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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목자의 사랑의 어깨에 기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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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15:3~7
주일오전예배 | 2018-11-04
설교자 : 서요한 목사

20대 초반의 나이에 결혼을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결혼 직후 바로 임신을 했는데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몇 달 후에 예쁜 딸이 태어났습니다. 재혼이라는 것이 쉽지 않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엄마는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며 아이를 혼자 키웠습니다. 엄마는 배우지 못했지만 딸을 대학까지 가르쳤습니다. 딸이 공부를 잘해 유학도 갔습니다. 귀국 후에는 우리나라 한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엄마와 딸은 말이 잘 통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못 배웠습니다. 반면에 딸은 많이 배웠습니다. 또 많은 문화를 경험했습니다. 엄마와 세대 차이도 많이 났습니다. 그럼에도 장성한 딸은 엄마의 고마움을 깊이 느낍니다. 엄마의 희생 없는 자신의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엄마 없는 자신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엄마에게 고맙다고 합니다. 그리고 엄마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너무 고마워서 엄마의 소원을 꼭 이루어드리고 싶다고 합니다. 하지만 엄마는 아무 것도 원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있다면 네가 잘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 외는 없다는 것입니다. 딸은 그래도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합니다. 꼭 해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교회가 멀어 다니기 어려우니 주일마다 태워다 달라고 했습니다. 잘 살게 돼서 집을 좋은 곳으로 옮기다 보니 교회가 멀어진 것입니다. 딸이 들어보니 별 것 아니었습니다. 또 딸도 고등학교 때 교회를 잠깐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교회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오늘 아주 훌륭한 교수님이 오셨다고 광고를 하는 것입니다. 싫지 않았습니다. 예배 후에 어머니가 모임이 있어서 한 쪽에 앉아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쪽에서 교인들 몇 명이 모여 남을 험담하는 것이었습니다. 딸의 마음에 교회 다니는 사람도 별 수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시 후에 교회 장로님이 오더니 말을 걸었습니다. 자기 아이가 고3인데 대학에 기부 입학을 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부정입학을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그리고 있는데 한 쪽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갈수록 가관이었습니다. 잠시 후에 어머니가 나오셨습니다. 딸은 어머니에게 흥분을 하며 다시는 이 교회에 오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기다리는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호통을 치시는 것입니다. “나는 30년 동안 교회를 다니며 예수님만 봤는데 너는 짧은 시간에 참 많은 것을 봤구나!” 어머니가 자기를 키우며 한 번도 그렇게 화를 내신 적이 없었습니다. 딸은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높은 신앙의 수준에 자기도 모르게 압도되었습니다. 그동안 어머니를 무식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못 배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항상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어머니의 한 마디에 범접할 수 없는 인생의 깊이와 삶의 연륜 그리고 신앙의 높이가 느껴졌습니다. 딸은 말없이 어머니 앞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여러분! 목사는 누구일까요? 여러분께 정말 죄송한데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일뿐입니다. 아니면 가장 많이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목사를 보고 교회에 나오지 마세요. 제가 저를 잘 압니다. 저는 훌륭한 사람이 못됩니다. 그냥 아주 연약한 인간입니다. 제가 실수하는 것을 보거든 저를 보지 마시고 저에게 은혜를 주셔서 자녀 삼으신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저렇게 부족한 사람도 하나님이 자녀를 삼으시는구나! 정말 하나님의 사랑은 놀랍구나!’ 이렇게 생각하세요. 또 교인들을 보고 교회에 나오지 마세요. 물론 처음에는 교인들을 따라 교회에 나옵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만 바라보세요. 교인들을 보고 교회 다니면 반드시 실망합니다. 혹시 교인들의 연약한 모습을 보시면 그래도 그들을 참으시고 받아주셔서 자신의 양을 삼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세요. 여러분! 사람의 착함, 선행은 교회 안에서 모두 부수적인 것입니다. 다 변두리 것들입니다. 자투리에 신경쓰지 마세요. 신앙생활의 핵심은 예수님입니다. 핵심 되신 예수님만을 바라보세요.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잃은 양의 비유>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입니다. 초점이 잃은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잃은 양을 찾는 목자에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초점은 양이 아니라 목자입니다. 목자를 바라보며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1. 잃은 양

