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이 땅에 천국을 시작한 사람들이 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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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15:1~7
주일오전예배 | 2018-10-28
설교자 : 서요한 목사

19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빈 센트 반 고흐의 <첫 걸음>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아주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한적한 시골집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문 바로 앞에는 밭이 있습니다. 등장인물은 세 명입니다. 아빠, 엄마, 그리고 아이입니다. 아이는 이제 겨우 돌이 됐던지 아니면 조금 못됐던지 해 보입니다. 딸처럼 보이는 아이가 엄마와 함께 대문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이는 엄마 손을 의지해 걸음마를 하고 있습니다. 걸어서 대문 밖을 나온 것은 처음인 것 같아 보입니다. 엄마가 뒤에서 붙들고 있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넘어질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이에게서 손을 뗐다 붙였다 하는 것 같습니다. 뒤에서 아이를 붙들고 걸음마! 걸음마!”라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앞에는 아빠가 있습니다. 아빠는 일하던 삽을 옆에 내동댕이 쳐놓고 아이를 향해 두 팔을 크게 벌리고 있습니다. 아빠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 얘기 걸어봐! 걸어봐! 옳지! 옳지! 잘한다. 잘해라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아이는 정확하지도 않은 발음으로 아빠! 아빠!”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두 팔을 벌리고 아빠에게 달려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걸어서 하는 아이의 첫 나들이입니다.

이 그림을 보며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의 붙드심, 인도하심, 함께 하심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뒤에서 붙들고 계시는 분을 성자 예수님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딤후4: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27: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앞에서 두 팔을 벌리고 계신 아버지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집을 나간 탕자가 돌아올 때 아버지가 달라가서 두 팔로 목을 안아주었습니다. 엄마와 아빠의 격려의 음성을 우리 삶 속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성령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격려하시고 위로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와 여러분의 옆에 앞에 뒤에 그리고 속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2:6>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

<37: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때 힘에 겨워 아이처럼 뒤뚱뒤뚱 걸을 때도 있습니다. 때로 넘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납시다. 낙심하지 맙시다. 힘을 냅시다. 예수님께서 나를 뒤에서 붙들고 계십니다. 성령님께서 나의 앞길을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저 앞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두 팔을 크게 벌리고 내 아들아! 내 딸아! 다시 일어나라. 힘내라. 어서 와라. 조금만 더 와라.”고 소리치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1. 세 개의 복음 시리즈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3-7)입니다. 이어서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8~10)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탕자의 비유, 11~32)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1-2절은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배경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는 모두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을 다시 찾으시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과 풍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 가지 비유를 마치 시리즈를 연재하듯 바로 바로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비유는 복음의 세 가지 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가지 비유는 하나입니다. 동일한 진리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각기 다른 영적 교훈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일한 것인데 색깔이 각기 다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 가지 비유를 복음의 피라미드또는 복음의 삼위일체라고 하고 싶습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는 자신의 양에 대한 예수님의 목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찾기 위해 산을 두루 찾아다닙니다. 숲에서 나타날 수 있는 사나운 맹수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위대하신 목자이십니다. 그 분은 길을 잃은 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으셨습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성자 예수님의 사역을 보여줍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두루 다니시며 찾아낸 잃어버렸던 예수님의 양이었습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에는 성령님의 사역이 나타나 있습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은돈을 찾는 여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교회의 귀중한 소유입니다. 드라크마에서 신부된 교회와 신랑되신 예수님의 사랑의 증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교회라는 여인 안에서 그의 사랑의 목적을 이루고 계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여러분!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룹시다.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풍성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탕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집에서 아들을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아들을 즉시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은 탕자와 같은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세 비유는 하나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셋은 하나이면서 셋입니다. 이 세 비유는 복음의 세 가지 색깔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이 땅에 천국을 시작한 사람들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의미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는 것입니다.

<14:35>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여러분! 귀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 귀가 있습니다. 그런데 들을 귀는 다 있지 않습니다. 못 듣는 귀가 있습니다. 안들리는 귀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말씀을 즐거이 들으려는 마음 자세입니다. 또 주의해서 들르려는 마음 자세입니다. 그리고 듣고자 하는 강한 열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을 갈망해야 합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왔습니다. 그것도 아주 열성적으로 들으러 나왔습니다.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세리와 죄인들은 당시 사회에서 천대받는 소외계층을 일컫는 말입니다. 14장에 예수님의 큰 잔치의 비유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잔치에 이웃들을 초청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핑계 저 핑계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부자들이었습니다. 잔치 자리는 텅 비게 되었습니다. 기쁨의 잔치가 아니라 쓸쓸한 잔치가 되었습니다. 잔치를 이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주인은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초청했습니다. 이제 잔치 자리가 꽉 찼습니다. 잔치에 부자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자들은 왔습니다. 소외된 자들은 왔습니다. 예수님의 영혼의 잔치에 모든 세리와 모든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왔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의 잔치가 시작됐습니다. 보세요.

