다.  

밴드가 네 음악을 연주하길 원하니, 아니면 네가 다른 사람 음악을 연주하길 바라니? 그건 전적으로 네 열정에 달렸다.”  

여러분! 세상을 위한 밴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밴드가 되세요. 하나님을 위한 해설가가 되세요. 나이를 따지지 마세요. 학벌을 따지지 마세요. 조건을 따지지 마세요. 필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2.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 “빛이 있으라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말이 신구약 성경에 1,200(1,213건 검색) 이상 나옵니다. 개역성경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1,200번의 이르시되가운데 맨 앞에 첫 번째로 나오는 이르시되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르시되는 히브리어로 아마르(와요메르)입니다. 아마르는 말하다, 계획하다, 명령하다, 생각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셨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첫 번째로 직접 하신 말씀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첫 번째로 하신 명령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빛이 있으라.’입니다. “빛이 있으라이 말씀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음성)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입니다. 또 천지창조의 첫 번째 명령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첫 번째로 빛의 존재를 명령하셨습니다. 빛은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첫 번째로 창조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빛으로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빛을 시작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빛을 기초로 세워진 세상입니다. 세상의 시작은 빛입니다.  

빛 아래서 식물이 만들어졌습니다. 빛 아래서 동물이 만들어졌습니다. 빛 아래서 해, , 별이 만들어졌습니다. 빛 아래서 사람이 만들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빛 아래 만들어졌습니다. 세상의 시작은 빛입니다. 그런데 불행이 닥쳤습니다. 사람이 빛으로 시작된 아름다운 이 세상을 어둠으로 끌고 간 것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사탄의 암흑으로 끌고 갔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를 보십시오. 사람들은 오늘도 세상을 암흑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흑암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흑암으로 덮여 있는 이 세상을 다시 빛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은 이 세상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흑암에서 다시 빛으로 나왔다는 말입니다. 크리스천은 흑암에서 빛으로 나온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빛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영혼이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연약한 육신을 그대로 가지고 암흑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흑암을 경험합니다. 우리 영혼이 혼돈과 공허에 휩쓸립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빛으로 나와야 합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면서 빛이 없다고 말하지 마세요. 세상이 어둡다고 말하지 마세요. 빛이 있습니다. 빛으로 나오세요.  

지난 수요일이었습니다. 차를 몰고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내려가다가 올라오는 차와 마주쳤습니다. 내려가는 통로 왼쪽 차로에 차가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제 차로였습니다. 올라오는 차는 제 차선을 침범해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마주친 차량은 주차가 되어 있지 않은 왼쪽 공간으로 피해 올라오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공간이 너무 좁아서 올라올 수가 없었습니다. 상황을 보니 마주한 차가 후진해서 비켜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비켜주지 않았습니다. 차는 계속 올라가려고 했습니다. 제가 가만히 있다가 올라오는 차가 피해줘야 합니다.”라고 점잖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랬더니 꽥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뒤에 차가 주차되어 있어서 못 내려가요.” 말이 안 되는 말이었습니다. 순간 기분이 아주 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후진해서 비켜주었습니다. 문제는 비켜주고 난 후이었습니다. 괜히 마음이 상했습니다. ‘뭐 저런 여자가 있나? 참 버릇도 없고 예의도 없네. 나이도 어린 사람이!’ 짜증이 났습니다. 그것도 계속 짜증이 났습니다. 나중에는 화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별일이 아닌데 생각할수록 계속 속이 상했습니다. 나중에는 아내에게 짜증을 부렸습니다. 그러다가 순간 생각했습니다. ‘마귀다! 마귀가 목사인 나로 목사답지 못하게 짜증내고 화를 내게 하려고 하는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혼자 마음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마귀에게 속지 말자. 그 여자 뒤에서 마귀가 나를 화 나가 하는 거야!’ 그러자 화가 풀렸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잠시 동안 저를 둘러싼 어둠 속에서 나왔습니다. 여러분! 빛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빛은 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를 계속 어둠 속에 잡아 두려고 합니다. 어둠 속으로 깊이 끌고 가려고 합니다. 제가 너무 원색적으로 생각했나요?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실상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어두우십니까? 빛으로 돌아서세요. 빛을 등지고 어둠을 품고 세상이 어둡다고 말하지 마세요. 내게는 빛이 없다고 말하지 마세요.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빛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빛으로 나오세요. 그래야 어둠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둠을 중단시킬 수 있는 것은 빛 밖에 없습니다. 어둠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빛 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절에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이 헬라어로 카타람바노(καταλαμβάνω)입니다. 카타람바노는 극복하다, 이기다는 뜻입니다. ‘깨닫지 못했다는 말은 극복하지 못했다’, ‘이기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어둠은 빛을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이길 수도 없습니다. 우리 영혼을 덮는 어두움을 벗어버리는 방법은 빛으로 나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했습니다. 빛으로 나오세요. 우리는 빛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빛으로 시작한 종교입니다. 성경의 출발이 빛입니다. 또 여호와의 종교의 출발이 빛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입니다.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이 내립니다. 그 중에 아홉 번째 재앙이 흑암의 재앙입니다. 삼일 동안 애굽에 해가 뜨지 않았습니다. 더듬어야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아주 캄캄한 흑암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는 고센 땅에는 빛이 있었습니다.  

