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해 아래 새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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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전도서1:3~11
주일오전예배 | 2018-09-09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소크라테스는 묻고 또 물어 사물에 대한 올바른 개념에 도달하게 했습니다. 이것을 산파술이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트라시마코스와 나눈 대화입니다.

소크라테스 : 자네는 정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트라시마코스 : 강자의 이익이 정의입니다.

소크라테스 : 강자도 물론 사람이겠지?

트라시마코스 : , 그렇지요.

소크라테스 : 그럼 강자도 실수를 하겠군?

트라시마코스 : .

소크라테스 : 그럼 강자의 잘못된 행동도 정의로운 건가?

트라시마코스 : .........

묻고 또 묻는 중에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질문법으로 일의 본질을 파악한 사람이 삼성 이건희 회장입니다(이지성 - 리딩으로 리딩하라).

1.이 일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2.이 일의 뿌리는 무엇인가?

3.이 일의 핵심기술을 무엇인가?

4.이 일의 핵심기술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5.이 일의 경쟁력의 핵심은 무엇인가?

6.이 일의 고객은 누구인가?

7.고객의 기호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브랜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브랜드’ ‘브랜드한다는 것입니다. 경영자가 경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경영을 한다고 합니다. 오늘의 이건희와 삼성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의문과 질문으로 일구어진 글로벌 기업이 삼성입니다. 20세기 최고 경영자요 학자인 피터 드러커의 경영법은 소크라테스의 대화식 경영법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만일 소크라테스와 점심식사를 할 수 있다면 우리 회사가 가진 모든 기술을 그와 바꾸겠다.”고 했습니다. 세계적인 기업가들이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을 경영에 접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인생의 경영자입니다. 우리도 성공한 인생경영자가 되기 위해서는 묻고 또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존 맥스웰은 지금 고민한 만큼 너는 단단해질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삶의 문제를 고민하고 묻고 다시 고민하고 물어야 합니다.

전도서는 수사학적인 질문으로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고 또 묻는 책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두 개의 수사학적 질문이 나옵니다. 이 질문은 인생의 본질을 묻는 철학적 질문입니다. 질문 첫 번째는 3절의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입니다. 두 번째는 10절에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입니다. 오늘 읽은 나머지 본문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얻도록 하기 위한 설명입니다. 이 시간 이 두 가지 수사학적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유익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이트론입니다. 다른 성경에는 나오지 단어입니다. 이트론은 이익, 유익, 소득, 이점이라는 뜻입니다. 이트론은 남는다(야타르)는 말에서 온 단어입니다. 잠깐 동안만 남는 남음이 아니라 영원히 남는 남음입니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트론은 전도서에만 나오는 표현입니다. 전도서에만 나오는 표현이 또 있습니다. ‘해 아래에서’(29)라는 말입니다. 해 아래에서는 인간의 유한한 삶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모든 삶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라는 말은 사람을 향하여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위하여라는 의미입니다. 3절을 제가 좀 더 의역을 해봤습니다. ‘해 아래서 사람이 수고하는 모든 노역 중에 사람()을 위하여 영원히 이익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의 모든 수고로운 수고 중에 사람()를 위해 영원히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라는 말은 사람에게 무엇이 영원한가?”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솔로몬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영원한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요? 이미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답은 이미 전도자가 했습니다. 전도자는 자신의 답이 우리의 답이 되도록 우리 주변의 사물 네 가지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과 해와 바람과 강물입니다.

첫째, 사람입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온다고 했습니다.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여기서 한 세대는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를 말합니다. 사람은 가고 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오고 있습니다. 땅은 영원하다는 인간의 세대에 비해 영원할 것처럼 길다는 뜻입니다. 인생은 아주 짧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는 것이 있습니다. 끝없는 수고입니다. 3절의 수고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아말입니다. 아말은 힘든 노동, 수고로운 노역, 고통,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은 죽을 고생하다가 간다는 것입니다.

둘째, 해입니다. 해도 뜨고 지고 있습니다. 해는 떴다가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갑니다.

<5>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간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헐떡거리며 뛰어간다.’는 말입니다. 해는 떴던 곳으로 헐레벌떡 뛰어갑니다. 잠시 쉬지도 않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같은 자리를 돌고 또 돕니다. 사람만 죽을 고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도 쉬지 못하고 죽을 고생하며 돌고 또 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익은 없습니다.

