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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여러분! 예수님 이름으로 일어나십시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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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3:1~10
주일오전예배 | 2019-01-13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조엘 오스틴의 최고의 삶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사무실에 특이한 액자를 걸어 놓고 일하는 어떤 경영자가 있었습니다. 그 액자에는 해변에 좌초된 커다란 배의 그림이 있습니다. 배의 노는 모래 속에 푹 파묻혀 있습니다. 썰물 때라서 바닷물은 저 멀리서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그림은 전혀 아름답지 않습니다. 용기를 주는 그림도 아닙니다. 용기는커녕 볼수록 왠지 기분이 나빠지는 그림입니다. 보는 사람을 쓸쓸하게 하는 그림입니다. 바다를 누비며 드높은 파도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추어야 할 배가 하릴 없이 모래사장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림 맨 밑에 적힌 글귀가 그림의 어두운 분위기를 일순간 바꾸어 줍니다. “바닷물이 다시 들어오면 좌초되었던 배가 다시 그 목적을 찾게 되리라. 배는 있어야 할 곳으로 다시 돌아가리라.”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한 바닷물은 반드시 다시 들어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경영자는 예전에 엄청난 시련을 겪었습니다.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을 건만 같던 그 시절, 그는 조그만 골동품 가게에서 이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 경영자는 단돈 몇 달러에 그것을 샀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볼 때마다 자신을 향해 말했습니다. “바닷물이 다시 들어오고 있어.” 이 그림은 그 경영자의 마음에 믿음을 불어 넣었습니다. 여러분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까? 인생길에 좌초해 있습니까? 목적을 잃었습니까? 일이 뜻대로 풀지 않습니까? 더 이상 살아갈 의지를 상실했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바닷물이 다시 들어오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바닷물이 빠질 때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바닷물은 반드시 다시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바닷물이 빠진 채로 끝나지 않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돛에 다시 생기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힘겹게 근근이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운명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파도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춰야 할 존재입니다. 매일 자신을 향해 선포하십시오. “바닷물이 다시 들어오고 있다. 그러면 나는 다시 대양으로 나아가리라.”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세요. 힘들고 어려울수록 예수님 이름을 선포하세요. 답답한 일이 있을수록 예수 이름을 외치세요. 억지로라도 선포해보세요. 이 이름에 힘이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예수님 이름이 있는 곳입니다. 성도는 누구입니까? 예수님 이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시간 함께 외쳐봅시다. “내 인생에 바닷물이 다시 들어오고 있다!”, “예수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1. 예수 이름으로 성전을 새롭게 하라  

오늘 읽은 본문에 성전이라는 말이 다섯 번 나옵니다. 누가는 이 사건이 성전에서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는 왜 성전이라는 것을 강조할까요? 성전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곳일까요? 하나님께서 이사야 56:7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하나님은 성전이 무엇을 위한 곳인지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만민이라는 말은 모든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성전은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로 나오는 집입니다. 특정인만 나오는 곳이 아닙니다. 모두를 위한 집입니다. 둘째, 기쁨을 주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는 곳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다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얻기를 바랍니다. 셋째, 예배하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존재목적은 무엇일까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서은 인간의 존재목적을 이렇게 답합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이 문장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예배가 됩니다. 인간의 존재 목적은 예배입니다.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예배입니다. 성전은 예배를 위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강도라는 말이 헬라어로 레스테스입니다. 레스테스는 강도 산적 반역도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강도는 장사하는 사람들의 탐욕을 빗댄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 방문자들에게 제물을 팔았습니다. 멀리서 오는 방문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명목이었습니다. 하지만 과도한 이익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성전 방문자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성전이 돈이 목적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돈벌이로 이용하는 사람들을 산적이라고 했습니다. 성전은 산적들의 소굴이 되어버렸다고 하셨습니다. 성전이 예배를 잃어버렸습니다. 알맹이를 잃어버렸습니다.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탄식입니다.  

