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기이한 은혜로 소원의 항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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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107:23-32
주일오전예배 | 2018-11-18
설교자 : 서요한 목사

미국 루이지애나 주의 나병환자 재활원 원장인 폴 브랜드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폴 브랜드 박사는 Hansen's 병의 세계적인 권위자입니다. 그가 영국으로 출장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여러 지방에서 업무를 본 뒤에 기차를 타고 여러 시간을 여행해서 런던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 날 밤, 호텔에서 옷을 갈아입고 양말 한 짝을 벗는 중에 갑자기 발뒤꿈치에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분은 나병의 권위자입니다. 인도에서 수많은 나병환자들을 시술했습니다. 그는 나병의 피 고름을 손으로 만지면서 치료하기도 했습니다. 순간 의심이 뇌리를 스쳐갔습니다. 기계적으로 일어나서 날카로운 핀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복숭아 뼈 아래 부분을 찔러 보았습니다. 아무런 감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핀을 한 번 더 깊이 찔러 봤습니다. 찔린 부분에서 피는 나왔는데, 감각이 없었습니다. 나병에 감염된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 날 밤, 브랜드 박사는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내가 나병 환자가 되었구나, 나병 환자로서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두려운 마음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서 살아가야 할 버림받고, 외로운 자기의 인생의 말로를 그려 보았습니다. 가족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고통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아 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은 오지만 브랜드 박사의 마음속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다시 한 번 더 자신의 발을 힘껏 찔러 보았습니다. 그 순간 너무나 아파 아악!”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어제 장시간 기차 여행을 하면서 좁은 자리에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신경의 한 부분이 눌려 호텔의 방에 올 때까지 그 마비가 풀리지 않았던 것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브랜드 박사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아픔을 느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내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 날 이후로, 브랜드 박사는 실수로 손가락을 베일 때에도 그 고통을 감사했습니다. 발을 잘 못 디뎌서 발목이 삐끗하여 정말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와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신경이 멀쩡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몸의 고통을 느끼십니까? 마음의 아픔을 느끼십니까? 그 고통과 아픔이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고통과 아픔은 여러분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통과 아픔의 반대편에 있는 기쁨과 행복도 느낄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에게 기쁨의 날이 올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저는 추수감사절이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매년 추수감사절이 다가올 때면 저는 감사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감사에 대한 책들을 읽습니다. 아픈 사람들의 책을 읽습니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가 얼마나 감사를 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감사할 일이 정말 많구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함께 감사합시다. 뭘 감사하나고요? 그냥 감사합니다. 살아 있는 것, 건강한 것, 먹고 사는 것, 예수님 믿게 된 것, 구원받은 것 감사합시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1. 영혼의 항해자와 거센 바다

23절에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이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을 문자 그대로 본다면 배에서 일을 하는 선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선원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이 말씀은 비유입니다. 시인은 인생을 항해에 비유했습니다. 시인 박정대 씨는 인생은 빌린 배라고 했습니다. 가수 패티김 씨의 <인생은 작은 배>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패티김은 인생을 지금 우리들이 타고 가는 시간이라 하는 무정한 배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힘들고 험한 직업 중에 하나가 선원입니다. 선원은 바다와 바람과 파도와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인생을 고해라고 했습니다. 인생에는 수없이 험한 파도가 일어납니다. 인생은 그 험한 파도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네 인생은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배와 같습니다. 사람은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인생이라는 배를 타고 항해하는 선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이 땅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크리스천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인생이란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4).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도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배에 비유합니다. 교회를 구원의 방주라고 합니다. 노아 홍수 때 노아와 그 가족들은 방주를 통해 구원받았습니다. 모세는 나일강을 갈대로 만든 방주로 타고 건너갔습니다. 교회는 구원 방주입니다. 교회는 영혼을 태우고 세상을 항해하는 배입니다. 목적지는 영원한 집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영원한 집을 향해 항해하는 배입니다. 우리는 그 배를 타고 천국으로 가는 항해자들입니다. 교회는 영혼의 배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배에 타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은 오늘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왜 이 메시지를 교회에 주셨을까요? 천국으로 가는 배를 사탄이 가만둘 리가 없습니다. 영혼의 배가 가는 항로에 사탄의 모레 톱이 있습니다. 사탄의 암초가 있습니다. 사탄이 만들어 놓은 소용돌이가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란 배를 타고 가다가 암초를 만나시면 내리지 마세요. 그것은 여러분들을 천국까지 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탄의 방해입니다. 교회를 다니시다가 사람 때문에 실망하지 마세요. 사람 보지 마세요. 예수님만 보세요.  

