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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창세기는 신구약 성경 66권 중에 첫 번째 책입니다. 제가 전도사 때 중학생들을 지도했습니다. 해마다 두 번씩 학습 세례식을 했습니다. 세례를 받기 전에 교육을 합니다. 그리고 시험을 봅니다. 시험문제 중에 “성경은 몇 권입니까?”라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 학생이 답을 ‘1권’이라고 썼습니다. 세례 교육을 제가 시켰습니다. 장로님 한 분이 와서 답을 보여주는 거예요. 제가 얼마나 민망한지 유구무언이 됐습니다. 성경은 66권입니다. 창세기는 성경 66권 중에 첫 번째 책입니다. 맨 앞에 있는 책이 창세기입니다. 군에서 열병식을 하면 키가 가장 큰 사람이 맨 앞에 섭니다.
창세기는 BC 1,410년경에 모세가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1,446년부터 1,406년까지 40년간 광야생활을 합니다. 창세기는 광야 생활 마지막 즈음에 기록된 책입니다. 창세기는 창조할 창(創) 자에 세상 세(世) 자를 써서 세상 창조에 관한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70인역)로는 게네시스(γενέσις)라고 합니다. 게네시스는 ‘발생’, ‘시작’, ‘기원’라는 뜻입니다. 영어의 Genesis의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창세기는 ‘시작의 책’입니다. 천지의 시작, 세상의 시작, 죄와 죽음의 시작, 복과 저주의 시작, 빛과 어둠의 시작, 사회와 문명의 시작, 결혼과 가정의 시작, 제사(예배)의 시작, 인류의 구원을 위한 성경 계시의 시작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는 모든 존재의 시작과 기원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인류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창세기 이후에 기록되어진 성경 65권의 모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답은 뿌리를 알아야 찾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뿌리입니다. 따라서 인류는 인생의 답을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은 창세기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은 요한계시록입니다. 창세기가 시작의 책이라면 요한계시록은 마침의 책입니다. 두 성경은 아주 연관성이 많습니다. 창세기는 하늘과 땅의 창조를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합니다. 창세기는 인류 타락의 시작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구원의 완성을 말합니다. 창세기는 저주를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저주의 제거를 말합니다. 창세기는 실낙원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복낙원을 말합니다. 세상 끝에 인류의 조상 아담이 잃어버렸던 에덴의 기쁨이 회복될 것입니다. 창세기는 마귀가 인간을 이깁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은 성도가 마귀를 이깁니다. 창세기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힙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은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립니다. 인류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원히 살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창세기의 완성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계획의 환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책입니다. 우리는 그 과정 속에 있습니다. 때로 시험에 들어 넘어지고 쓰러져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결국 하나님의 완성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1. 태초에
‘태초’는 히브리어로 레쉬트입니다. 레쉬트는 ‘태초, 시작, 기원, 첫째’라는 뜻입니다. 태초는 시작을 말합니다. 어떤 시작일까요? 시간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 순간에 우주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태초는 시간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시간이 없었을 때가 있었습니까? 예, 시간이 없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를 ‘영원’이라고 합니다. 태초 이전을 영원이라고 합니다. 태초 이전에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시작된 것입니다. 태초는 영원과 우주의 시간의 시작점이 만나는 순간입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시간 속에 있습니다. 사람은 시간적인 존재입니다.
또 태초는 공간의 시작을 말합니다. 시간과 함께 공간이 시작됐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천은 공간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은 공간 안에 있습니다. 공간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공간이 없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상상이 안 되시죠? 1915년 11월에 아인슈타인은 4차원의 공간에서 중력에 의해 공간이 어떻게 휘는지 증명했습니다. 그것을 장방정식이라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이것으로 시간과 공간과 물질을 통합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없는 세상을 물리학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여러분! 공간이 없는 세상이 존재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시간과 함께 공간을 만드셨습니다. 태초는 시간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공간의 시작입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공간 속에 있습니다. 인간은 공간적인 존재입니다.
