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살아 있는 책, 성경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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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히브리서4:12
주일오전예배 | 2018-12-02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여러분! 사탄은 실재합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탄은 실재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19에서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탄에 속했습니다. 사탄을 선한 자가 아니라 악한 자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세상이 점점 악해지길 바랍니다. 할 수만 있으면 더 악해지길 바랍니다. 선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악해지길 바랍니다. 그래서 마귀는 선한 자가 괴롭게 되길 바랍니다. 더 나아가 선한 자가 악한 자가 되길 바랍니다. 선한 자가 악한 자가 될 때 마귀는 개가를 부를 것입니다. 파안대소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선한 자는 끝까지 선한 자로 남아야 합니다. 결코 악한 자가 돼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마귀로 노래를 부르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우리가 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성경에서 나옵니다. 성경은 힘입니다. 성경은 세상을 이기는 힘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성경을 아주 미워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사람들에게서 성경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성경을 빼앗지 못하면 성경을 왜곡하려고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하나님의 진리를 말씀을 왜곡시켜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켰습니다. 오늘도 뱀은 진리의 말씀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또 들은 말씀을 빨리 잊어버리게 합니다. 텔레비전, 스마트 폰, 쇼핑, 친구 등등 세상일은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힘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또 마귀는 말씀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4:4 “그들의 경우를 두고 말하면, 이 세상의 신이 그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표준새번역)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성경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면 마귀가 성경을 보지 못하게 할까요? 성경 말씀을 빼앗으려고 할까요? 성경을 왜곡시키려고 할까요?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100, 1000, 10000배 중요한 책입니다. 목사님들은 힘주어 말합니다. “성경은 가장 많이 팔리는 책입니다.”, “성경은 가장 영원한 베스트셀러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미국은 공동장소에 가면 어디든지 성경이 있습니다. 호텔에도 서랍만 열면 성경이 있습니다. 저희 집에도 성경이 10권이 넘습니다. 아마 교인 집에는 성경이 몇 권씩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안 읽는 책이 성경입니다.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지만 가장 안 읽는 책도 성경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읍시다. 성경은 살아 있는 책입니다. 그리고 살리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어야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1. 쌍날칼 보다 예리한 성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검에 비유합니다. 칼에는 도와 검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날이 한쪽에만 서 있는 칼을 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양쪽으로 날이 서 있는 칼을 검이라고 합니다. 양쪽에 날이 서 있기 때문에 검을 쌍날칼이라고도 합니다. 검에 비해 도는 무겁고 둔탁한 느낌입니다. 반면에 검은 날카롭고 날렵한 느낌입니다. 도는 주로 자르는데 쓰입니다. 하지만 검은 자르기도 할 뿐만 아니라 찌르기도 합니다. 검은 자르기와 찌르기 용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칼을 대부분 자르는 용인 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도가 아닌 쌍날칼인 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49:2>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드사 그의 화살통에 감추시고  

<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못에 비유합니다.  

<12:11>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날카롭고 뾰족한 검에 비유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박힌 못에 비유합니다. 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날카롭고 뾰족한 검에 비유할까요? 그리고 잘 박힌 못에 비유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분별해 사람을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 바르게 살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지으신 뜻과 목적이 있습니다.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세상 권세는 그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사람을 유혹합니다. 그래서 불행하게 합니다. 고통스럽게 합니다. 원망하게 합니다. 아프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잘 살기를 바라십니까?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십니까? 가치 있게 살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할 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하지만 사용하지 않으시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은 책 중의 책입니다. 성경은 살아 있는 책입니다. 하지만 사용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10년이 훨씬 지난 일입니다. 어느 날 옷 가게를 하시는 성도님 한 분이 저를 자신의 가게로 오라고 했습니다. 갔더니 아주 고가의 양복을 한 벌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어떤 권사님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말고 제게 선물로 드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권사님이 80만원을 주고 가셨는데 자기가 조금 보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50만원 정도하는 양복을 주는 거예요. 당시 제가 입던 양복이 3만원 5만원이었습니다. 싸게 파는 옷 있잖아요. 주로 그런 것을 입었습니다. 그 분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안 가르쳐 주는 거예요. 권사님이 가르쳐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는 것입니다. 양복을 가지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너무 비싸서 그 옷을 입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 옷을 장롱에 보관해 놓고 1년에 많이 입어야 두세 번 입었어요. 아주 특별한 날에만 입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누가 사준지 알게 됐습니다. 사주신 분이 한 달에 영세민 보조금 20만원 받고 사시는 할머니이었어요. 그 말을 들으니 그 옷이 얼마 귀해요. 전에는 그냥 비싼 옷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값이 문제가 아닌 거예요. 그래서 잘 입지도 않았습니다.  

