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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 가셨습니다. 잔치가 한창입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서 혼인잔치 중에 포도주를 주지 않는 것은 “여러분! 이제 잔치가 끝났습니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십시오.”라는 말과 같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특별한 이유 없이 주인이 잔치에 온 손님을 먼저 돌려보내는 일은 없습니다. 아주 인심 사나운 일입니다. 혼주가 난처해졌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십니다. 하인들이 물을 아귀까지 가득 채웁니다. 예수님께서 떠서 갖다 주라고 하십니다. 그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됐습니다.
항아리는 물이 두 세통 정도 들어가는 크기입니다. 한 통은 약 40리터입니다. 두 세통이라는 것은 두 통은 넘고 세 통은 안 되는 크기입니다. 항아리는 물이 두 통 반 정도 들어가는 크기일 것입니다. 그러면 약 100리터입니다. 여섯 개이니 600리터입니다. 600리터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잔치 중입니다. 하인들이 바쁩니다. 요즘처럼 수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을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와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밤에 결혼식을 합니다. 한 밤 중에 마을 우물에 가서 600리터의 물을 길어 와야 합니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2-3시간은 족히 걸렸을 것입니다. 적어도 2시간 동안 손님들에게 잔치에서 가장 중요한 음식을 주지 않았습니다. 여기저기서 왜 포도주를 안주냐고 아우성이었습니다. 혼주는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항아리 6개가 다 찰 때까지 기다리시는 거예요. 하나가 찰 때마다 떠서 갖다 주라고 하시면 되지 않았을까요? 굳이 항아리가 차지 않아도 급한 대로 물을 떠서 갖다 주라고 하시면 안됐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6개가 완전히 다 찰 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혼주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요.
불교는 비움의 종교입니다. 공과 무를 추구합니다. 공은 ‘부풀어 오른’, ‘비어 있는’, ‘공허한’ 것을 의미합니다. 자체•실체•아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실제로는 없다는 것입니다. 무념, 무상, 무소유, 무아(지경)입니다. 기독교는 채움의 종교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 “내 집을 채우라” 하나님은 계속 해서 채워주십니다. 은혜로 채우십니다. 성령으로 채우십니다. 빈 집을 채우십니다. 빈 땅을 채우십니다. 비어 있는 인생을 채우십니다. 정욕으로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빈 항아리 같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채우심으로 채워지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계속 채우라고 하십니다.
본문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된 사건입니다. 이 사람은 40세 정도 되었습니다. 40년 동안 단 한 번도 걸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이름으로 걷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첫 번째 기적입니다. 사도행전2장은 오순절 성령강림장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성령의 역사하심이 제자들에게 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께서 그냥 역사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거기에는 사도들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어떤 기도가 이런 역사를 일으켰을까요? 오늘 본문의 사도들의 기도의 특징이 세 가지 있습니다.
1. 정시기도
먼저 사도들의 기도는 정시 기도입니다. 이 기적 사건이 “제 구 시 기도 시간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행3: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여기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그것은 기적의 시작이 기도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이 사건은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하심이 기도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와 기적의 연결고리는 기도입니다. 성령의 역사와 우리 삶의 연결고리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정시기도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9시 시간에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기도 시간이었습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라고 했습니다. 9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에 유대인과 우리는 6시간 차이가 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 시간을 정해 놓고 하루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9시에만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다른 기도 시간에도 올라갔습니다. 그날만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매일 올라갔습니다. ‘올라갈 새’라는 말은 매일 올라갔다는 의미입니다. 계속 올라갔다는 뜻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기도하기는 쉽습니다. 저녁이 돼서 집에 돌아와서 기도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런데 한 낮인 12시에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한창 일을 하는 중인 오후 3시에 기도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도 매일 같이 기도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제가 제자들처럼 하루에 세 번씩 한 달 동안 작정을 하고 기도해보았습니다. 새벽기도를 끝나고 집에서 가서 씻고 아침을 먹습니다. 잠깐 일을 보고 나면 8시 30분 정도 됩니다. 9시 전에 교회로 와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12시에 다시 기도합니다. 일을 보다가 시간만 되면 교회로 뛰어 왔습니다. 온통 신경에 9시 12시, 3시입니다. 쉬지도 못합니다. 피곤해서 쉬다가도 시간이 되면 벌떡 일어나서 교회로 달려옵니다. 얼마나 피곤한지 나중에는 입술이 부르텄습니다. 똑같은 기도를 하루에 3번 4번을 했습니다. 기도가 입에 달려 있어요. 사람 이름이 입에 달려 있어요. 제가 기도하기 위해 강단에 올라가는데 제 입에서 “또 기도! 휴”라는 말이 툭 튀어 나오는 거예요. 제가 왜 이렇게 기도했을까요? 제가 너무 연약해서요. 너무 부족해서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갈급해서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어서요. 힘이 들었지만 제게는 너무나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왜 이렇게 기도했을까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자신들의 한없는 부족을 느낍니다. 그래서 기도에 전무했습니다. 부족한 인생을 기도로 채운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기도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공적인 기도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정해진 기도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는 것은 우리의 양심을 일깨웁니다. 정해진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깨웁니다.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시122: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정시 기도의 모범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기도로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합니다. 기도로 사자의 입을 막습니다. 기도로 장래의 일을 기록합니다. 여러분! 정시 기도에 능력이 있습니다. 바람이 불 때 배를 띄우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배를 띄우는 것은 아주 힘이 드는 일입니다. 기도 시간에 성전에 계세요. 예배 시간에 성전에 계세요. 예배 시간에 세상에 있지 마세요. 회사에게 가정에서 일을 하다가 혼자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정해 보세요.
