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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16살의 한 소녀가 유괴되었습니다. 소녀는 유괴 후 4개월 동안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소녀가 감금되어 있던 장소는 교회이었습니다. 유괴범들은 이 소녀를 테네시 주의 멤피스에 있는 한 교회의 다락방에 감금했습니다. 이 사실을 교인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교인들은 매 주일마다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성도 간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소녀가 감금되어 공포에 떨고 있는 순간에도 말입니다. 이런 상황은 4개월 동안이나 지속 됐습니다. 이 소녀는 교회의 두 관리인에게 발견될 때까지 끔찍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이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에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미국의 부흥사 빌리 썬데이 목사님은 “말 한 마리를 자동차 차고에 넣어 둔다고 해서 그 말이 자동차로 변하지 않는 것처럼, 죄에 철저히 매여 있는 사람을 교회에 그저 데리고 온다고 해서 교회가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 교회에서 함께 신앙 생활하지만 모두가 다 영적으로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닫혀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무언가에 포로가 되어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생활이 무언가에 붙들려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그런 성도님들이 없도록 서로 돌아보고 섬기고 사랑하시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요즘은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모르는 세상이잖아요. 교회를 다니는데 사탄의 포로가 되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루를 다녀도 하나님의 자유한 백성이 되도록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여인에게 열 드라크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여인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 바닥을 빗자루로 부지런히 쓸었습니다. 아주 애타게 찾고 또 찾았습니다. 그래서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여인은 친구들과 이웃에게 함께 즐기자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이렇게 기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드라크마가 얼마나 귀한 것이기에 여인은 그것 하나를 찾고 이렇게 기뻐했을까요? 이 시간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드라크마
드라크마는 신약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말입니다(참고, 느7:70~72). 드라크마는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한 은화입니다. 유로화가 유럽에 통용되기 전인 2002년까지 그리스의 화폐 단위였습니다. 그러면 한 드라크마는 어느 정도의 가치일까요?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요즘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30,000원입니다. 잃어버리면 아까운 금액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여인은 이 돈이 아까워서 그렇게 애타게 찾았을까요? 물론 그런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인의 행동을 보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드라크마가 여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성경학자들 간에 통일된 견해는 없습니다. 학자들의 견해는 대략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이 드라크마는 생활이 어려울 때를 대비해서 모아 놓은 가족 밑천이라는 것입니다. 또는 특별한 필요들이 있을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 놓은 비상금이라는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비상금을 다시 찾은 여인은 아주 기뻐했습니다.
둘째, 이 드라크마는 약혼이나 결혼을 할 때 남자가 여자에게 주는 사랑의 증표라는 것입니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결혼을 할 때 신랑은 신부의 아버지에게 신부의 값을 지불했습니다. 그리고 신부에게는 선물을 했습니다. 그 선물이 드라크마 열 개입니다. 이것은 신부에 대한 신랑의 사랑의 증표이었습니다. 이 때는 드라크마가 화폐 이상의 가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는 이 열 개의 드라크마를 팔지, 목걸이, 머리띠 등으로 만들어서 몸에 액사서리처럼 착용했습니다. 이것을 세메디(Semedi)라 불렀습니다. 드라크마가 세메디가 되는 순간 돈 이상의 가치를 갖게 됩니다. 이 세메디는 도둑도 훔쳐가지 않습니다. 강도들도 빼앗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채가 있어서 모든 재산을 차압당해도 이 세메디만은 건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메디는 자기가 잃어버리지 않는 한 없어질 수 없는 물건입니다. 그래서 신부가 이 드라크마를 잃어버리게 되면 신랑에게 이혼을 당할 수 있는 사유가 된다고 합니다. 여인들에게 드라크마는 아주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약혼을 하고 결혼을 앞두고 있는 여인들이 드라크마를 잃어버렸다면 아주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드라크마를 애타게 찾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찾았을 때 아주 기뻐했습니다.
