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누구도 정죄할 수 없는 은혜

조회수 : 830회

본문 : 요한복음8:1~11
주일오전예배 | 2018-09-30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인터넷은 이 시대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20년 전만 해도 일반인들은 자기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인터넷이 발달이 사람의 인권을 많이 향상시킨 것 같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인터넷의 발달이 꼭 인권을 향상시킨 것만은 같지는 않다. 오히려 인권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 것이 한 순간이다. 여론 몰이로 거짓을 진실로, 진실을 거짓으로 바꿀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순간 실수하면 악플러들이 벌떼처럼 달라붙는다. 입에 담기 어려운 온갖 욕설이 줄줄이 달린다. 한 순간에 몹쓸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로 인해 우울증에 빠져 자살하는 사람도 생긴다. 인터넷이 꼭 정죄의 바다처럼 느껴진다. 세상은 정죄의 바다에 빠져 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떨까? 한국 교회는 지나친 정죄에 빠져 있다. 내가 아니면 누구도 용납하지 못한다. 누가 잘 못하면 서로 죽이려고 달려든다. 이쪽에서 이렇게 하면 저쪽에서 정죄하고, 저쪽에서 이렇게 하면 이쪽에서 정죄한다.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며 여기저기서 소리를 지른다. 상대의 실수를 결코 용납하지 못한다. 반드시 돌로 쳐야 한다. 그래야 정의가 선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내 탓이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 네가 잘 못했다고 한다. 너무 소리가 크다. 말이 너무 많다. 그래서 교회가 가벼워졌다. 사회도 이제 교회를 함부로 대하고 있다. 날마다 싸우는 집안을 누가 존경하겠는가? 안에서는 서로 욕하고 밖에서는 불신자들이 욕하고 있다. 오늘 우리 시대 교회는 정죄의 바다에 빠져 있다. 이것이 오늘 교회의 현주소이다. 여러분! 교회 욕하지 마세요. 간곡히 부탁합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현장범이 나온다. 또 손에 돌을 들고 그를 정죄하는 사람들도 나온다.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하셨을까? 언제든지 돌을 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나, 그리고 나를 향해 언제든지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들, 그래서 상처를 주고받는 우리들의 세상, 우리들의 교회, 이 시간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정죄에 빠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광대하심을 체험해보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예수님 앞에 끌려왔다. 예수님을 유대 사회에서 제거하고 싶어 하던 그들은 말한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5) 예수님은 아무 말씀 없이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언가를 쓰신다. 갑자기 회중 가운데 침묵이 흐른다. 그 침묵 중에 예수님께서 한 말씀 하신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예수님은 한 번 더 바닥에 무언가를 쓰신다. 그러자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한 사람씩 물러간다. 모두 물러가고 거기에는 예수님과 그 여인 밖에 남지 않았다. 이때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묻으신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없다고 대답하는 여인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말씀을 읽다 보면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첫째,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린 여자가 예수님 앞에 끌려왔다. 그러면 남자는 어디 갔을까? 둘째, 예수님께서 바닥에 두 번이나 무언가를 쓰셨는데 도대체 뭐라고 쓰셨을까? 이 두 가지가 궁금하다.  

첫째 부분을 생각해보자. 왜 간음한 남자는 없고 여자만 있을까? 간음이라는 것은 상대가 있다. 혼자 짓는 죄가 아니다. 대부분의 죄는 일방적이다. 살인, 도둑질, 탐냄, 거짓증거 등등은 모두 혼자 짓는 죄다. 하지만 간음이라는 죄는 쌍방의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게다가 간음한 후에 잡힌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잡혔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남자를 고의로 놔줬든지 아니면 남자가 재빠르게 도망을 갔든지 둘 중에 하나다.  

또 간음죄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여자 보다 남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요즘은 세상이 달라져서 상황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은 2천 년 전 고대의 일이다. 여성의 인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던 시대이다. 그 고대 사회에서 여성이 먼저 간음을 주도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틀림없이 동일한 범죄자이다. 그래서 동일한 형을 받는다. 하지만 주도자는 남자이다. 죄질을 놓고 볼 때 여자 보다 남자가 더 나쁘다. 그래서 돌로 치라는 모세의 법에도 여자 보다 남자를 먼저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힘없는 여자만 가지고 이럴까?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다면 머리는 풀어지고 옷도 제대로 입지 못했을 것이다. 끌려오면서 남자들에게 수치와 모욕을 당했을 것이다. 짐승이 끌려오듯 질질 끌려왔을 것이다. 돌로 치겠다고 협박도 했을 것이다. 뒤따라오며 사람들은 더러운 ××! 돌로 쳐라. 죽여라.”하며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비판하고 욕하고 손가락질 하고 죽이라고 하고 있다. 지금 여인은 손에 돌을 든 사람들 사이에서 부끄러움과 수치 그리고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고 있다.  

