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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 이론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불완전합니다. 예외 조항도 있습니다. 그래서 과학 이론은 지금도 계속 수정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론이 주창된 이후 한결같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법칙이 있습니다. 엔트로피 법칙입니다. 엔트로피 법칙은 모든 물질은 자연 상태에서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간다는 법칙입니다. 자연계에서 물질은 시간에 비례하여 질서가 깨지고 혼란스러워져 결국 무질서하게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무질서도가 높아집니다. 아무리 견고한 물건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노후화 되어 쓸모가 없어집니다. 이 법칙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불완전한 부분도 없습니다. 완전하게 증명이 된 법칙입니다. 굳이 증명이 필요 없는 법칙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엔트로피 법칙에 반하는 이론이 있습니다.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에 따르면 물질이 스스로 존재합니다. 물질이 스스로 움직입니다. 결국에는 물질이 사람이 됩니다. 진화론에서 물질은 마치 하나님과 같습니다. 21세기 첨단 과학으로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생명체를 물질에 의해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엔트로피 법칙과 진화론은 서로 반대되는 이론입니다. 줄 중에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립니다. 여러분 생각에 어떤 이론이 맞을 것 같습니까? 진화론이 틀렸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은 유인원이 흑인 황인 백인 순서로 진화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백인을 중심으로 인종을 개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미에서는 유색인종의 출산을 막는 단종법이 실시되기도 했습니다. 풋남(1961)과 민츠(1972)는 흑인은 구제 불가능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5만 년이 지나야 백인과 동등해질 것이라 했습니다. 히틀러는 나치전당대회(1933)에서 진화론을 나치강령으로 수용하고, 200만이 넘는 소외계층을 단종 처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지클론 B'라는 독가스를 만들어 600만이 넘는 유태인과 폴란드인을 학살하였습니다. 독일의 히틀러, 이태리의 뭇소리니, 동양침략의 원흉인 일본의 도조 히데키 등은 진화론의 약육강식 이론에 따라 그들의 침략을 정당화하였습니다. 유물론이 사회과학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마르크시즘입이고, 자연과학형태로 나타난 것이 진화론입니다. 스탈린과 모택동은 진화론의 영향으로 재임 중 수천 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지금도 공산주의자들은 진화론 교육으로 당원들을 세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진화론이 세상을 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은 인류의 적입니다. 학교에서 진화론을 계속해서 배우는 한 인류의 혼돈은 계속될 것입니다. 인문학의 전도사인 이지성 씨는 “우리는 불행하게 살도록 교육받았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 시대 교육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말입니다.
1. 땅
1장 1절에서 “땅”이 나옵니다. 1장 2절에도 “땅”이 나옵니다. 이어서 땅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땅은 그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1장 1절의 땅은 우주를 이루는 물질, 재료로서의 땅입니다. 또 1절의 땅은 하늘과 마주하고 있는 존재로서의 땅입니다. ‘천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2절의 땅은 지구만을 가리킵니다. 1장에 나오는 모든 피조물이 지구에 있거나 지구를 중심으로 있습니다. 따라서 2절에서의 땅은 우리가 발로 밟고 있는 지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하나님”입니다. 32회 나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많이 나오는 단어가 땅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21번 나옵니다(10절 뭍이라는 말 포함). 히브리어 성경에는 23번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에 두 번 생략됐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땅이란 말이 2,504번 나옵니다. 땅은 구약 성경의 중심 주제입니다. 땅은 천지창조의 중심주제입니다. 하나님이 땅에 식물을 만드셨습니다(창1:11). 땅에 동물을 만드셨습니다(창1:24-25).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신 후에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성경은 끊임없이 땅을 말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땅을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땅의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위해 준비하신 땅입니다.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땅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땅을 예비하시고 그 땅을 주셨습니다.
왜 땅이 중요할까요? 그것은 그 땅에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 성전에서 만나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땅을 구별하시고 그 땅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왜요? 거기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만나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땅이 중요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은 무엇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신약의 땅은 보이는 땅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땅입니다. 영적인 땅입니다. 교회는 오늘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가나안 땅입니다. 교회는 우리 시대 영적 에덴동산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거룩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주신 에덴동산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음행과 우상숭배로 그 땅을 더럽혔습니다. 땅을 아프게 했습니다. 땅을 신음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땅이 견디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토해냈습니다. 그래서 세계를 해매는 디아스포라가 됐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교회라는 영적인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 땅을 거룩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피로 값 주고 사신 땅입니다. 우리를 위해 구별하신 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명과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서로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이 땅에서 미워하면 안 됩니다. 편 가르면 안 됩니다. 이 땅에서 싸우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땅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을 신음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땅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2. 혼돈과 공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고 했습니다. ‘혼돈과 공허’라는 말은 이 지구가 창조될 때 땅의 원초적인 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천연 상태의 지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창조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시작하시기 전에 땅의 처음 모습은 혼돈과 공허였습니다.
