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살아 있는 책, 성경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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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히브리서4:12~14
주일오전예배 | 2018-12-09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여러분! 성경을 사랑합시다. 성경을 읽읍시다. “매삼주오매일 3장씩, 주일은 5장을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1년에 성경을 1독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1년에 1번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읽을까요? 성경은 아주 적극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2:7) 여기 생각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보이에오입니다. 보이에오는 계속해서 곰곰이 생각하고 검토한다는 의미입니다. 한번만 생각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입니다. 계속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우리말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주께서 모든 일에 그대에게 총명을 주실 것이다.”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께서는 모든 것을 깨닫는 능력을 그대에게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곰곰이 생각하며 읽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일에 깨닫는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성경을 적극적으로 읽으세요. 그러면 삶이 머리 아픈 일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 정원에 감나무가 있습니다. 가을만 되면 감을 따는 할아버지 할머니 노부부가 계십니다. 두 분 다 나이가 족히 70은 넘어 보입니다. 할아버지가 장대로 감을 따십니다. 장대로 안 되는 것은 올라가서 따십니다. 70이 넘은 할아버지가 아슬아슬한 곳까지 올라가십니다. 두 분이 아주 열심히 감을 따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읽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질 때를 기다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떨어진 감은 다 뭉개집니다. 그래서 떨어진 감은 먹지 못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읽으면 안 됩니다. 감은 따서 먹는 것입니다. 성경도 감처럼 따서 먹어야 합니다. 성경은 적극적으로 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적극적으로 읽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것이 무슨 뜻일까?’ 답을 찾아가며 읽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읽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읍시다. 성경을 사랑합시다. 성경 속에 여러분의 인생의 미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습니다. 성경은 메마른 세상 광야에서 지친 우리들에게 활력을 주는 하늘의 만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이 선 예리한 검입니다. 이 검은 관절과 골수는 물론 혼과 영까지 꿰뚫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경은 광야 세상에서 상하고 병든 우리 영혼의 치료제이며 치료 도구입니다. 성경이 죄악으로 신음하는 이 시대와 이 시대의 영혼들을 치료하길 소망합니다.

 

1. 성경이 당신을 비평하게 하라  

지난주에 이어 12절 말씀을 계속 생각해보겠습니다. 12절 끝부분에 또 마음의 뜻과 생각을 판단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판단하는 대상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마음일까요? 성경이 사람의 마음을 판단한다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솔로몬은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4:23). 성경은 생명을 관리하는 책입니다. 또 마음은 사람의 인격의 핵(중심)입니다. 마음은 사람의 영적인 내면입니다. 마음은 지(지성) (감정) (의지)의 좌소입니다. 따라서 마음이라는 말은 사람 자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을 판단한다는 것은 사람 자체를 판단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말씀이 사람을 판단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판단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크리티코스(κριτικός)입니다. 크리티코스는 판단할 수 있는’, ‘비평할 수 있는’, ‘심판할 수 있는’, ‘분별할 수 있는이라는 뜻입니다. 영어의 ‘critical’(비평적인)이라는 말의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사람의 마음을 판단한다는 것은 말씀이 사람의 마음을 비평한다는 뜻입니다. 또 말씀이 사람의 마음을 분별한다는 뜻입니다. 이 비평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비평입니다. 이 비평은 사람에게 타격을 주고 상처를 주기 위한 부정적인 비평이 아닙니다. 사람을 바로 세우기 위한 아름답고 좋은 비평입니다. 아주 은혜로운 비평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 하나님! 당신은 날이 날카로운 칼을 선택했습니다. 당신은 능력 있게 인간 마음의 딱딱한 껍질을 관통하여 당신의 사상의 칼날로 나의 마음을 찌르셨습니다. 내가 당신께 간구 하옵나니, 나의 이 완악하고도 완악한 마음을 당신의 은혜의 거룩하고도 강력한 칼로서 찌르소서. ! 주님, 찌르소서.” 말씀으로 마음을 찔리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가장 위대한 비평가입니다. 성경은 가장 완전한 비평가입니다. 성경은 사랑의 비평가입니다. 성경은 자비로운 비평가입니다. 성경은 살리는 비평가입니다. 성경은 생명의 비평가입니다. 성경은 세우는 비평가입니다. 그런데 사탄도 비평가입니다. 사탄의 다른 이름은 마귀입니다. 마귀가 헬라어로 디아볼로스입니다. 디아볼로스는 중상자’, ‘수다쟁이’, ‘고발하는 자’, ‘헐뜯는 자’, ‘비방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비평가입니다. 그런데 나쁜 비평가입니다. 사탄은 어둠의 비평가입니다. 사탄은 저주의 비평가입니다. 사탄은 죽음의 비평가입니다. 사탄이 비평하는 이유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사탄은 죽이는 비평가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살리는 비평가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우리를 비평하게 합시다. 성경 앞에 섭시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를 비평하게 합시다. 마귀가 우리를 비평하게 하지 맙시다. 마귀 앞에 서지 마세요. 세상 앞에 서지 마세요. 세상으로 가지 마세요. 성경 앞에서 서세요. 성경으로 돌아가세요. 하나님 앞에 서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비평하실 것입니다. 성경이 인정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성경을 가진 사람이 되세요. 성경을 가진 사람이 참 사람입니다. 성경을 가진 사람이 참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성경을 유일한 복음으로 삼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오직 한권의 책, 성경을 가지세요. 여러분! 책 중의 책인 성경을 가진 사람이 되세요.  

