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여러분! 예수님 이름으로 일어나십시오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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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3:1~10
주일오전예배 | 2019-01-20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준비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위를 받자마자 국내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게 되었습니다. 청년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귀국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던 어느 날, 그는 박사 논문을 지도해 주던 교수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던 청년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교수에게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한국에서 교수가 된다는 건 정말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목적을 달성하다니 꿈만 같습니다.”

잠자코 제자의 말을 듣고 있던 교수가 입을 열었습니다.

축하하네. 이제 학자로서, 자네가 세상에 무엇을 주고자하는 지 궁금하군.”

교수의 질문에 당황한 청년은 선뜻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학자로서요? 물론 경영학 교수니까...”

아니, 전공과목이 아니라 자네가 학생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의 문제일세.”

교수의 단호함 앞에 청년은 진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 글쎄, 무슨 뜻으로 물으시는 지...”

농부는 자신의 수고로 우리에게 귀한 먹거리를 선물하지. 저 웨이터는 줄곧 서있으면서도 편안한 미소와 봉사로 우리에게 멋진 식사를 대접하고 있지 않나? 자네는 수년 전 내게 교수가 되고자 이 곳에 왔다고 했지. 난 지금 왜 교수가 되고 싶은 건지를 묻는 거네. 자네는 학자로서 세상에 무엇을 주고 싶은가?”

결국 청년은 교수의 질문에 아무 답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헤어지기 전, 교수는 청년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습니다.

미래의 안락한 삶이 목적인 인생은 재미없지. 그런 게 자네의 행복까지 보장해 주지는 않아. 내 나이가 되어 보게. 평탄한 삶, 매끈한 일상이 어느 날 문득 시시하게 느껴진다네. 자네가 세상에 주고 싶은 것 또 줄 수 있는 것을 찾게. 그게 모든 질문의 답이 될 테니.”  

여러분은 한 사람의 성인으로 세상에 무엇을 주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 무언가를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하나님 앞에 목사가 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목사가 된지 18년이 됐습니다. 정말 오래된 것 같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목사가 돼서 18년 동안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질문에 저는 만족스러운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줄 것인지 고민해보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무엇을 주어야 할까요? 그 답을 저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찾았습니다.

1. 무엇을 얻을까? 무엇을 줄까?  

오후3시 기도시간입니다. 성전에 사람들이 가장 많을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 앉은뱅이가 앉아서 구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앉은뱅이 앞을 수 없이 지나갑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앉은뱅이를 피해서 지나갑니다. 그때 앉은뱅이의 눈에 베드로와 요한이 보입니다.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가는 걸음을 멈춥니다. 그리고 앉은뱅이를 유심히 쳐다봅니다. 그러더니 자기들을 보라고 말합니다. 이제까지 앉은뱅이를 이런 눈으로 이렇게 진지하게 쳐다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또 앉은뱅이에게 말을 거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수 십 년 동안 사람들은 자신에게 동전만 던져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벌레 보듯 했습니다. 따뜻한 말 한 마디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달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행동에 앉은뱅이의 태도가 바뀝니다. 2절에 구걸했다고 했습니다. 3절에도 구걸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5절에서는 무엇을 얻을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바라보다는 말이 헬라어로 에페코(ἐπέχω)입니다. 에페코는 굳게 붙들고(잡고) 있다. ~를 향해서 열중하다, 몰두하다, 영적인 일에 대하여 주목하다는 뜻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자신을 유심히 쳐다보는 베드로와 요한을 앉은뱅이도 전념을 다해 유심히 바라봅니다.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나를 진지하게 쳐다볼까! 나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단체와 기관이 있습니다. 또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종교나 단체, 기관에서 주는 것과 다른 무언가를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무엇을 얻을까!’ 바라보는 세상에 교회는 무엇을 주어야 할까요? 그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에게 예수 이름을 주었습니다.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은과 금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이름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을 주었습니다. 교회는 무엇인가요? 예수 이름을 주는 곳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이름을 주는 곳입니다. 예수 이름에 교회의 동기가 있습니다. 예수 이름에 교회의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 이름에 교회의 위상이 있습니다. 예수 이름에 교회의 영광이 있습니다. 교회의 이름표는 예수입니다. 교회의 문패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 이름은 예수입니다. 교회는 예수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죽으나 사나 예수 이어야 합니다. 다른 것은 1도 있으면 안 됩니다. 교회는 예수가 전부입니다. 다른 것은 절대로 섞이면 안 됩니다. 순도 100퍼센트 예수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능력은 예수 이름에 있습니다. 교회가 예수 이름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이 없으면 교회는 껍데기만 남는 것입니다.  

