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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참 예배의 은혜, 거짓 예배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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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이사야66:1~4
주일오전예배 | 2018-10-14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이용규 선교사님의 내려놓음이라는 책에 소 대신 예배를 택하는 마음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용규 선교사님은 몽골에서 순회 선교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용규 선교사님이 베르흐 지역에 있는 예배처소를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예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벌러르라는 소녀가 땀으로 뒤범벅이 된 채 교회 안에 뛰어 들어왔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예배가 시작되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소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 뛰어다녔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소녀는 예배 시간이 임박해지자, 말씀을 듣기 위해 소를 포기하고 들판을 가로질러 예배당으로 달려왔던 것입니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벌러르는 몇 달 전에 듣지 못하던 귀를 기도로 치료받은 소녀입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렇지만 몽골에서 소는 특히 귀한 대접을 받습니다. 아주 비싼 가격에 거래되기 때문에 큰 재산입니다. 그런 소를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놀랍고 마음이 답답했을까요? 그러나 소녀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달려온 것입니다. 소를 포기하고 예배를 선택한 것입니다. 소녀의 이야기를 들은 선교사님은 설교를 마치고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소가 아닌 예배를 선택한 벌러르의 믿음의 결단을 부끄럽게 하지 마십시오. 소를 찾게 해 주십시오.” 예배를 마쳤을 때 바깥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도망간 소가 제 발로 주인을 찾아온 것입니다. 벌러르는 예배에 대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배 가운데 선포되는 말씀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소녀의 순전한 예배에 하나님은 순전하게 응답하셨습니다. 선교사님의 순전한 기도에 하나님은 순전하게 응답하셨습니다.  

몽골은 물이 아주 귀한 나라입니다. 일 년 내내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 지역도 있습니다. 몽골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우물우물하며 그것으로 세수를 끝낸다고 합니다. 어떤 여 선교사님이 몽골에 갔는데 정말 더럽더랍니다. 우리나라 1950년대와 같은 풍경으로 살고 있는 곳입니다. 아주 오지입니다. 그런데 예배에 대한 순전한 열정이 있는 곳입니다. 말씀에 대한 뜨거운 갈망이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이 시대에 벌러르 같은 예배에 대한 순수한 열망이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마음을 받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순전하게 서세요. 교우를 순전하게 대해주세요. 계산하지 마세요. 오늘 우리 시대 교회에 순전함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앞에 나오는 예배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배자의 심령이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예배자들을 말씀하십니다. 그런 다음 혐오하는 예배자들의 종말을 말씀하십니다.

 

1. 참 예배  

먼저 예배자의 심령이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예배자의 심령이 어떠해야 할까요? 첫째, 가난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가난이 히브리어로 아니입니다. ‘아니의 뜻은 가난한’, ‘겸손한’, ‘낮은’, ‘비천한’, ‘억눌린입니다. 히브리어 아니라는 단어는 처음에는 단순히 가난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영향력이나 권력이나 특권을 가지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힘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억압을 당한다는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상의 재물을 소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없이 못사는 마음입니다. 즉 하나님 바보인 마음입니다.  

가난은 수입이나 재산이 적어서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해 삶이 괴롭다는 뜻입니다. 가난은 돈이 없어서 삶이 괴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가난하다고 했습니다. 돈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거지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입니다. 영어로 가난이 poor입니다. poor의 명사형이 poverty입니다.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 영어가 우리말에서 왔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에 의하면 poverty가 우리말의 파보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파보는 귀한 것을 깨뜨린다는 뜻입니다. 파보가 부드러워져서 바보가 됐다는 것입니다. 보통 바보를 밥보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밥보는 밥을 많이 먹는 사람입니다. 밥을 많이 먹으면 미련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보는 밥보가 아니라 파보라는 것입니다. 영어의 가난의 어원은 우리말의 파보라는 것입니다. 아주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없으면 못사는 하나님 바보를 말합니다. 많은 재산이 있습니다. 돈도 있습니다. 좋은 작장도 있습니다. 힘도 있습니다. 좋은 배경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 힘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저는 하나님 없이 못 살아요. 이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이 필요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바보는 하나님께 꽁꽁 묶인 사람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자유인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난한 마음은 세상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돈도 없고 집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거지가 아닙니다. 돈도 있습니다. 집도 있습니다. 하지만 돈이나 집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거지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거지를 만드는 종교가 아닙니다. 물론 살다 보면 돈도 없고 집도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없어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마음은 없다고 불안한 마음이 아닙니다. 있어도 자유롭고 없어도 자유로운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집착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가진 것을 잃어버릴까봐 노심초사 불안해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가난한 마음이 욕심이 없는 마음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지키려면 어느 정도의 욕심도 필요합니다. 가난한 마음은 한 마디로 세상에 대해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철저하게 매인 마음입니다. 하나님 없이 못사는 하나님 바보인 마음입니다. 우리는 때로 이런 파보!’라고 강하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바보의 어원이 파보입니다. 바보를 더 강하게 파보라고 하면 더 바보 같은 느낌입니다. 하나님 없이 못하는 하나님 파보인 가난한 마음을 가지세요.  

