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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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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1:29, 36
주일오전예배 | 2018-12-23
설교자 : 서요한 목사

해바라기는 꽃이 해를 따라 돌기 때문에 이름을 해바라기라고 했습니다. 어렸을 때 마당 한 옆에 해바라기가 자랐습니다. 제가 가만히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꽃이 해를 따라 돌지는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그대로였습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해바라기의 중국 이름은 향일규(向日葵)입니다. 향일규를 우리말로 잘 못 옮긴 것이 해바라기입니다. 향일규는 꽃이 해를 향해 핀다는 뜻입니다. 해바라기는 해를 향해 피는 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식물은 다 해바라기입니다. 식물은 가지 잎 꽃이 항상 밝은 곳을 향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해바라기 같은 주바라기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태양입니다. 우리는 태양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나침반의 바늘은 항상 남쪽과 북쪽을 가리킵니다. 어디 있든지 나침반은 항상 동일한 곳만을 가리킵니다. 자연은 참 신기합니다. 그런데 나침반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자석은 서로 다른 극을 잡아당깁니다. 지구를 커다란 자석입니다. 이 커다란 자석은 다른 조그만 자석들을 모두 북쪽과 남쪽 가리키도록 정렬시킵니다. 그래서 나침반이 항상 동일한 곳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커다란 자석입니다. 우리는 작은 자석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항상 끌어당기십니다. 우리의 영적인 자석 바늘이 항상 주님을 향해 있기를 바랍니다.  

나침반을 발명하기 전에는 북극성을 보고 길을 찾았습니다. 북극성은 항상 같은 위치에 떠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북극성만을 가리키는 별이 있습니다. 그것을 지극성이라고 합니다. 지극성은 북극이나 남극을 지향하는 한 쌍의 별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큰 곰자리의 탐랑성(알파성)과 거문성(베타성)입니다. 두 별을 지극성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1365일 항상 북극성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별의 거리를 다섯 배하면 북극성에 도달합니다. 두 별은 항상 북극성만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지극정성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항상 같은 곳을 가리키는 나침반처럼 항상 주님은 항상 우리를 가리키시는 분이십니다. 항상 북극성만을 가리키고 있는 지극성처럼 주님은 항상 우리를 가리키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주님을 배반하고 나 몰라라 할 때도 주님은 변치 않고 항상 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이 사랑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변덕스러워도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주님을 바라보며 삽시다. 1365일 매순간 지극성이라는 두 별이 항상 북극성을 가리키듯 우리도 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삽시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 이 말씀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보라  

먼저 보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사람들에게 보라고 외쳤습니다. 보라는 말은 단순히 무엇을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주 큰 감격으로 인해 속에서 터져 나오는 감탄사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아주 작은 소리로 보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주 큰 소리로 보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왜 요한은 큰 소리로 외쳤을까요? 구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바로 자기 눈앞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구세주를 목이 빠질 정도로 고대하고 또 고대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그 구세주가 지금 요한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메시야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조금도 그분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분이 바로 앞에 서 있지만 누구도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결코 잠잠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크게 외쳤습니다. 팽창이 된 콜라 캔에서 콜라가 터져 나오듯 요한의 입에서 보라는 말이 분출되어 나왔습니다. 이 외침에는 구세주를 만난 감격이 있습니다. 이 분을 만난다면 정말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향해 보라!”고 외치는 세례 요한의 심정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원래 소리가 큰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설교 중간에 소리를 더 크게 지를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설교 중에 소리를 질러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여기 귀가 먹은 사람이 왔나? 목사가 왜 이렇게 소리를 질러? 아이 시끄러워!’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세례 요한은 아닙니다. 하지만 때로 세례 요한처럼 크게 외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제 속에 타는 듯한 간절함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제가 성경을 연구하다가 깨달은 진리가 있습니다. “아 이거구나!” 할 때가 있습니다. 맨 날 같은 소리라고 하지 마세요. 제 속에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입니다. 주일 11시 예배 바로 전이었습니다. 교회 2층 주차장에서 승용차가 주차 벽을 뚫고 아래로 추락했습니다. 2층이지만 실제로는 3층 높이었습니다. 차가 추락하면서 뒤집어 졌습니다. 차가 완전히 찌그러졌습니다. 차에 교회 성도님 한 분이 타고 있었습니다. 정말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가슴이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집사님이 누워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간절한지요? 가슴이 왜 그렇게 막막한지요?  

