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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의 쳇바퀴’라는 것이 있습니다. 행복한 일이 생겨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져 또 다른 것을 욕망하게 되는 현상을 쾌락의 쳇바퀴라고 합니다. 하버드대학 심리학 교수 대니얼 길버트(Daniel Gilbert, 1957~)는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을 연구했습니다. 대니얼 교수는 로또가 주는 행복의 효과는 평균 3개월이 지나면 사그라진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출세의 꿈을 이룬 사람도 평균 3개월이 지나면 예전과 똑같은 크기만큼 행복하거나,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평균 3개월이 지나면 다시 웃을 수 있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3개월이 지나면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쾌락의 쳇바퀴’입니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 교수 리처드 이스털린(Richard Easterlin, 1926~)은 1978년 성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상품이 적혀 있는 목록에서 ‘갖고 싶은 것’과 ‘현재 가진 것’을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16년 후에 같은 참가자에게 같은 목록을 주며 다시 선택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참가자 거의 전원이 과거에 갖고 싶은 것으로 선택했던 물건을 현재 보유했습니다. 첫 설문에서 ‘갖고 있는 것’으로 선택한 물건을 현재 갖고 싶은 것으로 표시했습니다. 현대인의 일상이 ‘쾌락의 쳇바퀴’에 갇혀 있다는 걸 말해주는 연구 결과라 할 수 있겠습니다.
쾌락은 다람쥐 쳇바퀴와 같습니다. 다람쥐가 쳇바퀴 안에서 같은 자리를 계속 돌고 돌듯 사람은 계속해서 또 다른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족은 없습니다. 계속 돌아야 합니다. 돌고 돌고 계속 돌아도 끝이 없습니다. 이것이 쾌락입니다. 아이들이 게임을 합니다. 게임은 쳇바퀴와 같습니다. 계속 해야 합니다. 또 다른 것을 해야 합니다.
오늘 저는 쾌락에 관한 설교를 할 것입니다. 설교 중간에 술에 관해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 술을 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술을 마시는 분들을 비판하거나 정죄하기 위해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기도하시면서 술은 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건강에 좋고 가정에도 좋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좋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더욱 좋습니다.
전도자는 전무후무 했던 자신의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허무한 것이었습니다. 바람을 잡는다는 것은 바람을 먹는다는 뜻입니다. 지성의 끝은 바람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 지성의 끝은 바람을 먹는 것처럼 허무한 것입니다. 인간 지성을 탐구했던 전도자는 이제 육체적 쾌락을 연구합니다.
1. 쾌락은 나 밖에 없다 그래서 허무하다
전도자는 어느 날 자기 자신에게 말합니다.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려보라”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 성경은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할 것이니, 너는 네 마음껏 즐겨라.”고 번역했습니다. ‘너’는 전도자 자신입니다. 즐거움과 낙은 육체적인 쾌락을 주는 감각적인 것들입니다. ‘시험 삼아’라는 말은 시도하다 또는 입증하다(NIV - test, KJV - prove)는 뜻입니다. 전도자는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쾌락의 끝이 무엇인지 입증하기 위한 실험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육체적 쾌락의 끝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허무입니다. 1절 끝에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쾌락의 끝은 단순한 허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정 반대에 있는 것입니다. 2절에서 웃음을 미친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웃음은 감각적인 쾌락을 말합니다. ‘미쳤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할랄’입니다. ‘할랄’은 ‘찬양하다’ 또 ‘영광돌리다’는 뜻입니다. 할랄에서 할렐루야가 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아주 좋을 때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할랄’에는 미쳤다는 뜻도 있습니다. 똑같은 단어가 정반대의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저 위에 있는 것이라면 감각적인 쾌락은 저 밑에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실험이 끝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말은 감각적인 희락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저 아래 밑바닥에 있는 기쁨이 아니라 저 위에 있는 기쁨을 사모해야 합니다.
세속적인 쾌락은 사람을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 되게 합니다. 감각적인 쾌락에 빠진 솔로몬은 계속해서 ‘나!’, ‘나!’, ‘나!’라고 말합니다. 1절에 ‘나’라는 말이 3번 나옵니다. ‘너’가 두 번입니다. ‘너’도 솔로몬 자신입니다. 그러니까 ‘나’가 5번 나오는 셈입니다.
<1절>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1절부터 11절까지 ‘나’가 32번 나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39번 나옵니다. 번역할 때 7번이 생략된 것입니다. 10절만 한 번 보겠습니다.
<10절>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또 ‘나를 위하여’라는 말이 4번 나옵니다(4, 6, 7, 8절).