사람들이 이 여인을 협박하고 있지만 이들의 진짜 목적은 예수님이었다. “예수를 시험함이러라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은 이 여인의 인생을 담보로 하여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다. 참으로 비열한 인간들이다. 마귀의 수법은 잔인하다. 그들의 말 속에 올가미가 있다. 돌로 친다는 것은 사형을 의미한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집행권이 없었다. 로마 사람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정죄할 수도 없었고 사형을 집행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돌로 치라고 하면 로마법을 정면으로 어기게 된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용서해주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하면서 모세의 법을 대놓고 어기는 꼴이 된다. 모세의 법에 간음자에 대한 분명한 심판이 명시되어 있다.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22:22>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지금 예수님은 외통수에 걸려있다. 이 여인 또한 모욕과 수치 그리고 생사의 갈림길이라는 외통수에 빠져 있다. 이 상황을 모면해도 더 이상 살 소망이 없다. 여인은 깊은 절망에 빠져 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이것이 마귀의 수법이다. 마귀는 사람을 외통수에 빠지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을 자기에게 무릎 꿇게 한다. 또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한다. 여러분! 삶의 외통수에 빠지게 되면 그것은 마귀의 수법이다. 그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주님만이 마귀의 수법을 풀 수 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스토리는 요한복음에만 나온다. 요한은 지금 우리에게 왜 이 여인의 스토리를 들려주고 있는가? 마태, 마가, 누가 어떤 복음서 기자도 들려주지 않은 이 간음한 여인의 스토리를 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가? 사도 요한은 이 여인에게서 자신을 발견한 것이 아닐까? 이 간음한 여인이 바로 내가 아닌가? 정죄에 빠진 여인이 내가 아닌가? 외통수에 빠진 이 여인이 내가 아닌가? 우리는 이 간음한 여인에게서 나를 발견해야 한다.  

아 아닙니다. 나는 아니에요. 나는 간음한 적이 없어요.”, “나는 외통수에 빠지지 않았어요.” 정말 그럴까? 우리 시대에 간음이라는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텔레비전에 수없이 야한 장면이 등장한다. 어쩌다가 인터넷 검색 좀 해 보려고 클릭 한번 하면 온갖 야한 사진이 좌우로 도배된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낯 뜨거운 장면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 많은 드라마 영화를 보면서 미남미녀의 애정씬에 단 한 번도 음란한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 있는가? 음란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느 누구도 이 죄에 대해 자유로울 수는 없다. 내 마음을 들키지 않아서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현장범이 아니라서 나는 아닌가?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토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에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와 그 여동생을 살해한다. 그는 죄책감으로 자지 못하고 먹지를 못했다. 몸은 병들고 지쳐버렸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창녀이었던 소냐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그리고 소냐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지 물었다. 소냐는 그에게 십자가를 주며 말한다. “지금 바로 거리로 나가 네거리에 서서 절을 하고 당신이 피로 더럽힌 땅에 입을 맞추세요. 그리고 온 세상을 향해 사방으로 머리를 숙이고 모두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나는 살인을 했습니다.’하고 말하세요.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새 생명을 주실 거예요.” 그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센나야 광장 쪽으로 걷던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갑자기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굳은 몸이 풀리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는 광장에서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키스를 했다. 광장에서 사람들은 라스콜리니코프의 행동을 보면 취한 사람으로 비아냥거렸다. 사람들은 비웃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삶은 새롭게 시작되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간음한 여인에게서 우리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한다. 물론 나는 간음을 안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정죄의 세상에 빠져 있다. 삶의 외통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서로를 욕하고 비난하고 침 뱉는 세상이다. 비난의 광장에 홀로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정죄의 광장에 홀로 선 나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거기서 나를 발견할 때 내 곁에 서 계신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 삶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창조적 구원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  