신앙생활은 항해와 같습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을 집을 떠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나그네에 비유합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영원한 본향인 천성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나그네길입니다. 여러분! 천성을 향해 날마다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그런데 성경은 신앙생활을 항해에도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종종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항해 중에 여러 가지 일을 만납니다. 사도 바울에게 꿈에도 소원은 로마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은 배를 타고 바울이 꿈에도 그리던 로마로 가는 모습으로 마쳐지고 있습니다. 여러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면이 항해입니다. 신앙생활은 영적 항해입니다. 뱃사람들의 바다 위의 항해는 모든 크리스천의 영적 항해에 대한 아주 훌륭한 예표이며 묘사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항해자들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항해자들입니다. 우리는 영적 항해자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소원의 항구로 항해하고 있습니다.  

항해자들은 바다가 늘 잔잔하길 바랍니다. 고요하길 바랍니다. 평안하길 바랍니다. 파도가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바람이 항상 원하는 곳으로 불어주길 바랍니다. 암초를 만나길 바라지 않습니다. 당연히 태풍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인생 항해자이든지 믿음의 항해자이든지 그리고 함께 신앙 생활하는 교회 공동체이든지 누구나 바다는 고요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소원의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별일 없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와 같은 바다는 없습니다. 제가 세상을 조금 살아보니 태풍이 없는 바다는 없습니다. 파도가 없는 바다는 없습니다. 늘 맑은 날이 아닙니다. 항상 좋은 날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다에 바람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바람이 있든 없든, 파도가 있든 없든, 날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믿음의 항해를 계속 하는 것입니다. 중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계속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다에 어떤 일이 생겨도 중단하지 않는 영혼의 항해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 시인은 항해자들이 만날 수 있는 아주 강력한 바람과 거센 파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25> 여호와께서 명령하 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 도다  

이 말씀을 <현대어성경>명령 한번 내리시면 미친 듯 바람이 불어대고 파도가 휘몰아쳐라고 번역했습니다. 바다에는 미친 바람과 휘몰아치는 파도가 있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렵게 하기 위해 바다에 광풍과 큰 파도를 일으키시는구나!’라고 말입니다. “이제 보니 내 인생이 어려운 것은 하나님 때문이구나!”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이 말씀은 시인이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을 인정한 고백입니다. 시인의 고백은 인생의 바다에 광풍과 거센 파도가 일어나도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 아래에 있다면 결코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광풍과 큰 파도도 우리의 영적 항해를 중단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파도는 항해자들을 롤러코스터처럼 흔들어놓습니다.  

<26>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 도다  

하늘가장 높은 곳을 말합니다. ‘깊은 곳가장 깊은 곳을 말합니다. 하늘과 깊은 곳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 항해 중에 아주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떨어져 가장 깊은 곳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주 기쁘고 좋을 일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아주 힘들고 나쁜 일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파도는 우리를 롤러코스터처럼 들었다 놨다합니다. 그 떨어짐이 얼마나 심한지 우리 영혼을 녹아버릴 정도입니다. 바람과 파도 앞에서 인간은 무력합니다.  

<27>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파도 앞에서 항해자들은 이리 저리 구릅니다. 술에 취한 자처럼 비틀거립니다. 인생 항해술이 소용없습니다. 지각(호크마)이라는 말은 인간의 경험, 지혜, 능력, 재능, 지식 등을 총망라한 단어입니다.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진다고 했습니다. 빠진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빨려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지각(지혜)이 빨려 들어갑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능력이 바람과 파도 앞에 철저하게 무력해지는 모습입니다. 항해자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미친 바람과 거센 파도 앞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마세요. 중단하지 마세요. 항해를 계속하세요.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결코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2. 기도하는 항해자, 은혜로운 선장