서울 강남에 소망교회에 곽선희 원로목사님이 계십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설교자 중에 한 분이십니다. 목사님의 외삼촌인 이병원 장로님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이 장로님은 북에서 월남하여 남한에서 병원 원장까지 하신 분이십니다. 이 장로님은 굉장히 과묵하신 분이었다고 합니다. 말이 굉장히 없으셨다고 해요. 하루 종일 말을 거의 하지 않으셨습니다. 친구를 만나면 이 장로님에게 오늘은 몇 마디 했는가?”라고 친구가 물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한 이 장로님은 손에서 책을 놓는 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늘 책을 달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진찰실에도 응접실에도 책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곽선희 목사님이 가보니까 책이 한 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책은 모조리 치워지고 단지 진찰실 책상 위에 큼지막한 글씨로 써진 성경책 한 권만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곽 목사님이 그 이류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장로님이 나이 여든이 넘으니 이제는 어떤 책도 필요가 없구나. 신문을 읽거나 뉴스를 들을 필요도 없어. 이제 내가 읽어야 할 책은 오직 성경뿐이야.”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다보니 다른 책이 재미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나이가 들어도 읽을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은 생애를 오직 성경말씀만 읽으며 살다가 90세에 하늘나라에 가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오직 한 권의 책 성경을 가진 사람이 되세요. 성경이 여러분을 비평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으로 온전하게 할 것입니다.

 

2. 성경 앞에 항복하라  

성경이 나를 비평할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항복해야 합니다.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지으신 것은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말합니다. ‘그 앞에하나님 목전에서’, ‘하나님 면전에서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얼굴 앞에 그 모습이 그대로 들어나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숨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하나님 앞에 숨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사람만이 숨으려고 합니다. 감추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자 아담이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외식했습니다. 원망했습니다. 남의 탓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 앞에 들어나 있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 깊은 곳 또한 하나님 앞에 그대로 열려져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숨으려고 하지 마세요.  

만물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리라고 했습니다. ‘드러나다는 말이 헬라어로 트라겔리조입니다. 트라겔리조는 털어놓다’, ‘폭로하다’, ‘드러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속마음을 하나님 앞에 털어놓으세요. 하나님 앞에 자신을 폭로하세요. 그래야 자유함이 있습니다. 이 트라겔리조라는 단어는 고대에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중에 두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트라겔리조는 레슬링 선수가 상대방 선수의 목을 잡고 뒤로 젖히는 행위를 말합니다. 레슬링 선수가 목이 뒤로 젖혀지면 어떻게 될까요? 움직이지 못합니다. 경기 끝입니다. 더 이상 진행하면 선수의 생명이 위험합니다. 잘 못하면 죽습니다. 항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 앞에서 항복해야 합니다. 성경 앞에서 항복할 때 우리는 다시 살 수 있습니다. 드러났다는 말은 목이 뒤로 젖혀졌다는 뜻입니다. 고대 올림픽은 옷을 벗고 했습니다. 벌거벗은 채로 목이 뒤로 젖혀진 것입니다. 완전한 항복을 뜻합니다. 우리는 성경 앞에서 완전히 항복해야 합니다.  