혹시 여기에 앰뷸런스가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갈 때 시끄럽다고 짜증내시는 분이 있습니까? 불자동차가 사이렌 소리를 내며 정신없이 지나갈 때 불편해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아마도 그런 분은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주 급박합니다. 그 사이렌 소리는 죽느냐 사느냐? 입니다. 그들은 지금 촌각을 다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말로 할 수 없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가슴에 먹먹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이렌 소리를 알아주세요. 그 마음을 알아주세요.  

보라!” 이 외침에는 구세주를 목격한 세례 요한의 벅찬 감격이 있습니다. “보라는 말에는 외치는 자의 간절함이 있습니다. 여기에 이 땅의 모든 인생들이 바라보아야 할 구주가 계십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깨달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 분을 보세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들으세요. 그 심정을 헤아려보세요. 사이렌 소리보다 더 급박함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무리들에게 보라고 외칠 때 자신은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요? 틀림없이 요한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똑바로 예수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한결같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29절에 예수님이 자기에게 나아오시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36절에 예수님이 요단 강가를 거니실 때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한결같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만약 요한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라고 하면서 자신은 정작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요한이 쳐다보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설교자는 누구를 바라보아야 할까요? 목사는 누구를 바라보아야 할까요?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목사는 돈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목사는 쾌락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목사는 세상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목사는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9절에 보다(블레포)는 말은 정확히 보다’, ‘자세히 살피다는 뜻입니다. 36절의 보다(엠블레포)는 말은 온 맘을 다해 응시하다’, ‘넋이 나간 채 뚫어져라 응시하다는 뜻입니다. 목사는 예수님을 아주 자세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뚫어져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나아올 때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요한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왔습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섰습니다. 세례 요한은 아주 바빴습니다. 그 바쁜 시간에 예수님이 요한에게 나아오신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나오는 순간 모든 것을 멈추었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시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던 일을 계속하지 않았습니다. 어찌해야할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즉시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나오셨습니까? 모든 것을 멈추세요. 여러분의 생각을 멈추세요. 가정의 일들, 직장의 일들, 힘들고 어려운 일들, 모두 중지하세요. 근심 걱정을 멈춰주세요. 세상일을 멈춰주세요.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용감하게 바라보세요. 계속 바라보세요. 집중해서 바라보세요. 뚫어져라 바라보세요.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바라보아야 할 이 세상의 구세주입니다.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향해 보라고 외칠 때 요한의 손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차려 자세이었을까요? 팔짱을 끼고 있었을까요? 단지 눈만 예수님을 향해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저는 틀림없이 세례 요한의 손이 예수님을 향해 들려져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한 손만 들려져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한손만 예수님을 향해 있었다면 아주 불손한 태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마치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손가락질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세례 요한의 양손은 예수님을 향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겸손한 자세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의 눈은 예수님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사의 손도 예수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한 손만 예수님을 향해 있으면 안 됩니다. 두 손 모두 예수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한 손은 예수님을 향해 있고 다른 한 손은 세상을 가리키면 안 됩니다. 두 손 모두 예수님을 가리켜야 합니다. 그것도 겸손하게 부끄러운 모습으로 예수님을 가리켜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 들어가다가 하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을 모시고 서 있는 천사들이 있었습니다. 천사들의 날개는 여섯이었습니다. 둘은 발을 가렸습니다. 둘은 얼굴을 가렸습니다. 둘로 날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듯 자기를 가리고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응시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의 태도입니다.  