여러분! 전자가 맞을까요? 후자가 맞을까요? 전자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지만 후자가 더 타당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여인은 아주 애타게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찾고 또 찾았습니다. 집안 곳곳을 쓸고 또 쓸었습니다. 단지 잃어버렸던 비상금을 찾았다면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이렇게까지 기뻐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남편에 대한 사랑의 증표이었기 때문에 기뻐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내리십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은 물론이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까지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잃은 영혼을 찾았을 때 하늘 잔치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한 영혼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오셨을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2. 잃어버린 은전, 잃어버린 영혼
예수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잃어버린 은전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인들은 항상 세메디를 하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보니 한 개의 드라크마가 없어졌습니다. 누가 훔쳐 갈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집안 어디엔가 떨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지 꽤 된 것 같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의 집 바닥은 흙이었습니다. 타일이나 장판이 없던 시대입니다. 드라크마는 집안에 다니는 사람들의 발에 치여 어디 구석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발에 밟혀 땅에 깊이 박힌 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많은 먼지에 덮여있을 수도 있습니다. 드라크마는 지금 먼지 구덩이 사이에 있습니다. 여러분! 아담 아래서 잃어버린 영혼은 바로 먼지 구덩이에 있는 은전과 같습니다.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곳에 살아도 잃어버린 영혼의 상태는 진흙 속에 박혀 있는 은전입니다. 드라크마가 융단에 떨어진 것 아닙니다. 카페트 위에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침대 위에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진흙 바닥에 떨어진 것입니다. 먼지에 덮여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본성적으로 잃어버린 영혼들입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은혜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은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드라크마는 자신이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드라크마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드라크마는 자신이 진흙 속에 박혀 있는지 모릅니다. 자신이 비참한 상태인지 모릅니다. 누군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밟혀 진흙 속에 박혀도 자신의 처지를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모릅니다. 자신이 과거에 보관함에 다른 귀중품과 함께 잘 보관되어 있었던 것도 모릅니다. 주인에게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드라크마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영혼들의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은 자신이 잃어버렸는지 알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얼마나 비참한지 모릅니다. 지난 날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이었는지 모릅니다. 지난 날 자신이 세메디처럼 특별한 존재였다는 것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영혼들은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하나님이 아니라 원숭이에서 찾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지 모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깨우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깨우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깨우침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깨우침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깨우칠 때 우리의 영혼의 감각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깨우침을 받을 때 우리 영혼은 은전처럼 다시 빛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드라크마는 잃어버렸습니다.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자신이 잃어버린 존재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에게 잊어지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드라크마가 처음부터 열 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없지만 틀림없이 방, 거실, 주방, 창고 어디엔가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난 날 잃어버린바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은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는 잊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항상 가슴 속에 새기고 계셨습니다.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그런데 오늘 우리 시대 교회는 은전 같이 소중한 아주 많은 영혼들을 잃어버렸습니다. 교회가 많은 영혼들을 잃어버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크리스천이 기독교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이신 김형석 교수님의 「행복예습」이라는 책에 <더러워진 연못에서 혼자 깨끗할 수 없듯이>라는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왜 우리는 역사적인 문제와 사고방식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가? 