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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한반도에 삼국 시대 이전에 삼한(마한 진한 변한) 시대가 있었습니다. 삼한은 한반도 중남부에 있었던 아주 조그만 나라입니다. 삼한 시대는 BC 300년부터 AD 300년까지입니다. 지금부터 약 2,000년 전입니다. 이 시대에 천신에게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을 천군이라고 불렀습니다. 일종의 제사장입니다. 천군이 다스리는 지역을 소도라고 했습니다. 이 소도는 신성지역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소도에는 정치적 세력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범죄자가 소도로 도망해도 잡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이런 제도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면 범죄자들에게 아주 좋은 은신처가 될 것 같습니다. 삼한의 소도는 범죄에 이용될 소지가 있었습니다.
<청소년 쉼터>라는 것이 있습니다. 학대받는 아동, 청소년, 여성들이 피신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2,000년도에 만들어진 보호시설입니다. 쉼터는 현대판 피난처입니다. 현재 전 국회위원이었던 고승덕 씨가 이사장으로 있습니다. 쉼터에 있는 동안 신변을 보호해줍니다. 의식주를 제공해줍니다. 그리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도와줍니다. 아주 좋은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숨을 곳이나 피할 곳이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에 저에게는 정말 잊지 못할 피난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할머니의 치마폭입니다. 저는 1남 5녀 중 셋째입니다. 아들이 귀한 집안이었습니다. 아들 선호사상이 있을 때입니다. 할머니는 저에게 아주 끔찍하셨습니다. 무엇이 생기면 제일 좋은 것은 항상 제 것이었습니다. 항상 할머니는 제 것을 챙겨놓으셨습니다. 또 제가 잘하든 잘못하든 항상 제 편이셨습니다. 제가 동네 아이들과 놀다가 시비가 붙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요새는 키가 큰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는 저처럼 큰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가 또 힘도 셌습니다. 지금은 말랐지만. 몸도 빨랐습니다. 아이들과 시비가 붙으면 제가 거의 다 이겼습니다. 어떤 때는 코피가 터집니다. 피나 나면 무섭잖아요. 그러면 집으로 막 도망갑니다. 저에게 당한 아이들이 저를 한 대 때리고 싶어 막 쫓아옵니다. 저는 마음이 여렸습니다. 아이들이 죽자 사자 덤비면 막 도망갔습니다. 저는 집으로 뛰어가며 “할머니!”하고 소리칩니다. 그러면 할머니가 맞아주십니다. 그때 저는 할머니 치마폭으로 ‘팍’ 안깁니다. 그러면 할머니가 치마폭으로 저를 덮어 주십니다. 할머니가 저를 무조건 보호해주셨습니다. 쫓아온 아이에게 까진 곳이 있으면 약을 발라서 보내셨습니다. 별 일 아닌 것 같으면 달래서 보내셨습니다. 아이가 가면 저는 치마폭에서 나왔습니다. 할머니는 제 어린 시절 저에게 산성이고 피난처이셨습니다. 그 할머니가 제가 초등학교 4학년인 어느 여름 날 오후에 제 옆에서 조용히 돌아가셨습니다. 제게 산성이 없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피난처가 있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 피난처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지금부터 3424년 전에 가나안 땅에 도피성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하나님의 복을 받은 백성들입니다.