사람은 시간적인 존재입니다. 시간의 멈춤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시간의 멈춤입니다. 그래서 시간은 사람에게 생명입니다. 시간은 사람에게 귀한 것입니다. 헬라어에서 시간을 가리키는 말이 둘입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시간입니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이것을 크로노스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간입니다. 이것을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카이로스는 ‘시점, 시기, 시간, 알맞은 때, 기회’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엡5:16)고 했습니다. 세월이라는 말이 카이로스입니다. 하나님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아끼라는 말이 헬라어로 엑사고라조입니다. 엑사고라조는 ‘구속하다, 구원하다, 구출하다, 건져 올리다'는 뜻입니다. 세월을 아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건져 올리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둠벙에서 대나무 낚시를 했습니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있노라면 어느 순간에 찌가 탁 탁 탁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붕어가 입질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때는 아닙니다. 그때 저는 낚싯대를 꽉 움켜잡습니다. 낚아챌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찌가 조금씩 움직이다가 갑자기 물속으로 쑥 빨려 들어갑니다. 바로 그 찬스에 저는 낚싯대를 낚아채 듯 걷어 올립니다. 그러면 붕어가 딸려 올라옵니다. 카이로스는 강태공이 낚싯대를 낚아채 듯 하나님의 기회를 낚아채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회를 어떻게 건져 올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기도입니다.
B.C. 1,500년경 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나일강에 던졌습니다. 바로왕의 명령입니다. 하지만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던지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엄마 요게벳은 모세를 위해 갈대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물에 잠기지 않도록 갈대상자 안과 밖에 역청과 나무진을 칠했습니다. 요게벳은 모세를 거기에 눕혔습니다. 그리고 나일강에 띄었습니다. 아무렇게나, 아무 때가, 아무 곳에나 띄운 것이 아닙니다. 바로의 공주가 목욕하러 오는 장소에, 목욕하러 오는 시간에, 갈대 사이에 띄웠습니다. 다른 엄마들처럼 아들을 물에 흘려보낸 것이 아닙니다.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요게벳은 모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공주는 갈대상자를 물에서 건져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을 모세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물에서 건져냈다는 뜻입니다. 모세의 이름은 카이로스입니다. 모세의 뜻은 의미입니다. 그러면 공주가 모세를 건져냈을까요? 예, 표면적으로 볼 때는 공주가 모세를 건져 올렸습니다. 하지만 모세를 건져 올린 것은 모세의 엄마입니다. 모세의 엄마 요게벳은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모든 아이가 물에 떨어내려갈 때 모세만은 떠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됐습니다. 카이로스가 된 것입니다. 역사의 의미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 모세의 엄마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시간적인 존재입니다. 시간을 건져 올리세요. 시간을 떠내려 보내지 마세요.
또 사람은 공간적인 존재입니다. 공간이 없어진다는 것은 사람에게 죽음입니다. 죽음은 공간의 무너짐입니다. 죽는 순간 사람은 공간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 이 시간, 이 공간을 소중하게 여깁시다. 이 공간이 없어질 때가 옵니다. 이 공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공간 안에 함께 있는 사람, 함께 하는 일을 소중하게 여깁시다. 이 시간을 소중하게 여깁시다.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이라는 단편 소설을 존 무스가 개작한 이야기입니다.
니콜라이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니콜라이에게는 꼭 알고 싶은 세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니콜라이는 이 답을 알 수만 있다면 올바르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니콜라이는 답을 찾기 위해 마을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알려진 거북이 레오 할아버지에게 갑니다. 니콜라이가 레오를 찾아갔을 때 레오는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니콜라이는 할아버지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미소 지을 뿐 밭을 가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늙은 레오의 모습을 지켜보던 니콜라이는 할아버지를 도와 밭을 갈고 고랑을 만들었습니다.
밭일이 끝나갈 즈음 소나기와 함께 폭풍이 밀려왔습니다. 니콜라이와 레오가 오두막으로 뛰어가는데 어디선가 살려달라는 외침이 들렸습니다. 쓰러진 나무에 깔려 다리를 다친 어미 판다였습니다. 니콜라이는 어미 판다를 구해 다리를 치료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빗속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기 판다까지 어미에게 데려다주었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니콜라이는 다시 거북이 레오에게 묻습니다.
“할아버지, 어제 제가 드린 질문에 답을 아직 주지 않으셨어요.”
“너는 이미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알고 있잖니.”
레오는 대답했습니다. 니콜라이는 어제 자신을 도와 밭을 갈았고, 그곳에서 밭을 갈지 않았다면 어미 판다의 도와달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래서 니콜라이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밭을 갈던 그 순간이었으며, 니콜라이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거북이 레오였고, 가장 중요한 일은 레오를 도와 밭일을 하는 것이었다고. 그다음 판다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제 가장 중요한 때는 판다를 구하고 치료하는 순간이었으며, 가장 중요한 사람은 도움이 필요했던 어미와 아기 판다였고, 가장 중요한 일은 그 둘을 돕는 일이었다고. 레오는 말합니다.