둘째, 트라겔리조는 짐승의 가죽을 벗길 때 사용했습니다. 고대에는 짐승의 가죽을 옷으로 많이 사용했습니다. 짐승의 가죽을 벗길 때 목을 매달았습니다. 짐승은 줄에 매달려 가죽이 완전히 벗겨졌습니다. 그러면 가죽 속에 덮여 있던 짐승의 속살이 그대로 들어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집에서 토끼를 키웠습니다. 봄이 되면 토끼풀을 뜯어다 먹이곤 했습니다. 먹는 입 모양이 아주 귀여워요. 그런데 아버님이 토끼 가죽을 파셨던 것 같아요. 다른 집에서도 토끼를 키웠습니다. 저의 아버님과 동네 어른들이 토끼 가죽을 벗기는 것을 봤습니다. 다 자란 토끼를 위에서 맵니다. 그리고 아주 예리한 칼로 입 주변에서부터 가죽을 아래로 벗겨 나갑니다. 아침부터 살벌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가죽과 몸체 사이에 아주 얇은 투명막이 있습니다. 투명막으로 쌓인 몸통만 남겨놓고 가죽이 그대로 벗겨지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몸통만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투명막을 통해 토끼의 피, , 내장들이 그대로 보입니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완전히 벗겨진 토끼의 속을 신비롭게 쳐다본 기억이 있습니다. 가죽이 벗겨진 짐승의 속이 다 보이는 것처럼 우리의 속마음은 하나님 앞에 그대로 들어나 있습니다. 숨기지 마세요. 숨지도 마세요. “주님! 저 이런 사람이에요.” 그냥 그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가세요. 이것이 성경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우리를 그대로 드러내시는 이유는 우리를 치료하기 위함입니다. 병원에 가면 X-ray를 찍습니다. CT를 찍습니다. 그리고 MRI를 찍습니다. 그러면 몸속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의사가 몸 안을 자세히 들어다 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병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치료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X-rayMRI처럼 우리 영혼을 드러내는 이유는 우리를 치료하기 위해서입니다. 내적 치유에서 내면을 들어내는 것은 치유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라는 말을 개역성경은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라고 번역했습니다. 상관이라는 말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좋은 관계를 맺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로버슨(Robertson)이라는 성경학자는 이 말을 중요한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책임을 지시는 자로 번역을 했습니다. 성경 앞에 가진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나올 때 성경은 우리를 치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새롭게 됩니다. 하나님과 중요한 관계가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지시는 자로 서십니다.  

로버트 스티븐 캐플런의 나와 마주서는 용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은 8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의 제목이 이제 나를 들여다봐야 할 때다입니다. 2장의 제목이 냉철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봐라입니다. 캐플런은 2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어느 사이엔가 자신의 기량과 결점에 대해 미리 파악하는 작업을 중도에 멈추고 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에 대해 생각하기 보다는 좀 더 즐거운 생각거리들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신하건대 이 과제를 소홀히 하면 미래의 커리어에 있어 치명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점을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결점을 감추고 싶어 합니다. 자기 약점을 인정하지 않아요. 하지만 약점을 감추지 마세요. 연약한 자신과 마주서세요. 그래야 미래로 나갈 수 있습니다.  

팔이 하나 없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처녀 때부터 20여 년 동안 팔이 없이 살았으므로 그 여인은 열등감에 젖어 살아왔습니다.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잠재해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나 길을 갈 때에 팔이 있는 것처럼 위장을 하고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쳐다보거나 뒤에서 큰 소리만 나도 그녀는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하루는 누군가에게 팔이 없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팔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하고 찬송을 했습니다. 그때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자기 몸을 결박하고 있던 것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후 그녀가 외출을 하려고 할 때 위장을 하고 다니던 팔의 스카프를 풀어 버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이것만은 풀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진실로 내게 감사하였다면 위장하고 다니던 것을 풀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그 음성에 순종하여 스카프를 풀었습니다. 그 때 그 여인은 참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불구됨을 찬송함으로써 마음속의 깊은 상처가 나음을 받은 것입니다.  

성경 앞에서 진실된 나와 마주하세요. 자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사도 바울은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경 앞에 항복하세요. 주님의 말씀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분을 자유하게 하는 책입니다.