1. 도피성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도피성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도피성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가 도망하여 피하는 곳입니다. 도피성이라는 말은 도망하여 피하는 성이라는 뜻입니다. 도피성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이르 미클라트입니다. 히브리어 ‘이르’는 도시, 성읍,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미클라트는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도피성이라는 말의 원어적인 의미는 ‘피난처의 성’ 또는 ‘안식처의 성’입니다. 피난처라는 말은 재난을 피하여 거처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근심, 고통, 위험 따위로부터 피할 수 있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안식처라는 말은 편이 쉬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안식처와 비슷한 말이 보금자리입니다. 보금자리는 지내기에 매우 포근하고 아늑한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따라서 도피성은 살다가 생각지 못한 재난을 만나면 피해 편히 쉬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에게 피난처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보금자리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피난처가 있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피난처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도피성에 관한 설교를 여러 편 읽고 들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제 어머님이 다니고 계신 시골교회 목사님이 하신 이야기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휴가 중에 어머님과 함께 그 시골교회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운전을 하고 가시던 중이었습니다. 신호가 바뀌는 중에 재빨리 지나가셨답니다. 신호를 살짝 위반한 것입니다. 신호를 어기자마자 뒤에서 경찰이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번 차량 우측에 차 대세요.” 경찰차가 뒤에 따라오고 있었던 거예요. 그때 순간 도망가고 싶더래요. 성경처럼 목사님에게 도피성이 있었으면 좋겠더랍니다. 경찰이 쫓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쏙 들어가서 경찰이 지나갈 때 숨을 수 있는 그런 곳이 있었으면 좋겠더랍니다. 그 목사님의 표현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쏙 들어가 숨고 싶었다.” 설교를 들으면서 ‘도피성은 그런 의미가 아닌데 ...’ 이런 생각을 하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 말씀이 너무 공감이 갔습니다. 가장 마음에 남는 설교가 되었습니다. 대부분 목사님들이 끄는 차가 교회 이름이 찍힌 봉고차입니다. 저도 경험해 봤지만 교회 차를 끌고 가다가 신호 위반으로 걸리면 아주 민망합니다. 차에 교회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목사인 거 압니다. 그럴 때는 아주 숨고 싶습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쏙 들어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또 돈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전도사 때 사례가 20만원이었습니다. 교통법규를 위반했는데 범칙금이 6만원인 거예요. 1/3! 여러분! 우리 삶에 어려움이 있을 때 쏙 들어가서 숨을 곳이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에게 숨을 곳을 주셨습니다.
2. 도피성이 필요한 이유
하나님은 왜 도피성을 만드셨을까요? 그것은 가나안 땅에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신19:10). 사람이 살다보면 뜻하지 않는 사고가 터집니다. 사고가 크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크더라도 배상이 가능한 경우가 있습니다. 물질적인 피해는 배상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는 경우에는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배상을 해도 여전히 상처는 남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은 계획적인 살인자는 반드시 죽이도록 했습니다(출21:14). 그런데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경우가 있습니다. 도피성이라는 말과 아주 관련이 깊은 말이 ‘부지중에’라는 말입니다. ‘부지중에’라는 말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실수로’라는 뜻입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사람이 죽는 경우를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전혀 생각지 못한 사고가 터질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당합니다.