둘째, 통회하는 심령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심령(히브리어 루아흐, 영어 성경 spirit)이라는 말이 사람의 영 또는 영혼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심령은 사람의 중심을 일컫는 말입니다. 사람의 한 가운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통회는 절구로 빻듯이 산산조각으로 완전히 부스러뜨리는 것을 말에서 온 말입니다(스펄전, 시편 강해). 통회는 죄악된 자아를 완전히 깨뜨리는 것입니다. 통회는 철저한 회개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죄사함을 위해 반드시 통회해야 합니다(라이프성경사전). 통회는 단순히 지난날의 후회나 선한 결심 혹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 죄에 대한 분명하고도 자발적인 고백과 전 인격적인 단절을 포함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통회하는 심령에 은혜를 주십니다.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회개 없이는 은혜도 없습니다. 회개는 은혜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김명혁 원로목사)1013일 명성교회에서 월례기도회 및 발표회를 진행했습니다. 기도회에서 김삼환 목사님은 오늘 세상을 아무리 개혁하려 해도 바뀌지 않는다. 회개를 통해서 변화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회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관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울왕은 버림을 받았지만 다윗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다윗왕 사울왕의 차이는 회개의 차이입니다. 가룟 유다는 버림을 받았지만 베드로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도 회개의 차이입니다. 모두 죄를 짓습니다. 회개가 은혜를 결정합니다. 오늘 우리사회가 개혁, 적폐청산을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개혁 안됩니다. 적폐청산 안됩니다. 진정한 개혁과 적폐청산은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190712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연합부흥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평안남도 전역에서 1,500여명이 평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지금부터 111년 전입입니다. 지금도 연합집회에 1,500명이 모이기 힘듭니다. 그런데 2주 동안 매일 같이 새벽 낮 밤 1,500명이 모인 것입니다. 엄청난 열망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흥회에 은혜가 없었습니다. 13일 저녁이었습니다. 강사 이길함 목사님은 당시의 집회 분위기에 대하여 집회는 전혀 영적인 생기가 없었으며 하나님의 성령이 회중 가운데서 떠나 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사람들은 매우 답답하여 했다. 그리고 모두 그러한 집회 분위기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길함 목사님은 무엇 때문에 집회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부터 멀어졌는가 하고 회중들을 향하여 물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때에 한 사람이 일어나서 자기 죄를 눈물로 뉘우치며 고백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평안 장대현 교회 길선주 장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집회에 은혜를 내리시지 않는 이유는 바로 나 때문입니다. 나는 바로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집회에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1년 전에 내 친구 중 한 사람이 임종하면서 내게 부탁하였습니다. ‘길장로! 내가 세상을 뜨거든 내 유산을 돌보아 주시오. 내 아내가 세상을 너무 모르니 당신만 믿겠소.’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난 뒤 미망인 재산을 관리해주면서 미화 100달러 상당의 돈을 사취하였습니다.”  

