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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성경에서 아웃사이더라고 불리는 가장 최적의 인물이 누구일까요? 프랭크 안토니 스피나는 「아웃사이더의 신앙」이라는 책에서 에서를 꼽습니다. 에서는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인물 중에 하나입니다. 그는 한 입 식사를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판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에서를 경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수 천 년 동안 교회와 주일학교 교육에서 부정적인 역할 모델의 본보기가 되어 왔습니다. 에서 보다 더 “아웃사이더”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성경 인물이 있을까요?
그러면 에서는 처음부터 아웃사이더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에서는 인사이더이었습니다. 그것도 최고의 인사이더 자리에 있던 사람입니다. 그는 가장 뛰어난 인사이더로 생애를 시작했습니다. 경주에 비유하자면, 그는 트랙의 가장 안쪽 자리(즉 가장 유리한 자리)에서 출발한 사람입니다. 에서는 다른 말들이 경주를 시작하기도 전에 먼저 달리기를 시작하도록 허락받은 특별한 말과 같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손자입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아들입니다.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애당초 이스라엘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에서는 이스라엘을 설립한 선조들과 가장 직접적인 혈연관계에 있게 되는 엄청난 행운을 얻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에서가 이삭과 리브가의 장남이었다는 것입니다. 장자 상속법에 의하면 에서는 그의 가족의 부와 사회적 지위뿐만 아니라 미래의 영적인 권리까지도 상속할 자격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에서를 먼저 나온 자라고 말합니다. 동생 야곱은 에서의 발꿈치를 잡은 자라고 말합니다. 에서는 인사이더이었습니다. 동생 야곱은 아웃사이더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조건을 따져 보면 에서의 미래는 더없이 밝았습니다.
그런데 역전됐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세 개의 가장 일반적인 이름을 꼽게 되면 항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입니다. 원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에서가 되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으레 “야곱과 에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어쩌다가 “에서와 야곱 이야기”라고 말을 하면 영 불편한 순서가 되었습니다. 왜 역전됐을까요? 그 이유를 창세기는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창25:34)고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아웃사이더들의 역전 스토리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아웃사이더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전됐습니다. 룻은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아웃사이더 인생입니다. 하지만 역전됐습니다. 다윗은 집안에서 아웃사이더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전됐습니다. 다윗은 나라에서 아웃사이더였습니다. 산지에서 도망자로 산적처럼 살았습니다. 하지만 또 역전됐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은 아웃사이더의 하나님이신가?’라는 생각이들 정도로 아웃사이더의 역전 스토리가 많습니다. 본문에도 한 아웃사이더의 인생 역전 드라마가 나옵니다. 그는 은혜로 하나님의 인사이더가 됐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세상에서 말하는 인사이더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사이더가 되는 은혜가 있길 축복합니다.
1. 한 아웃사이더의 인생 역전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은 유대 사회에서 아주 철저한 아웃사이더 인생이었습니다. 그냥 아웃사이더가 아닙니다. 밑바닥 인생 중에서도 밑바닥 인생이었습니다. 40년 동안 앉은뱅이였습니다. 단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적어도 30년 이상 거지로 살았을 것입니다. 구걸이 전부인 인생, 이 보다 더 가여운 인생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사람의 인생을 아웃아웃사이더 인생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런데 앉은뱅이였던 사람은 한 순간에 세 가지 면에서 인생역전을 경험합니다.
첫째, 끌려 다니며 살던 인생이 다른 사람을 끌어 주는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앉은뱅이는 날마다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자기 발로 왔습니까? 아닙니다. 항상 다른 사람들의 등에 업혀 왔습니다. 오고 싶어서 왔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싫으나 좋으나 항상 와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끌어다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루도 오고 싶은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구걸하는 일이 좋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끌어다 놓으면 하루 종일 앉아 있어야 합니다. 집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합니다. 데리러 올 때까지 앉아 있어야 합니다. 먹는 것도 마음대로 먹지 못합니다. 밥을 갖다 주어야 먹습니다. 물을 갖다 주어야 마십니다. 화장실도 누군가 데려다주지 않으면 가지 못하지 않았을까요? 앉은뱅이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항상 누군가에 의해 끌려 다니며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이쪽으로 끌고 가면 이쪽에 있어야 합니다. 저쪽으로 끌고 가면 저쪽에 있어야 합니다. 어디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집에 있고 싶다고 집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끌어다 놓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앉은뱅이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앉은뱅이의 인생이 갑자기 바뀝니다. 예수 이름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때부터 앉은뱅이의 인생은 완전히 바뀝니다.
<8절>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주저앉아 있던 인생이 서 있는 인생이 됐습니다. 끌려 다니던 인생이 걷는 인생, 뛰는 인생이 됐습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인생이 됩니다.