지금 우리나라가 고민하고 있는 최대 관심사는 한국 사회를 지탱하고 이끌어갈 공통된 가치관이 없다는 것이다. 전통을 상실했으며 우리 사회를 육성해나갈 정신적 기반도 없다. 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불교적 가치관이 있었고, 조선 왕조 시대에는 유학적 윤리관이 사회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시련을 겪으며 혼란기를 지나야 했다. 기독교는 양적으로 팽창하여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를 합치면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다. 한 때는 그 정신이 민족 성장에 도움을 주었으나, 지금은 그 종교적 가치관을 그대로 수용해도 좋다는 사회적 공감대는 좁아지고 있다. 불교의 기본 정신도 사회적 가치가 되지는 못하고, 그저 사찰의 수와 불교 시설만 확장되었을 뿐이다. 즉, 불교 정신이나 기독교 정신이 우리 사회의 희망이라며 믿고 따르는 의식 있는 국민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남은 것은 교리와 의식을 중요시하는 폐쇄적인 가치관뿐이다. 우리 사회만 그런 것은 아니다. 세계의 몇몇 선진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 시대를 이끌고 지탱해줄 정신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사회가 표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김형석 교수님은 이 시대의 개인의 불행과 사회악은 정신적 가치의 빈곤에서 유발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교육계와 종교계의 책임이 크다는 것입니다. 아주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기독교는 구한말부터 우리 민족의 정신적 기초가 되어왔습니다. 서재필, 김옥균, 이승만, 윤치호, 유길준, 박영효 등 이 민족 근대화에 선봉에 섰던 사상가들의 다수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삼일독립운동 때에 민족대표 33인중 기독교인 16명이었습니다. 일제 해방 후에 기독교는 조국의 근대화를 이끌어왔습니다. 1970년대의 새마을 운동의 시작은 가나안 농군학교의 김용기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구한말부터 1970년대까지 기독교는 이 나라의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그런데 그 정신을 잃었습니다. 기독교가 기독교 정신을 잃은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수 없이 많은 영혼들이 목자를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 우리는 잃어버린 기독교 정신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기독교 정신을 찾지 못하면 반짝 반짝 빛나는 은전이 진흙에 박혀 빛을 잃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전 같은 영혼들이 이 세상 진흙 속에서 괴로워할 것입니다. 목사는 목사의 정신을 찾아야 합니다. 성도는 성도의 정신을 찾아야 합니다.
김형석 교수님의 『행복예습』이라는 책에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경상북도 안동의 한 고아원에 ‘이’라는 성을 가진 원생이 있었습니다. 18세가 되면 이 군은 고아원에서 나가야 했습니다. 그 나이까지만 고아원에 머물 수 있는 규정 때문입니다. 이 군은 마땅히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군에 입대했습니다. 복무를 마치고 직업군인이 됐습니다. 몇 년 후에 중사가 됐습니다. 하지만 원망스러운 운명에 대한 울분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휴가를 얻으면 머물던 고아원을 찾아가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사랑을 나눌 친구도 별로 없었습니다. 하루는 신병들의 사격 훈련을 지도하다가 수류탄 두 개를 훔쳐 탈영을 했습니다. 어떤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울분을 참지 못해서였습니다. 탈영을 했으나 갈 곳이 없었습니다. 안동 시내를 방황하다가 막걸리도 마시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거리를 지나는데 영화 관람을 끝낸 사람들이 극장 앞으로 빠져나오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수류탄을 군중 속으로 던졌습니다. 대상 없이 분풀이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는 갈 곳도 없는 신세인데 너희들은 인생을 즐기고 있어?”하는 역정스러움이 폭발했습니다.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 중사는 체포됐습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살아남기를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됐습니다. 이런 사실을 처음부터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군목이었습니다. 군목은 수감되어 있는 이 중사를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이 중사는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인데 혼자 있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군목은 몇 차례 면회와 대담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군목은 혼자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무엇이 이 중사를 저런 운명에 몰아넣었는가. 이것은 이 중사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는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이 중사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자랐거나 자기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으면 그런 끔찍한 범행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이 중사를 사랑해주지 못한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자기도 그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런 결론 내린 군목은 겨우 이 중사와 손을 잡고 대화할 시간을 얻었습니다. 군목은 “이 중사가 오늘 이런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은 우리 모두의 잘못이며 내 책임기도 하니까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약간 당황한 이 중사가 이렇게 된 것은 자기 잘못이며 목사님과는 상관이 없다고 했습니다. 군목은 “너에게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었거나 너도 누군가를 사랑했다면, 그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죄를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를 사랑해주지 못한 것은 나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니까 네가 용서해주어야 하겠다.”