5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 그 옷을 입으려고 꺼냈습니다. 꺼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종아리 부분이 10cm 정도가 잘라져 있었습니다. 저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아내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습니다. 드라이를 하면 비닐을 씌워 주잖아요. 비닐을 씌운 채로 보관하면 습기가 찹니다. 비닐을 벗겨 놓으면 잘 입지 않으니까 먼지가 뽀얗게 앉습니다. 그래서 비닐을 씌운 채로 비닐 윗부분은 남기고 아래 부분을 잘라서 버리려고 비닐을 자르다가 비닐과 함께 바지를 잘랐다는 것입니다. 아내 말로는 오래 돼서 천이 잘 잘라지지 않는 가위이었다는 거예요. 일부러 자르려고 해도 안 잘리는 가위라는 거예요. 그런데 결이 잘 맞았는지 비닐과 함께 사각하는 소리가 나며 바지가 싹둑 잘리더래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래요. 언제 그랬냐니까 오래 됐다는 거예요. 몇 달 동안 잔소리 들을까봐 말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고 있었던 거예요. 150만 원짜리 양복이 한 순간에 날아갔습니다. 1년에 많이 입어야 2-3번 입었습니다. 어떤 때는 1년에 한 번도 안 입었다고요. 5년 동안 열 번도 안 입었어요. 150만원자리 양복은 모셔놓고 3만원 5만원자리 양복만 입는 거예요. 옆에 좋은 것이 있으면 뭐해요. 집에 귀한 것이 있으면 뭐해요.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그 양복을 20번만 입었어도 억울하지 않았을 거예요. 얼마나 억울한지 아내에게 3년 동안 잔소리했습니다. “그 옷이 어떤 옷인데하면서요. 그래서 요즘은 좋은 것 생기면 빨리 빨리 써요. 새 양복이 생기면 계속 그것만 입어요. 빨리 안 입으면 제 아내가 또 잘라 버릴지 몰라요.  

성경은 책 중의 책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좋으면 뭐해요. 쓰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요. 여러분의 인생을 위해 말씀의 검을 쓰세요. 이 세상에는 짝퉁 검이 수 없이 많습니다. 3만원, 5만원자리 검이 많습니다. 그 검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생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두 가짜 검입니다. 말씀의 검이 진짜 검입니다. 이 검은 이 세상 어떤 검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 보다도 예리하여라는 말은 ‘~ 이상으로 더 잘 베어지는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검 보다 더 잘 베어지는 검이라는 뜻입니다. 최고의 검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검이 최고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위해 말씀의 검을 사용하세요. 성경을 사용하세요. 여러분의 인생이 가치가 있어질 것입니다.  

마이클 페러데이는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는 이 복된 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찌하여 사람들은 길을 잃는가?” 성경을 옆에 두고 인생의 길을 잃는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2. 영혼을 수술하는 말씀  

말씀의 검은 이 세상 어떤 검보다 예리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예리할까요? 말씀의 검은 사람의 영혼을 수술할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합니다.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여기서 혼과 영은 같은 것입니다. 영혼삼분설에서는 혼을 육적 생명의 중심으로 봅니다. 육적 생명의 원동력이 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종교적인 것으로 봅니다. 이러한 견해는 자칫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이원적으로 구분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영은 선한 것이 되고 육은 악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영만 하나님과 교제한다면 육은 들러리에 불과하게 됩니다. 인간은 영과 육이 합일된 전인격체입니다. 인간은 전인격체로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것입니다. 혼과 영은 동일한 것에 대한 다른 명칭입니다. 성경은 혼이라는 말과 영이라는 말을 교류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영혼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영혼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혼과 영은 인간 내면의 아주 깊은 곳을 의미합니다. 사람에게는 잘 느껴지지도 않고 잘 인지도 되지 않는 아주 깊은 내면의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느끼지도 못하고 인지할 수도 없는 내면의 깊은 곳까지 찌르고 쪼갤 수 있는 예리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심령을 찌르고 쪼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찌르다’(디이크네오마이)는 말은 꿰뚫다는 뜻입니다. ‘쪼개다는 말은 분리하다’(메리스모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는 말은 뼈들을 나누고 영과 혼을 나눌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찔러 쪼갠다는 말은 인간의 깊은 내면을 꿰뚫어 잠재된 의식까지 들추어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은 억눌리고 억압되어진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까지 환하게 비추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든 것이 들어납니다.  