어떤 목자에게 양이 100마리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를 잃었습니다. 목자는 아흔 아홉을 들에 두고 하나를 찾아 나섭니다. 들에 두었다는 말은 방치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안전한 곳에 양을 두었다는 말입니다. 목자는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목자는 어떻게 양을 잃게 될까요? 3절에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이라고 했습니다. 목자가 부주의해서 양을 잃었을까요? 아닙니다. 목자가 들판에서 양을 아무 탈 없이 끌고 다니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목자가 양을 잃게 되는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풀 때문입니다. 아침이 되면 목자는 양을 이끌고 풀을 찾아 나섭니다. 푸른 풀밭을 만나면 양들은 흩어서져 풀을 뜯습니다. 들판에 풀이 넓게 퍼져 있을수록 양들도 넓게 퍼집니다. 이때 유독 무리와 멀어지는 양들이 있습니다. 양은 풀을 뜯는 중간 중간 고개를 들어 무리를 쳐다봅니다. 목자의 소리도 들립니다. 양은 본능적으로 풀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런데 풀을 따라가다 보면 무리에게서 멀어집니다. 목자의 소리도 멀어집니다. 나중에는 목자의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하게 됩니다. 하지만 양은 무리가 시야에 있기 때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풀을 따라 갑니다. 무리들이 시야에 있기 때문에 안심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목자가 양들에게 그만 가자고 해도 소리를 못 들을 수 있습니다. 혼자서 정신없이 풀을 뜯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양이 고개를 들어 무리가 이동하는 것을 보면 금방 따라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정한 거리가 넘어가 버리면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따라가지도 못하게 됩니다. 목자도 보지 못하고 양도 판단을 잘 못한 것입니다. 또 시야에 있더라도 거리가 너무 멀어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무리와의 거리를 너무 많이 둔 것입니다. 목자와 거리를 너무 많이 둔 것이 길을 잃게 합니다.

교인들에게서 이런 경우를 간혹 볼 수 있습니다. 신자들 중에 잠깐 신앙생활을 등한시 하는 것인데 별일 있을까?’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핑계 저 핑계로 교회를 빠집니다. 이런 경우를 가끔 봐왔습니다. “목사님! 저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조금만 봐주세요. 내가 이 일만 잘 되면 더 열심이 할 겁니다. 제가 어디 가는 것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를 안 나옵니다. 눈앞에 있는 이익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다시 회복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이 아주 끝날 때가 많습니다. 일이 잘 돼서 다시 돌아와도 신앙에 확신이 없어집니다. 교회가 서먹해집니다. 나오는 것 같은데 예전 같지 않습니다. 눈앞에 이익 때문에 예수님과 거리를 두는 것은 아주 위험한 도박입니다. 목자를 잃는 것은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큰 손실입니다.

둘째, 생각지 못한 불의의 사태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목초지를 영화 속에 나오는 아름답고 푸른 들판을 상상하시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의 지형은 사막, 광야, 산지, 골짜기, 들판 등등 여러 가지 험지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광야를 지나다보면 모래바람이나 돌풍이 갑자기 불어오기도 합니다. 그러면 목자는 양을 급히 몰아야 합니다. 목자는 바람을 피하기 위해 양떼를 급하게 움푹 파인 곳으로 몰고 가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에 바람이 금방 지나가면 별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계속 불어올 때가 있습니다. 바람이 더 세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목자는 바람을 뚫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 있는 우리로 양떼를 데리고 가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멀리 떨어져 있는 양은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별다른 수가 없습니다. 목자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양이 따라오고 싶어도 합류할 수가 없습니다. 바람이 합류되는 것을 막아버리기 때문입니다. 눈앞에서 목자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를 잃어버려도 한 동안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풀이 있고 물이 있으면 됩니다. 길을 잃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양은 목자 없는 들판에서 마음대로 뛰어다닙니다. 자기 길을 찾은 것입니다. 하지만 풀이 떨어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밤이 되고 험산 준령을 만나면 그제야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제 양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때서야 양은 목자를 찾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똑같습니다. 길을 잃은 양의 모습은 집을 나간 탕자와 같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돈을 가지고 먼 타국으로 갑니다. 여기저기 돈을 뿌렸습니다. 따르는 사람이 생깁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입니다. 탕자는 드디어 자신의 길을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아 내 인생을 찾았구나!” 자기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돈이 떨어집니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졌습니다. 그 많던 사람들이 다 떠나버렸습니다. 급기야 흉년까지 들었습니다.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이 생긴 것입니다. 민심이 아주 흉흉해졌습니다. 돼지를 치는 것도 어렵습니다. 탕자는 그제야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 성경은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에 비유했을까요? 양의 모습이 사람과 너무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53: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양과 아주 비슷합니다. 개는 들판에 나가도 혼자 집을 찾아옵니다. 소도 들판에 갖다놓으면 혼자 집을 찾아옵니다. 닭도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양은 절대로 혼자 집을 찾아오지 못합니다. 오히려 끝없는 미로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한 없이 헤매다가 생을 마감합니다. 이게 양입니다. 사람이 양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람은 혼자 예수님께 나오지 못합니다. 여러분! 길을 잃은 양이 되지 마세요. 미로 같은 세상에서 헤매지 마세요. 항상 목자를 따라 가세요. 오직 그 분에게만 영생이 있습니다.