광풍과 파도 앞에서 항해자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것들을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 힘들고 더 지치게 됐습니다. 무력해졌습니다. 그때 항해자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28절 상반절>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  

부르짖었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차아크입니다. 차아크는 소리 질러 간청하다’, ‘큰 소리로 기원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부르짖음은 일반적인 외침과는 다른 것입니다. 아주 날카로운 소리를 지른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감정 중에서 가장 필사적이며 극도의 요구를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시인은 아주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이렇게 한번 기도해봅시다. “주여, 아아악! 제가 죽겠어요.” 목사가 광신도구나! 교인들을 광신도로 만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다급할 때는 다급하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힘들 때는 아주 간절하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힘들 땐 하나님! 저 죽겠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저는 기도를 <영적 잠수>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깊이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샌가 마음이 평안해져요. 마음이 좋아져요. 슬펐었는데 갑자기 기쁨이 솟아요. 힘이 없었는데 생기가 나요. 기도는 고민, 아픔, 갈등, 고통, 괴로움이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깊이 잠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의 도피가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을 이기는 것입니다. 걱정이 있는데 기도하다 보면 걱정을 이기게 돼요. 답답한데 기도하다 보면 소망을 갖게 돼요. 속이 상한데 기도하다 보면 마음이 치료 돼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아보세요.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힘이 충전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현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기도로 현실을 도피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로 현실을 이기자는 것입니다. 기도는 영적 잠수입니다.  

20041226일 아침 758분에 인도양에 리히터 규모 9.1의 강진이 일어났습니다. 2011311일 일본 지진과 비슷한 규모입니다. 10~20m 정도의 헤일이 일어났습니다. 집체 보다 큰 파도입니다. 이 지진으로 11개국에서 20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수백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관측사상 최악의 피해입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기록들이 있습니다. 스쿠버 다이버지에 실린 내용입니다. 인도네시아 아체 지역에 쓰나미가 지나갈 때이었습니다. 일본인 타다 씨와 동료들이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이빙 중에 매우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타다 씨는 그냥 바다 위로 커다란 보트가 지나가는 줄 알았답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냥 바다 속은 정상이었습니다. 다이빙이 끝나고 해변으로 돌아오자 모든 건물은 사라지고 세상이 온통 진흙으로 덮여있었습니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됐습니다. 어떤 스킨 스쿠버 다이버는 바다 속이 요동쳐서 오히려 재미와 스릴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바다 속에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 다이버도 있었습니다. 세상이 뒤집어질 때 바다 속도 요동은 했습니다. 혼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타격은 없었습니다. 스쿠버 다이버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쓰나미가 있었다. 하지만 스쿠버 다이버들은 안전했다.” 인생은 영적인 잠수가 필요합니다.  

스티브 도나휴의 인생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도나휴는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이라는 책도 썼습니다. 도나휴는 인생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이라는 책에서 장수거북을 소개합니다.  

장수거북은 다른 바다거북보다 세 배 혹은 네 배까지 크게 자랍니다. 몸무게가 900kg이 넘기도 합니다. 이 장수거북의 잠수 능력은 단 한 번 호흡으로 수심 1,000미터 이상 잠수하는 대형 고래와 맞먹습니다. 바다거북은 평상시에 수심 300미터 이상 잠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끔, 잠수 시간의 1퍼센트 정도는 1,000미터도 넘는 가장 깊고 컴컴한 바다를 탐색하는 데 씁니다. 과학자들은 위성 전송 데이터 분석기를 이용해 장수거북의 놀라운 성향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장수거북이 그처럼 깊이 잠수해 들어가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앞으로도 이 엄청난 크기의 장수거북이 놀라우리만치 깊은 심해로 파고드는 진짜 이유를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가끔 장수거북이 1,000미터 이상 바다 깊이 잠수해 들어갈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수거북은 잠수시간의 1퍼센트는 1,000미터 이상 바다 속에서 있습니다. 한 번 숨을 쉬고 약 48분 동안 한 시간 가까운 시간을 숨을 꾹 참고 1,000미터 이상 깊이의 바다 속을 헤엄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본인도 모를지 모릅니다.  