<11절>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앉은뱅이였던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들었습니다. 그들을 못 가게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가리키며 “이 사람들이 나를 고쳤다.”고 외쳤을 것입니다. 그러자 모든 유대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 종이 있었습니다. 수업 시간이 되면 선생님 한 분이 나오셔서 종을 치십니다. 그러면 학생들이 교실로 모여듭니다. 선생님도 오십니다. 종소리와 함께 모든 수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종은 학교 중앙에 있습니다. 교무실 바로 앞에 있습니다. 앉은뱅이였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종을 치는 사람이 됐습니다. 이 사람은 신나게 종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앉은뱅이는 앵벌이들에게 이리 저리 끌려 다녔습니다. 앵벌이들에게 이용당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이용당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로 끌어당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의로운 길로 이끄는 사람이 됐습니다.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앉은뱅이였던 사람처럼 하나님의 학교인 교회에 종을 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죽어 가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의의 길, 생명의 길로 끌어당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끌려 다니면 안 됩니다. 그러면 세상에 이용당합니다. 마귀에게 이용당합니다. 여러분! 마귀에게 이용당하지 마세요. 세상에 이용당하지 마세요.
마귀에게 끌려 다니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이끌려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이끌려 사는 방법은 말씀에 따라는 사는 것입니다.
<삼상3:21>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
하나님은 말씀에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께 이끌려 사는 것입니다. 말씀에 이끌려 삽시다. 하나님께 이끌려 삽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끌려 살 때 세상이 우리를 따라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바로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돈에 끌려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돈을 따라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명예에 끌려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명예가 따라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권력에 끌려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권력이 따라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끌려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따라다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따라 사세요. 그러면 세상이 여러분을 따라갈 것입니다.
둘째, 앉은뱅이의 인생은 구걸하는 인생에서 찬양하는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앉은뱅이는 매일 같이 성전으로 출근했습니다. 성전 봉사자인가요? 아닙니다. 성직자인가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예배자인가요? 그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은 성직자도 기도자도 아닙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항상 성전에 있습니까? 그것은 구걸하기 위해서입니다. 앉은뱅이는 기도가 아니라 구걸하기 위해 성전에 매일 출근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들어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항상 성전 문에만 앉아 있었습니다. 최소한 수년에서 최대한 30년 이상을 날마다 성전으로 나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번도 성전에 들어간 적이 없습니다. 예배자들, 기도자들, 순례자들을 구경하는 구경꾼이었습니다. 늘 성전의 마당만 밟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것도 전심으로 찬양했습니다. 진정한 예배자가 된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자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성전에 나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진정한 예배자가 되십시오. 구경꾼이 되지 마십시오. 성전 마당만 밟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이사야 선지자는 마음이 없이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성전 마당만 밟는 자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내 앞에 보이러 오니”라고 했습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얼굴을 보이는 것입니다. 또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전의 마당만 밟다가 가는 것입니다. 밟는다(레모스)는 말이 히브리어로 짓밟다 또는 밟아 뭉개다는 뜻입니다. 형식적인 예배는 예배를 짓밟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전 마당만 밟는 사람이 되지 마세요. 구경꾼이 되지 마세요. 마음이 없는 예배를 드리지 마세요. 마음을 다해 예배하세요.
미국 어떤 한인교회 교인들이 허구한 날 주일예배를 빼먹고 골프장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교인들을 붙들고 제발 주일날은 골프장에 가지 말고 예배를 드리라고 신신 당부를 했습니다. 교인들은 한 동안 예배를 잘 드렸습니다. 그런데 몇 주 후에 집사님 한 분이 다시 주일날 골프장에 나갔습니다. 적어도 이 사람만큼은 안 그럴 것이라고 믿었던 집사이기에 목사님은 너무도 속이 상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집사님이 대답했습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 몸은 교회에 와 있는데 마음은 골프장에 가 있고, 골프장에 가면 몸은 골프장에 있는데 마음은 교회에 가 있으니 몸과 마음 중 어느 쪽이 교회에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저는 몸보다는 마음이 교회에 가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겨서 그만…”
말이 안 되는 말입니다. 여러분! 예배드릴 때는 몸과 마음이 하나이어야 합니다. 몸이 없는 마음은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이 없는 몸도 소용이 없습니다. 몸과 마음은 하나이어야 합니다. 예배드릴 때는 몸과 마음이 하나이어야 합니다. 앉은뱅이였던 사람은 성전 입구 앉아서 구걸할 때 성전에서 찬양 소리가 나면 그 마음이 성전을 향해 있지 않았을까요? 그 찬양 속에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요? 성전에서 기도 소리가 나면 그 기도 속에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요? 성전에 너무 들어가고 싶지 않았을까요? ‘아 나도 저 찬양하는 무리 속에 들어가고 싶다.’ 그래서 고침받자마자 성전으로 뛰어 들어가며 찬미를 한 것이 아닐까요? 만약 그랬다면 이제 앉은뱅이였던 사람은 몸과 마음이 하나 된 진정한 예배자가 된 것입니다. 몸도 성전에 있습니다. 마음도 성전에 있습니다. 앉은뱅이는 예수 이름 때문에 거지에서 참 예배자로 인생 역전을 경험합니다.