그러면 말씀이 사람의 내면을 찌르고 쪼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의식까지 들추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프게 하려고요? 정죄하려고요? 괴롭게 하려고요? 아닙니다. 오히려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리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영혼을 찌르고 쪼개는 이유는 상처로 곪아터진 심령을 치료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인생을 새롭게 세우는 책입니다.  

영혼과 동시에 함께 언급된 것이 관절과 골수 입니다. 관절은 뼈와 뼈를 서로 연결해주는 조직입니다. 관절 때문에 우리 몸은 활동이 가능한 것입니다. 뼈는 뻣뻣합니다. 뼈만 있으면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관절이 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관절이 없으면 사람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말씀이 뼈 관절을 찌르고 쪼갠다고 했습니다. 왜 쪼갤까요? 사람에게 하나님의 활력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활력을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살게 합니다.  

골수는 뼈를 채우고 있는 젤라틴처럼 부드러운 조직입니다. 뼈는 사람의 몸을 지탱해주는 기둥입니다. 뼈가 있어서 사람이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골수, 즉 뼈를 수술한다는 말은 인생을 새롭게 세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 깊은 곳을 들추어내는 것은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고 했습니다. 왜요? 사람을 올곧게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의 인생이 치료되고 세워지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새롭게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심리학에서 사람의 마음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눕니다. 의식은 표면 의식이라고 합니다. 무의식은 잠재의식이라고 합니다. 무의식은 인간이 인지하고 이해하고 종용할 수 없는 의식이 알지 못하는 심리영역입니다. 무의식 속에는 인간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보고 듣고 겪은 모든 일들이 그대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까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무의식은 크기와 넓이는 알 수 없는 거대한 저장 창고와 같습니다. 그런데 무의식이 90~95%입니다. 표면의식은 5~10%에 불과합니다. 무의식이 인간행동의 90% 이상을 지배합니다.  

심리학에서 사람의 무의식을 깊고 거대한 쓰레기통에 비유합니다. 아주 많은 쓰레기들을 던져 넣어도 넘치지 않을 만큼 충분히 큰 쓰레기통이 있습니다. 의식은 그 쓰레기통의 가장 위에 쌓인 물건들만 확인하고 처리할 수 있습니다. 처리되지 않은 것들이 쓰레기통 깊은 곳에 그냥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의식의 특징 중에 하나입니다. 한번 쓰레기통에 던져진 내용물들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냥 눈앞에서만 사라졌다고 여겨질 뿐입니다(석정훈 - 무의식은 답을 알고 있다81).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쓰레기통 속에서 썩고 냄새나는 내면의 상처가 인간을 행복하지 못하게 합니다. 인간을 계속 아프게 합니다. 인간을 계속 괴롭힙니다. 이 무의식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료되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인생사입니다. 목사님의 고향은 이북입니다. 목사님이 여섯 살이었을 때 6.25가 터졌습니다. 무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려움에 휩싸여 자던 아이는 한 밤중에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부모님의 대화를 엿듣게 됩니다. 대화의 내용은 내일 남한으로 피난을 가야 하는데 이 아이를 두고 가느냐? 데리고 가느냐?”하는 문제였습니다. 데리고 가긴 할 텐데 아이가 그 먼 거리를 걸을 수 없으니 문제고, 그렇다고 여섯 살이나 됐으니 업고 갈 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설마 공산당이라도 아이들을 죽이진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아이를 두고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모든 상황을 알게 된 아이는 너무 무서운 마음에 잠을 자지 못하고 뜬 눈으로 날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아침부터 어머니의 치마꼬리를 붙잡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사람들 틈에서 부모를 잃고 말았습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가 겪은 고생은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도 우여곡절 끝에 남한으로 넘어오게 됩니다. 아이는 고아원에서 자랍니다. 후에 아이는 자라서 목사가 됩니다. 하지만 목회에 문제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목회가 너무도 어려웠습니다. 이유는 목사와 성도들의 갈등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많이 옮겨 다녔지만 가는 곳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목사님의 무의식 속엔 사람은 늘 배신한다.”는 고정관념이 아주 뿌리 깊이 박혀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우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데 오히려 성도들로부터 버림을 받을까봐 성도들을 신뢰하지 못하니까 교우들 쪽에서 볼 때 의심 많은 이상한 목사로 느껴지게 된 것입니다.  