<6:2-3>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여러분! 교회는 예수님을 가리켜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예수님에게서 눈을 떼는 순간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목사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순간 목사는 더 이상 목사가 압니다. 그때 교회는 세상의 욕을 먹게 됩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세요. 주님을 가리키세요. 가정에 충실하세요. 배우자에게 충실하세요. 자녀들에게 충실하세요. 직장에서 최선을 다하세요. 그리스도인으로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하세요. 여러분!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정말 열심히 사셔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눈은 예수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손은 예수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눈과 손이 다른 곳을 향해 있다면 세상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때 성도는 맛을 잃은 소금이 될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을 것입니다.  

영국은 1757년부터 1946년까지 195년 동안 인도를 지배했습니다(좁게는 1877년부터 1946년까지). 식민시절 인도는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못지않게 힘들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한 것처럼 영국도 인도 사람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했습니다. 독가스가 가득 찬 방에 마스크 하나면 씌운 채로 인도 사람을 집어넣고 어떻게 죽어 가는지 관찰했습니다. 그때 인도 사람들은 아주 처참하게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영국은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인도는 힌두교 국가였습니다. 영국은 인도 여러 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간디의 독립 운동으로 영국이 철수할 때 간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의 예수는 두고 가고, 교회는 가져가라.” 예수님은 좋지만 교회는 싫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말입니까? 또 마하트마 간디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는 좋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싫다. 그들은 전혀 예수를 닮지 않았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크리스천은 더 이상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이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2. 하나님의 어린 양  

그러면 왜 우리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어린 양은 생후 1년 미만의 새끼 양입니다. 작고 연약한 양입니다. 이 어린 양은 순결과 온유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순결하고 온유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어린 양 같으신 그분의 순결하심과 온유하심을 본받으세요.  

유대인들에게 어린 양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일까요? 어린 양의 고기는 아주 연하고 맛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에게 어린 양의 고기는 진미로 알려져 있습니다(32:14; 삼하 12:3-6; 6:4). 그러면 히브리인들은 어린 양하면 맛있는 고기를 생각했을까요? 진미를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을까요? 아닙니다.  

이스라엘 성전에서는 매일 같이 아침과 저녁에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이것을 상번제라고 합니다. 이때 사용된 제물이 어린 양입니다. 예수님은 상번제로 드려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하루를 시작하게 하시는 아침의 어린 양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하루를 마치게 하는 저녁의 어린 양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는 아침에 어린 양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의 완성인 저녁의 어린 양입니다. 예수님은 천지 창조 시작에 드려진 창조의 아침의 어린양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완성인 역사의 저녁의 어린 양입니다. 예수님은 아침의 어린 양입니다. 그리고 저녁의 어린 양입니다.  