장수거북은 정말 신비한 존재입니다.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장수거북은 그 어떤 바다거북보다 빠르게 헤엄칩니다. 덩치에 비해 아주 날렵합니다. 상어의 위협에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아주 위풍당당합니다. 그 어떤 거북보다 멀리 이동하고 먹이를 찾는 범위도 가장 넓습니다. 두꺼운 지방 조직이 있어 북극해 근처의 차가운 물에서도 따뜻한 체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장수거북은 16세기 프랑스의 한 과학자가 거북으로 정정하여 분류할 때까지 전설 속에만 나오는 큰 바다뱀으로 오인 받을 만큼 독특하고 신비로운 생명체입니다. 바다에 거북 종류가 7가지입니다. 6종은 모두 바다거북과에 속합니다. 그런데 장수거북은 홀로 장수거북과에 속합니다. 거북은 거북인데 다른 거북과 완전히 구별됩니다. 이 거북의 능력이 어디서 올까요? 이것은 순전히 제 추측입니다만 그의 1,000m 잠수의 능력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유는 모를 수 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그럴 만한 동기가 있으리라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인생에서 깊이 잠수할 수밖에 없는 시기를 겪습니다. 직장 생활, 돈 문제, 결혼생활, 자녀문제, 집안 문제, 미래의 문제, 건강의 문제 등으로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해답을 찾으라며 영적인 신비한 공간으로 나를 밀어 넣습니다. 답을 찾기 위해 내면의 숨겨진 어둠 속으로 던져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영적 잠수를 하는 것입니다. 삶의 도피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삶의 여러 가지 문제 앞에서 영적인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꾹 참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대면하도록 영적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잠수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장수거북처럼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인생의 답을 찾는 것입니다. 기도는 영적인 잠수입니다.  

고대 셈족언어에서 분노라는 말은 원래는 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 코라는 말이 235회 나옵니다. 그 중에 25회를 라고 번역했습니다. 나머지 210(42번은 사람이 주어; 168번은 하나님이 주어)는 분노라고 번역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다는 말은 원래 코가(혹은 숨이) 길다는 뜻입니다. 숨을 오래 참는 것입니다. 숨이 코를 통과하는 시간이 길고 고른 것은 그만큼 여유롭고, 느긋한 마음상태를 가리킵니다. 사실 화가 난 사람의 숨결은 거칩니다. 빠릅니다. 분노가 심하면 심할수록 숨이 가빠집니다. 여러분! 우리는 숨을 오래 참는 사람이 됩시다. 영적 호흡을 길게 참고 하나님 앞으로 깊이 잠수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24시간입니다. 1퍼센트이면 10~15분정도입니다. 긴 시간이 아닙니다. 짧은 시간입니다. 하루 10분에서 15분 정도 영적 잠수를 하세요.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 잠수하지 마시고 미리 잠수하세요. 그래서 미리 힘을 비축해 놓으세요. 영혼의 항해자는 깊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애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고통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28>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29>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비슷한 말씀이 6절에도 있습니다.  

<6>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건지시고라는 말이 히브리어의 의미는 끌어내다‘, ‘뽑아내다’, ‘잡아채다’, ‘분리시키다입니다. 고통 중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고통 가운데서 우리를 끌어내십니다. 고통 중에 간절히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위에서 낚아채십니다.

 

3. 소원의 항구

영혼의 항해자가 결국 이른 곳이 어디입니까? 그곳은 소원의 항구입니다.  

<30>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여호와께서 영혼의 항해자들을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은혜로운 선장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영혼의 항해자들의 최고의 선장님이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키를 우리의 은혜로운 선장님이신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여기 바라는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헤페츠입니다. 헤페츠는 염원, 소원, 바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라는 항구라는 말을 개역 성경은 소원의 항구라고 번역했습니다. 저는 이 소원의 항구라는 말이 너무 좋습니다. 소원은 우리가 바라는 인생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인생의 목적지가 있으십니까? 아마도 있으실 것입니다. 아니 반드시 목적지가 있어야 합니다. 목적지가 없는 인생처럼 불쌍한 인생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간절히 바라는 그 소원의 항구에 여러분의 은혜로운 선장님의 인도하심으로 꼭 도착하시기 바랍니다.  

