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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어떤 성도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절벽에서 떨어지다가 다행히 나뭇가지를 잡았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뭇가지는 아래로 쳐졌습니다. 그리고 팔의 힘이 점점 빠져갔습니다. 그 사람은 나뭇가지를 잡고 소리쳤습니다. “누구 없어요? 살려주세요. 누구 없어요?” 그런데 작은 소리가 들리더래요.
“나 여기 있다.”
“누구세요?”
“나는 네가 믿는 하나님이다.”
“오! 하나님! 저 좀 살려주세요!”
“그래! 그럼 염려 말고 손을 놓아라! 내가 구원하마. 어서 손을 놓아!”
그러니까 자기가 한참 있다가 “거기 누구 다른 분 없어요?”라고 했답니다. 꿈에 너무 웃겨서 웃다가 잠을 깼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믿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 좋은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어도 다른 것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굳이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교회도 성도도 순수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순수한 신앙이 그리운 시대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모세의 믿음>입니다. 이 시간 모세의 신앙을 생각하며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거절하라
모세의 신앙은 <거절>에서 시작합니다.
24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거절하다>는 말은 ‘부정하다, 인연을 끊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의 시작”은 세상과의 인연을 끊는데서 시작합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로 40년을 살았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호화로운 삶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7:22에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는 말씀 외에 40년 동안 모세가 애굽 왕궁에서 무엇을 했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모세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모세가 세상을 거절할 때부터 시작합니다. 신앙은 거절에서 시작합니다.
‘세상과의 인연을 끊는다.’고 할 때 이것은 단절을 말하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과 인연을 끊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친구들과 관계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또 짐 보따리를 싸서 깊은 산 중에 들어가 혼자 사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고대 중국 은나라 때 백이와 숙제라는 형제가 살았습니다. 주나라의 무왕이 은나라를 치려고 했습니다. 백이숙제는 인의에 어긋난다면 무왕을 말렸습니다. 하지만 무왕은 무력으로 은나라 주왕을 토벌해 죽였습니다. 인의를 버린 무왕의 행위가 옳지 않다며 백이숙제 형제는 주나라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죽고 말았습니다.
백이와 숙제 형제처럼 깊은 산중에서 생식하며 혼자 사는 것은 거절이 아니라 단절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거절’은 단절이라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위협하는 세상의 요구에 대한 거부입니다. 크리스천은 세상 사람들과 잘 섞여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믿음을 흔드는 세상의 요구는 과감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세가 거절한 것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출애굽기 2장에서 의문이 생기는 기사가 하나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 하나를 쳐 죽였는데 이것을 알게 된 바로가 모세를 찾아 죽이려고 한 사건입니다. 당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모세는 바로의 유력한 후계자였습니다. 바로는 절대 권력자이었습니다. 바로 앞에서 사람의 생명은 한낱 파리의 목숨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엄청난 권력을 앞으로 소유하게 될 사람이 사람 하나 죽인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죽이려고 했을까요? 궁금해서 몇몇 사료를 찾아보았더니 참 놀라운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바로의 왕관을 짓밟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이 아니고 역사의 기록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믿을 만한 것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애굽 사람을 쳐죽였다는 출애굽기의 기록과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함을 거절했다는 히브리서의 기록과 바로의 왕관을 짓밟아 버렸다는 사료를 종합해보면 모세는 바로를 거역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모세는 바로의 왕관을 거절했습니다. 모세는 어린 아이의 코 묻은 돈 몇 푼을 거절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애굽의 권세가 얼마나 컸는지 아십니까?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를 가리켜 세계 4대 제국이라고 합니다. 애굽이 4대 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애굽은 대제국에 대한 야망을 가지고 힘을 키우던 시기이었습니다. 모세는 당시 세상이 주는 최고의 면류관을 거절했습니다. 이 거절이 바로에게는 거역이었습니다. 반역이었습니다. 바로에 대한 거역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바로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할 때 그는 이미 장성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불혹의 나이 40세이었습니다. 애굽의 모든 학술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통치자로서 지혜와 판단력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바로를 거절했습니다.
거절이 주는 장점이 있습니다. 첫째 간단합니다. 긴 질문 긴 글에 아주 간단하게 거절이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No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둘째 상대방의 정신에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거절은 사용에 따라 상대방의 정신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평소에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 늘 거절당하는 사람이라면 거절해도 별로 영향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거절당해본 적이 없는 왕이나 대통령 같은 사람들은 거절당하면 충격이 아주 큽니다.