세상의 최고 화두는 은과 금입니다. 세상은 돈 돈 돈 합니다. 세상은 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생각하고 가장 많이 고민하는 것이 돈입니다. 세상은 돈 이야기를 빼면 남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돈을 말하고 돈을 생각하고 돈을 내놓는 곳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돈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은과 금을 말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이름을 말하는 곳입니다. 목사는 예수를 말하는 사람입니다. 목사는 예수를 주는 사람입니다. 간혹 교회에 어려운 사람들, 걸인들이 찾아옵니다. 전화도 옵니다. 그러면 돈을 10만원씩 주고 싶어요. 어려운 사람들에게 1천만 원씩, 1억씩 주고 싶어요. 차가 없는 사람에게는 차를 사주고 싶어요. 집이 없는 사람에게 집도 사주고 싶어요. 하지만 목사는 돈을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는 예수를 주는 사람입니다. 예수 이름을 줄 수 없다면 목사가 아닙니다. 예수 이름을 줄 수 없다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이름을 주어야 교회입니다.  

중세기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의 부름을 받고 교황청에 갔습니다. 교황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세계 각국으로부터 오는 보화를 가득 실은 마차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때 교황이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베드로 사도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했지만 이제 우리는 금은보화를 저렇게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으로부터 오는 저 많은 보화를 보십시오. 그리고 이 웅장한 건물들과 화려한 장식들을 보십시오.”  

그 말을 들은 아퀴나스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교황님, 초대교회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오늘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성당을 지었습니다. 금으로 기둥을 세웠고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았습니다. 실로 엄청난 건물입니다. 또 우리는 땅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신자들도 정말 많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은과 금은 정말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가졌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우리에게 없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음악회를 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콘서트홀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바자회를 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자선단체는 아닙니다. 교회에서 문화행사를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문화센터는 아닙니다. 교회에서 교육을 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학교는 아닙니다. 교회는 사회 개혁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정치기관은 아닙니다. 교회는 소외된 곳을 살피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봉사를 해야 합니다. 난민을 돌아보고 약한 자를 섬겨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부스러기에 불과합니다. 교회는 예수 이름을 주어야 합니다. 진짜는 예수 이름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 옵션에 불과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을 주었습니다. 진짜를 준 것입니다. 핵심을 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이웃, 친구, 동료 그리고 가족에게 예수 이름을 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진짜는 예수 이름입니다.

2. 예수 이름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면 예수 이름을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이름으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베드로는 말만 한 것이 아닙니다. 행동까지 했습니다. 그것도 온 힘을 다했습니다. 여기 잡다는 말이 헬라어로 피아조(πιάζω)입니다. 피아조는 놓치지 않기 위해 힘을 주고 사력을 다해 꽉 잡았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손을 있는 힘을 다해 꽉 쥐었습니다. 그리고 일으켰습니다. 베드로의 행동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베드로는 뱃사람입니다. 그의 손은 바다에서 고기가 가득 담긴 그물을 배 위로 끌어당기던 손입니다. 잡는 힘과 당기는 힘이 아주 센 손입니다. 거친 손입니다. 베드로가 잡아당기면 그 힘으로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났을 것입니다. 만약 치유가 되지 않는다면 앉은뱅이는 그대로 다시 주저앉게 될 것입니다. 엉덩방아를 아주 세게 쪄야 하는 상황입니다. 힘이 없는 앉은뱅이는 다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잡아 일으켰습니다. 힘을 다해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힘으로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일으킨 것입니다. 베드로의 확신이 아주 놀랍습니다. 오순절 이후 첫 번째 기적입니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시도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혼 힘을 다해 잡아 일으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선포한 대로 이루어질 줄 믿고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킨 것입니다. 여러분! 이 확신과 이 믿음을 오늘 우리가 가질 수는 없을까요? 우리도 사람을 예수 이름으로 일으켜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이름으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곳입니다.  