둘째, 예수님이 바닥에 손가락으로 쓰신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예수님께서 땅에 무어라고 쓰셨는지 기록이 없다. 단지 손가락으로 바닥에 쓰셨다고만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성경학자들이 여러 가지 다양한 생각을 했다. 어떤 학자들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쓰셨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십계명을 썼을 것으로 생각한다. 십계명 중 칠계명에 간음하지 말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거기 모인 사람들의 죄목을 일일이 썼을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살인, 간음, 도적, 거짓 증거 등등 죄목을 순서대로 쓰셨을 것으로 생각한다. 심지어 거기 있는 사람들의 이름까지 쓴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부끄러워서 돌아갔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해석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부분에 대해 성경이 말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기자가 침묵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말씀을 더 깊이 살펴야 한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바닥에 쓰셨다고 했다. 왜 예수님은 손가락으로 쓰셨을까? 막대기가 없으셔서 그랬을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 기자는 지금 바닥에 쓰신 글이 아니라 예수님의 손가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6절 하반절>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한은 손가락이란 말을 정확하게 두 번 사용하고 있다. 굳이 손가락이란 말을 써야 했을까? 또 왜 예수님은 나뭇가지가 아니라 손가락으로 쓰셨을까? 손가락이 주는 의미가 있다.  

출애굽기 819절에 손가락이라는 말이 나온다. 애굽에 열 가지 재앙 중 세 번째 이 재앙이 내린 후의 일이다. 애굽의 요술사들이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재앙이었다. 요술사가 바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여기서 '권능'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손가락이라는 뜻의 의역이다. 성경 아래를 보면 이 부분에 손가락이라고 각주를 달아 놓았다.  

시편 83절에도 손가락이란 표현이 나온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여기 주의 손가락이란 말은 주의 권능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그런데 시인은 손가락으로 창조하셨다고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가락은 곧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관용적 표현이다.  

출애굽기 3118절에도 손가락이라는 말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끝부분에 친히라는 말이 히브리어로는 손가락으로이다. 여기도 성경 번역가들이 각주를 달아 놓았다. 십계명 두 돌판(4:13)은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친히 쓰셨다.  

다니엘서에도 손가락이란 말이 나온다. 벨사살 왕이 1000명의 귀인을 초청해 놓고 술잔치를 할 때였다.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금은 그릇으로 술을 마셨다. 벨사살은 알지도 못하는 금, , 구리, ,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했다. 이 때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난다.  

<5:5-6> 5.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6. 이에 왕의 즐기던 얼굴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친지라  

심판의 손가락이다. 참 놀랍지 않은가? 사람들의 말처럼 예수님께서 바닥에 십계명을 쓰신 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죄목을 일일이 열거하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슬금슬금 물러갔을까? 당시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을 텐데 참으로 이 사건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사도 요한은 이 세상 정죄의 현장에서 바닥에 무어라 쓰시는 예수님의 손가락에 자신의 시선을 고정시켰다. 손가락질 하면서 소리 지르는 모욕과 비난의 현장에서 다시 바닥에 무언가를 쓰시는 예수님의 놀라우신 그 손가락에 자신의 마음을 고정시켰다. 사도 요한은 지금 예수님의 손가락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가락을 발견했다. “하나님의 손가락”, “권능의 손가락”, “세상을 만드신 손가락”,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린 손가락”, “벨사살 왕을 심판하신 손가락”, “우리를 치료하시는 손가락”, “! 저 손가락  

그 손가락이 움직이자 살기등등했던 사람들은 잠잠해졌다. 7절에 그들이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그 손가락이 움직이자 정죄의 현장에 침묵이 흘렀다. 여러분! 이 손가락은 우리를 치료하는 하나님의 권능이다. 이 손가락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손가락은 병들과 상하고 찢기고 모욕과 상처로 얼룩진 우리 인생을 재창조하는 창조의 손가락이다. 이 손가락이 정죄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는 여인을 구원하신다. 이 손가락이 여인의 삶을 새롭게 한다.  