<4절>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6절> 나를 위하여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 위하여 못들을 팠으며
<7절> 남녀 노비들을 사기도 하였고 나를 위하여 집에서 종들을 낳기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도 내가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더 많이 가졌으며
<8절> 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원어 성경에는 ‘나를 위하여’가 6번 나옵니다. 솔로몬이 쾌락에 빠지자 계속 ‘나!’, ‘나!’, ‘나!’입니다.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쾌락은 자기중심적인 것입니다. 아주 이기적인 것입니다. 자기만 만족하면 그 뿐입니다. 나만 좋으면 그만입니다. 이것이 쾌락입니다.
이전의 솔로몬은 전혀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이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자 일천번제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일천번제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원하는 것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솔로몬은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왕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듣는 마음을 구한 것은 백성을 잘 다스리기 위함입니다.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백성을 위한 간구입니다. 만약 자기를 위했다면 명예나 돈을 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공동의 유익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 솔로몬은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이타주의자이였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평안했습니다.
<왕상 4:25>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또 솔로몬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합니다.
<대하2:1> 솔로몬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자기 왕위를 위하여 궁궐 건축하기를 결심하니라
솔로몬은 이타주의적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쾌락에 빠지자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속적인 쾌락은 이기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과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질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첫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둘째,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쾌락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자기만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과 정반대가 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쾌락은 사람을 대항합니다. 그리고 쾌락은 하나님을 대항합니다. 쾌락에 빠진 사람들을 보세요. 배우자와 자녀들이 고통당합니다. 왜요? 자기 밖에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오직 자기 외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쾌락이예요. 그래서 쾌락은 허무한 것입니다. 여러분! 쾌락의 쳇바퀴에 빠지지 마세요. 혹시 들어갔다면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 자신과 가족을 위한 일입니다. 쾌락은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입니다. 쾌락은 허무한 것입니다.
2. 어리석은 것을 붙들고 잘 살려고 하다
솔로몬의 인간 쾌락의 첫 번째 연구는 술이었습니다.
<3절>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 하여
솔로몬은 어떻게 하면 술로 자신을 기쁘게 할지 연구했습니다. 솔로몬은 술을 마시되 지혜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면서 마셨습니다.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라고 했습니다. 술을 진탕 마시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이 인간에게 주는 쾌락이 어떤 것인지 살폈다는 뜻입니다. 솔로몬은 술을 마시면서 술이 사람을 얼마나 기쁘게 할 수 있는지를 연구했습니다.
또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도 살폈습니다.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 하여’(3절 하반절)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어리석은 것을 꼭 붙들었다는 말입니다. 여기 어리석은 것은 술을 포함한 감각적인 삶을 말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것인지 알면서 어리석은 것을 붙들고 어리석은 것으로 잘 살아보겠다고 연구하고 살피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솔로몬은 전설적인 지혜자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것을 붙들고 어떻게 하면 이것으로 잘 살 수 있는지 살피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사는 것은 선한 삶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아주 나쁜 것이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보세요. 군대에 갔습니다. 부대에 좋은 일이 있으면 회식을 합니다. 술에 진탕 취하는 거예요. 안 마신다는 데 억지로 마시게 합니다. 안 마시면 협박합니다. “이 ××, 빠져가지고!” 이럽니다. 나중에는 때립니다. 때리면서 먹이는 것이 술입니다. 대학에 들어가 보세요. 학문의 전당인지 술의 전당인지 몰라요.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셔요. 밤잠 못자고 놀지 못하고 쉬지 못하고 공부해서 대학에 갔습니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12년을 공부해서 대학을 갔습니다. 그런데 입학하기 전에 선배들이 술부터 가르칩니다. 대학생으로 아름다운 정체성이 형성될 꽃다운 나이에 대학 선배들이 해주는 것이 겨우 오리엔테이션에 끌고 가서 이상한 짓거리 하며 강제로 술 먹이는 거예요. 이것이 이 사회 최고의 지성인이 하는 일입니다. 대학 오리엔테이션에서 강제로 술 먹여 입학생들이 죽어나가요. 그런데도 또 강제로 마시게 해요. 이게 지성인입니까? 술로 대학생활을 시작합니다. 술로 성인을 시작합니다. 직장은 어떻습니까? 신입사원 들어오면 폭탄주를 만들어서 먹입니다. 안마시면 강제로 마시게 합니다. 술이 때리고 협박하면서 먹여야 할 좋은 것입니까? 술로 사회생활을 시작합니다. 우리 사회가 어리석은 것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잘 살고 싶어 해요. 솔로몬이 말합니다. 어리석은 것을 붙들고 잘 살려고 했다고. 그것도 자신의 지혜를 써서.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라는 말이 히브리 성경에는 ‘술로 내 육신을 끌어당기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술이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세상은 술로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술 먹으면 신난다고! 술 먹으면 행복하다고! 술 먹으면 잘 살 수 있다고! 여러분! 세상 좀 바꾸어보세요. 술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유대전승백과」(나단 아우수벨)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을 목적으로 단단한 땅을 파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사탄이 나타나더니 “당신은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요?”하고 물었습니다. 노아는 “나는 여기에 포도나무를 심으려고 하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그것은 무슨 열매를 맺소?”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고 그 마음에 활기를 주는 포도를 맺지요.”