“기억하렴.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란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너와 함께 있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거야. 이 세 가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란다. 그게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야.”
여러분! 우리는 지금 가장 중요한 때에 가장 중요한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과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예배에 최선을 다합시다. 이 공간에서 함께 예배하는 교우들에게 선한 사람이 됩시다. 이 공간이 무너지고 시간이 멈추면 우리는 다른 세상에 있을 것입니다. 이 순간 사랑합시다. 섬깁시다. 미워하지 맙시다. 싫어하지 맙시다.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합시다.
2. 하나님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의 첫 번째 문장의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입니다. 모세는 성경 기록을 하나님에게서 출발합니다. 모세는 “내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의 기록입니다. 천지의 기원을 하나님에게서 찾은 것입니다. 모든 우주 만물과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은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인간도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어쩌다가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마존 강에서 암수 원숭이 한 쌍이 사람이 되어 툭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과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작품들입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라는 말이 32번 나옵니다. 1장은 31절까지 있습니다. 모세는 매 절마다 하나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조의 출발, 창조의 진행, 창조의 마침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답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시작해서 얻은 답을 사람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철학, 현대 과학, 현대 문명은 출발점을 피조물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얻은 답을 사람에게 적용합니다. 거꾸로 됐습니다. 결과가 무엇입니까? 방황, 혼돈, 무질서입니다. 왜 그럴까요? 답이 잘 못됐기 때문입니다. 출발이 틀리면 답도 틀립니다. 피조물은 출발점이 아닙니다. 시작은 하나님입니다. 모세는 우주의 시작을 하나님에게서 찾았습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길입니다.
1831년 12월 27일 찰스 다윈이 비글호라는 배를 타고 아마존을 향해 영국의 플리머스 항을 출발합니다. 비글호는 브라질, 우루과이, 칠레를 거쳐 1,835년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 섬에 도착합니다. 갈라파고스 섬은 에콰도르에서 1,000km 떨어진 화산 제도입니다. 이 섬에서 다윈은 진화론의 힌트를 얻습니다. 다윗은 이곳에서 핀치새 30여종을 발견합니다. 이 새들은 육지에서 사는 핀치새와 모양이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부리 모양이 미세하게 차이가 있었습니다. 또 섬 위치에 따라서 외형상 차이도 있었습니다. 다윈은 같은 종이라 할지라도 지형이나 기타 여러 조건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다윈은 1936년에 6년간의 아마존 여행을 마치고 귀국합니다. 그리고 23년 후인 1859년에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를 출판합니다. 다윈의 진화론의 시작은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무인도입니다. 진화론의 기원은 새의 부리입니다. 새에게서 시작한 이론이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이 적용이 됩니다. 물고기 동물 심지어 사람에게까지 적용됩니다. 진화론은 인간의 사상과 철학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나중에는 우주도 진화론에 맞추어집니다. 나중에는 진화론이 하나님에게까지 적용됩니다. 새의 부리가 사람과 철학과 사상 우주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한번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새의 부리에서 사람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게 과학인가요? 소설이지!
