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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1993년에 삼성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론을 선포하며 <뒷다리론>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뛸 사람은 뛰어라. 걸을 사람은 걸어라. 뛸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 걸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그대로 앉아서 쉬어도 좋다. 다만, 뛰려는 사람, 걸으려는 사람 뒷다리만 잡아당기지 말라는 말이다. 그래야 내가 가만히 있어도 뛰는 사람 덕에, 걷는 사람 덕에 발전해서 먹고 산다.”
이건희 회장은 이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화를 하나 소개할까요. 늑대가 나타났다고 늘 거짓말을 했던 양치기 소년 이야기를 다들 아시지요. 그런데 이 소년이 나중에 저승에 갔습니다. 염라대왕이 왜 거짓말을 밥 먹듯 했느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소년은 ‘너무 심심해서 죽겠더라고요. 이해해 주세요.’라며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게다가 ‘내 친구 아무개는 나보다 훨씬 더 거짓말을 많이 했는데도 사람들이 모르고 있어요.’라고 남의 뒷다리 잡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양치기 소년은 친구의 뒷다리를 잡았습니다. 혼자 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친구와 함께 죽겠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인재가 되려는 사람이 금기시해야 할 네 가지가 다 들어 있습니다. 바로 ‘거짓말, 변명,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억지, 뒷다리 잡기’입니다. 이건희 회장이 가장 싫어하는 타입은 ‘부정적 사고를 하고 배신한 적이 있거나 또는 남과 같이 죽자는 식의 물귀신이나 뒷다리 잡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나 혼자 못 죽어.”, “죽으려면 다 같이 죽어야지.”, “너 죽고 나 죽자.”,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뒷다리 잡기는 우리 사회에 없어져야 할 악습 중에 악습입니다. 이 뒷다리 잡기가 국가, 사회, 기업을 좀 먹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뒷다리 잡기, 물귀신은 없어져야 합니다.
성경에도 뒷다리를 잡는 사람이 나옵니다. 모세의 누나 미리암과 모세의 형 아론입니다. 모세가 이방인인 구스 여인과 재혼을 합니다. 이것은 영적 의미가 있는 결혼입니다. 그런데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민12:2) 동생이 너무 잘 나갔습니다. 동생을 끌어내리고 자기들이 위에 서고 싶었습니다. 누나와 형이 동생의 뒷다리를 잡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왜 40년을 살았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과 불평으로 여호수아와 갈렙의 뒷다리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뒷다리를 잡은 사람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직장, 사회, 조직에서 뒷다리 잡지 마세요. 뒷다리를 잡으면 다 죽습니다. 교회에서 뒷다리 잡지마세요. 마귀가 너무 좋아해요. 조직이 무너지잖아요.
시편 133:1에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의 연합, 영적 동거가 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등대교회에 아름다운 섬김과 연합이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 물귀신 신앙, 뒷다리 잡기 신앙은 없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주 아름다운 믿음의 연합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연합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처음부터 아름다운 팀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두 사람은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어떤 성향의 사람들이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베드로와 요한, 동료이자 라이벌
먼저 베드로와 요한은 가까운 동료이면서 경쟁관계이었습니다. 열두 제자는 세 그룹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그룹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입니다. 두 번째 그룹은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입니다. 세 번째 그룹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안 사람 시몬, 가룟 유다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그룹의 베드로와 안드레가 형제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이 형제입니다. 마태복음 10장과 누가복음 6장에 열 두 사도의 이름이 나옵니다. 두 복음서 기자는 네 사람을 첫째 그룹에 함께 묶어 놓았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네 사람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던 동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도 같은 그룹에 있었습니다.
열 두 제자들 사이에는 자리에 대한 다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의 일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와 청원을 하나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면 우리 아들 둘을 하나는 예수님의 우편에 하나는 예수님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치맛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나머지 제자들이 화가 났습니다. 자리를 놓고 서로 경쟁을 한 것입니다. 마태는 이 기사를 기록하면서 제자들이 분히 여겼다고 했습니다(마20:24). 분히 여겼다(ἀγανακτέω)는 말이 ‘못마땅했다’, ‘흥분했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22장 24절에는 열 두 제자들이 누가 큰지 서로 다투었다고 했습니다. 제자들끼리 자리다툼이 있었습니다. 누가 크냐? 작으냐? 다툼이 있었습니다. 예수공동체는 섬김의 공동체였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서번트(종) 리더십이었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전혀 다른 성격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공동체 안에서 세상적인 경쟁을 한 것입니다. 왜 이런 경쟁을 했을까요? 그것은 예수공동체의 본질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기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가 어떤 곳인지 잊으면 안 됩니다.