1994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10여명의 사냥동우회 회원들이 봉고차를 타고 사냥을 갔습니다. 당시 봉고차 좌석은 마주 앉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사냥총을 여기 저기 좌석 틈에 놓았습니다. 회원 중에 한 명이 총을 조수석 등받이와 마주 앉도록 배치한 좌석의 등받이 사이에 두었습니다. 그 총에는 실탄이 장전되어 있었습니다. 10여명이 회원들이 차를 타고 산길을 가는 중이었습니다. 산길은 비포장입니다. 길이 험합니다. 봉고차가 덜컹거리며 달리고 있었습니다. 산을 깊이 들어갈수록 길이 험했습니다. 차가 요동쳤습니다. 차가 심하게 덜컹하는 순간 그 충격으로 조수석 등받이 뒤에 실탄이 장전되어 있던 총이 격발이 되었습니다. 총알은 좌석의 등받이를 뚫고 앉아 있던 사람의 등을 관통해 심장에 박혔습니다.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아주 슬픈 일입니다. 이때 이 사람이 죽은 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운전수입니까? 총 주인입니까? 아니면 그 자리에 앉은 사람 책임입니까? 제가 볼 때는 총 주인입니다. 그런데 법은 운전한 사람에게 책임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운전한 사람이 구속됐습니다. 여러분! 이런 경우에 법이 맞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몸집이 약간 퉁퉁한 편이었습니다. 착하고 후덕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경우입니다. 이 세상에는 법이 있지만 정말 답이 없는 사건 사고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억울한 경우 하나를 예로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과 함께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나무를 자르기 위해 도끼를 찍었습니다. 이때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옆에 있는 이웃이 맞았습니다. 이웃은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신19:5). 하지만 고의성이 전혀 없습니다. 나무를 함께 하러 갈 정도이면 가까운 사람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전혀 원한이 없습니다. 또 전혀 생각지 못한 사건입니다. 이런 경우 살인죄를 적용해 처벌한다면 아주 억울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억울한 일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가족이 갖는 억울함과 분함에는 비할 수가 없습니다. 가족은 더 억울하고 더 기가 막힙니다. 그래서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도 가족은 복수심에 불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피를 보복하는 자’는 피해자에게 가장 가까운 가족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식이 될 것입니다. 자식이 없으면 형제가 될 것입니다. 형제도 없으면 친척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 피를 보복하는 자’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고엘입니다. 고엘은 ‘대신 갚아 주는 사람’ 또는 ‘기업 무를 자’라는 뜻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는 고엘 제도가 있습니다. 고엘은 친족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의무와 권리를 말합니다. 고엘에게는 세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첫째, 빚을 갚지 못한 친척을 책임지는 의무입니다. 예를 들면 땅을 팔았을 때 땅을 되찾아주는 것입니다. 또 빚으로 종이 되었을 때 해방시켜주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 없이 죽은 경우 가장 가까운 근족이 미망인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주어야 하는 의무입니다. 룻기는 고엘 제도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친족이 죽임을 당한 경우 가장 가까운 근족이 살인자를 끝까지 찾아내서 보복해야할 의무입니다. 6절에 피를 보복하는 자라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또 고대 이스라엘에는 동해보복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출24:23-25> 23.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이것은 동태, 동량, 동해, 등가의 복수법입니다. 피의 보수자는 이 법에 따라 손해를 입은 만큼만 보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안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보복할 때 항상 범위를 넘어갑니다. 필요 이상으로 보복합니다.
사냥꾼들이 곰을 잡는 방법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곰이 잘 다니는 길목에 커다란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그러면 그 곳을 지나던 곰이 돌덩이에 머리를 부딪치게 됩니다. 머리를 부딪힌 곰은 자기가 가는 길을 막은 것이 화가 나서 돌덩이를 이마로 들이받습니다. 그러면 돌덩이는 저만큼 밀려갔다가 다시 곰을 향하여 밀려와 곰을 들이받습니다. 그러면 더 많이 화가 난 곰이 더 세게 돌덩이를 들이받습니다. 곰의 반복되는 무차별한 공격은 그 도가 더 심해집니다. 결국 곰은 그 어리석은 힘겨루기로 머리가 터지고 녹초가 되어 힘을 다 소모해버립니다. 그때 숨어서 지켜보던 사냥꾼들이 와서 곰을 끌고 간다고 합니다.