‘혼돈’은 섞일 ‘혼’(混) 자에 어두울 ‘돈’(沌) 자입니다. 혼돈을 국어사전은 “하늘과 땅이 아직 나누어지지 않은 태초의 상태”라고 했습니다. 혼돈은 어둡고 무언가 뒤범벅되어(hodgepodge) 있는 상태입니다. 달이나 화성 또는 금성 등 사람이 살지 않는 별의 표면을 사진으로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상태를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혼돈은 하나님의 창조 과정에서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무언가 뒤섞여 있는 상태입니다. 태초에 지구는 뒤섞여 있는 덩어리였습니다. 리빙바이블(Living Bible)은 혼돈이라는 말을 “모양을 갖추지 않은”(shapeless)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NIV는 “형태를 이루지 않은”(formless)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KJV는 “형태가 없는”(without form)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닿기 전에 지구는 아무런 모습이 없었습니다. 산도, 들도, 바다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모든 것이 뒤범벅되어진 흙덩어리였습니다.
혼돈이 히브리어로는 토후입니다. 토후는 “황폐, 황량, 사막, 광야, 쓸쓸함, 파멸” 등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닿기 전 지구는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사람의 심령의 상태가 바로 혼돈이 아닐까요? 죄 아래 있는 사람들의 심령 상태가 혼돈입니다.
공허는 빌 공(空)자에 빌 허(虛)자입니다. 공허는 아무 것도 없이 텅텅 비어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공허가 히브리어로 보후입니다. 보후는 ‘황무지, 빈터’라는 뜻입니다. 지구는 태초에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 살지 않고 텅 비어 있는 쓸쓸한 땅이었습니다. 아무도 살 수 없는 황량한 곳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터이었습니다.
여러분! 천지창조는 놀라움과 신비 그리고 아름다움 그 자체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하나님은 매일 같이 “좋다!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신비로운 천지창조 기사를 기록하면서 모세는 왜 맨 앞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했다는 말을 먼저 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맨 앞에 쓸쓸하고 외로운 광야 같은 지구의 처음 모습을 말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혼돈하고 공허했던 땅의 처음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의 모습과 같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처음 읽은 사람들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 그 모습은 혼돈과 공허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이 세상은 애굽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을 보십시오. 질서정연해 보이십니까? 아름답고 깨끗해 보이십니까? 겉모양은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모습은 공허와 혼돈입니다. 사람들의 영혼은 메마르고 비어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는 오늘 우리 시대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 아래에 있을 때 우리 심령은 쓸쓸하고 황폐한 빈 땅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터치가 필요합니다. 애굽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창조주 곁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혼돈과 공허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신동운 씨의 「사람이라면 알아야 할 심리학 상식백과」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어디까지 고독을 견딜 수 있을까요? 1954년 미국에서 이런 실험이 있었습니다. 실험은 하루에 20달러의 보수를 받고 학생을 고용해 진행했습니다. 당시에는 20달러가 상당한 고액이었습니다. 실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극도의 고독한 상태를 만들기 위해 학생을 방음 장치가 달린 작은 방에 들어가게 하고 반투명의 보호 안경을 씌워 시각적 자극을 가능한 최소화했습니다. 잘 들리지 않고 잘 보이지 않게 한 것입니다. 또한 면장갑을 끼게 하고 소매에는 긴 통을 끼웠습니다. 만지는 느낌을 못 느끼게 한 것입니다. 거기에 촉각 자극을 제한하기 위해 머리에 고무 베개를 댔습니다. 식사와 배설 시 이외에는 침대에 24시간 누워 있도록 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감각이 박탈당한 상태를 만든 것입니다.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이 거의 안 되는 상태입니다. 터치가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그 결과, 아주 고액의 보수였음에도 이 고독한 실험은 3일 이상 버틴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처음 8시간 정도까지는 어떻게든 버텼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 되면 휘파람을 불거나 혼잣말을 하는 등 안절부절하기 시작했습니다. 실험이 끝난 뒤 간단한 작업을 시키면 답을 틀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마음을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원래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기기 위해서는 무려 3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실험이 며칠 동안 계속되자 다람쥐가 움직이는 광경이 보이거나 음악이 들린다는 등 환각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4일째 되는 날에는 손이 떨리기도 하고 똑바로 걷지 못하거나 반응이 늦어지기도 했고 통증이 민감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사람에게 일체의 터치가 없을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레이더의 감시원이나 장거리 운전사는 가벼운 감각 박탈 상태라고 합니다. 그래서 실제 없는 것을 보고 사고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고층주택에 사는 주부가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방에 있을 때 강열한 불안이 드는 것도 감각박탈에 의한 고독감에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층 아파트로 가지 마세요.
인간의 마음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극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극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터치하실 때 혼돈과 공허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예배는 내 영혼이 하나님께 접촉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여러분의 영혼을 하나님께 터치하세요. 말씀으로 기도로 찬송으로 하나님을 터치하세요. 혼돈이 사라질 것입니다. 공허가 은혜로 채워질 것입니다.
3. 흑암과 깊음
“흑암은 깊음 위에 있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NIV 성경은 “흑암이 깊음의 표면 위에 있었고”(darkness was over the surface of the deep)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 깊음은 무엇일까요?