여러분은 등대교회를 어떻게 이용하십니까? 이 예배실을 어떻게 이용하십니까? 구약 성전과 지금의 예배실은 개념이 다릅니다. 하지만 예배와 기도하는 곳이란 의미에서 같은 목적을 갖습니다. 이곳이 여러분에게 기도의 집, 기쁨의 집 그리고 예배의 집이 되길 바랍니다. 등대교회가 우리 성도님들에게 인간 최고의 목적이 실현되는 곳이 되길 바랍니다. 교회는 예배를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배를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의 성전을 자신들의 밥벌이 수단으로 이용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과 그 사람을 날마다 성전에 메다 준 사람들입니다. 2절에 구걸하기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구걸이 헬라어로 엘레에모쉬네입니다. 엘레에모쉬네는 동정’, ‘자선’, ‘선행’, ‘자선 물품이라는 뜻입니다. ‘구걸하기 위하여라는 말은 동정을 요구하기 위하여또는 자선을 요구하기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지금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타고난 장애를 이용해 성전에 들어가는 종교인들에게 자선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비굴한 삶입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습니다. 40년 동안 이렇게 살았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정말 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약자 중에 약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밖에 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억울하지 않았을까요? 때로는 한 숨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어떤 때는 비굴한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 장애우가 우리 아닐까요?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핸디캡이 있습니다. 상처도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핸디캡이나 상처에 억눌려 산다면 이 장애우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 핸디캡이나 상처에 눌려 살지 마세요. 인생 별 차이 없습니다. 핸디캡을 극복하세요. 이것은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제를 경건의 한 덕목으로 보았습니다. 잠언19:17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외식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거룩한 척, 경건한 척 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걸인에게 동전을 던져 주어도 사람들이 보도록 큰 소리가 나게 던져주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입구는 걸인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전으로 들어가는 종교인들의 신앙심에 호소하며 구걸하기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입구에는 많은 거지들이 있었습니다. 나면서 걷지 못하던 사람도 이 미문에서 구걸을 했습니다. 성전과 신앙심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제가 여기 와서 얼마 후의 일입니다. 추석 얼마 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노인 두 분이 오셔서 근처 노인정에서 나왔다고 하세요. 그러면서 돈을 좀 달래요. 순간 제가 우리 교회에서 노인정에 얼마를 기부를 해야 하나!’ 이런 고민을 했어요. 그런데 상황이 그런 것 같지 않아요. 그래서 아주 조금 드렸어요. 그러자 한 분이 이런 말을 하세요. “내 딸이 교회를 다니는데 이 교회를 다니라고 해야겠네.” 저는 노인정이라고 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드렸어요. 그런데 그 말이 제 마음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리고 제 마음이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거 몇 푼 때문에 딸까지 파나! 얼마나 어려우시면 저렇게 하실까!’ 그때부터 명절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세요. 걸인도 오세요. 모두 제 신앙심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것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나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장애우를 날마다 성전 미문에 메다 주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 장애인의 동업자인지 아니면 이 장애인을 등쳐먹는 사람들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 장애인에게 구걸을 시킨 것 같습니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입니다. 장애인을 성전 앞에 메다 주고 하루 종일 무엇을 했을까요? 아마도 건들거리며 놀았을 것입니다. 앵벌이들입니다. 장애우의 신체적 장애를 이용해 돈벌이 하는 거머리들입니다. 사람의 핸디캡, 아픔, 고통을 이용해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전에 앵벌이들이 있었습니다.  

성경 시대에 하나님의 성전은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심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성전의 원래 모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성전답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입구에서 예수 이름으로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을 고칩니다. 성전이 성전답게 되는 순간입니다. 성전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이 성포되어야 합니다. 그때 성전이 성전답게 됩니다. 교회에서는 예수 이름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때 교회가 교회답게 됩니다. 그래야 우리는 성전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개인의 이익에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심으로 장사하면 안 됩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합시다.

2. 미문지기가 되라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은 성전 미문에 앉아 있습니다. 미문은 공식 명칭이 아닙니다. 속칭입니다. 미문은 사도행전 3장에만 나오는 명칭입니다. 그래서 미문이 정확하게 어디인지 모릅니다. 예루살렘에 미문으로 추정되는 곳은 세 곳입니다. 첫째는 수산문입니다. 현재 예루살렘은 둘레가 4,018m입니다. 사방으로 문이 8개가 있습니다. 성경 시대에는 문이 10개 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동쪽에는 수산문이 있었습니다. 이 문을 황금문이라고 부릅니다. 수산문 앞에는 올리브 산(감람산)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이 이 문을 지나서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의 집이 있었던 베다니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베다니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수산문을 통해 성전을 오갔습니다. 지금은 이 문이 막혀 있습니다. 16세기 트루크 제국의 술래이만이 이 문을 막아버렸습니다. 이 수산문은 쌍문입니다. 하나는 자비의 문(남쪽문), 다른 하나는 회개의 문(북쪽문)으로 불립니다. 이 문을 지나면 성전이 바로 나옵니다. 그래서 수산문을 미문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둘째는 고린도 문입니다. 고린도문은 성전의 주출입구입니다. 고린도 산 황동과 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고린도 문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휘황찬란했습니다. 다른 문들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미문이라고 불렸습니다. 2절 끝에도 미문이라는 성전 문이라고 했기 때문에 아마도 고린도 문이 미문일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위치로 볼 때 걸인들이 여기서 구걸을 했을 것입니다. 성전의 문은 영적으로 기도를 상징합니다. 기도 시간에 기도의 문에서 예수 이름으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셋째는 니카노르문입니다. 니카노르문은 청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문은 육중하고 아주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미쉬나는 니카노르문을 미문이라고 말합니다. 유다 마카비 독립 운동 때 유다가 적장 니카노르의 손을 이곳에 박았기(1마카비 7:1) 때문에 니카로르 문이라고 부릅니다.  