세상 권세는 마귀가 쥐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사단의 요구에 항상 Yes, 혹은 Ok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요구에 Yes 하는 것은 사탄의 요구에 Yes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하여 No하는 것은 사단의 요구에 No하는 것이 됩니다. 사단에게 치명타를 가하는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셨습니다. 사탄이 이런 저런 요구를 합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No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No가 얼마나 위력이 있는지 예수님께서 세 번 No하시자 마귀가 떠났습니다. 마태복음4장 11절에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여러분! No의 위력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세상의 요구에 No하는 것입니다.
셋째, 소신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항상 Yes만 하는 사람은 소신 있는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앨빈 토플러는 「미래쇼크」라는 책에서의 거절은 성숙함이라고 했습니다. 거절은 우리를 분명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합니다.
모세는 세상을 포기했습니다. 모세는 세상을 버렸습니다. 모세는 세상과 인연을 끊었습니다. 모세의 신앙은 세상의 면류관을 거절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신앙의 성숙은 세상의 요구에 대한 거절에서 시작합니다. 사도는 히브리서 11장을 기록하면서 아브라함, 야곱, 모세 등과 같은 믿음의 영웅들을 가리켜 “믿음의 선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예가 아닙니까? 모세의 후예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세상의 요구에 거절합시다. 모세처럼 세상의 요구에 No라고 말합시다.
2. 선택하라
“거절”의 다음 단계는 선택입니다. 25절에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좋아하다>는 말은 <선택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모세의 영광스러운 결심의 적극적인 측면을 보여줍니다. 믿음에는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거절하는 것 다음에는 반드시 선택하는 것이 따라옵니다. 이 순서입니다.
선택할 때는 반드시 한 세계를 버려야 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기 전에 먼저 악을 버려야 합니다. 선한 것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기 전에 먼저 우상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있기 전에 세상을 등져야 합니다.
홍기선 감독의 「선택」(2003년)라는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선택이란 하나를 고르는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하나를 버리는 것임을 이제서야 알았다.” 한 세계를 포기하지 않으면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상을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OECD국가 중 자살률이 1위입니다. 작년까지 14년 동안 1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루 평균 36명이 자살합니다. 약 40분에 1명씩 자살하는 셈입니다. 연간 13,092명입니다. 왜 이렇게 자살률이 많을까요? 그것은 가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자살하는 70-80%가 우울증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울증이 생기는 이유는 상처 때문입니다. 상처를 받았다는 것은 무언가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해요. 그것을 잃어버리면 멘붕이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젠가는 잃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영원히 간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그것 때문에 언젠가는 상처를 입을 수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살하는 사람의 100%가 무언가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잃습니다. 물질을 잃습니다. 직장을 잃습니다. 친구를 잃습니다. 세상은 온통 잃어버리는 것 때문에 상처를 입습니다. 지금 세상은 잃어버림 때문은 멘붕 상태입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에게 제안합니다. 결코 잃어버릴 수도 없고 결코 상처받지도 않고 결코 변하지도 않는 하나님을 선택할 것을 제안합니다.
모세는 히브리 사람들과 고난 받기를 더 좋아했는데 그것은 그 백성들이 자기의 백성들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습니다. 모세가 선택한 대상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택하신 하나님, 자기의 조상들을 택하신 하나님, 그리고 나를 택하신 하나님, 나를 택하시고 내게 은혜와 당신의 말씀을 계시하신 하나님, 모세는 그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여러분! 모세가 거절한 세상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모세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부귀영화를 거절한 것입니다. 만약 그것을 그냥 잃었다면 자살하거나 미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자살도 하지 않고 미치지도 않았을까요? 바로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최고의 가치, 절대 가치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선택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시고 말씀하여 주신 하나님을 이 세상 보다 더 좋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멘붕인 이 세상에서 여러분의 멘탈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3. 바라보라
모세가 세상 최고의 영화를 거절하고 하나님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것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선택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바라보다는 말은 헬라어에서 두 단어가 결합된 합성동사입니다. 그 동사는 이것을 보다가 다른 것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모세가 바라 본 것은 무엇입니까? 모세는 시간 속에 속한 것을 보다가 영원한 세계에 속한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면류관을 바라보다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모세는 세상을 보다가 천국을 바라보았습니다.