라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 중사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옳습니다. 저는 사랑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사랑을 받아보지도 못했고 사랑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제게 꼭 필요한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랑을 할 시간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이 중사에게 “과거에도 너를 사랑했고 지금도 너를 사랑할 뿐 아니라 앞으로도 네 영혼을 사랑해줄 분이 게신데, 우리 그분에게로 가자.”고 권고했습니다. 이 중사는 그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 아버지라고 확언했습니다. 눈을 감았던 이 중사는 “저를 그 분에게로 안내해주세요. 제가 갈 곳이 없지 않습니까?”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이 중사는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비로소 빛을 찾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이 중사가 목사님에게 부탁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형을 받으면서 시신을 기증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데 쓸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마지막으로 사랑을 베풀 수 있으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청이었습니다. 하지만 총살로 형을 받는 사람은 장기를 누구에게 기증하게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각막은 가능했습니다. 이 중사는 그것만이라도 꼭 도와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의 길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사형되는 날 아침 이 중사는 군목에게 다가갔습니다. 군목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유언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중사는 안과 군의관님이 오셨느냐고 물었습니다. 군의관의 손을 꼭 잡은 이 중사는 “군의관님, 저는 육신의 눈은 떴으나 마음의 눈은 뜨지 못해 이렇게 큰 죄를 지었습니다. 제 눈을 받은 사람은 육신의 눈도 되찾고, 마음의 눈도 떠서 제가 하지 못했던 사랑을 대신 베풀어달라고 전해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목사님이 다른 유언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과 부르던 찬송가를 부르다가 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렇게 이 중사는 천국으로 갔습니다. 군의관은 이 중사가 너무나 착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착한 사람이 왜 이렇게 됐을까요? 목사님의 말씀처럼 이 시대의 책임이 아닐까요?
사랑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습니다. 사랑이 단절된 곳에 희망도 행복도 머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찾아야 할 잃어버린 은전이 아닐까요? 주님은 오늘 우리가 이 정신을 다시 되찾기를 원하십니다.
3. 등불을 밝히자. 바닥을 쓸자
그러면 이 은전을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을까요? 여인은 은전을 찾기 위해 등불을 밝히고 바닥을 부지런히 쓸었습니다. 등불을 밝히고 바닥을 부지런히 쓰는 여인의 행위에서 오늘 우리 시대 교회와 성도가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합니다.
고대 유대 사회의 가옥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창문이 아주 작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는 아예 창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낮에도 집안은 어두컴컴했습니다. 집 안에서 무엇을 찾아야 한다면 등불을 키지 않고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가 활동하는 이 세상은 영적으로 어둡습니다. 정신적으로는 혼란합니다. 도덕적으로는 혼잡합니다. 여러분! 세상이 어둡습니다. 그래서 등불이 반드시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런데 마땅한 등불이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진흙 파묻혀 속에 있는 은전 같은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등불을 켜야 합니다. 그 등불이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빛은 착한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등불입니다. 사람빛이에요. 여러분의 불빛으로 교회 안을 밝히 비춰주세요. 그리고 세상을 비춰주세요. 하나님은 우리가 이 등불을 가지고 있기를 바라십니다.
<왕상 11:36> 그의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거기에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
<왕15:4>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의 아들을 세워 뒤를 잇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으니
여러분! 우리 교회에 하나님을 위한 등불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사람을 위한 등불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 아이들이 장성하면 청와대, 국회, 세종시, 대기업, 예술, 스포츠 등 사회 각계각층으로 들어가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꿈꾸고 소망하고 있습니다. 사회 곳곳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곳곳에서 등불이 되는 거예요. 암울한 시대에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바벨론의 왕궁으로 보내셨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왕궁에서 등불이 됐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막노동판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등불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니엘과 에스겔은 어두운 시대 등불이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밝히 비추는 거예요.