미문은 수산문, 고린도 문, 니카노르 문 셋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어쨌든 성경은 그 문을 미문, 아름다운 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 시대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하는 아름다운 문입니다. 휘황찬란한 문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문 앞에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이 사람은 40세 정도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30년 이상을 여기서 구걸을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은 단 한 번도 성전에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성전 문에 앉아 있을 뿐입니다. 수십 년 동안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성전 문만 밟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의 모습이 지금 나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말씀을 보면서 수 십 년 동안 신앙생활하면서 성전 문에만 앉아 있는 영적 장애우가 내가 아닌지 고민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문입니다. 어떤 문입니까? 천국의 문입니다. 하늘의 문입니다. 하나님의 문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문입니다. 이 문이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자신의 피를 뿌림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가장 큰 희생으로 만들어진 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에 앉아계십니다. 교회는 미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성전에 들어가셨습니까? “저기 설교자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이미 성전에 들어와 있습니다.” 제 말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성전에 들어갔는지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미문인 교회 앉아 있지만 하나님의 지성소로 들어가지 못했다면 영적으로 앉은뱅이와 같은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지성소로 들어가세요. 미문에만 앉아계시지 마세요.  

교회는 아름다운 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 이 아름다운 문이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심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교회 존재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를 자꾸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더렵혀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정치에 이용되면 안 됩니다. 교회가 개인적인 이기심을 채우는 곳이 되면 안 됩니다. 목사의 이익에 이용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의 목적에 이용되면 안 됩니다. 아름다운 문을 아름다운 문으로 있게 해주세요. 거룩한 문을 거룩한 채로 있게 해주세요.  

여러분! 문에만 앉아계시지 마시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세요. 그래서 하나님의 미문을 지키는 미문지기가 되세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이 사람들이 이기적인 욕망으로 얼룩지지 않도록 해주세요. 고라 자손은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시편 84: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3. 베드로의 눈으로 앉은뱅이를 보라  

미문에 앉아 있는 장애우가 베드로와 요한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었습니다.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여기 보다는 말이 헬라어로 에이돈입니다. 에이돈은 자기가 보려고 해서 본 것이 아니라 그냥 보인 것을 말합니다. 보려고 해서 본 것이 아닙니다. 그냥 보인 것입니다. 오후 3시 기도시간입니다. 성전에 사람들이 가장 많은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베드로와 요한이 장애우의 눈에 보였습니다. 이것이 이 장애우에게 큰 은혜이었습니다. 미문에 걸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걸인만이 베드로와 요한을 본 것입니다. 걸인은 날마다 미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수없이 미문을 오갔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그 때에 그들이 거기서 만난 것입니다. 우연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에 우연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보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왜 그런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틀림없이 이것은 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장애우의 눈에 베드로와 요한이 보였던 것처럼 여러분의 눈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길 바랍니다. 세상은 점점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차고 있습니다. 들려오는 소리, 보이는 것들이 좋은 것이 많지 않습니다. 좋지 않은 것들이 더 많습니다. 이 고통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감추어두신 은혜가 여러분의 눈에 띄길 소원합니다.  

<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세요. 구하고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감추어진 은혜가 있습니다. 장애우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합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이 장애우를 관심을 갖고 바라봅니다.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여기 주목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아테니조입니다. 아테니조는 유심히 보다’, ‘관심을 가지고 보다’, ‘눈여겨보다’, ‘주시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시선을 고정시키고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걸인을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보았습니다. 단지 동전 몇 개를 던져주어야 하는 거지로 본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과 동일하게 예수님의 은혜가 필요한 영혼으로 본 것입니다. 장애우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동전 몇 개 얻기 위해서 보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장애우를 예수님의 사랑이 필요한 인격으로 본 것입니다.  