서울 용산구 이촌동에 충신교회라고 있습니다. 이 교회에 박종순 원로목사님이 계십니다. 박 목사님이 신학교 다닐 때의 일입니다. 사도행전 3장을 읽다가 나도 앉은뱅이를 한 번 일으켜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 서울 역을 갔더니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경과 상황이 딱 맞아 떨어졌습니다. 목사님이 앉은뱅이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선포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신경이 쓰였습니다. 목사님은 그 사람을 업고 사람이 없는 뒷골목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일어나라, 일어나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앉은뱅이를 다시 업어서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데려다 놓고 도망갔습니다. 앉은뱅이가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목사님은 얼마나 민망하고 낯이 뜨거웠겠어요.  

한국 교회 초창기 목회자인 김익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1900년대 초에 있었던 일입니다. 청년 김익두는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금식을 하고 산에 가서 성경을 읽는 등 신앙생활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어느 날 산에서 내려오는데 길가에 앉은뱅이가 앉아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김익두가 앉은뱅이의 손을 잡고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하지만 앉은뱅이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앉은뱅이가 당황하여 눈이 휘둥그레져 김익두 목사님을 뚫어지게 쳐다 보았습니다. 너무나 부끄럽고 당황한 김익두는 다시 입산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 주간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닷새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느닷없이 불덩이가 입으로 들어가고 전신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은 온갖 죄상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떠오르는 대로 눈물 콧물을 쏟아가며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세상에서 맛볼 수없는 기쁨과 환희, 그리고 산도 밀면 밀려갈 것 같은 믿음의 큰 힘을 체험합니다.  

그는 산에서 내려오다가 지난번 망신당한 앉은뱅이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그의 손을 잡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고 소리를 치고 그를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랬더니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 건강한 사람과 같이 걷는 것이었습니다. 김익두도 감짝 놀랐습니다. 앉은뱅이도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이 김익두 목사님이 체험한 첫 번째 신유의 기적입니다.  

베드로는 예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것은 앉은뱅이의 인생을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예수 이름을 준다는 것은 예수 이름으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죽은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앉아 있는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낙심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괴로운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기쁨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삶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인생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연약한 영혼을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손은 사람의 행동을 상징합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손으로 일으켰습니다. 손만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앉은뱅이에게 다가갔습니다. 허리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잡아서 일으켰습니다. 한 손만 사용했을까요? 두 손을 다 사용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말만 한 것이 아닙니다. 말과 행동이 하나였습니다. 베드로는 말과 손과 행동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쟁이가 돼서는 안 됩니다. 말과 행동이 하나이어야 합니다.  

일본의 뛰어난 신앙의 사람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님이 바로 그런 사랑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평생 빈민을 위해 몸을 바치기로 헌신했습니다. 당시 빈민들에게서 가장 큰 고통은 변비였다고 합니다. 변이 차돌처럼 굳어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 목사님은 변비로 고통스러워하는 빈민의 항문에 자기의 손을 넣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되지 않으면 침으로 녹여서 빨아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자신의 항문에 손을 대기도 힘들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는 자신의 손과 입으로 이렇게 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일본 기자가 '당신은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 때 그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배운대로 합니다. 나의 피를 닦아 준 스승님처럼, 어려운 사람을 따뜻한 손으로 만져주신 예수님처럼...'