여러분! 환경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그 모양이 다 다르지 않나요? 저와 여러분이 천안에 산다고 다 똑같이 생긴 것 아니잖아요. 봉서산에 사는 참새가 다 똑같은 것 아니잖아요. 한 곳에 살아도 생김새가 다 다르잖아요. 식물도, 동물도, 사람도 원래 다 달라요. 그런데 새의 부리에서 시작된 이론을 이 세상의 모든 동물에 적용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어떻게 새의 부리를 사람에게까지 적용하나요? 너무나 잘 못된 출발이 아닙니까? 현대 과학은 출발이 잘못 됐습니다.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2008년 3월 23일 오전 11시경 젊은 남자 한 사람이 어느 쇼핑센터에서 칼로 8명을 차례로 찔렀습니다. 남자는 근처에 있던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이 남자는 21일부터 72세 노인 강도 살인 용의로 전국에 지명 수배되고 있었던 카네카와(24살)라는 젊은이였습니다. 카네카와는 게임을 좋아했습니다. 게임 대회에서 준우승한 경험도 있습니다. 법정 심문에서 판사가 카네카와에게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카네카와는 이 질문에 ‘모기가 물면 모기를 죽이는 것이 이상합니까? 모기를 죽이는 것과 사람을 죽이는 것이 무엇이 다릅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기가 막힌 대답입니까? 하지만 오늘 교육의 결과가 아닐까요? 과학 시간에게 진화론을 배웁니다. 단백질 덩어리가 사람이 됐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화된 원숭이라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동물이 사람이 됐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진화론은 모기와 사람이 같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 사회 윤리 시간에는 인간 존엄을 가르칩니다. 현대 교육은 모순에 빠져 있는 것 아닙니까? 세상에서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출발이 잘 못됐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문제를 자연과 인간에게서 찾으면 안 됩니다. 물론 참고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답이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문제의 답을 하나님에게서 찾으세요. 직장 문제의 해결을 하나님에서 출발하세요. 관계 문제의 열쇠를 하나님의 눈으로 보세요. 물질 문제를 하나님께 물으세요. 건강 문제의 답을 하나님께 구하세요. 우리는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하나님에게서 출발해야 합니다. 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왜요? 인류와 우주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하나님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3. 창조하시니라
창조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빠라입니다. 빠라는 ‘새기다’, ‘조각하다’, ‘창조하다’, ‘만들다’, ‘생산하다’, ‘태어나다’는 뜻입니다. 다양한 뜻을 가진 동사입니다. 그런데 주어가 하나님일 때는 ‘창조하다’는 뜻으로만 쓰입니다. 구약 성경에 빠라라는 말이 44번 나옵니다. 그런데 모두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빠라의 주어로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쓰이지 않습니다. 빠라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나타내는 히브리어입니다.
그러면 창조(빠라)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변형하는 것은 개조, 발견, 찍어냄, 만들기입니다. 이것은 창조(빠라)가 아닙니다. 빠라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무에서부터 유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고대 이집트, 바벨론, 그리스, 인도 등 고대 문명이 발생한 곳에 수많은 신화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신화는 만들기, 변형, 개조입니다. 진정한 창조설화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창조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너머서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면 결코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창조입니다. 사람들이 겨우 생각해 낸 것이 윤회설입니다. 윤회설은 돌고 도는 것입니다. 윤회설은 물질의 근원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창세기의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것도 무로부터의 창조라고 말입니다.
기독교는 창조신앙입니다. 만들기 신앙이 아닙니다. 개조신앙이 아닙니다. 회전신앙도 아닙니다. 변형 신앙도 아닙니다. 창조신앙입니다. 성경의 시작이 창조론입니다. 창세기가 성경 첫 번째 책입니다. 첫째라는 것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두머리라는 것입니다. 으뜸이라는 것입니다. 왜 창조가 중요할까요? 왜 창조를 성경 맨 앞에 두었을까요? 첫째, 크리스천이 믿는 하나님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음”을 “있음”이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없어도 염려하지 마세요. 있다고 자랑하지 마세요. 못한다고 기죽지 마세요. 잘한다고 잘난 체 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하나님 앞에 겸손하세요.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있는 것을 없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왜 창조가 성경 맨 앞에 있을까요? 둘째, 창조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창조라는 단어가 세 번째 등장합니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에는 창조라는 말이 두 번째 등장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창세기 1장 1절이 ‘태초에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 기자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창조론 위에서 기록된 책입니다. 성경 전체 신앙은 창조 신앙의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성경은 창조 신앙입니다. 성경은 창조 신앙에서 출발합니다.
왜 창조가 성경 맨 앞에 있을까요? 셋째, 창조는 복음의 기초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했습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음받았습니다. 창조의 주체자는 예수님입니다. 창조를 믿지 못하면 예수님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창조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창조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창조 신앙은 복음의 뿌리인 것입니다. 창조 신앙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창세기는 모세가 기록했습니다. 창세기를 최초로 읽은 사람들은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40년 동안 메마른 광야에서 생활했습니다. 광야는 죽음의 땅입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40년 동안 단 한 번도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을 할 곳도 없었습니다.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다. 사냥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물을 파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굶어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40년 동안 먹이시고 마시게 하시고 입히시고 재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 수 없는 곳에서 40년 동안 살게 하셨습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이 아닙니다. 40년을 살게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은 메마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이 창조주이심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 생활은 우리 인생길에 비유됩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길이 광야보다 낫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입히시고 먹이신 것처럼 우리를 입히시고 먹이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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