열 두 제자 중에 첫째는 항상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공동체 안에서 문을 여는 역할을 했습니다. 뭐든지 베드로가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3년 공생애 사역 기간에 베드로의 집에서 많이 묵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자신의 집을 제공해드린 것입니다. 베드로의 열정과 헌신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위협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요한입니다. 요한은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의 품에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최후까지 예수님 곁을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도 열심히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많이 아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 사람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요한에 대한 질투심에서 나온 물음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공동체 안에서 라이벌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육적인 경쟁 모습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직분이 있습니다. 장로, 안수집사, 권사, 서리집사. 성가대장, 지역장, 부장 등등. 사람들은 이 직분들을 세속적인 욕망을 가지고 취득하려고 합니다. 마치 감투하나 쓰는 것처럼 여깁니다. 봉사하지 않습니다. 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뭐라도 하나 따고 싶어 합니다. 안 되면 시험에 듭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직분은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서열이 아닙니다. 등급이 아닙니다. 종의 직분입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높다’ ‘낮다’라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바울은 신앙생활을 운동경기에 비유했습니다. 우리는 경주를 하되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육적인 경주, 욕망의 경주, 욕심의 경주는 안 됩니다. 바울은 또 신앙생활을 싸움에 비유했습니다. 우리는 싸움을 싸우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육적인 싸움, 질투의 싸움, 이기심의 싸움은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서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2. 베드로와 요한,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
베드로와 요한은 동료이었지만 전혀 다른 성향에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다음 세 가지 면에서 서로 달랐습니다. 첫째, 성향이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요한은 이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현실적인 사람은 계산이 빠릅니다. 눈앞의 이익에 민감합니다. 반면에 이상적인 사람은 눈앞의 이익보다 이상을 생각합니다. 현실적인 사람은 이상적인 사람이 외계인 같이 느껴집니다. 반면에 이상적인 사람은 현실적인 사람이 속물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사람과 이상적인 사람은 대화가 통하질 않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말이 서로 말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또 베드로는 행동가였습니다. 어떤 일이든 즉시로 행동에 옮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자 바로 물로 뛰어듭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물으시면 가장 먼저 대답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무슨 일이 있으면 반사적으로 말과 행동이 툭툭 튀어나오는 행동가이었습니다. 반면에 요한은 철학적이며 시적인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은 신약성경 27권 중에 유일하게 시적인 책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시적인 책입니다. 그래서 상징적인 언어가 아주 많이 등장합니다. 요한은 시인이었고 철학가이었습니다. 행동가와 시인은 함께 어울리기 어려운 조합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다혈질의 사람이었습니다. 흥분을 잘했습니다. 또 쉽게 동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시자 즉시로 예수님을 붙들고 안 된다고 만류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아주 인간적인 사람입니다. 반면에 요한은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주여!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 인간들을 태워버릴까요?”라고 말합니다. 속에서 끓어 올라오는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날카로운 성격의 사람입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다혈질이지만 인간적인 사람입니다. 반면에 요한은 괴짜에 예민한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질 자체가 다른 사람입니다. 바뀔 수도 바뀌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함께 어울리기 정말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 베드로와 요한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났습니다. 제자들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반면에 요한은 가장 어렸습니다. 두 사람의 나이 차는 꽤 났을 것입니다. 한 사람은 꼰대였고 한 사람은 풋내기였습니다. 세대 차이가 있었습니다. 