사탄은 “그럼 우리 함께 일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노아는 이에 동의했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양을 데려다가 죽이고 그 피를 땅 표면에 부었습니다. 또 사자를 잡아다가 죽이고는 그 피를 뿌려서 땅을 적셨습니다. 노아는 이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사탄은 역시 원숭이를 잡아다가 살해하고는 그 피를 땅 표현에 쏟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사탄은 돼지를 가져다가 죽여서 땅을 비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으로 사탄은 노아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사람은 포도주의 즙을 맛본 뒤 - 포도주를 한 컵 마신 뒤 - 양처럼 온순해지고 부드러운 마음씨를 갖습니다. 두 번째 잔을 마신 뒤에는 사자처럼 용기가 생기고 그 힘을 뽐내고 그 위세를 자랑합니다. 아주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실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꼬냑을 두 잔 마시고 한남대교를 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세 번째 잔을 마신 뒤 그는 취하여 원숭이처럼 춤을 추고 날뛰고 모험을 걸면서 바보가 됩니다. 그러나 네 번째나 그 이상을 마신 다음에는 돼지처럼 천하고 더럽고 추잡해집니다. 그는 진흙 속에 뒹구는 돼지가 되는 것입니다.
3.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다
솔로몬은 두 번째로 일을 연구했습니다. 솔로몬은 사업을 크게 벌였습니다. 4절에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고 합니다. ‘사업’은 히브리어로 마아세입니다. 마아세는 ‘생업’, ‘일’, ‘행위’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노력하다’, ‘일하다’는 뜻의 동사 아사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사업은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이루어낸 성과를 말합니다. 솔로몬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일에 몰두했습니다.
<4절>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①집들을 짓고 ②포도원을 일구며
<5절> ③여러 동산과 ④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6절> 나를 위하여 ⑤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 위하여 ⑥못들을 팠으며
<7절> ⑦남녀 노비들을 사기도 하였고 나를 위하여 집에서 ⑧종들을 낳기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도 내가 ⑨소와 양 떼의 소유를 더 많이 가졌으며
<8절> ⑩은 금과 ⑪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⑫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⑬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먼저 집들을 지었습니다(4절). 여기 ‘집’은 ‘성전’, ‘궁궐’, ‘집’ 등 다양한 종류의 건축물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솔로몬은 7년 동안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자신의 궁궐을 13년 동안 건축했습니다. 이 외에 예루살렘, 하솔, 므깃도, 게셀 등에 성읍을 건축했습니다. 그리고 각종 국고성, 병거성, 마병성을 건축했습니다. 정치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것이 토목사업입니다. 자기 업적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솔로몬도 토목 사업에 집중했습니다.
둘째, 포도원, 동산, 과원을 만들었습니다(4-6절). 여러 개의 포도원을 만들고 포도나무를 직접 심어보기도 했습니다.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고 각종 나무를 돌봤습니다. 원예에 빠진 것입니다. 과수원을 만들어 각종 유실수를 심어 열매를 따기도 했습니다.
셋째, 이스라엘 전역에 못과 수로를 팠습니다(6절).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솔로몬이 판 못의 크기는 길이가 185m 넓이가 65m, 깊이가 15m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저수지입니다.
넷째, 많은 재산을 소유했습니다(7절). 많은 노비, 종, 가축을 소유했습니다. 당시 종이나 가축은 부의 척도이었습니다.
넷째, 은금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소유한 보배를 소유했습니다(8절). 그리고 여러 지방의 보배들을 소유했습니다. 여기 보배라는 말이 세굴라입니다. 세굴라는 아주 특별한 보물이라는 뜻입니다. 솔로몬은 아주 특별하고 진귀한 보물들을 많이 소유했습니다.
다섯째, 가수들을 두었습니다(8절). 당시에는 음악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솔로몬은 개인 가수를 두었습니다.
여섯째, 첩을 많이 두었습니다(8절). 이성 파트너가 1000명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아주 심한 성적인 쾌락에 빠진 것입니다.