<4:18-19>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은혜의 잔치, 천국의 잔치, 영혼의 잔치가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는 말씀을 들을 때 시작됩니다.

<4: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귀에 응했습니다. 응했다는 말은 꽉 찼다’, ‘완성됐다’, ‘이루어졌다’(플레로오)는 의미입니다. 귀에 천국이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천국이 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천국 잔치는 시작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은혜의 잔치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천국은 말씀을 들으러 열성적으로 나온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라는 말이 계속해서 가까이 나오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시제가 미완료과거입니다. 미완료과거는 과거의 행동이 끝나지 않고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시제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내내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열성적으로 들었습니다. 그들에 의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됐습니다. 또 말씀을 들으러 나온 자들에 의해서 이 땅에 교회가 시작됐습니다. 말씀을 들은 자들에 의해 이 땅에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을 들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일을 하느라 정신없었습니다. 말씀을 들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말씀을 듣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을 들은 마리아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그때 사무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말씀을 들은 사무엘은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듣지 않은 엘리 제사장은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2:1) 여러분! 말씀을 들읍시다. 아주 열성적으로 들읍시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새 역사가 일어납니다.

<12:11> 입이 음식의 맛을 구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간하지 아니하느냐

음식은 입으로 먹습니다. 말씀은 귀로 먹습니다. 육신의 잔치는 입으로 합니다. 영혼의 잔치는 귀로 합니다. 입으로 먹은 양식은 육신의 힘이 됩니다. 귀로 먹은 양식은 영혼의 힘이 됩니다. 크리스천은 말씀의 귀잔치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 이렇게 소원합시다.

<50: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학자같이 말씀을 들읍시다.

3. 천국을 막는 사람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정죄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아주 경멸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영적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부정적이었습니다. 반면에 세리, 죄인, 창녀, 가난한 자들, 맹인들, 몸 불편한 자들과 같은 사회의 소외 계층의 사람들은 긍정적이었습니다. 말씀을 맡은 자들은 부정했고 죄인들은 긍정했습니다. 왜 이런 아이러니가 생겼을까요? 그것은 위선과 교만 때문입니다.

<23: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모세는 율법을 세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교만을 지적하셨습니다. 또 그들의 외식을 지적하셨습니다.

<23:13 상반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

교만과 위선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했습니다.

<7: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엘리트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통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고향은 유대의 갈릴리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최고의 엘리트들이 누추한 차림을 하고 있는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교만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위선이 복음을 듣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천국으로 가는 길을 막아버렸습니다.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교만은 자신도 죽고 다른 사람까지 죽음에 이르게 하는 큰 죄입니다.

고신대학원 신원하 교수님의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라는 책이 있습니다. 기독교 전통이 우리에게 전해 준 일곱 가지 대죄가 있습니다. 교만, 시기, 탐욕, 탐식, 분노, 정욕, 나태입니다. 이 일곱 가지를 죽음에 이르는 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만은 나머지 여섯 가지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만을 모든 범죄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바룩 스피노자는 교만을 일종의 정신착란이라고 했습니다. C.S. 루이스는 교만에 비하면 다른 죄들은 벼룩에 물린 자국과 같다.”고 했습니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 모든 민족과 모든 가족에게 발생하는 비극의 주된 원인은 바로 교만이다.”이라고 했습니다. 교만은 영적 암이다.”라고 했습니다.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라는 책이 있습니다. 스캇 펙은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면서 사탄과 대화를 시도합니다. 그리고 악령의 심리상태를 분석합니다. 엽기적인 의사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아주 지성적인 사람입니다. 스캇 펙은 사탄의 심리 상태의 핵심을 나르시시즘으로 보았습니다. 나르시시즘은 자아도취적 자기애(自己愛)를 뜻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다 결국 물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Narcissos) 이야기에서 유래했습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교만입니다. 스캇 펙은 거짓의 사람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악의 가장 본질적인 심리적인 문제는 바로 나르시시즘이다. 악성 나르시시즘의 특징은 복종할 줄 모르는 자기 의지에 있다. 사탄은 그리스도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기가 자기의 불완전함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즘은 나는 완벽하다. 그래서 나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극도의 오만이나 자만 또는 교만을 말합니다. 스캇 펙은 사탄의 핵심 심리 상태는 나르시시즘이라는 것입니다. 완전한 교만입니다. 최극점에 있는 교만입니다. 사탄은 교만의 왕입니다. 사탄은 교만의 신입니다.