2. 9시 기도
두 번째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는 <9시 기도>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얼마나 기도했을까요? 얼마나 기도했는지는 모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기도에 전무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본문 말씀은 ‘9시 기도 시간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9시 기도>라는 말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에서 9라는 수는 결실, 알곡, 많음, 거둠, 저장함, 부족, 심판, 종국, 완성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레25:22> 너희가 제8년에는 파종하려니와 묵은 곡식을 먹을 것이며 제9년 곧 추수하기까지 묵은 곡식을 먹으리라
이것은 희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7년째, 안식년에는 농사를 짓지 않았습니다. 땅을 쉬게 했습니다. 6년 농사를 짓고 1년을 쉬는 것입니다. 6년째에 농사를 지은 것으로 8년째 가을 추수할 때까지 먹어야 했습니다. 1년 농사로 2년을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년이 7번이 지나고 50번째 되는 해는 희년입니다. 희년에도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안식년을 쉬고 희년도 쉬는 것입니다. 한 해 농사로 3년 동안 먹는 것입니다. ‘9년 추수하기 까지’라고 했습니다. 9라는 말이 추수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누가도 사도행전에서 9라는 수를 추수, 결실 등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넬료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행10:3-4>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사자가 고넬료에게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고 했습니다. 기도와 구제의 응답이 9라는 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같은 말씀이 뒤에 다시 나옵니다.
<행10:30-31> 30. 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걷게 된 시간도 <9시 기도시간>입니다.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응답된 것도 9시 기도시간입니다. 누가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기도에 전무했음을 9라는 숫자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인생의 한없는 결핍을 깨달은 성도들이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고 또 채웠음을 누가는 9라는 숫자로 표현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여러분! 인생은 부족합니다. 인생은 결핍되어 있습니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린의 말처럼 인간은 존재적 진공상태입니다. 인생은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져야 합니다.
엘리사 선지자의 제자 중에 하나가 죽었습니다(왕하4). 그 제자는 빚이 많았습니다. 그 빚을 그의 아내가 고스란히 떠않았습니다. 아내는 빚을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집에 남은 것은 빈 그릇과 기름 한 그릇뿐입니다. 여인도, 여인의 자녀도, 여인의 집도, 여인의 집 그릇도 모두 비어 있었습니다.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채주는 여인의 두 아들을 종으로 데려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엘리사는 여인에게 이웃들에게 그릇을 빌릴 수 있는 만큼 다 빌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릇에 기름을 부으라고 합니다. 여인은 기름을 붓고 또 부었습니다. 여인은 빈 그릇에 기름을 찰 때마다 옮겨놓습니다. 그릇이 하나 둘씩 차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모든 그릇이 다 찼습니다. 이제 여인도, 여인의 두 아들도, 여인의 집도, 여인의 집 빈 그릇도 하나님의 은혜와 놀라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엘리사는 여인에게 말합니다. “그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나머지로 두 아들과 함께 생활하라.” 채울 때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하나님은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인생을 하나님으로 채워야 합니다.
여러분! 인생은 빈 그릇과 같습니다. 빈 그릇 같은 심령이 성령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야 합니다. 은혜로 채워져야 합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얼마큼 채워야 할까요? 9라는 숫자만큼 채워야 합니다. 9시 그러니까 우리 시간으로 오후 3 시는 한창 일하는 시간입니다. 점심을 먹고 저녁 전까지 하는 일이 정점에 달해 있는 시간입니다. 그 바쁜 시간에 일을 멈추고 기도한다는 것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자신의 삶을 채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기도로 채우고 또 채웠습니다. 제자들은 왜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했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의 자리가 너무 컸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너무 연약했습니다. 그래서 기도에 전무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기도로 채운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9라는 수만큼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세요. 여러분의 가정을 9라는 수만큼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세요. 가정을 9라는 수만큼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세요. 아니 9가 넘쳐서 10이 되게 하세요. 집에서 기도하세요. 거실에서 기도하세요. 방에서 기도하세요. 화장실에서 기도하세요. 아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세요.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세요. 여러분! 교회 오셔서 기도해주세요. 우리 교회가 9라는 수만큼 여러분의 기도로 가득 차게 해주세요. 그래서 은혜로운 교회가 되게 해주세요.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교회가 되게 해주세요.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3. 삼겹줄 기도
세 번째 사도들의 기도는 삼겹줄 기도입니다. 누가는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성전에 올라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에 “베드로와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3절에도 “베드로와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4절에는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라고 했습니다. 더불어는 ‘함께’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기록자인 누가는 의도적으로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1절에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치료받은 후에 베드로와 요한을 함께 붙들었습니다. 베드로만 붙든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도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이 함께 단단하게 묶여 있음을 느낀 것입니다. 베드로의 형제는 안드레입니다. 요한의 형제는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기간에 형제들끼리 짝이 됐습니다. 형제들끼리 묶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짝이 바뀝니다. 예수님 부활 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짝이 됩니다. 부활의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두 사람이 함께 달려갑니다. 성령 강림 후에 두 사람이 함께 성전에 올라갑니다. 함께 기도합니다. 함께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킵니다. 틀림없이 피는 물 보다 진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형제보다 더 친밀한 관계가 있습니다(잠18:24). 베드로와 요한이 그랬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도의 특징 중에 하나는 합심기도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함께 기도로 꽁꽁 묶여 있었습니다. 이 합심기도에 성령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성령께서 하나가 된 삼겹줄 기도입니다.