구약 성경 레위기에는 5대 제사가 있습니다. 5대 제사에는 여러 가지 동물들이 사용되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제물이 어린 양입니다. 또 안식일(28:9-10), 초하루(28:11), 나팔절(29:1-2), 속죄일(29:7-8), 초막절(29:12-13), 유월절 직전의 일주일(28:16-19), 칠칠절(23:18-20), 결례의식(12:6), 나실인의 서원예식 등 각종 제사에 어린양이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어린 양이라는 말은 제사의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매일 같이 어린 양이 죽었습니다. 하루도 어린 양이 죽지 않는 날은 없습니다. 이 어린 양의 죽음은 속죄입니다. 따라서 어린 양이라는 말은 속죄라는 말입니다. 이 어린 양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속죄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죄를 위해 어린 양은 죽고 또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어린 양은 사람의 어린 양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린 양입니다. 사람 제사장이 드리는 어린 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은 뛰어난 어린 양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크고 으뜸이 되는 것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무 중에 제왕으로 불리는 백향목을 하나님이 나무라고 했습니다. 천둥은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은 어린 양 중에 첫째라는 뜻입니다. 제물 중에 가장 뛰어난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제물 중에 으뜸이라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은 가장 뛰어난 제물일까요? 이스라엘의 어린 양은 매일 죽어야 했습니다. 죽고 또 죽었습니다. 영원히 계속해서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어린 양은 한 번 죽음으로써 세상의 모든 죄를 사할 수 있습니다.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더 이상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한 번 죽음으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말은 세상 죄를 멸했다는 뜻입니다. ‘지고 가는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이로입니다. 아이로는 들어 올리다’, ‘둘러매다’, ‘제거하다’, ‘말살하다’, ‘멸하다’, ‘치워버리다는 뜻입니다. ‘지고 가는이라는 헬라어 동사는 처음에는 들어올리고, 다음에는 둘러메고 그리고 가서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세상 죄를 들어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등에 둘러 매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갔다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세상 죄를 멸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죄는 없어졌습니다. 세상 죄는 파멸됐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직접 죄의 저주를 담당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노아 시대를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다시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약속의 증표로 주신 것이 무지개입니다. 무지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케쉐트입니다. 케쉐트는 활이라는 뜻입니다. 그것도 아주 팽팽한 활입니다. 그러니까 무지개는 활인 것입니다. 그런데 무지개 활이 어느 곳을 향해 조준되어 있습니까? 하늘을 향해 조준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팽팽하게 당겨진 활의 모습이 무지개인 것입니다. 따라서 무지개는 하나님의 인류를 위해 자기저주(self-malediction)인 것입니다.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라도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겠다는 언약의 표입니다. 인간의 반역과 배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시겠다는 극한 은총의 증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지개 약속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정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완전히 제거해버리셨습니다. 십자가는 죄의 용서입니다. 십자가는 죄의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죄의 멸망입니다. 십자가는 죄의 파멸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박살났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구원받습니다. 믿는 자는 심판으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요?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무지개 약속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노아에게 무지개를 볼 때 내 약속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지개는 언약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무지개 언약은 영원합니다.  

<4: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하나님께서 저 하늘 구름 속에만 무지개를 걸어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당신의 보좌에도 무지개를 걸어놓으셨습니다. 무지개 언약은 영원합니다. 한결같은 은혜입니다. 변하지 않는 은혜입니다.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1802326<무지개>라는 아름다운 시를 발표했습니다.

 

하늘의 무지개 바라보노라면

내 가슴은 뛴다네,

나 어려서 그러하였고

어른 된 지금도 그러하거늘

나 늙어서도 그러하리다.

아니면 이제라도 나의 목숨 거두어 가소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내 생애의 하루하루를

천성의 경건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내용을 볼 때 시인은 그리스도인 같습니다. 맨 마지막 줄 천성의 경건함이 원문으로 natural piety입니다. 우리말로 천연의 경건또는 자연적인 신심(信心)’이라고 번역이 될 것입니다. 저절로 생겨나는 경건함이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우리 안에는 천성적인 신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천성적인 신심으로는 부족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자연적인 신심이 영적인 신심이 되는 것입니다.  

내일 모레가 성탄절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별을 보고 동방에서부터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적게는 1년에서 많게는 2년 정도 여행을 했을 것입니다. 그 긴 시간 동안 동방박사들은 오직 예수님의 별만을 보며 여행을 해 왔습니다. 한 번도 그 별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만약 잃어버렸다면 예루살렘까지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직 별만을 따라서 동방에서 예루살렘까지 왔습니다. 그럼 다 온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는 8km입니다. 목적지가 코앞입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예수님의 별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왜 잃어버린 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은 사람들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냐고 물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사람들에게 묻자 예루살렘에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소동이라는 말은 불안하게 했다’, ‘어지럽게 했다’, ‘근심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별을 잃어버렸을 때 세상에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많은 아이들이 죽었습니다. 애곡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잃어버릴 때 사회는 어지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 증거를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예수님을 자세히 바라보세요. 진심으로 바라보세요.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세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교인이 교인답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교회가 교회답습니다. 기독교는 주바라기가 되어야 합니다. 주바라기가 되세요.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한 곳만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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