셋째, 바람입니다.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해 보다 자유롭습니다. 해는 매일 같은 길을 갑니다. 하지만 바람은 여기저기로 마음대로 붑니다.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붑니다. 서로 불다가 동붑니다. 바람은 이리저리 불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결국 돌고 돌아서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불다가 돌아가며 돌며 돌아 돌아갑니다. 바람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넷째, 강물입니다.

<7>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릅니다. 흐르고 또 흐릅니다. 태초 이래 계속해서 흐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바다를 채우지 못했습니다. 얻은 것이 없습니다. 그저 피곤할 뿐입니다.

<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만물은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세상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 자리입니다. 사람은 해처럼 바람처럼 강물처럼 만족과 행복을 찾아 수고하고 또 수고하지만 눈 하나 채우지 못합니다. 귀도 채우지 못합니다. 피곤함을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헛될 뿐입니다. 여기서 전도자는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수고 속에 영원한 것이 있는가?” 전도자의 답은 없다는 것입니다. 해 아래 모든 수고가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요일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해처럼 바람처럼 강물처럼 빨리 지나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그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해 아래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헛된 세상에서 영원한 것을 붙드시길 소원합니다.

1977년 부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일찍 남편을 잃고 4남매를 혼자 고생고생하며 키운 어머니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임종이 가까워오자 4남매가 모두 모였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런데 평생에 다이아 반지 한번 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원통 하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자녀들이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인데 자식 된 도리로 안들어 드릴 수 없지 않느냐?’ 하면서 조금씩 돈을 내서 다이야 반지를 사 드리기로 했습니다. 이때 맏며느리가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최근에 옆집 아주머니가 다이야 반지를 샀는데 그것을 빌려다가 끼워 드리고 어차피 돌아가실 어른이니까 나중에 빼서 되돌려 주면 어떻겠느냐고 했습니다. 모두들 생각해 보니 그것도 좋을 것 같아서 옆집 아주머니의 반지를 빌려다가 고급상자에 넣은 다음 누워계신 어머니께 가지고 갔습니다. 반지를 받은 어머니는 어린애처럼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는 불빛에 비쳐보고 얼굴에 비비시며 한참 좋아하시더니 물 한 그릇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자녀들이 물을 갔다 드렸더니 어머니는 반지를 빼내 입에 털어 넣고는 꿀꺽 하고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만족 한 듯 자리에 누우시면서, “너희들이 선물한 반지 애미가 극락까지 가지고 갈란다.”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습니다. 자녀들 사이에 다이야 반지를 어떻게 찾아 돌려주어야 할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아들들이 어머니의 배를 갈라 반지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니까 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은 어머니를 두 번 죽이는 것이라고 반대했습니다. 결국 화장을 시켜 드리고 잿더미 속에서 반지를 찾았는데 너무 손상이 되어 버려 도저히 돌려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4남매가 돈을 모아 새 반지를 사서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다 타버린 다이아반지! 이것이 인생이 아닐까요?

4절에 한 세대는 가고 ... 오되...”라고 했습니다. 5절에 해는 뜨고 ... 지되 ... 돌아가고라고 했습니다. 6절에 바람은 불다가 ... 돌아가며 ... 돌며 ... 돌아 ... 돌아가고라고 했습니다. 7절에 강물은 흐르되 ...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고 했습니다. 때가 되면 해도 바람도 강물도 모두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 바람, 강물은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돌아갈 곳이 있습니까? 저의 어머님은 시골에 계십니다. 가끔 어머님께 갑니다. 가다 보면 돌아갈 어머님이 계셔서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캄캄한 밤에 집에 돌아가다 보면 돌아갈 집이 있어서 좋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 돌아갈 집이 있어서 좋다.” 일을 보다가 교회를 옵니다. 세상에서 돌고 돌다가 다시 돌아갈 교회가 있어서 좋습니다.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 돌아갈 곳이 있습니까? 아마 있을 것입니다. 축하합니다. 그러면 영원히 돌아갈 집도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영원히 돌아갈 곳이 있어야 합니다. 해 바람 강물은 이 땅과 함께 세상 끝 날에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해 달 별도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물의 영장인 우리 사람이 돌아갈 곳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잠시 잠깐 돌아갈 집이 아니라 영원히 돌아갈 곳이 있어야 합니다.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 영상이 하나 있습니다. 아름답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한 영상입니다. 동네 아이들과 마을 한 가운데 있는 커다란 마당에서 놀곤 했습니다. 놀다보면 해가 지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해가 져도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놀아요. 얼마나 신이 났었는지 몰라요. 저녁이 되면 엄마들이 자기 아이들을 부르러 한 분 두 분 오세요. “누구야!”하고 불러요. “이제 그만 집에 가자. 가서 저녁 먹자.” 그래요. 그러면 그 아이는 안 가려고 해요. 노는 게 재밌잖아요. 그러면 엄마가 손을 잡고 억지로 끌고 갑니다. 어떤 엄마는 좀 더 놀라고 조금 기다려줍니다. 그렇게 아이들이 하나 둘씩 돌아갑니다. 나중에는 한 두 명만 남습니다. 이제 더 이상 놀이가 되지 않습니다. 정말 쓸쓸합니다. 다른 아이들은 다 엄마가 부르러 오는데 저는 엄마가 부르러 오지 않는 거예요. 엄마가 부르러 오는 아이들이 얼마나 부러운지요. 엄마 손에 붙들려 억지로 집에 가는 아이들이 왜 그렇게 부러운지요? 저희 엄마는 왜 그리 바쁘셨는지... 그래도 집에 오면 엄마가 부엌에 계세요. 밥하고 계신 거예요. 아궁이에 불을 때고 계세요. 부엌에 들어가면 따뜻해요. 푸근해요.