셋째, 앉은뱅이의 인생은 아웃사이더 인생에서 인사이더 인생으로 바뀝니다. 앉은뱅이는 날마다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기도 시간이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앉은뱅이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항상 성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반기지 않습니다.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손짓을 해도 못 본 체 합니다. 한 푼 달라고 해도 못들은 체 합니다. 외면! 피함! 등 돌림! 못 본체! 못 들은 체! 따돌림! 이것이 앉은뱅이의 인생입니다. 앉은뱅이는 사람 사회에서 투명인간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사람들로부터 배제되어 있는 비주류 인생이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앉은뱅이 앞을 걸어서 지나갑니다. 오고 가고 또 오고 가고 다시 오고 가고. 하지만 앉은뱅이는 수없이 오고 가는 사람들 속에 합류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얼마나 그들을 따라 걷고 싶었을까요? 얼마나 그들의 대열에 들어가고 싶었을까요? 하지만 들어갈 수도 없고 끼어주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할 수 없는 사람. 비주류 인생, 아웃사이더 인생, 이방인 인생, 이것이 앉은뱅이의 삶입니다. 그런데 앉은뱅이는 한 순간에 인사이더가 됩니다.
솔로몬의 행각에서 베드로의 설교가 시작됩니다. 그때 누가 거기에 있었을까요? 바로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것도 한 중앙에 서 있습니다. 솔로몬의 행각은 예루살렘 성전 뜰 동편에 있는 성전의 부속건물입니다. 기다란 집채 모양의 회랑입니다. 162개의 거대한 기둥들이 네 줄로 세워져 있습니다. 기둥 사이로 세 개의 통로가 있습니다. 성전의 외부 현관입니다. 솔로몬은 성전 바로 옆에 장엄한 현관을 세우고 그곳에 자기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그래서 솔로몬 행각이라고 부릅니다. 헤롯 왕은 그 건축물을 증축했습니다. 자기가 제2의 솔로몬이 되겠다는 야망에서 한 일입니다. 솔로몬의 행각은 명예와 권력, 부의 상징입니다. 유서 깊은 곳입니다. 이곳에서 종교 교사들이 자유롭게 강론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곳에서 설교하셨습니다(요10:23). 유대 랍비들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입니다. 바로 이 곳 중앙에 지금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서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고 있습니다. 베드로 설교의 동기입니다. 앉은뱅이였던 사람은 한 순간에 아웃사이더에서 인사이더가 됐습니다. 세상의 인사이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사이더입니다. 육적인 인사이더가 아닙니다. 영적인 인사이더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인사이더가 되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학교 기업 기관 단체에서 인사이더가 되기 위해 못자고 못 쉬고 못 먹고 뛰고 있습니다. 사고 입고 쓰며 삽니다. 그러다가 인사이더가 되는 순간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 인사이더가 돼서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대단한 일 안해요. 인사이더 별 볼일 없어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에요. 혹시 여러분은 인사이더이십니까? 겸손하세요. 교만하지 마세요. 아웃사이더의 마음을 알아주세요.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세요.
혹시 여러분은 아웃사이더이십니까? 그래서 인사이더가 되려고 애쓰십니까? 인사이더를 부러워하지 마세요. 세상 인사이더 별 것 아닙니다. 하나님은 백 사람의 인사이더보다 한 사람의 아웃사이더의 마음을 더 알아주십니다. 세상의 인사이더보다 하나님의 인사이더가 되려고 애쓰세요. 그러면 세상에서도 뛰어난 인사이더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인사이더 천 명 보다 한 사람의 하나님의 인사이더를 필요로 하십니다. 하나님의 인사이더가 되려고 애 좀 써보세요. 앉은뱅이는 일생을 아웃사이더로 살았지만 이제 하나님의 인사이더가 됐습니다. 사도행전 역사에 첫 번째로 기록된 하나님의 인사이더입니다.