지금을 나 세대라고 합니다. 미 제너레이션(me generation)이라고 합니다. ‘중심 사고가 강한 젊은 세대를 말합니다. ‘나 세대의 특징은 나의 이익과 나와 관련된 단체의 이익 외에는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익만을 따라가다 보면 자기도 전혀 모르는 사이에 바른 길에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이익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시적인 안목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안목이 필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눈앞에 풀을 봐서는 안됩니다. 풀을 따라 가서도 안됩니다. 풀 위에 양의 무리를 봐서도 안됩니다. 모두 부수적인 것입니다. 모두 주변적인 것입니다. 주변적인 것을 볼 때 우리는 길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1950년 초반 강원도 어느 산골에 상수라는 아이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상수는 큰아버지로부터 노란 고무신을 선물 받습니다. 난생 처음 받아본 새 고무신입니다. 상수는 너무 좋았습니다. 상수는 신발을 신고 개울에서 놀다가 그만 고무신 한 짝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고무신은 물살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떠내려갔습니다. 상수는 고무신을 건지려고 무작정 개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고무신은 계속 떠내려가다가 큰 강으로 흘러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너무 멀리 왔습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길을 잃은 것입니다. 상수는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았습니다. 어느 덧 세월은 50년이 흘렀습니다. 노인이 된 상수 씨는 TV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에 나갔습니다. 그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했습니다. 마침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던 그의 형이 동생을 알아보고 다시 가족을 만나게 됐습니다. 상수 씨는 50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운 어머니는 아들을 잃고 화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늙으신 아버지는 치매를 앓고 있었습니다. 아들을 50년 만에 만났지만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노랑 고무신 한 짝!’ 지나고 보니 너무 시시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수 십 년 후에 깨달은 것입니다. 별 것 아닌 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다가 집을 잃고 부모를 잃고 형제를 잃어버렸습니다. 고무신 한 짝 때문에 인생을 잃어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무신처럼 별것 아닌 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다가 정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별 것 아닌 것을 따라가지 마세요. 값진 인생을 잃어버지 마세요. 영원을 잃어버리지 마세요.

오늘 본문 말씀과 똑같은 말씀이 마태복음에도 나옵니다. 마태는 잃는다는 말에 플라나’(마태복음)라는 헬라어를 씁니다. 플라나는 속아서 잃어버렸다는 뜻을 내포하는 단어입니다. 마귀는 사람을 보게 합니다.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속지 마세요. 우리는 풀 너머, 양무리 너머에 서 계신 목자를 바라봐야 합니다. 목자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자를 따라가야 합니다. 사람 바라보지 마세요. 예수님 바라보세요. 그래야 길을 잃지 않습니다.

2. 양 찾기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단어는 찾다’(ερίσκω)는 말입니다. 본문에 찾는다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4절에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않겠느냐?’라고 했습니다. 5절에 찾아낸즉이라고 했습니다. 6절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잃어버린 영혼을 얼마나 애타게 찾고 계신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잃은 영혼을 찾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찾는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목자는 양을 끝까지 찾습니다. 4절에 찾아내기까지라고 했습니다. 목자는 양을 찾아낼 때까지 찾습니다. 목자에게 양에 대한 포기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양이 자기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양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양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목자는 양을 반드시 찾아낼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139:7-10>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우리의 목자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반드시 찾아내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수렁에 빠졌던지 어떤 골짜기에 갇혀 있든지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낼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둘째, 목자는 양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닙니다. 4절에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이 질문은 수사의문문입니다. 질문이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의문문으로 적극적으로 찾는 목자의 행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찾기 위해 사람을 고용하지 않습니다. 종을 보내지도 않습니다. 자기가 직접 양을 찾아 나섭니다. 왜요? 자기 양은 자기 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고용했을 때 그 고용인은 들판에 헤매는 다른 양을 데려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목자는 다른 양이 아니라 자기 양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쓰지 않습니다. 목자는 양을 찾기 위해 두루 다닙니다. 산지, 골짜기, 들판 등등 안가는 곳이 없습니다. 험지라고 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험지일수록 더 자세히 찾습니다. 이것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셋째, 목자는 양을 계속 찾습니다. 5절에 찾아낸즉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찾아냈을 때라는 뜻입니다. 지금 찾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양 찾기는 현실 속에서 계속됩니다. 예수님의 양 찾기는 오늘도 계속 됩니다. 결코 중단하지 않습니다.