길선주 장로는 설교가 끝난 후에 있었던 기도회 도중에 갑자기 일어나 자기의 죄악을 큰 소리로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죄를 고백하는 그의 눈에서는 회개의 눈물이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믿었던 친구와 미망인을 속인 죄를 자백했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는 대로 사취한 돈을 미망인에게 돌려주겠노라고 배상을 약속을 하면서 쉬지 않고 자기의 죄를 회중 앞에서 자복하였습니다. 길선주 장로의 고백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회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여러 날 동안 무겁게 짓누르던 장벽과 같은 담이 별안간 무너져 내렸습니다. 죄에 대한 애끊는 회개가 예배당을 휩쓸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한 사람씩 일어나 자기 죄를 고백했습니다. 저녁에 시작한 합심기도가 예배가 이튿날 새벽 2시가 되었는데도 끊나질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곳의 회중들 가운데 임했고 한 사람 한 사람 일어나 자신의 죄를 고백했고 흐느껴 울며 마루 바닥에 고꾸라졌고 혼신을 다해 통회하였습니다. 특별히 장대현 교회의 강 씨와 김 씨라는 재직이 있었는데 서로 마음에 증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대상 앞쪽에 앉아 있었던 김 씨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앞으로 나와서는 즉시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다른 형제들을 미워했으며 특별히 블래어 선교사를 미워했음을 고백하고는 온몸을 전율하며 그대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김 씨가 통회하자 온 회중은 마치 하나의 강력한 통회의 폭풍처럼 통회하기 시작하였으며 울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선교사들도 함께 울었으며 회중들이 통회하는 것을 전혀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역시 강 씨도 일어나 자신의 심장이 끊어지는 듯 절규하며 회개를 했고 김 씨에게 가서 사랑스럽게 자신의 팔을 벌려 포옹하고 서로 함께 울었습니다.  

김 씨는 블래어 선교사에게 나아가 블래어 목사님 나를 용서해주실 수 있습니까? 나를 용서해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고 블래어 선교사는 일어나서 아버지, 아버지를 두 번 말하고는 김 씨를 포옹했습니다. 회중들은 통회를 계속했고 그것은 어떻게 중단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하나님의 면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이 회개의 역사는 14일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15일에도, 16일 수요일 저녁예배 때도 계속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회개가 1907년 한국 초대교회 역사에 길이 남을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이 부흥으로 평양 시내에 술집이 장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개혁은 회개할 때 이루어집니다. 회개가 은혜입니다.  

셋째, 하나님 말씀에 떠는 심령입니다. ‘떨다는 말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노예적인 떨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무서움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떨었습니다.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17:17) 그렇다고 예레미야가 죄인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욥도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 구나”(6:4) 여기서 말하는 떨림은 심판에 대한 떨림입니다. 심판에 대한 무서움입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경건한 떨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대하심 앞에서 떠는 경건함입니다. 이것은 말씀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떨림입니다. 이것은 무서움이 아닙니다. 말씀을 귀담아 듣고 마음에 간직하고 행하는 떨림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세상에 민감합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람은 말씀에 민감합니다. 믿음은 민감함입니다. 믿음은 세상에는 둔감하지만 말씀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합시다. 이렇게 민감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상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13:13>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  

지난 여름에 옥상 화단에 오이를 심었습니다. 몇 년 전에 오이씨를 사다가 뿌렸습니다. 오이가 잘 열렸습니다. 맛도 좋았습니다. 이 건물 환경 미화하시는 분에게 드렸더니 이렇게 맛있는 오이는 드물다는 것이었습니다. 씨를 받아서 내년에도 심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씨를 받아 해마다 심었습니다. 작년까지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올해는 심는 것이 귀찮았습니다. 그래서 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씨를 남겨두면 뭐하나 싶어서 어느 날 아무렇게나 뿌려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여기 저기 막 났습니다. 아주 많이 났습니다. 오이 집을 지어주어야 하는데 귀찮아서 지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오이가 열리기는 했는데 오이가 반듯하게 자라지 않았습니다. 오이가 전부 구부러지는 거예요. 오이는 집을 지어주지 않으면 열매가 열려도 구부러집니다. 그래서 오이 집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오이가 반듯하게 열리는 것입니다. 오이 더듬이가 집을 꼭 잡고 있어야 오이가 반듯하게 자라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오이가 자라는 것을 보고 영적 교훈을 얻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신앙의 더듬이로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붙들고 살 때 우리는 반듯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 삶에 중심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이 중심이 흔들리면 안됩니다. 오이가 집을 지어줘도 집이 흔들리면 오이가 구부러집니다. 이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것은 말씀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오이 넝쿨처럼 말씀을 꼭 붙들고 살아갑시다.