2.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3장 이 위치에 앉은뱅이 치료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가 정말 중요한 자리거든요. 보세요. 1장은 예수님의 승천입니다. 2장은 오순절 성령강림과 교회의 탄생입니다. 구약성경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3장입니다. 3장은 정말 중요한 위치입니다. 이런 중요한 위치에 누가는 앉은뱅이의 인생 역전 드라마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앉은뱅이의 인생이 하나님의 역사의 진행 수레바퀴와 맞물려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인생이 교회 탄생의 역사와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의 서곡과 이 사람의 인생 역전 스토리가 하나의 드라마가 되어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영광스럽지 않습니까?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한 개인의 인생 드라마와 하나님의 역사 드라마가 맞물려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말씀을 생각하는 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인생이 하나님의 역사의 수레바퀴에 맞물려 있다면! 하나님의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내가 거기에 있다면!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정말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의 역사의 진행 수레바퀴와 맞물려 있기를 바랍니다. 그 영광의 자리에 있도록 기도하세요. 그 자리로 들어가세요. 얼마나 흥분되는 일입니까?
예수님은 어디로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갈릴리로 오셨습니다. 갈릴리가 어떤 곳입니까? 변방입니다. 변방 중에도 변방입니다. 갈릴리는 유대 사회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는 편견이 생길 정도의 아주 변방입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갈릴리를 이방으로 여겼습니다.
<마4: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갈릴리는 이스라엘 땅입니다. 그런데 이방 취급을 받았습니다. 갈릴리는 변방 중에도 변방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변방의 갈릴리에서 인류 구속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왜요? 변방에서 신음하는 아웃사이더들의 인생을 돌아보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도들은 모두 갈릴리 출신입니다. 갈릴리는 아웃사이더입니다. 제자들도 아웃사이더입니다. 앉은뱅이도 아웃사이더입니다. 그런데 앉은뱅이의 치료와 동시에 변방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예루살렘에서 중심의 종교가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승천하셨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면서 교회는 인류 역사의 센터로 들어왔습니다. 앉은뱅이의 일어남은 교회가 인류의 센터로 들어왔음을 알리는 종소리입니다. 초대교회의 부흥과 앉은뱅이의 치료가 맞물려 있습니다. 앉은뱅이는 하나님의 인사이더가 됐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인사이더를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것 허세입니다. 거품입니다. 안개입니다. 인사(이더)! 인사(이더)! 하지마세요.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거 별 것 아닙니다. 진짜는 하나님의 인사이더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사9: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방의 갈릴리를 영광스럽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아웃사이더 인생을 돌아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방 갈릴리가 영광스럽게 됐습니까? 바로 예수입니다. 앉은뱅이가 어떻게 아웃사이더에서 인사이더로 일어났습니까? 예수 이름입니다. 어떻게 교회가 인류 역사의 센터로 들어왔습니까? 그것도 예수 이름 때문입니다. 왜 교회가 인류 역사의 센터에 있습니까? 예수 이름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이름을 소유하세요. 이 이름이 나를 일으킬 것입니다. 이 이름이 내 가정을 일으키고 우리의 사회를 일으킬 것입니다. 이 이름을 가지세요. 이 이름이 진정한 인사이더입니다.
앉은뱅이는 40살 정도 되었습니다(4;22).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7-8살부터 구걸을 했다고 가정한다면 30년 이상을 거지로 살았습니다. 30년이 아니라 해도 적어도 몇 년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지로 구걸했을 것입니다. 3장 이하에 보면 유대 사회에서 이 사람이 앉은뱅이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앉은뱅이는 틀림없이 예수님을 알았을 것입니다. 유대 사회에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앉은뱅이는 예수님을 여러 차례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료역사를 들었을 것입니다. 고난당하심을 보았을 것입니다. 죽으심을 들었을 것입니다. 부활과 승천을 들었을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때에 있었던 예루살렘 소동도 느꼈을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그 성전 미문에 앉아서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을 그대로 보고 듣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앉은뱅이를 아셨을 것입니다. 유대 사회에 유명한 앉은뱅이입니다. 성전에만 올라가면 볼 수 있는 앉은뱅이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아주 여러 번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앉은뱅이를 못 보셨을까요? 틀림없이 보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 앉은뱅이를 고쳐주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수없이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 사람은 고쳐주지 않으셨을까요? 저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교회 시작과 함께 이 사람의 치료 사건을 계획하지 않으셨을까요? 예수님은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역사의 실행자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주실 은총을 따로 빼놓고 그 때를 기다리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교회 시대가 시작되는 순간에 이 사람의 인생을 사용하신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 기다리세요. 현실을 잘 견디세요. 힘드실 때 많죠? 현실에 지지 마세요. 세상에 지지 마세요. 잘 이기세요. 앉은뱅이 인생을 사용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인사이더가 될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칭기스칸 같은 영웅이 아닙니다. 세계를 통일한 알렉산더 같은 위대한 왕도 아닙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같은 위대한 정치인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징기스칸보다 알렉산더보다 더 존귀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이었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 사람과 같은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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