넷째, 목자는 양 찾기를 완성할 것입니다. 6절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고 했습니다. 목자는 양 찾기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목자이십니다. 완전하신 목자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양 찾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이제 양 찾기를 마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양 찾기의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예수님은 양 찾기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전 국무장관의 이야기입니다. 라이스의 아버지는 목사이며 교수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자랐습니다. 라이스의 어렸을 때 꿈이 피아니스트였습니다. 피아노 연주에 아주 수준급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이스는 성인이 된 후에는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교회를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날 아침에 무얼 사기 위해 집근처 슈퍼마켓에 갔습니다. 쇼핑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오더니 교회에서 예배드리려고 하는데 반주자가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혹시 슈퍼마켓 손님 중에 피아노 칠 수 있는 분이 있냐는 것입니다. 슈퍼마켓 근처에 있는 교회에서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콘돌리자 라이스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를 찾기 위해 슈퍼마켓까지 찾아오시는 예수님! 라이스는 감격했습니다.

3. 목자의 사랑의 어깨에 기대세요.

양을 찾은 목자는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잔치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양 한 마리를 찾은 것이 잔치를 할 일일까요? 집에서 키운 개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다고 생각해봅시다. 친구와 이웃을 불러다가 잔치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더군다나 없는 것이 다시 생긴 것도 아닙니다. 재산이 증식된 것도 아닙니다. 원래 있던 것을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오히려 손해를 봤을 수 있습니다. 어깨에 메고 왔다는 것은 양이 다쳤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양을 치료해줘야 합니다. 오히려 마이너스입니다. 그런데 목자는 잔치를 하자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양과 목자의 관계가 보통 관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무언과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자신의 재산이나 소유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잔치를 베푸는 것입니다. 만약 재산으로 생각했다면 잔치를 베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둘 사이는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자와 양의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요? 그 실마리가 시편에 있습니다.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00: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유대인들은 목자는 하나님이시고 양은 자기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가 양을 찾고 또 찾는 이유를 압니다. 또 어깨에 메고 돌아와 잔치를 하는 이유를 압니다.

목자가 양을 어깨에 멨다는 말은 양과 한 운명공동체가 됐다는 말입니다. ‘어깨라는 말이 영어 성경에는 어깨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 쪽 어깨에 멘 것이 아닙니다. 양쪽 어깨에 멘 것입니다. 목자는 양을 양쪽 어깨에 메고 두 손으로 양을 붙들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너무나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성경의 많은 비유의 말씀 중에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는 우리의 구원을 가장 완벽하게 설명해주는 말씀입니다. 목자가 양을 양 어깨에 멨다는 것은 양과 하나가 됐다는 말입니다. 양과 함께 살고 양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지극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만약에 양을 메고 가다가 목자가 넘어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목자는 양을 잡은 손을 놓을까요? 아닙니다. 목자는 넘어지면서도 양을 보호할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찾고 돌아오는 길은 평지가 아닙니다. 광야입니다. 골짜기입니다. 산등성이입니다. 넘어지면 생명에 위협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깨에 양을 메고 있습니다. 목자와 양은 하나의 운동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내가 하나의 운명 공동체가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산다는 말입니다. 어깨는 아주 지극한 사랑의 연합입니다. 양을 어깨에 멨다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메셨다는 말입니다.

또한 목자가 양을 어깨에 멨다는 것은 지극한 기쁨을 말합니다. ‘즐거워 어깨에 메고라고 했습니다. 아빠가 아이를 어깨에 태우는 것은 지극한 기쁨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아빠의 기쁨과 사랑과 만족이 있습니다. 양이 얼마나 더러웠을까요? 양은 깨끗해 보이지만 아주 지저분한 동물입니다. 아주 쉽게 더러워지는 동물입니다. 게다가 냄새가 아주 지독합니다. 산과 들로 헤맬 때 온갖 이물질이 털에 엉겨 붙었을 것입니다. 참을 수 없는 냄새가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목자는 양을 어깨에 멨습니다. 더러움도 목자의 기쁨을 막을 수 없습니다. 역겨운 냄새도 목자의 기쁨을 막을 수 없습니다. 목자는 즐거워 양을 양 어깨에 멨습니다. 목자의 기쁨은 계속됩니다. 목자는 집에 돌아와 친구와 이웃을 초청해 잔치를 합니다.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이 기쁨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 기쁨은 바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 품으로 돌아오셨을 때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쁘셨는지 느낄 수 있습니까? 아마도 여러분은 그 예수님의 마음이 잘 느껴지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도 잘 모릅니다. 요즘 저는 예수님의 사랑을 조금씩 느껴가고 있습니다. 제가 요즘 깨닫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의 신비로움입니다. 저는 과거에 막연히 주님의 사랑이 크다고 생각했고 크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느끼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은 단순히 큰 정도가 아니라 신비로운 것이구나!’라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예수님의 사랑은 기이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사랑은 큽니다. 그리고 아주 신비롭습니다. 아주 기이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목자로 섬겼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목자로 섬기세요. 목자되신 예수님의 어깨에 기대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짐이 가벼워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목자로 섬겨 목자의 신비하고 기이한 사랑을 경험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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