 

3. 성경을 굳게 잡으라  

성경이 우리를 치료한 후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도리가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큰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사람을 대표합니다. 제사장은 사람 앞에서는 하나님을 대표합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하나님께는 사람을,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사람 제사장은 불완전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제사장이십니다. ‘승천하신의 헬라어의 문자적인 뜻은 하늘들(우라노스)을 관통하여 지나간입니다. 하늘이 복수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여러 개의 하늘들을 관통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늘들을 관통해서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을 이어주셨습니다. 하늘을 관통하셨다는 말은 하늘의 정복자라는 뜻입니다.  

<31:3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위에 있는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밑에 있는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이 행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그들을 다 버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인류는 우주를 정복하려고 합니다. 정복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성경은 정복은 고사하고 측량도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연을 정복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우주를 정복하지 못합니다. 아니 측량도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늘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는 도리의 근거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고 합니다. 왜 굳게 잡으라고 할까요? 우리가 <믿는 도리>는 잃어버리거나 빼앗기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굳게 잡다는 말이 헬라어로 크라테오(κρατω)입니다. 크라테오는 붙들어 매다’, ‘어깨에 매달리다’, ‘등에 기대다’, ‘등을 껴안다는 뜻입니다. 믿는 도리, 즉 성경을 굳게 잡는다는 의미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성경에 나를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성경의 어깨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넓은 등에 기대십시오. 성경의 등을 꼭 껴안으십시오. 믿는 도리를 굳게 잡는 것은 우리가 가진 믿음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믿음을 굳게 지키세요.  

그런데 크라테오와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크라타이오오(κραταιω)입니다. 크라타이오오는 강해지다’, ‘힘이 강화되다’, ‘강하게 되다’, ‘강하게 만들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크라테오와 크라타이오오는 똑같이 크라토스’(κρτος)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두 단어의 출발이 같습니다. 두 단어의 어원이 되는 크라토스는 , 권세, 능력, 권능, 통치라는 뜻입니다. 두 단어는 똑같이 힘이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붙드느냐에 따라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여러분을 약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적인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든든하게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여러분! 성경을 붙드세요. 성경이 여러분을 강하게 할 것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시인 하이네(Heinrich Heine ; 1797~1856)성경은 인류의 약상자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영혼의 치료약입니다. 성경은 영혼의 치료 도구입니다. 성경은 치료자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우리 영혼을 치료하는 목적이 무엇인가요? 우리 영혼을 치료하는 치료가 끝인가요? 치료가 목적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치료하셨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치료가 목적인 적은 없었습니다. 성경에 치료를 위한 치료는 없습니다. 반드시 치료 후에 새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명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여러분! 영혼을 치료받으셨습니까?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이 끝이 되면 안 됩니다. 구원 이후에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명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지옥의 단편>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19세기 영국의 소설가입니다. 오스카 와일드가 기독교에 악의를 갖고 쓴 소설이 <지옥의 단편>입니다. 성경을 비꼬았습니다. 이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주정꾼을 만났습니다. 그는 폐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어째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가?”

주정꾼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당신이 걷지 못하던 나를 일으켜 걷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걸어 다닌들 무엇을 먹고 살라는 말입니까. 그 동안 직업을 구해 보았으나 만족한 직업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후 세상을 비관하다 이 꼴이 되었습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예수님 창녀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창녀 생활에서 해방시켜 준 여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상하여 물으셨습니다.

어째서 이런 생활로 되돌아왔느냐?”

창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당신이 나를 창녀에서 건져 새 사람을 만들어준 것 같았습니다. 창녀에서 발을 씻은들 무슨 행복이 있단 말입니까. 나는 더욱 고독해서 살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창녀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세상사람 누구도 내 진실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예수님은 불량자가 사람들과 난폭하게 싸우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물으셨습니다.

너는 어째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느냐?”

불량자는 예수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이 눈을 뜨게 해 준 소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무엇을 보라는 겁니까? 보이는 것이 모두 신경을 돋구고 귀찮고 화나는 세상입니다. 결국 나는 화풀이도 하고, 마구 치고 받고 하는 생활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차라리 세상을 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악의를 가지고 성경을 공격했습니다. 예수님의 치료 사역을 비꼬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치료를 위한 치료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치료 후에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명을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조자 채프먼은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지어졌다. 우리는 그것을 비평할 수 없다. 그것이 우리를 비평 한다.” 우리는 성경을 비평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우리를 비평해야 합니다. 성경을 사랑합시다. 성경을 읽읍시다. 성경이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성경이 여러분을 새롭게 합니다. 성경이 여러분을 세웁니다. 성경이 여러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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