3. 예수 이름을 받았을 때  

예수 이름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 이름을 갖게 된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첫째, 힘을 얻습니다. 7절에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라고 했습니다. ‘힘을 얻다는 말이 헬라어로 스테레오오입니다. 스테레오오는 강하게 하다, 확고하게 하다, 튼튼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앉은뱅이는 인생이 무기력했습니다.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영적으로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소망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 이름으로 힘을 얻었습니다. 단순히 발과 발목만 강해진 것이 아닙니다. 삶이 강해졌습니다. 인생이 튼튼해졌습니다. 예수 이름은 믿는 자에게 힘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으세요.  

고등학교 1학년 때에 제 가까운 친구 중에 양쪽 다리가 모두 소아마비였던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늘 목발을 집고 다녔습니다. 두발이 보통 사람 보다 훨씬 가늘었습니다. 꼭 젓가락 같아요. 엉덩이는 아예 없었습니다. 반면에 어깨와 팔은 울퉁불퉁했습니다. 팔씨름을 하면 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목발 때문에 생긴 근육입니다. 앞뒤로 앉아서 친하게 지냈습니다. 어느 날 저와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제가 두 손으로 어깨를 밀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친구가 바닥을 뒹구는 것이었습니다. 세게 민 것도 아닙니다. 보통 아이라면 뒤로 한 두 걸음 움찔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데굴데굴 구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뒹굴던 모습이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납니다. 그 때를 생각하면 그 친구에게 지금도 미안합니다. 아주 가까운 친구이었는데 그 때부터 멀어졌습니다. 다리는 우리 생활의 기초입니다. 다리에 힘이 없다는 것은 생활을 지탱해주는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리에 힘이 생긴 것입니다. 생활의 기초가 강해진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예수 이름으로 삶에 힘을 얻었습니다.  

둘째, 뛰는 기쁨을 얻습니다. 뛰어 서서 걸었다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펄쩍 뛰어 일어섰다입니다. 마치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뛰어 올랐다는 뜻입니다. 메뚜기가 뛰어 오르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메뚜기는 튕기듯이 뛰어오릅니다. 메뚜기가 뛰어 오르듯이 앉은뱅이는 뛰어 올랐습니다. 토끼가 언덕을 뛰어 오르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토끼가 언덕을 껑충껑충 뛰어오르듯 앉은뱅이는 껑충 뛰어 올랐습니다. 여러분! 예수 이름은 기쁨입니다. 예수 이름 안에는 뛰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이 여러분의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제일 먼저 간 곳이 어디입니까? 성전입니다. 집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에게 간 것이 아닙니다. 친구에게 간 것이 아닙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30년 이상을 성전 입구에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성전 안으로 들어간 적이 없었습니다. 거지였습니다. 앉은뱅이였습니다. 행색이 누추했습니다. 누구 하나 성전으로 들어가자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8절에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넷째,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고 했습니다. ‘심히 놀랍게라는 말이 헬라어로 땀보스(θάμβος)입니다. 땀보스(θάμβος)는 두려움, 놀라움, 경외라는 뜻입니다. 놀라움은 놀라움인데 그냥 놀라움이 아니라 두려움이 섞인 놀라움입니다. 너무 놀라 무섭기까지 했다는 뜻입니다. 너무 엄청난 사건이라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놀라니라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사건으로 성전은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 대한민국 1세대 소설가인 방기환 임옥인 부부를 아십니까? 방기환 씨는 1993년에 임옥인 씨는 1995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임옥인 씨가 건국대학교 가정대학장을 맡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19751223일에 대전에서 개최한 세미나에 갔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사지가 마비되었습니다. 소생할 가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앰뷸런스에 실려 서울 성모병원에 온 그는 하루를 못살 지경이었습니다. 손에는 마비가 오고, 언어도 상실한 가운데 의식도 불투명한 식물인간이 되어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었습니다. 전혀 소망이 없어 퇴원해서 집에 있었습니다. 건국대학교 여학생이 돌보아 주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병문안을 왔습니다. 신유은사가 있는 친구입니다. 친구가 방에 들어와서 기도를 하더니 대뜸 옥인아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임옥인 씨는 정말 화가 났습니다. 또 아주 섭섭하기도 했습니다. ‘아니 친구지간에 이럴 수가 있나. 왔으면 안수를 해주거나 만져 주기나 할 것이지 건방지게 일어나라고만 하다니.’, ‘누구는 일어나고 싶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속이 아주 많이 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도행전 3장의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시더랍니다. ‘앉은뱅이도 일어났는데.’ 임옥인 선생님은 기도하면서 마음 속으로 외쳤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외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처럼 행동까지 했습니다. 손을 한번 확 잡았습니다. 그러자 손이 쑥 움직이더랍니다. 그래서 또 왼쪽 손을 움직여 보았습니다. 손이 또 쑥 움직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 권사님이 다시 옥인아, 일어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임 선생님이 벽을 잡고 일어났습니다. 친구가 벽을 짚고 돌라고 해서 벽을 짚고 돌았습니다. 이번에는 손을 떼고 돌라고 해서 손을 떼고 돌았습니다. 그때 임옥인 선생님을 돌보던 건국대학교 여학생이 그것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나갔습니다. 다 죽어가던 사람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으니 얼마나 무섭고 놀랐겠어요. 병원에서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집에 와서 있었습니다. 전혀 소생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이름으로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예수 이름의 능력입니다. 예수 이름을 믿으면 정말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힘을 얻습니다. 뛰는 기쁨을 얻습니다. 입에서 찬양이 흘러나옵니다. 예수 이름의 신비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임옥인 선생님이 치료 받은 후에 <새 손의 기도>라는 시를 썼습니다. 1979년 월간 목회에도 실린 시입니다.