<전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한 사람이면 패합니다. 두 사람이면 이깁니다. 그러면 세 사람이 되면 얼마나 강해질까요? 한 사람, 두 사람 하다가 갑자기 세 겹줄이 나옵니다. 여기 ‘삼겹줄’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줄은 나입니다. 두 번째 줄은 너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줄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삼겹줄은 나와 너 그리고 주님이 한 줄로 묶인 줄입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모일 때 주님이 우리의 세 번째 줄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세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인 줄, 그것이 삼겹줄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삼겹줄은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의 힘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였습니다. 함께 기도했습니다. 함께 떡을 뗐습니다. 함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함께 찬양했습니다. 초대교회 신앙은 삼겹줄 신앙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꽁꽁 묶여 있는 신앙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기도는 삼겹줄의 기도이었습니다. 그들은 삼겹줄 기도로 세상을 이겼습니다. 그들은 삼겹줄 기도로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마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여러분! 삼겹줄이 돼서 기도하세요. 남편과 아내가 집에서 무릎을 맞대고 두 손을 잡고 집안을 위해 기도하세요.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세요. 직장을 위해서 기도하세요. 그 기도에 우리 주님이 세 번째 줄이 돼서 함께 하십니다. 부부가 함께 기도할 때 주님이 세 번째 줄이 되십니다. 여러분! 집에서 아이들과 손을 잡고 함께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거기에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의 집을 삼겹줄 가정으로 만드세요. 그래서 세상 권세가 흔들지 못하는 단단한 가정이 되게 하세요. 여러분! 이 악한 시대에 믿음의 가정을 일으키세요. 혼자인 분들이 계시죠? 혼자 기도하세요. 주님이 여러분의 짝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에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의 일입니다. 아말렉 족속이 이스라엘과 싸우러 나왔습니다(출17:8-13). 아말렉은 산적입니다. 도적떼들입니다. 광야를 지나는 여행객, 나그네들을 탈취해서 먹고 사는 족속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조폭 중에 조폭입니다. 여호수아가 싸우러 나갔습니다. 그때 모세는 산에 섰습니다. 거기서 기이한 일이 벌어집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여호수아가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아론과 훌이 모세 양쪽에서 팔을 떠받칩니다. 그래서 해가 지도록 손이 내려오지 않게 했습니다. 하루 종일 세 사람이 손을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여호수아가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만약 모세가 혼자서 산에서 올라갔다면 여호수아는 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승리 비결은 삼겹줄 기도입니다.
1970년 4월 11일 13시 13분 달나라를 향하여 아폴로 13호를 쏘아 올려 졌습니다. 미국의 과학자들은 아폴로 13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폴로 13호는 현대 과학의 걸작품입니다. 이것은 매우 정교하면서도 완벽합니다. 이것이 고장날 확률은 백 만 분의 일입니다.”
모든 사람의 확신 속에 아폴로 13호는 달나라를 향하여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발사 직후에 문제를 발생했습니다. 2단 로켓의 중앙 엔진이 예정보다 2분 빨리 멈춘 것입니다. 또 지구로부터 321,860km 떨어졌을 때, 2개가 있는 기계선의 산소 탱크 중 하나가 갑자기 폭발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구로 돌아올 방법도 막막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은 미국 텍사스 휴스톤에 있는 우주 지휘소에 비상연락을 취하고 회신을 기다릴 수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휴스톤에서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2만 마일이나 떨어진 우주선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우주 지휘소에서는 다만 북극성을 바라보며 방향을 잡아서 돌아오라고 회신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은 영원한 우주의 미아가 될 위험에 빠진 것입니다. 그때에 미국의 대통령은 전국민에게 함께 아침 9시에 기도하자고 호소했습니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군인도, 어린이도, 온 국민이 함께 기도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폴로 13호가 무사히 태평양에 떨어진 것입니다. 구조된 우주 비행사는 배에 오르자마자 군목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그 주간 타임지 표지로 나왔습니다.
우주 비행사 중의 한 사람인 스위저트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지구에 계신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기도의 힘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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