성경의 믿음의 영웅들은 눈이 네 개 이었습니다. 괴물이냐구요? 아닙니다. 두 개는 육적인 눈입니다. 다른 두 개는 영적인 눈입니다. 그들은 육적인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눈으로는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을 바라보며 저것을 바라본 사람들이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바라본 대로 됩니다.
사탄이 하와에게 말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뱀의 말을 들은 하와가 선악과를 바라보았습니다.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선악과를 바라보았습니다. 여기 ‘본즉’(히, 라아)이라는 말이 ‘바라보다 쳐다보다 관심을 가지고 보다’라는 뜻입니다. 하와는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사람은 강하게 바라보는 것에 끌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최근 10대 청소년들은 영화 속에나 있을 법한 일들을 저지릅니다. 그런데 이들은 실제로 범죄를 저지른 후, 드라마나 영화를 모방했다고 말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지난 5년 간 아동성폭력이 무려 80.2%가 증가했고, 10대 성범죄 발생률은 일본의 10배, 미국의 2배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최근에는 인터넷과 케이블 TV 등 매스컴을 통해 모방 범죄가 생기면서 더욱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유럽과 미국에서는 범죄나 자살에 관한 보도를 줄이자, 그동안 강력한 처벌로도 줄어들지 않았던 범죄율과 자살률이 빠르게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법적으로 범죄하는 사람들을 처벌해도 범죄가 줄어들지 않았는데 TV에서 그것을 생생하게 찍어서 보여주고 보도하는 것을 자제시키니까 자동적으로 범죄율이 확고하게 줄어들었다고 말한 것입니다(조용기 - 「바라봄의 법칙」 中에서).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암으로 병원에 누워 세상 떠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병문안 오시는 분이 화분 하나를 머리맡에 놓아 주었습니다. 며칠 지나자 다 말라 버렸습니다. 어머니가 간병하는 딸에게 말했습니다. “딸아! 저 화분을 버려다오, 말라가는 내 생명 같아서 보기가 싫구나!” 딸이 말했습니다. “어머니! 일부러 버리지 않았어요. 저 말라가는 화분의 화초를 날마다 바라보세요. 어머니 암세포가 저렇게 말라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바라보세요.” 딸의 말을 듣는 순간 어머니 마음에는 번개같이 스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렇다! 저 말라가는 화분을 바라보며 내 암세포가 저렇게 말라가는 생각하며 기도하자.’ 어머니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하나님! 저 화초가 말라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내 암세포가 저렇게 말라지게 하옵소서!” 어머니는 고침 받았습니다. 바라보는 것은 능력입니다.
사람의 인생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닷가의 모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여호수아는 밟고 들어갈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지금이 아니라 장차 하나님이 주실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기자는 기라성 같은 믿음의 영웅들을 언급합니다. 에녹,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라합, 다윗 등등. 그런데 믿음의 영웅들을 언급하기 전에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눈을 소개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여기 영적인 눈, 믿음의 눈의 특징이 있습니다. 믿음의 눈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라는 것, 소망하는 것을 미리 당겨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세는 이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눈을 가지세요. 이 땅에 것만 계속 바라보지 마세요. 이 땅에 것을 바라보다가 저 하늘에 있는 것을 바라보세요. 모세는 바로의 왕관을 바라보다가 하나님이 주시는 왕관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머리는 좋은 데 공부에 게을리 했습니다. 성적이 언제나 반에서 하위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5등 안에 들기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너는 머리가 좋단다, 이제 5등 안에 들어 보아라. 너는 이제부터 5등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 책상 앞에 5자를 크게 써 붙였습니다. 아들 방에 들어가며 나가며 잡은 고리 양쪽에 5자를 붙였습니다. 아들이 사용하는 냉장고 손잡이 앞에도 5자를 써 붙였습니다. 도시락을 어머니가 싸주어도 도시락위에 5자를 써 붙였습니다. 고기반찬도 5개를 넣었습니다. 아버지가 퇴근할 때 아들이 라면 좀 사다 달라고 전화가 오면 라면도 5개를 사다주면서 5등을 강조하였습니다. 아들은 늘 5자를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자나 깨나 항상 5였습니다. 드디어 아들은 5등 안에 들었습니다. 바라봄은 능력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을 닮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에 의해 변화되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을 닮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에 의해 변화됩니다.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바라보면 끝내 그것을 얻게 됩니다.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노력하면 끝내 그분을 닮게 됩니다.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면
마침내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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