이 목사님이 목회를 마칠 때 쯤 내적 치유 세미나에 참석하게 됩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자기 자신이 어린 시절 상처의 희생자임을 깨닫고 너무나 안타까워했습니다. “만약 내가 조금만 더 빨리 내적 치유 세미나에 참석했다면 교우들에게 버림받을까봐 교인들의 눈치를 보는 목회를 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섬기면서 보다 열매가 있는 목회사역을 할 수 있었겠다.”고 눈물로 고백을 했습니다. 내면치유라는 것은 마음 속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상처를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치료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치료할 때 우리는 온전케 됩니다. 상처를 그대로 두면 그냥 쓰레기통의 쓰레기처럼 곪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에 따르면 사람은 억눌리고 상처 입은 무의식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상처 입은 무의식을 그대로 두면 무의식은 우리 일생을 괴롭힐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세요. 말씀의 빛이 여러분의 영혼에 비추게 하세요.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을 수술하게 하세요. 말씀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활력을 주실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기로 온전한 사람으로 새롭게 될 것입니다.

 

3. 성경을 읽자  

성경을 사용하는 방법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토마스 제퍼슨은 성경은 세계의 사람들을 훌륭하게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훌륭하게 합니다. 성경을 읽읍시다. 저는 여러분에게 몇 가지 성경 읽기 방법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첫째, 매일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은 매일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구약이 929장입니다. 신약이 260장입니다. 신구약을 합하면 1,189장입니다. 1365일입니다. 매일 하루에 3장씩 읽으면 1,095장입니다. 그런데 평일은 3, 주일날은 5장씩 읽으면 1,199장입니다. 그러면 1년에 성경 1독이 되는 것입니다. 저를 따라서 해보세요. “3 5” 매일 3, 주일은 5장입니다. 하루에 15분에서 20분이면 충분합니다. 하루에 3장이 많다면 1장이라도 읽으세요. 5분 읽고 5분만 성경말씀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텔레비전을 3-4시간 봅니다. 그 중에 1/10, 1/20만 성경에 투자하세요.  

둘째, 느끼고 감동되는 것을 메모하면서 읽는 것입니다. 그냥 읽어도 괜찮지만 메모하면서 읽으면 더 좋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마음에 감동이 되는 것이 있으면 성경 빈 공간에 메모를 하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조금만 적는 것입니다. 노트에 적으면 더 좋습니다. 그러면 성경 묵상 노트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기도하면서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기 전에 기도하세요. 성경을 통해 주님의 뜻을 깨닫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가 깨닫는 말씀이 있으면 즉시로 기도하세요. 저는 깨닫는 말씀이 있으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습니다. 읽은 말씀대로 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다 읽은 다음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말씀의 열매가 맺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넷째, 감동된 말씀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읽다가 감동된 말씀, 깨달은 말씀이 성도의 능력입니다. 그 말씀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하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말하세요. 아내에게 말하세요. 이웃에게 말하세요.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고. 내 가슴에 박힌 말씀은 상대방의 가슴에도 박힙니다.  

성경을 사용합시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성경을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성경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사용합시다.  

19세기 미국의 부흥사이었던 무디(1837-1899)는 성경 애독자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디에게 무디 선생님의 성경을 보자고 했습니다. 무디 선생님의 성경을 보았더니 구구절절이 색연필로 그어져 있고, 거기에는 아름다운 명상들과 언어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도처에 ‘T. P.’자란 글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무디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무디 선생님,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때 무디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실험해 보았더니 입증되었다(Tried and Prove)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해 보았더니 그대로 하나님이 입증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나타나고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에 내 영혼을 노출시킵시다. 성경이 내 마음 속을 비추게 합시다. 성경이 내 삶을 비추게 합시다. 그리고 성경에 말씀에 따라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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