그런데 현대 문화가 나르시시즘 문화입니다. 뉴욕대학교 정신의학과 교수인 리처드 체식의 자기심리학과 나르시시즘의 치료라는 책이 있습니다. 체식은 이 책에 크리스토퍼 라쉬(나르시시즘의 문화의 저자, 1978)의 말을 인용합니다.

래쉬에 따르면 자기애적인 사회란 과거를 문화적으로 폄하하고 계속해서 자기애적인 요소들을 부추기는 사회다. 래쉬의 전반적인 논점은 자기애적인 사회가 자기애성 인격들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사람들이 더욱 자기애적인 사회를 만든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비록 돌아갈 수는 없어도 과거가 더 나았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현대 미국과 같이 자기애적인 사회에서 사는 자기애성 개인들에 대해 래쉬는 순간을 위해 살고 전통을 쌓지 못하며 이리저리 떠돌고 자존감을 확인하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고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거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묘사했다.

어린 왕자에 교만한 이가 사는 별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이 사는 별이 있었습니다. 교만한 사람과 어린 왕자의 대화입니다.

교만한 이 : 너는 정말 나를 찬미하니?

어린 왕자 : 찬미한다는 의미가 뭔가요?

교만한 이 : 찬미한다는 의미는 내가 이 별에서 가장 잘 생기고, 가장 옷을 잘 입고, 가장 부자이면서 지적이라는 걸 인정한다는 뜻이지.

어린 왕자 : 하지만 당신 별엔 오직 당신뿐이 없는데.

어린 왕자는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어른들은 이상하다며 이 별을 떠났습니다. 교만한 이들은 결코 칭송밖에는 듣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는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나르시시즘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나르시시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사탄의 교만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교만의 시대입니다. 귀가 막힌 시대입니다. 하지만 귀를 엽시다. 하나님에 대하여 귀를 엽시다. 그래서 말씀을 들읍시다.

<13:15>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34:1> 열국이여 너희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민족들이여 귀를 기울일지어다 땅과 땅에 충만한 것, 세계와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이여 들을지어다

<55: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들어야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들어야 우리 안에 천국이 시작됩니다. 인디언 보호구역에 사는 한 인디언이 친구를 만나기 위해 뉴욕에 왔습니다. 공항에서 친구를 만난 인디언이 횡단보도를 건너다 말고 말했습니다.

. 귀뚜라미 소리다!”

친구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 공항은 고속도로와 바로 연결되어 있다네. 귀뚜라미가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고.”

아냐. 분명히 들린다니까.”

비행기를 너무 오래 타서 이명이 들리는 거야. 저 봐 저쪽에서 공사 소음도 크게 나는데 무슨 귀뚜라미 소리가 난다는 거야?”

인디언은 아무 말 없이 길가로 가서 잔디 아래 나무 가지를 들췄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불러 두 마리의 작은 귀뚜라미를 보여주었습니다.

, 정말이네! 자네 청각이 대단하군. 이 소음 속에서 귀뚜라미를 소리를 듣다니!”

인디언이 말했습니다.

아니야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소린데 자네가 못 듣는 것뿐이야 우리 동전으로 한번 시험해 볼까?”

그렇게 말하고 나서 인디언이 동전 두어 개를 바닥에 던졌습니다. ‘딸랑동적이 바닥에 떨어지며 작은 소리를 냈습니다. 그러자 길을 가던 많은 사람들이 재빨리 동전이 떨어진 바닥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이에 인디언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거 봐. 사람들의 청각은 거의 비슷해. 다른 점이 있다면 뉴욕 사람들은 돈에 집중하고 있고. 우리 인디언들은 자연과 생명에 집중하고 있다는 거야.”

여러분! 내가 좋아하는 소리만 듣지 맙시다. 내가 싫어하는 말도 들읍시다. 귀 기울어 봅시다. 무슨 소리가 들리십니까? 돈의 소리가 들리십니까? 현대인들은 돈의 소리를 쫓아 달려가다가 결국 무덤이란 종착점에 닿습니다. 덧없습니다. 우리 귀에 하나님의 소리를 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귀를 엽시다. 하나님께 마음을 엽시다. 우리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2: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말로 위로하고라는 말이 히브리 성경에 마음에 말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의 귀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음성에 마음을 엽시다. 귀를 엽시다. 들어야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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