<새 손의 기도>  

이 손은 주님의 마음을 그리는 손

이 손은 주님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손

이 손은 주님의 손

주님이 주신 새 손

주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손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손

이 손은 우는 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손

이 손은 상처입은 이들을 만져주는 손

이 손은 절망하는 이의 창문을 열어주는 손

이 손은 갇힌 자의 결박을 풀어주는 손

이 손은 굶주리는 이에게 베푸는 손

이 손은 길 잃은 자의 길잡이

이 손은 눈먼 자의 지팡이

이 손은 귀먹은 자의 목소리

이 손은 벙어리의 말문

…… <이하 생략> ……

베드로는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이름입니다. 예수 이름은 예수님 자체이십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 이름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 이름을 준다는 말은 예수님을 준다는 뜻입니다. 예수 이름이 내게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이름이 내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이름이 완전히 내 것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에게 예수 이름은 완전히 자신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으세요. 예수 이름이 완전히 여러분의 것이 될 정도로 믿으세요. 그것이 능력입니다. 보통 교회는 예수를 전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 이름을 준다고 했습니다. 자기 것이 넘치지 않으면 줄 수가 없습니다. 넘쳐야 줄 수 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예수 이름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크리스천으로 세상에 무엇을 주고 있습니까? 자식에게 무엇을 주고 있습니까? 돈을 주고 있습니까?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주고 있습니까? 예 모두 중요한 것입니다. 삶을 위해 땀을 흘리고 수고하시는 여러분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부스러기 아닐까요? 진짜는 예수 이름입니다. 여러분! 이웃, 친구, 동료들에게 무엇을 주고 계십니까? 친절, 우정, 사랑, 섬김. , 이런 모든 것들은 사람 사는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옵션입니다. 핵심은 예수 이름입니다. 이 이름에 생명, 구원, 능력이 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가룟 유다가 부럽다. 가롯 유다에게는 팔아먹을 예수라도 있었지만 현대교회는 팔아먹을 예수조차 없다.” 여러분은 세상에 예수 이름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죽은 영혼을 일으켜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시대에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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