깊음은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많은 양의 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깊음을 깊은 바다로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깊음은 바다 보다 훨씬 더 크고 엄청나게 많은 양의 물입니다. 지구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지구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물로 겉 표면이 덮여 있었습니다. 이 물이 둘째 날에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나누어집니다. 셋째 날에는 바다와 육지로 나누어집니다. 원시 상태의 지구는 아주 많은 양의 물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깊은 물 위에 흑암이 덮여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흑암은 성경에서 악의 상징입니다. 그렇지만 흑암이 항상 악은 아닙니다. 여기서 흑암은 하나님의 창조의 한 부분입니다. 창조 중에 생긴 어두움입니다. 빛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어두움에서 머물러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구를 흑암 가운데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흑암에서 빛으로 나아가셨습니다.
때로 우리의 마음을 흑암이 덮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왠지 모르는 우울함, 쓸쓸함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외로움, 슬픔, 고독의 어두운 그늘이 우리의 삶을 덮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져요.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때 우리는 어둠 속으로 끌려가서는 안 됩니다. 어둠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빛이신 우리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마귀는 에게 지지 맙시다. 주의 이름으로 어둠을 이깁시다.
4.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영
2절 끝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위에 운행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영은 성령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운행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라하프입니다. 라하프는 ‘새가 자신의 새끼 위에서 날개짓을 하다’, ‘부드러이 활공하다’, '새가 알을 품고 굴리다‘, ’움직이다‘는 뜻입니다. 새가 자기 새끼 위에 떠 있는 모습니다. 이 단어가 신명기 32:11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신32: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독수리가 자기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새끼를 날개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받을까요? 아주 조심스럽게 받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매를 많이 봤습니다. 매가 얼마나 멋진지 몰라요. 매가 창공을 나는 모습, 매가 나무에 앉아 있는 모습 정말 멋있습니다. 매가 사냥하는 모습도 봤습니다. 정말 날쌥니다. 하늘의 제왕은 매입니다. 매가 사냥이 끝난 후 들판에서 먹이를 뜯습니다. 매는 날개가 아주 커요. 날개를 펴면 제가 양팔을 벌린 것보다 더 큽니다. 매는 그 커다란 날개를 퍼덕이며 부리로 먹이를 뜯습니다. 고개를 흔들며 뜯습니다. 아주 사납습니다. 여기 ‘너풀거리다’는 말은 매가 사납게 먹이를 뜯는 모습이 아닙니다. 둥지 위에서 새끼를 조심스럽게 보살피는 모습입니다. 성령께서 수면 위를 운행하셨다는 말은 새가 자기 새끼 위를 조심스럽게 나는 것처럼 지구를 살펴보시는 모습입니다. 히브리어 ‘운행하다’(라하프)는 말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일어나는 흥분, 떨림, 설렘 등의 감정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흥분과 감격과 설렘을 가지고 최초의 지구를 둘러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마음입니다.
또 운행하시니라는 말은 새가 소중히 알을 품고 굴린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암탉이 알을 품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운행한다는 말은 암탉이 알을 품고 조심스럽게 굴리듯이 성령께서 지구를 품고 안고 굴리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총신대학원 유재원 교수는 ‘운행하시니라’는 말을 “감싸 돌리고 계시니라”(「모세오경」)고 번역했습니다. 처음 지구가 창조될 때 지구는 하나님의 품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깊은 애정과 흥분과 감격과 설렘으로 지구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떠났을까요? 아닙니다.
1절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2절에서는 “성령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에서는 “그가”라고 했습니다.
<요1:1-3>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가 누구일까요? 성자 예수님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깊은 애정과 사랑으로 세상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이 땅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변치 않는 사랑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암탉이 병아리를 품에 품듯 우리를 품으십니다. 보호하십니다. 인도하십니다.
청주에 가면 좋은 교회라고 있습니다. 아주 아름답게 지은 교회입니다. 한형제 목사님께서 설립하신 교회입니다. 부설로 좋은 기도 동산도 있습니다. 기도원도 아주 아름답습니다. 제가 한형제 목사님께 직접 들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 교회를 다녔던 집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건축할 때이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교회를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커튼이 한형제 목사님을 감싸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로 위에서 커다란 유리가 떨어졌습니다. 유리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하지만 커튼 속에 계신 한 목사님은 전혀 다치지 않았습니다. 만약 커튼이 목사님을 싸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주 위험했을 것입니다. 한형제 목사님은 이때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품에 안으신 것이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품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지금도 이 세상이라는 바다 위를 운행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삶 위를 운행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있습니다. 세상의 혼돈과 공허, 깊음과 어둠이 우리를 휘감아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낙심하지 맙시다. 깊음에 빠지지 맙시다. 흑암에 머물러 있지 맙시다. 빛이신 우리 주님께 나아갑시다. 그 사랑 안에 거합시다. 그 은혜 가운데 거합시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넉넉한 사람으로 세상을 이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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