항구라는 곳은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항구는 오랜 항해로 지친 항해자들이 안식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곳입니다. 또 항구는 짐을 내리는 곳입니다. 또 항구는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항구는 새로운 짐을 싣는 곳입니다. 항구는 쉬는 곳입니다. 에너지를 충전하는 곳입니다. 짐을 내리는 곳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짐을 싣는 곳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원의 항구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죄의 검고 묵은 짐을 내려놓습니다. 아픔의 짐, 고통의 짐, 슬픔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정말 믿으십니까? 믿는다는 말은 내 인생의 모든 아픔의 짐을 내려놓는다는 말입니다. 그대로 짐을 지고 계시면 안됩니다. 다 내려 놓으셔야 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짐을 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마르지 않은 은혜가 있습니다. 샘 솟는 기쁨이 있습니다. 소원의 항구라는 말은 기쁨의 항구라는 말입니다. 기쁨을 싣는 항구입니다. 또 예수님에게는 권세와 사랑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은혜로운 짐은 모두 공짜입니다. 그냥 값없이 내 배에 실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으신다면 여러분의 모든 짐을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새로운 짐을 실으시길 바랍니다.  

소원’(헤페츠)이라는 말은 가족이 있는 곳, 고향, 무덤, 최종 목적지라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천국을 소원의 항구라고 하고 싶습니다. 천국에는 제 영원한 가족이 있습니다. 거기에 제 아버님이 계십니다. 거기에 제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제 딸이 있습니다. 저는 거기로 돌아갈 것입니다. 거기서 꿈에도 드리던 사람을 만날 것입니다. 저는 거기서 이 세상의 모든 수고의 짐을 내려놓을 것입니다. 고단한 짐을 다 내려놓을 것입니다. 거기는 이 세상에서 불던 어떤 광풍도 불지 않을 것입니다. 공포도 없습니다. 그곳은 아내도 병들지 않고 자녀도 아프지 않을 것입니다. 머리를 썩일 필요도 없습니다. 마음의 근심도 없습니다. 우리를 흔들던 이 세상의 모든 폭풍에서 벗어나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영원히 쉴 것입니다. 그 항구는 또 다른 항해를 할 필요가 없는 항구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영원한 소원의 항구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찬양합시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3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32> 백성의 모임에서 그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그를 찬송할지로다  

무엇을 찬양할까요? 하나님의 기이한 인도하심을 찬양합시다.  

<24>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기이합니다. 신비합니다. 놀랍습니다. 우리는 그 기이한 은혜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답답합니다. 어떻게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로운 선장님, 최고의 선장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우리 인생의 키를 맡깁시다. 그러면 우리는 결국 소원의 항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미국 시골의 통나무집에 한 병약한 남자가 살았습니다. 그 집 앞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때문에 집 출입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집 앞의 바위를 매일 밀어라!"

그 때부터 그는 희망을 가지고 매일 바위를 밀었습니다. 8개월이 지났습니다. 점차 자신의 꿈에 회의가 생겼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바위의 위치를 자세히 측량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바위가 1인치도 옮겨지지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현관에 앉아 지난 8개월 이상의 헛수고가 원통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이 찾아와 그 옆에 앉으며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왜 그렇게 슬퍼하지?"

그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지난 8개월 동안 희망을 품고 바위를 밀었는데 바위가 전혀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네게 바위를 옮기라고 말 한 적이 없단다. 그냥 바위를 밀라고 했을 뿐이야. 이제 거울로 가서 너 자신을 보렴."

그는 거울 앞으로 갔습니다. 곧 그는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거울에 비춰진 남자는 병약한 남자가 아니라 근육질의 남자였습니다. 동시에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지난 8개월 동안 밤마다 하던 기침이 없었구나! 매일 기분이 상쾌했었고, 잠도 잘 잤었지.."

하나님의 계획은 '바위의 위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변화는 '바위를 옮겼기 때문'이 아니라 '바위를 밀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바위가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 바위 때문에 기도하고 단련되어 새롭게 되었습니다. 바위가 싫었지만 바위 속에는 하나님의 기이한 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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