<10:21-23>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

22.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23. 그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이 빛은 어떤 빛일까요? 이 빛을 어떤 성경학자는 기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초자연적인 빛이라고 했습니다. 이 빛이 어떤 빛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비춰지는 신비의 빛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여호와의 종교는 하나님의 신비한 빛 가운데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광야 길에 어려움이 닥쳐올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그리워했습니다. 애굽의 어둠을 그리워한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사람은 참 이상하죠? 어둠을 그리워해요. 어둠을 사랑해요. 더 이상한 것은 자신이 그리워하는 것이 어둠이라는 것을 몰라요. 이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신비로운 빛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사시다가 어려움이 닥쳐와도 어둠을 그리워하지 마세요. 어둠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지 마세요. 어둠이 좋았다고 말하지 마세요. 그냥 빛에 계세요. 굳세게 서서 어둠에 지지 마시고 빛으로 어둠을 이기세요. 다시는 어둠으로 가지 마세요.

 

3. 명령의 성취. “빛이 있었다  

창세기 1장에 ‘~이 있으라.’하시니 ‘~이 있었다.’라는 표현이 일곱 번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 있었다라는 말은 과거형이 아니라 미완료형입니다. 미완료는 지속적인 동작을 나타낼 때 쓰는 히브리어 문법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있었고는 미완료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빛이 현재까지 계속 있다는 뜻입니다. 과거에 있다가 중간에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있다는 뜻입니다. 태초에 창조된 빛은 현재까지 계속 온 세상을 비추고 있습니다. 빛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빛이 있습니다. 여러분! 빛이 없다고 말하지 마세요. 빛이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큰 빛입니다. 온 세상을 비추는 빛입니다. 아주 환한 빛입니다. 희미한 불빛이 아닙니다. 이 빛은 비춤을 멈추지 않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계속 비출 것입니다.  

1879123, 유난히 많은 눈이 내린 미국 뉴저지주 멘로 파크 연구소의 겨울밤. 캄캄했던 밤이 순식간에 대낮처럼 환해졌습니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발명한 순간입니다. 에디슨의 전구는 40시간 동안 켜져 있었습니다. 이틀이 안 되는 시간입니다. 에디슨은 이 백열전구를 만들기 위해 몇 년 동안 연구했을까요? 에디슨은 백열전구를 발명하기 위해 2년 동안 수천 번의 실험을 했습니다. 그렇게 공들여 만들었는데 겨우 40시간 만에 꺼지고 말았습니다.  

센테니엘 라이트(Centennial Light)라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켜져 있는 백열전구입니다. 캘리포니아 주 리버모어 어스트 애버뉴 4550번지에 있습니다. 에디슨이 만든 전구입니다. 이 전구는 1901년부터 현재까지 켜져 있다고 합니다. 자그만치 119년 동안 켜져 있는 불입니다. 현재 기네스 북에 올라가 있습니다. 물론 중간에 꺼 놓은 적도 있습니다. 필라멘트가 탄소로 되어 있습니다. 유리 두께는 일반 전구보다 8배가 두껍습니다. 그래서 오래 갑니다. 이 전구의 밝기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4와트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60와트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손상을 막기 위해 4와트로 줄였다고 합니다. 4와트이면 아주 희미한 불빛입니다. 아주 조그만 불빛입니다.  

사람이 만든 빛은 작습니다. 희미합니다. 언제 꺼질지 모릅니다. 잠시 동안만 비춥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만든 빛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꺼지지 않고 온 세상을 비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빛은 이제 없어져라. 이제 너의 사명은 끝이 났다.”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온 세상을 계속 비출 것입니다.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비춤이 쓸데없을 때까지 이 빛은 계속해서 온 세상을 비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빛이 나타날 때까지 이 빛은 계속 세상에 있을 것입니다     

1980년대에 필리핀에서 민주혁명이 있었습니다. 1966년부터 1986년까지 필리핀을 통치한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을 물리친 혁명입니다. 이 혁명을 촛불혁명이라고 합니다. 그때 구호가 어둠을 탓하기보다 차라리 한 자루의 촛불을 켜라”(스코틀랜드 속담)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어둡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가 빛으로 나갑시다. 그리고 불을 켭시다. 그래서 세상을 밝힙시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팔레스타인은 어두운 곳이었습니다. 선지자도 없었습니다. 말씀도 없었습니다. 그때 불을 켠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1:35>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세례 요한은 광야 어두운 곳에서 불을 켰습니다. 그 빛은 한 줄기 소망의 빛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불빛을 보고 광야로 나왔습니다. 우리도 세례 요한처럼 붉을 밝힙시다. 우리는 어두운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망하기보다 한 자루의 촛불이 됩시다. 그래서 우리도 세례 요한처럼 세상을 밝힙시다. 어두운 세상의 소망이 됩시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봄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겨울이 봄을 이길 수 없듯이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빛으로 어둠을 이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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