사람도 똑같습니다. 운전을 방해했다고 차로 들이받습니다. 나중에는 칼부림이 납니다. 위층이 떠들었다고 쫓아가서 폭력을 행사합니다. 심한 경우는 살인까지 합니다. 이것이 타툴 일입니까? 이것이 사람을 죽일 일입니까? 사람은 필요이상으로 보복합니다. 그래야 화가 풀립니다. 이것이 사람의 보복심리입니다. 나중에는 둘 다 망합니다. 우리 사회는 보복심리 때문에 피투성이가 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보복심리를 알기 때문에 동해보복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본 정신은 용서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기를 바라십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피해를 입은 만큼만 피해를 입히게 하셨습니다. 그 이상은 안됩니다. 그 이상은 법이 제재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회에 공의를 위해 동해보복법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동해보복법에 따라 피의 보수자는 살인자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경우에 하나님은 도피성으로 피하도록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 합니다. ‘부지중에’ 죄를 짓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실수로’ 일을 저지릅니다. 프랑스의 사상사 볼테르는 “인간은 항상 실수하게 마련이다.”라고 했습니다. 괴테는 실수는 인간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실수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3장 2절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실수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도피성이 필요합니다. 도피성이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도피성이 없이 살아갑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 집을 마련합니다. 차를 삽니다. 돈을 모읍니다. 하지만 정말 준비해야 할 것은 도피성이 아닐까요? 좋은 차가 있습니다. 큰 집이 있습니다. 갈 곳이 많습니다. 할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괴로울 때 피할 곳이 없습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특징입니다. 현대인들은 도피성이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사건이 터지면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요? 도피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도피성은 집보다 차보다 우리에게 더 필요합니다. 여러분! 도피성을 가지세요. 하나님은 부지중에 사람을 죽인 자를 위해서 도피성을 만드셨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 나의 도피성
우리들의 도피성은 무엇입니까? 다윗은 주님을 ‘나의 피난처’라고 했습니다.
<시 55:8> 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시 61:3>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여러분! 주님이 나의 도피성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우리의 피난처가 되셨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피난처가 되셨습니다.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가 자유하게 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를 받아준 대제사장이 죽는 것입니다.
<민35:28>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머물러야 할 것임이라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 소유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
자기를 받아준 대제사장이 죽으면 살인자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아무도 그에게 죄를 물을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이 살인자를 자유케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은 근본적으로 죄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순간 우리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나는 왜 예수께로 왔나? 죄악에 쫓겨 왔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쫓기는 존재입니다. 무엇에 쫓기는 존재입니까? 죄악에 쫓기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나의 도피성으로 삼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 앞에 나와 주님 앞에 우리의 모든 문제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살인자가 도피성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도피성으로 들어가는 문에서 장로들에게 자기가 당한 사건을 모두 말하는 것입니다.
<수20:4>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
자기가 당한 사건을 모두 말하면 그 때 제사장은 그를 도피성으로 받아들입니다. 도피성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이르 미클라트라고 했습니다. 미클라트는 칼라트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칼라트는 받아들이다 수용하다, 계약하다, 끌어들이다, 수용하다는 뜻입니다. 도피성은 ‘받아들이는 성’ 또는 ‘끌어들이는 성’이라는 뜻입니다. 주님 앞에 우리 아픔을 고백하면 주님은 우리를 끌어들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픔을 담당하십니다. 주님은 고통 때에 나를 끌어들이는 피난처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당한 기가 막힌 사건을 당하거든 주님 앞에 나와서 다 고백하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짐을 맡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예수님은 나의 쉼터이십니다. 예수님께 나아오셔서 다 고백하세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짐을 져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쉼터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일이 있어서 불당동 신도시에 갔습니다. 그런데 건물마다 커피숍이 하나씩 있어요. 어떤 건물에는 크지도 않은데 두 개가 있어요. 수요가 되니까 커피숍이 그렇게 많을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는 곳 중에 하나가 카페입니다. 카페가 주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만남이 있습니다. 대화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여러분에게 영적 카페가 되길 바랍니다. 교회가 주는 영적 분위기가 있습니다. 교회에는 주님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주님과의 대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주시는 안식이 있습니다. 저는 교회가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여러분의 영적 카페로 삼으세요.
4. 도피성은 가까이에 있다.