공감대를 찾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연령적으로 어울리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셋째, 신앙적 성향이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호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 칼을 갖고 있었을까요?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것입니다. 무슨 일이 터지면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잡으러온 로마 병정의 귀를 잘라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말리시지 않았다면 로마 병정들과 싸움이 났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호전적인 기질은 성경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8에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에 영적 전투가 필요함을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전후서는 삶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현실적인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의 성격이 성경에 그대로 반영된 것입니다. 반면에 요한은 사색적입니다. 요한의 사색적 성향이 요한일이삼서에 그대로 나타나있습니다. 두 사람은 신앙적인 성향에서 정 반대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격이 정반대의 사람입니다. 나이 차이가 많습니다. 신앙적인 성향도 전혀 다릅니다. 두 사람은 공감대가 전혀 없습니다. 어울리기 정말 힘든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바뀌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바꾸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요? 교회 안에는 베드로가 필요합니다. 요한도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에는 베드로가 가졌던 영적 전투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 요한과 같은 사색과 묵상도 필요합니다. 교회는 꽃꽂이와 같습니다. 꽃꽂이에는 꽃이 있습니다. 이런 꽃도 있습니다. 저런 꽃도 있습니다. 빨강 꽃, 노랑 꽃, 하얀 꽃이 있습니다. 가지가 있습니다. 잎도 있습니다. 긴 잎, 둥근 잎, 갈라진 잎 여러 가지 잎이 있습니다. 심지어 가시도 있습니다. 교회는 꽃꽂이입니다. 꽃이 꽃잎에게 “너는 왜 그렇게 생겨 먹었니?”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꽃잎이 가시에게 “너는 왜 그 모양이니?”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긴 잎에 짧은 잎에서 “너는 왜 그렇게 짧니?”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교회에는 베드로도 있고 요한도 있습니다. 빌립도 있고 안드레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발도 씻으셨고 가룟 유다의 발도 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찬식을 하시면서 베드로에게 잔을 주셨지만 가룟 유다에게도 잔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나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두를 끝까지 끓어않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요한을 욕하면 안 됩니다. 요한이 베드로를 욕하면 안 됩니다.
얼마 전에 어떤 선교 단체에서 진행하는 훈련 프로그램을 두 달 정도 스텝으로 도와준 적이 있습니다. 매주 다른 선교사님이 오셔서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가 끝나면 합심 기도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오시는 선교사님들이 정말 뜨겁게 기도하세요. 그 날 오신 분이 아주 뜨겁게 기도하실 때이었습니다. 스텝 중에 한 분이 “하나님이 귀가 잡수셨나 왜 저리 소리를 질러!”라고 해요. 그러면서 저를 쳐다보면서 “목사님도 그래요?”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저는 더 해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부르짖는 기도가 있습니다. 조용한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때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조용한 기도도 말씀하지만 부르짖는 기도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 성향이 나와 다르다고 비방하지 마세요. 교회는 모두가 필요합니다. 함께 조화를 이루는 곳이 교회입니다.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다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이 달랐지만 조화를 이룬 것처럼 우리는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교회는 조화를 이루는 곳입니다.
3. 베드로와 요한, 환상적인 팀이 되다
베드로와 요한은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환상적인 팀이 됩니다. 부활의 새벽입니다.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함께 달려갑니다. 요한이 먼저 예수님의 무덤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들어가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올 때까지 무덤 입구에서 기다립니다. 베드로가 도착하자 무덤 안으로 함께 들어갑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무서워 숨어 지낼 때의 일입니다.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 물고기 잡으러 두 사람이 함께 바다로 갑니다. 사도행전 4장에 두 사람이 함께 복음을 전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유대인의 미움을 받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감옥에 갑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재판을 받습니다. 복음동지, 감옥동지, 재판동지가 됩니다. 결코 섞일 수 없는 사람이 늘 붙어 다니는 사람이 됐습니다.