어떤 남자아이가 엘리베이터에서 여고생을 성폭행했습니다. 그리고 금품을 빼앗아 갔습니다. 양 당사자와 양가 어머니가 광주 남부경찰서 구내식당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서로 원수 같은 사이인데 퍽 온화한 분위기로 이어졌습니다. 여고생의 어머니는 크리스천입니다. 어머니는 이 문제를 신앙적으로 해결하기로 기도 중에 마음먹었습니다. 여고생의 어머니는 몇 가지 조건을 가해자 아이와 어머니에게 제시하였습니다.
“보상은 반드시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하지 말고 사회에 보상하십시오. 형편에 맞는 액수를 결손아동 돕기 기금으로 기탁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아들을 교도소에 가지 않게 합의서를 써드릴 터이니 다음과 같은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서 담당 형사에게 제출하여 주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잭 캔 필드의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한비야의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어린 시절 순간적으로 일으킨 성충동으로 자녀의 앞날을 망쳐서야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렇게만 하면 용서합니다.”
사고를 낸 아들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아들이 마땅히 처벌받아야 할 죄를 저질렀는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배려하여 주신 데 뭐라고 감사하여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이 모습을 본 조선일보 기자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자신의 딸에게 상처를 준 남의 아들까지 감싸 안고 어떻게든 올바른 길로 인도해 보려고 하는 김 씨의 노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자신의 딸아이를 성폭행한 아이와 그 엄마가 앞에 있습니다. 멱살을 잡고 얼굴을 할퀴고 욕을 해도 마음이 풀리지 않을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암울하고 분통터지는 순간에 그 어머니는 크리스천으로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가해자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보며 얼마나 암울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암울해 하는 사람에게 이 어머니는 빛을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경직되고 삭막했던 경찰서가 영적인 은빛으로 환해지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모습이 아닐까요? 암울한 때에 우리는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여인은 등불을 켜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바닥을 부지런히 쓸었습니다. 쓸다는 말이 헬라어로 사로오입니다. 사로오는 ‘깨끗이 하다’, ‘청소하다’입니다. 이 사로오라는 말에서 사륵스라는 말이 생깁니다. 사륵스는 몸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몸이라는 말은 깨끗하다는 말에서 왔습니다. 사람은 몸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여인은 지금 집안을 깨끗하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특징은 청결입니다. 성도의 특징은 순결입니다. 깨끗함을 잃어버리는 순간 성도의 은빛이 꺼지는 것입니다. 깨끗함이 은빛입니다. 크리스천은 말씀과 기도를 깨끗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인은 등불과 집안 쓸기에 집중했습니다. 왜 등불과 쓸기에 집중했을까요? 잃어버린 은전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잃어버린 은빛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잃어버린 은전을 찾았을 때 하늘에는 놀라운 기쁨이 있습니다.
<1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된다고 했습니다. ‘천사들 앞에서’라고 했습니다. 한 영혼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천사들 앞에 최고의 화제 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하늘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셨습니까? 천사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이가 드디어 돌아왔어! 예수님이 얼마나 찾고 찾던 사람이야!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어! 정말 축하할 일이야! 주님 축하합니다. 정말 축하합니다. 주님께서 그 영혼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는데 드디어 열매를 맺었네요. 축하합니다. 주님!” 하늘의 천사와 주님은 여러분을 이렇게 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여러분이 세상으로 돌아간다면 악한 영들이 환영할 것입니다. 마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그 아이는 원래부터 내 자식이었어.” 교회가 냉담하다고 말하지 마세요. 나를 사랑하는 이가 없다고 말하지 마세요. 모두 마귀의 거짓말입니다. 하늘에서 여러분을 향해 환호성을 울리고 있다고요. 진흙 속에 묻혀 있지 마세요. 예수님께로 오십시오. 먼지 속에 덮여 있지 마세요. 예수님께 나오세요. 예수님 믿으세요. 예수님 안에 참된 영혼의 자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순간 은전의 하얀 빛이 하늘로 비추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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