솔로몬은 아주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아주 많은 것을 소유했습니다. 그리고 온갖 일에 심취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자기를 위해서 일을 했고 자기를 위해서 소유했습니다. 솔로몬이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 열왕기상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상4:22-23> 22. 솔로몬의 하루의 음식물은 가는 밀가루가 삼십 고르요 굵은 밀가루가 육십 고르요 23. 살진 소가 열 마리요 초장의 소가 스무 마리요 양이 백 마리이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진 새들이었더라
이 음식은 1만 명에서 2만 명 정도가 먹는 양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의 궁궐에는 매일 매일이 대규모의 잔치가 열렸습니다. 삶 자체가 매일 매일 축제였습니다. 많은 이성들과 쾌락에 빠졌습니다. 성과제일주자가 되었습니다. 일중심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먹고 즐기고 일하고 다시 먹고 즐기고 일하며 “남 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크게, 너 높이”를 외쳤습니다.
현대인들은 숫자를 좋아합니다. 복권이 있습니다. 복권은 숫자의 조합입니다. 복이 수로 표현되는 세상입니다. 복권을 사지 말라는 것 아닙니다. 복권 사세요. 하지만 조금만 사세요. 매주 사지 마세요. 가끔 사세요. 중독 되요. 이 삼 천 원으로 일주일만 웃자는 생각으로 사세요. 더 이상은 하지 마세요.
생떽쥐베리는 「어린왕자」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하면 어른들은 진짜 중요한 것은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애의 목소리는 어떠니?”, “무슨 놀이를 좋아하니?”, “그 애도 나비를 수집하니?” 어른들은 절대로 이런 식으로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 이렇게 묻는답니다. “그 애는 몇 살이니?”, “형제는 몇 명이니?”, “몸무게가 얼마냐?”, “그 애 아버지는 돈을 얼마나 버니?” 어른들에게 “창가에 제라늄 꽃이 핀 화분이 놓여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살고 있는, 장밋빛 벽돌로 지은 예쁜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어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 한다는 것입니다. 대신 이렇게 말하면 금방 알아듣습니다. “100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 그러면 그제야 “그렇다면 굉장히 훌륭한 집이겠는 걸”하고 감탄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 조용하고 아주 점잖은 사람이야! 인품이 좋아!” 이렇게 말하면 ‘그런가 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신 이렇게 말하면 감이 확 옵니다. “그 사람 80평 아파트에 살아!” 사람을 소개하면서 “직장도 좋고 착하고 활달하고 매사에 긍정적이야!”라고 하면 “아 그래요.”하고 맙니다. 그런데 “그 청년 28살인데 포르쉐타고 다녀!”라고 하면 호감이 확 생깁니다. 현대인들은 숫자를 좋아합니다.
숫자의 허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냅니다. 40일 동안 가나안을 정탐한 정탐꾼들은 다수와 소수로 나누어집니다. 10명은 가나안 땅 거민은 신장이 장대하다는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2명은 그들은 우리의 먹이(밥)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0대 2입니다. 이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10명의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죽거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뻔했다고. 우리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결국 603,550명 중에 2명만 빼고 603,548명은 모두 죽습니다. 2명만 남습니다. 숫자는 허상입니다.
솔로몬은 치적을 쌓았습니다. 온갖 금은보석을 모았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했습니다. 온갖 쾌락에 빠졌습니다.
<10절>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11절>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모든 것이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헛되다고 했습니다. 이 말에는 솔로몬의 후회가 있습니다. 지금 솔로몬은 인생의 끝에 와 있습니다. 헛된 것을 알려고 젊음을 낭비했습니다. 헛된 것을 알려고 자신의 지혜를 낭비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일생을 쾌락의 쳇바퀴에서 돌고 돌았습니다. 한 없이 돌고 돌다보니 어느 덧 인생의 끝에 와 있습니다. 솔로몬은 죽음 앞에서 인생을 돌아보며 후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웃음을 미친 것이라고 합니다. 희락을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기뻐하면 안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웃으면 안된다고 결론 내리면 안됩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갈5:2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희락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주인되신 주님과 함께 기뻐하는 삶을 말합니다.
<마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 말씀은 “네 주인과 함께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음 속에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의 기쁨과 그리스도 있는 사람의 기쁨은 어떻게 달라야 할까요? 그것은 감각적인 쾌락이 아니라 하나님 주시는 쾌락으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이 말하는 허무한 쾌락이 아니라 허무하지 않는 쾌락을 약속합니다. 영원한 쾌락을 약속합니다. 참된 쾌락을 약속합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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