미국의 작가이며 성공학자인 지그 지글러(1926.11.6.-2012.11.28.) 박사가 어느 날 뉴욕의 지하도를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한 거지가 연필을 1달러에 팔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지에게 돈을 주고 연필을 받지 않은 채 그냥 지나쳐갔습니다. 지글러도 다른 사람들처럼 1달러를 주고 연필을 받지 않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하지만 지글러는 가다가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그는 거지에게 말했습니다. “아까 내가 준 1달러의 대가로 연필을 주시오.” 거지가 연필을 내주자 지글러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당신도 나와 같은 사업가요. 더 이상 거지가 아닙니다.” 이 말 한마디에 거지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 나는 더 이상 거지가 아니야. 길거리에서 돈 1달러를 받고 연필 한 자루씩 파는 사업가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에 그 거지는 자신에 대한 자화상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과 환경을 바꾸는 말을 수없이 되뇌었습니다. “나는 거지가 아니라 사업가다. 연필을 파는 사업가다.” 그 거지는 후에 큰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글러 박사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시 돈만 주고 갔던 사람들을 보며 나는 거지의 자화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신도 나와 똑 같은 사업가다라는 박사님의 한 마디 덕분에 인생이 바뀔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눈이 바뀌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미문에서 이 장애우를 처음 본 것이 아닙니다. 수없이 보았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 씩 보았습니다. 하지만 피했습니다. 외면했습니다. 동전이 주기 싫어서 멀리 돌아서 가곤 했습니다. 그 거지가 거기에 앉아 있는 것이 너무 불편했습니다. 아름다운 문에 거지가 앉아 있는 것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거지가 거기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행여 그 사람이 부르면 못들은 체 했습니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얼굴을 돌렸습니다. 무시했습니다. 바쁜 듯이 휙 지나갔습니다. 그럼에도 한 편에는 신앙인으로 마음이 찜찜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지나치기를 수 없이 반복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그 사람 앞을 그렇게 지나쳤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장애우를 30년 전에도 거지로 보았습니다. 10년 전에도 거지로 보았습니다. 어제도 거지로 보았습니다. 아니 오늘 아침까지 거지로 보았습니다. 수십 년 동안 그 장애우를 동전이나 몇 개 던져주면 되는 거지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날, 그 순간에는 달랐습니다. 그 영혼이 너무 불쌍했습니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가슴이 예수 이름으로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의 눈이 왜 바뀌었을까요? 바로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에 성령께서 임재하시자 예수님의 눈으로 이 장애우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눈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죽어 가는 영혼들에 대해 가져야 할 눈입니다. 목사도 성도도 이 눈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눈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에 성령의 임재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성령의 임재를 소원합시다.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눈이 바뀌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나면서 걷지 못하는 사람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3절에 구걸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5절에 무엇을 얻을까 하여라고 했습니다. 거지는 습관적으로 거지처럼 살았습니다. 거지 근성이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언제나 거지였습니다. 몸도 거지였습니다. 옷도 거지였습니다. 마음도 거지였습니다. 말도 거지였습니다. 행동도 거지였습니다. 모든 것이 거지였습니다. 그래서 거지처럼 살았습니다. 30년 전에도 이렇게 살았고 10년 전에도 이렇게 살았습니다. 어제도 이렇게 살았고 오늘도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내일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10년 후에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너무 허무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의 눈이 바뀌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이 사람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성전도 바뀌었습니다. 교회도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들도 달라졌습니다. 내가 바뀌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저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였습니다. 내가 거지였습니다. 내가 걷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장애인이었습니다.  

주님! 바뀌고 싶습니다. 바뀌기를 원합니다. 정말 바뀌고 싶습니다. 10년 전처럼 오늘을 살지 않게 해주십시오. 어제처럼 오늘을 살지 않게 해주십시오. 어제의 삶이 오늘의 삶이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내일을 다르게 살고 싶습니다. 오늘의 삶이 내일의 삶이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내일은 내일의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나의 힘으로 안 됩니다. 성령의 역사를 주십시오. 그래서 나도, 나의 가정도, 나의 자녀도, 나의 교회도 달라지게 해 주십시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해주십시오.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 걷게 해주십시오. 여러분! 2019년 한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이름으로 여러분의 가정도 자녀도 삶도 일어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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