 

2. 거짓 예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거짓 예배를 지적하셨습니다. 예배가 얼마나 거짓됐는지 혐오스러울 정도이었습니다.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예배는 어떤 예배였을까요? 첫째, 살인함과 다름이 없는 예배입니다. 여기 살인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때리다’, ‘치다’, ‘죽이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쳐서 죽이는 것입니다. 예배는 은혜입니다. 폭력과 예배는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말입니다. 여러분! 옆에 있는 교우에게 푸근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을 가집시다. 교회는 사랑입니다. 교회는 절대로 싸우면 안됩니다. 교회는 아픈 사람, 괴로운 사람, 학대받는 사람이 오는 곳입니다. 둘째, 개의 목을 꺾음과 같은 예배입니다. 고대 유대인에게 개는 추함(23:18)이나 경멸스러움(삼상17:43)을 상징하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앞에 드리는 제물을 개의 목을 꺾는 것처럼 취급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개처럼 대했다는 말이 아닌가요? 예배를 함부로 드리지 맙시다. 겸손히 드립시다. 셋째,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돼지는 부정한 짐승이었습니다. 여러분! 예배를 더럽히지 맙시다. 교회를 더럽히지 맙시다. 저와 여러분은 깨끗해야 합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깨끗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예물을 드립시다. 넷째, 분향하는 것이 우상을 찬송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분향은 기도의 향입니다. 우상은 헛것입니다. 기도를 헛것으로 만들지 맙시다. 하나님을 헛것처럼 대하지 맙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길로 갔습니다. 거기서 세상의 가증한 것을 기뻐했습니다. 자기 길은 하나님의 길과 반대되는 길입니다. 멸망의 길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예배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진리에 따른 예배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처음 몇 장만 읽어봐도 인간은 사탄의 거짓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 거짓말에 살짝 끼어 넣으려고 했습니다. “당신이 주신 여자가 사과를 주어서 먹었습니다.”, “당신이 만드신 뱀이 주어서 먹었습니다.” 거짓 예배는 하나님을 거짓에 끼어 넣는 것입니다. 참예배를 드립시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3. 예배의 끝  

하나님은 거짓 예배를 드리는 자들에게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4>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심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유혹을 받도록 그냥 내버려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유혹을 택하여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유혹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거두어 가겠다는 뜻입니다. 보호막이 사라진 것입니다. 통회하지 않으면 유혹으로 망하게 됩니다.  

길선주 장로님이 목사가 됐습니다. 목사가 돼서 평양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일제가 길 목사님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신사참배를 거절했습니다. 협박하고 회유를 해도 넘어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경찰들은 길선주 목사님을 쓰러뜨릴 방안을 고안했습니다. 그것은 여성으로 유혹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찰들은 길선주 목사님을 잡아다가 평양 기생집에 갖다 놓고 예쁜 기생들이 유혹하도록 했습니다. 도망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때 길선주 목사님은 통곡을 했습니다. “하나님! 길선주 죽습니다. 길선주 죽습니다. 하나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기생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그래서 길선주 목사님은 술 방에서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통회할 때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하지만 통회하는 마음이 없는 거짓 예배자는 유혹에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둘째, 무서워하는 것을 임하게 하실 것입니다. 무서워하는 것은 전쟁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재난은 전쟁입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2002)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전쟁이 무서운 이유를 말합니다. 하나는 통제입니다. 군인은 국민을 보호합니다. 전쟁은 군인이 국민을 억압하고 통제하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이별입니다. 가족과 이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이것이 전쟁의 참혹함입니다. 거짓 예배를 드리는 자들에게 보호막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참예배를 드리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을 것입니다.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엎드려 통회하며 하나님 말씀에 떠는 자는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참 예배의 끝은 평화입니다. 하지만 거짓 예배의 끝은 전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로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끊임없이 부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4>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여러분!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가난한 마음으로, 통회하는 심령으로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배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31:19>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어느 병원에 이상한 환자 한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저더러 방귀쟁이라고 합니다. 저는 방귀를 뀌어도 소리도 안들리고 냄새도 안나는데 자꾸 사람들이 코를 막고 인상을 찌뿌려요. 뭐가 문제이지요?”

, 그렇습니까? 방귀를 얼마나 자주 뀌십니까?”

지금 이 방에 들어와서도 다섯 방이나 뀌었습니다. 그런데 별 문제가 없잖아요?”

의사는 약을 지어 주면서 다음 주에 다시 한번 오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주에 병원에 온 방귀쟁이 환자는 코를 틀어막고 말했습니다.

아니고, 내 방귀냄새가 이렇게 독한지 몰랐습니다.”

, 그래요? 드디어 코가 뚫렸군요. 오늘은 귀가 뚫리는 약을 지어 드릴께요.”

코가 막히고 귀가 막히면 자기가 뀐 방귀냄새도, 소리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코가 막히고 귀가 막혀 있으면, 아무리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알아볼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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