하나님은 도피성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가까운 곳에 두셨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도피성은 6개가 있었습니다. 요단강 동편에 3개, 서편에 3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땅의 크기는 전라남북도 정도의 면적입니다. 강원도의 2배 정도 되는 크기입니다. 충청남도 세 배 조금 안되는 크기입니다. 물론 고대에는 지금 보다 조금 더 컸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은 아주 조그만 나라입니다. 그 조그만 나라에 도피성이 6개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곳에서 어디서든지 32km 이내에 도피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디서든지 걸어서 하루면 갈 수 있었습니다. 도피성은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또 도피성으로 가는 길은 넓고 좋은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도피성으로 가는 길을 잘 닦게 하셨습니다.
<3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길을 닦고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
랍비들의 문헌에 의하면 도피성으로 가는 도로의 폭이 14m이었다고 합니다. 왕복 4차선이 넘는 도로입니다. 도피성으로 가는 길은 험한 길이 아닙니다.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또 도피성으로 가는 길에 푯말을 세웠습니다. 도피성으로 가는 길이 눈에 잘 띄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피의 보복자가 쫓아와서 원수를 갚기 전에 피하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6절>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원한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하지 아니하나 두렵건대 그 피를 보복하는 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잡아 죽일까 하노라
왜 도피성을 가까이 두셨을까요? 왜 도피성으로 가는 길을 넓게 하셨을까요? 왜 푯말을 세워 눈에 잘 띄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누구나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은 가깝고 쉽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험산준령이 아닙니다. 누구나 나올 수 있습니다. 아무나 나올 수 있습니다. 어디서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어디서든지 주님께 달려가세요.
<시84: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온의 대로는 주님께 가는 길입니다. 그 마음에 주님께 가는 길이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마음에 세상으로 가는 대로가 있으면 안 됩니다. 주님께 나가는 대로가 있어야 합니다. 그 대로가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도피성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도피성은 가까이 있습니다. 도피성으로 가는 길은 쉬운 길입니다.
주님은 고통의 날에 피할 바위가 되십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그늘이 되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쉼터이십니다. 마음이 곤고하고 아프실 때 가만히 계시지 마시고 주님께 달려가세요. 주님은 우리의 도피성이 되십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에게 한 가지 제안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우리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서로 서로 도피성이 되어 주자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강퍅합니까? 정말 영적으로 메말라 있습니다. 부지 중에 실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은 영적으로 쉴 곳이 필요합니다. 주님처럼 우리 이웃에게 작은 도피성이 되어줍시다. 실수한 사람을 혼내고 찌르는 이웃이 되지 맙시다. 감싸 주고 싸매주는 이웃이 됩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이웃하는 모압 백성들을 나루에 떠다니는 새 같다고 하셨습니다.
<사16:2> 모압의 딸들은 아르논 나루에서 떠다니는 새 같고 보금자리에서 흩어진 새 새끼 같을 것이라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있을 곳이 없어 날아다니는 새들처럼, 털린 둥지에서 흩어진 새끼 새들처럼, 모압의 여인들이 아르논의 나루터에서 헤맨다.” 우리말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퍼덕거리며 떠도는 새처럼,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 새처럼 모압의 여인들은 아르논 나루터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주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16:3> 너는 방도를 베풀며 공의로 판결하며 대낮에 밤 같이 그늘을 지으며 쫓겨난 자들을 숨기며 도망한 자들을 발각되게 하지 말며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들이 유다 백성에게 애원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할지 말하여 주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여 주십시오. 뜨거운 대낮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처럼, 우리가 그대의 그늘에서 쉴 수 있도록 보호하여 주십시오. 우리는 피난민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해치지 못할 곳에 우리를 숨겨 주십시오.” 우리말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조언해 주고 중재해 주어라. 한낮에는 밤처럼 네 그림자를 드리워서 쫓겨난 사람들을 숨겨 주고 피난민을 그림자 밖으로 몰아내지 마라.”
여러분! 주님은 우리 도피성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주님처럼 도피성이 되길 바라십니다. 이웃의 도피성이 됩시다. 커다란 도로가 됩시다. 그리고 예수님께로 가는 푯말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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