오늘 본문에 두 사람이 함께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보는 순간 앉은뱅이에게로 갑니다. 베드로는 요한에게 함께 가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베드로에게 “어디 가냐?”고 묻지 않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베드로를 따라갑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 앞에 섭니다. 요한도 앉은뱅이 앞에 섭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우리를 보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행동에 요한은 “뭐 하는 거냐?”고 묻지 않습니다. 마치 두 사람이 한 사람처럼 움직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이끌림입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함께 움직인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실 때가 있습니다. 두 사람은 성령의 역사하시는 순간에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에베소서 5장 16절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했습니다. ‘세월’이라는 말을 NIV 성경은 ‘기회’(opportunity)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기회라는 말이 아주 의미가 있습니다. 누가 주는 기회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잡는 것이 시간을 아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어떻게 잡을 수 있습니까? 기도해야 잡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나그네라고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나가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기도로 그 기회를 잡읍시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순간에 그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을 한두 번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수 없이 지나다녔습니다. 수십 년을 지나다녔습니다. 앉은뱅이를 처음 본 것이 아닙니다. 수 없이 보았습니다. 수십 년을 보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 시간에 기도를 상징하는 성전 문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기회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기도는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를 알게 합니다. 기도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순간을 포착하게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함께 기도하다가 함께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함께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 함께 하다가 성경에 영원히 기록될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우리교회는 사도행전적인 교회가 될 수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사도행전적인 교회를 꿈꾸는 것은 주제넘은 생각일까요? 목사와 성도, 성도와 성도가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환상적인 팀을 이루는 등대교회가 될 수 없을까요?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팀이 될 때 우리는 세상을 향해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선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여러분! 우리 교회가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팀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을 받읍시다. 예수 이름으로 함께 일어납시다. 예수 이름으로 함께 걸읍시다.
촉망받는 발레리나 김수미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김수미 씨는 22살에 연습실에서 청소를 하기 위해 창틀에 올라갔다가 빗물에 미끄러져 4층에서 떨어졌습니다. 1층 간판에 허리를 부딪치고, 건물 앞에 세워져 있던 학원 차에 머리를 부딪쳐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녀가 병원에서 깨어나서 들은 소식은 영원히 발레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실망하는 그녀에게 척추가 바스러져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루 사이에 인생이 이렇게도 처참해질 수 있을까? 그녀는 차마 부모님 앞에서 울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발레 연습으로 뭉그러진 발가락을 바라보며 혼자 숨 죽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김수미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손과 눈으로 하는 일뿐이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성경을 보는 일이었는데, 문득 사도 바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처럼 활동적인 사람이 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과연 이렇게 많은 서신을 썼을까?’ 교회를 직접 찾아갔으면 갔지 편지를 쓸 인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옥에 갇힘이 바울에겐 고난이었지만 그것을 통해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그래, 내게도 이유가 있지 않을까? 본래 내 기질로는 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 나에게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때부터 그녀는 다른 사람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배우며 열심히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에 그녀는 어떤 필리핀 선교사님을 따라 필리핀 선교 현장으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놓고 기도하는데, 계속해서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의 재능을 사용하렴. 내가 네게 준 달란트는 발레야.”
그녀는 이 음성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발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제가 어떻게 발레를 할 수 있나요? 저도 하고 싶어요. 저도 무대에 서고 싶다구요. 하지만 지금은 걸을 수도 없는데 어떻게 발레를 해요.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만 되고 말거에요. 걸을 수만 있다면 할게요. 걷게 해주세요.”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에 반항하며 울기를 얼마나 했을까요? 또 다시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이미 걷고 있어.” 이 음성과 함께 이상한 힘이 그녀의 다리를 두 손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데 있어서 걷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의 염려를 뒤로 하고 그녀는 학생들을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8 명의 학생과 함께 연습실도 없는 집의 좁은 마룻바닥에서 발레단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초라한 무대에서 크리스마스 첫 공연을 했습니다. 그 순간 그녀에게 “수미야, 너는 이미 걷고 있어.”라는 음성이 또 다시 들렸습니다. 샬롬발레단 김수미 씨의 이야기입니다. 샬롬발레선교단은 1996년 안산에서 창단됐습니다. 2001년 3월에는 제주지부가 창단됐습니다. 그리고 무용으로 제주복음화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로마 프랑스 등 유럽에서 발레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보면 가능성이 없습니다. 나는 안 됩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이름으로 할 수 있습니다. 예수 이름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걷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영적 앉은뱅이였습니다. 앉은뱅이면서 앉은뱅인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합니다. 성령을 경험합니다. 그때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걸었습니다. 나는 앉은뱅이가 아닐까요? 앉은뱅이인데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한 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 등대교회는 앉은뱅이가 아닐까요? 2019년 예수 이름으로 함께 일어납시다. 그래서 함께 걸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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