<96-8> 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예수님의 이 크신 권능 앞에 모든 정죄하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과 여인만 남았다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정죄하는 사람들은 다 물러갔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홀로 남은 간음한 여인 옆에 서 계셨다. 예수님께서 지금 저와 여러분 옆에 앉아 계신다. 우리 삶 속에서 함께 서 계신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묻으셨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10)  

여인이 대답한다. “주여! 없나이다.” “주님! 아무도 없고 저 혼자만 남았습니다.” “오 주님! 절망에 빠졌었는데 이제 살길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죄 있는 사람들은 다 물러갔는데 죄가 없으신 한 분이 남아 있군요!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만이 나를 돌로 칠 자격이 있지 않나요!” 침묵이 흘렀다. 그때 다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예수님도 돌을 내려놓으셨다. 여러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이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 여인을 돌로 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런데 나도 너를 돌로 치지 않는다.”라고 하신다.  

돌로 치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간주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죄인이 되는 순간이다.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포기하는 시간이다. 영적으로 십자가를 지시는 순간,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순간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여기에 구원이 있다. 여기에 놀라운 은총이 있다. 예수님은 나를 정죄하지 않으신다.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에 죄를 정했다고 했다. 여기서 정하다’(카타크리노)는 말이 헬라어로 유죄를 선고했다’, ‘불리한 판결을 내리다’, ‘정죄했다는 뜻이다. 사람은 죄가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 이치대로 한다면 인간이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죄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죄가 없는 예수님께 유죄를 선고하셨다. 예수님께 불리한 판결을 내리셨다. 사람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셨다. 사람 대신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드시고 예수님을 심판하셨다. 예수님은 기꺼이 죄인의 죄를 담당하시고 죄 있는 모양으로 죽으셨다. 그리고 더 이상 우리에게 죄를 묻지 않으셨다. 기억도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8:12>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32:34>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것이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완전한 구원이다.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예수님은 우리 죄를 다시는 묻지 않으신다. 그러면 우리도 다시 우리 죄를 기억할 필요가 없을까? 이제 우리는 마음대로 살아도 될까? 사람들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며 죄용서 받았으면 피차 다 있는 것이 좋은 거라고 말한다. 그런데 모세는 여호와를 거역한 일을 잊지 말라고 한다.  

<9:7>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 다시는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신다. 다시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죄를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의인이다. 하지만 죄인된 기억을 잊어서는 안된다. 죄인된 심령으로 살아야 한다.  

2007년도에 <밀양>이라는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다. 기독교를 비꼰 영화이다. 그래서 기독교 단체에서 상영금지 요청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우리 사회에 이런 영화가 만들어졌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내용은 이렇다.  

신애는 남편을 잃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아들을 데리고 새 삶을 시작한다. 신애는 밀양에서 돈이 좀 있는 체 하며 산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다니는 학원 원장이 신애의 돈을 노리고 아들을 유괴하고 살해한다. 신애는 망연자실한다. 그때 이웃의 권유로 교회에 출석한다. 신애는 교회에서 새로운 삶을 산다. 신앙으로 마음으로 평안을 누린다. 가정 예배도 드린다. 노방 전도도 나간다. 어느 날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겠다면 교도소로 면회를 간다. 신애는 살인자에게 내가 오늘 여기 찾아온 건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해주러 왔어요.”라고 말한다. 그때 살인자가 이렇게 말한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준이 어머니한테 우리 하나님 아버지 이야기를 듣게 되니 참말로 감사합니다. 저도 믿음을 가지게 되었거든 예. 하나님이 이 죄 많은 놈한테 손 내밀어 주시고, 그 앞에 엎드려가 지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제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도하고, 하루하루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더.” 살인범의 말에 신애는 어안이 벙벙해진다. 면회를 마치고 나온 신애는 주차장에서 쓰러진다. 기가 막혔나 보다. 그리고 신애는 변한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미친 사람처럼 두 손으로 의자를 두드린다. 기도모임을 하는 교우의 집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기도 한다. 야외집회 기도시간에 <거짓말이야>라는 음반을 틀어 조롱한다. 교회 장로를 유혹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신애는 자해를 하고 정신병원신세를 지게 된다. 영화는 신애의 집 마당에서 머리를 자르면서 끝이 난다.  

우리 시대에 왜 이런 반기독교 영화가 만들어졌을까? 그리스도인은 누구도 정죄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그런데 죄인이었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처럼 자신의 죄를 잊어버렸다. 그리고 마음대로 산다. 은혜를 받고 마음대로 산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죄인 되었던 신분도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다.

이전글 의인의 길, 악인의 길
다음글 쾌락은 쳇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