부자와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부자는 날마다 잔치하며 재밌게 살았습니다. 나사로는 거지였습니다. 삶을 아주 고단하게 살았습니다. 둘 다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천사들이 와서 데려갔습니다. 성경 표현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받들려 들어갔다는 말이 데려가다(ἀπόφέρω, 데려가다, 가져가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억지로 데려갔다는 의미입니다. 천사는 이 세상에 사는 나사로를 억지로 데려갔습니다. 엄마처럼! 그런데 부자는 죽었는데 누가 데려갔는지 언급이 없습니다. 나사로는 천사가 데리러 왔습니다. 불러주는 천사가 있어서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부자는 데리러 온 존재가 없습니다. 이름을 불러주는 존재가 없어요. 부자의 이름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왜요? 불러줄 천사가 없습니다. 무의미한 이름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나사로는 거지지만 이름이 정확하게 나와요. 우리 주님이 불러주셔서 그래요. 나사로는 영원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왜 그리스도인의 삶을 거지로 표현했을까요? 성경 기자가 인생의 고단한 삶을 거지로 표현하지 않았을까요?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지 않고 거지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거지처럼 고단한 삶입니다. 하지만 영원히 돌아갈 집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으로 돌아가시면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들의 집을 다 준비하면 내가 너희들을 부르러 다시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수고로운 수고를 모두 마칠 때 주님은 우리를 부르러 오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이 준비해놓으신 천국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돌아갈 집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질문인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는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전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9-10>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것은 한 마디로 해 아래 무엇이 새 것인가?”,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해 아래 있는 것은 모두 헌 것이다.”는 말입니다. 지금 있는 것은 모두 전에 있었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있는 일이 후에 다시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돌고 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전도자가 윤회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금 새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이미 오래 전에 하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후에 다시 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새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옛 것이라는 말입니다. 모두 구식이라는 것입니다. 신식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신식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런 의구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온통 새 것 뿐인데 새 것이 없다니요?” 세상을 보면 이런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가까운 대학 도서관에 볼 책이 있어서 걸어서 갔습니다. 가는 길에 옷가게들이 100m 쭉 있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가을 신상이라고 붙어 있어요. 그 다음 가게도 신상, 그 다음 가게도 신상, 계속해서 신상, 신상, 신상이라고 쫙 붙어 있어요. 제가 지난봄에 그 길을 갈 때는 여름 신상이라고 붙어 있었습니다. 이제 곧 겨울 신상이라는 말이 붙을 것입니다. 1년 내내 신상이에요. 옷 가게를 지나면 핸드폰 가게가 4-5개 쭉 나옵니다. 한 건물 1층에 벽 하나 사이로 핸드폰 가게가 나란히 있어요. 저는 같은 곳인 줄 알았어요. 유리에 신제품 출시라고 붙어 있습니다. 신제품, 신제품, 신제품. 1년 내내 신제품입니다. 백화점을 가보세요. 온통 신상들이 걸려 있습니다. 마트에 가보세요. 모두 다 새 것입니다. 세상은 새 것을 추구합니다. 그런데도 솔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세상은 새 것을 말하는 데 성경은 새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도자의 말이 틀렸을까요? 성경이 틀렸습니까? 아닙니다.

전도자가 말하는 것은 본질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껍데기만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속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겉만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쇠로 망치를 만들고 지금은 쇠로 비행기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옛날에는 천으로 한 복을 만들고 지금은 양복을 만들 뿐입니다. 옛날에는 옷을 저렇게 입고 지금은 옷을 이렇게 입을 뿐입니다. 본질은 똑같습니다.

제가 양복을 31년째 입고 있습니다. 양복을 입으면서 제일 관심 있게 본 것이 깃(카라) 모양입니다. 시대에 따라 깃 모양이 계속 바뀝니다. 신학교 다닐 때입니다. 어떤 분이 교회 바자회에서 양복 한 벌 사주셨어요. 5,000원입니다. 제 몸에 딱 맞았습니다. 그것을 10여년을 입었습니다. 다른 분들을 보니까 양복이 해마다 바뀌는 거예요. 저는 똑같은 옷을 입는데. 그런데 저는 다른 곳은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제 눈에는 계속 깃 모양만 보이는 거예요. 이 부분 모양이 계속 바뀌는 거예요. 저는 항상 똑같은데. 그래서 제 스타일이 구식처럼 생각되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제 양복 깃과 똑같은 스타일이 다시 등장한 거예요. 그때 제가 스타일은 계속 돌고 도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유행은 돌고 돌뿐입니다. 넓어졌다가 좁아졌다가 길어졌다가 짧아졌다 커졌다 작아졌다가 바뀔 뿐입니다. 새 것은 없습니다. 모두 구식입니다. 그냥 신식처럼 보이는 것뿐입니다. 유행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본질은 똑같습니다. 속은 같습니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데 겉만 다르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 본질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변화시킬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혼을 새롭게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삶의 의미, 삶의 가치, 삶의 내용, 삶의 질을 변화시킬만한 새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껍데기만 바꿔놓고 새것이라고 마음을 먹고 살 뿐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는 우리 인간의 삶에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세상은 새 것을 추구합니다. 사람은 새 것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교회도 새 것을 추구합니다. 성경도 새 것을 추구합니다. 하나님도 새 것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새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진짜 새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새 것을 모르면 세상의 새 것만 추구합니다. 한국교회가 절실히 추구해야 할 것은 세속적인 새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로 새로워진 새것이다.

고린도후서5:16-17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마음이 새로워졌습니다. 손과 눈과 귀와 입이 새로워졌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것은 세상적인 새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로 새로워진 새 것입니다.

로마 우르반대학 대강당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그리고 그다음에는 ...>

이것은 우르반대학 설립자의 의도에 따라 새겨진 글입니다. 이 글이 강당에 새겨진 일화가 있습니다. 설립자가 젊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로마법대를 다니는 고학생이었습니다. 졸업반이 되었을 때 학비를 감당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감당할 길이 없어 필립 네리란 부자 노인을 찾아가 재정상의 도움을 청원했습니다. 네리 노인은 그의 요청을 들어 주기로 허락한 후 다음과 같은 문답을 했습니다.

네리노인 그런데 이 돈으로 무엇을 하겠소?”

학 생 우선 법대를 마쳐야겠습니다.”

네리노인 그리고 그다음에는?”

학 생 변호사가 되렵니다.”

네리노인 그리고 그다음에는?”

학 생 돈을 벌어야겠어요.”

네리노인 그리고 그다음에는?”

학 생 집을 짓겠습니다.”

네리노인 그리고 그다음에는?”

학 생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네리노인 그리고 그다음에는?”

학 생 결혼을 해야죠.”

네리노인 그리고 그다음에는?”

학 생 자녀를 낳아서 교육을 시켜야죠.”

네리노인 그리고 그다음에는?”

학 생 점점 늙게 될 것입니다.”

네리노인 그리고 그다음에는?”

학 생 “.............”

아무 대답이 없는 그 대학생을 향해서 네리 노인은 이제 엄숙히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사망이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심판이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영원이다. 예수 안에는 영원한 천당. 예수 밖에는 영원한 지옥이다.” 그 이후 청년의 마음 속에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이라는 질문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후에 대학을 세우고 이 경구를 학교 강당에 붙여두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학생들이 이것을 보고 교훈을 얻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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