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찬미

조회수 : 1001회

본문 : 사도행전2:47
주일오전예배 | 2018-07-29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슬픈 노래를 보른 가수들은 대부분 일찍 타계했다는 논문이 있습니다. 가수들이 자기가 부른 노래 가사에 따라 일찍 운명을 달리 했다는 것입니다. 1969년에 가수 양미란 씨는 <흑점>이라는 노래를 부릅니다. 양 씨는 1987년에 골수암으로 41살에 사망합니다. 몇 년 후에는 노래를 지은 남편 정민섭 씨도 폐암으로 사망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수 윤심덕 씨는 <사의 찬미>란 노래를 불렀습니다. 윤 씨는 192684일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60년대 말 <산장의 여인>을 부른 가수 권혜경 씨는 자궁암과 위장암으로 산장에 집을 집고 수도승처럼 쓸쓸히 살았다고 합니다. 1962년 남인수 씨는 <눈감아드리오리>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남 씨는 노랫말처럼 41세의 한창의 나이에 일찍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불렀던 가수 차중락은 29세의 젊은 나이에 낙엽처럼 떨어져 저 세상에 가버렸습니다. <간다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를 열창하던 김정호는 20대 중반에 암으로 요절했습니다. 노래 가사처럼 가 버렸습니다. <이별>을 불렀던 패티김은 작곡가 길옥윤과 이별했습니다. 김상희 씨는 <멀리 있어도>를 부르면서 남편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어 몇 년간 떨어져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수 조미미는 35세까지 결혼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노래가 히트되면서 재일 교포가 바다를 건너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노처녀로 지내던 노사연은 <만남>을 부르고 행복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신애 씨는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을 친다.”라는 가사 때문인지 사기를 당해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합니다. 송대관 씨는 1987년 데뷔해서 무명으로 지내다가 1975년에 <해뜰 날>을 발표하고 노랫말처럼 진짜 쨍하고 해 뜨는 날이 오게 되었습니다.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가수가 노래 한곡을 취입하기 위해 같은 노래를 보통 2,000~3,000번이나 부른다고 합니다. 그 이상 부르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노래 가사에 감정을 넣고 부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노래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가사 내용이 자신의 잠재의식에 덜컥 연결된 것입니다. 가사의 내용이 진실이라고 믿어버린 잠재의식은 나중에 현실의 세계에다 그 내용을 정확히 투영합니다. 가수 100명을 대상으로 히트곡이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조사해보니 놀랍게도 91명의 가수가 자신의 히트곡과 운명을 만들었습니다. 요절한 가수들은 너나없이 죽음과 연관된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얼마 전에 홍서범 씨가 어떤 프로에 나와 가수의 인생은 자기가 부른 노래대로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음악의 사람의 본능입니다. 뉴욕 대학교 의과대학 신경학과 교수인 올리버 색스(Oliver Sacks, 영국 런던 출생)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올리버는 사람의 음악적인 성향을 인간의 본성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선천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도 인간이 있는 곳에는 항상 음악이 있었습니다. 그 음악에 사람들의 정서가 투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유전자 속에 음악을 프로그램화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 본성에 음악을 주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초대교회는 노래가 있는 교회이었습니다.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여기 찬미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아이네오(ἀινέω)입니다. 아이네오가 신약성경에서 찬미하다’, ‘찬송하다’, ‘찬양하다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찬미(讚美)는 기릴 찬에 아름다울 미를 써서 아름다움을 기리어 칭송한다는 뜻입니다. 찬송(讚頌)은 기릴 에 기릴 자를 씁니다. 하나님을 기리고 높인다는 의미입니다. 찬양(讚揚)은 기릴 찬, 오를 양을 써서 아름다움이나 훌륭함을 기리고 드높인다는 뜻입니다.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찬양 찬송 찬미는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찬송에 대한 우리말 표현은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찬양에 관한 단어가 훨씬 많습니다. 구약 성경에 찬양이란 뜻을 가진 히브리 단어가 6개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단어가 할랄입니다. 할랄은 찬양하다, 찬미하다, 영광스럽게 하다, 드러나게 하다 등등의 뜻입니다. 할랄과 비슷한 말이 있죠? 할렐루야입니다. ‘할랄이 할렐루야입니다. ‘할렐’(할랄)찬양하라’ ‘영광스럽게 하라’ ‘드러나게 하라는 뜻입니다. 루는 너희입니다. 그리고 는 야웨(여호와)의 단축형입니다. 할렐루야는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라’ ‘여호와를 높여라’ ‘여호와를 드러나게 하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할렐루야는 최고의 감사, 기쁨, 즐거움, 환호에 대한 응답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아주 좋은 일이 있을 때 할렐루야!”라고 외칩니다. 또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찬양할 때 할렐루야를 사용했습니다.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높일 때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찬양의 뜻을 가진 헬라어 단어가 15개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단어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이네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어가 독사(독사조)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영광또는 영광돌린다.’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영광을 헬라어로 독사라고 합니다. 영광돌리다는 말은 독사조라고 합니다. 이 독사라는 말에는 영광이라는 뜻도 있지만 찬송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2: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영광(독사)이라는 말이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15:6한마음과 한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독사조) 하려 하노라고 했습니다. 영광을 돌리다(독사조)는 말이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하나님을 높인다는 의미입니다.  

이 외에 찬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헬라어 단어를 살펴보면 무릎을 꿇다, 경의를 표하다(바락), 칭찬하다(테힐라), 악기의 줄을 퉁기다, 노래하다(자마르), 고백하다, 감사하다(엑쏘몰로게오), 크게 여기다, 위대해지다(메갈루노), 자랑하다 등의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말의 의미를 종합해볼 때 찬양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는 것입니다.  

633년에 스페인의 톨레도(Toledo)에서 톨레도 회의가 있었습니다. 이 종교회의에서는 찬송의 틀을 만들었습니다. 찬송에 반드시 갖추어야 할 3가지 요소를 정한 것입니다. 첫째, 노래(Canticum), 둘째, 높임(Laudem), 셋째 하나님(Deity)입니다. 찬양에는 반드시 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찬미는 하나님을 기리고 높이는 것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높이는 노래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성경은 아주 구체적으로 번역했습니다. “나의 이름을 부르는 나의 백성,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창조한 사람들, 내가 빚어 만든 사람들을 모두 오게 하여라' 하고 말하겠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또 이사야 선지자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을 우리말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 백성은 나를 찬양하게 하려고 내가 손수 만든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노래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 노래는 찬양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찬미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이 회복되는 기적이 있게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뜨거운 성령 체험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애슐리 스미스의 기적을 믿나요(2006)라는 책이 있습니다. 애슐리 스미스는 새벽 두시에 담배를 사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려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총을 겨누었습니다. 강도는 애슐리를 집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습니다. 강도는 브라이언 니콜스라는 사람입니다. 바로 전날 브라이언은 강간 혐의를 받고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브라이언은 재판정에서 총을 빼앗아 재판장과 여성보안관 두 사람과 속기록 직원을 쏴 죽이고는 도망쳤습니다.  

애슐리는 10대 때 상점서 물건을 훔치다 걸려 1년간 보호관찰 처분을 받았습니다. 음주운전, 과속, 폭행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습니다. 4년 전 남편이 흉기에 찔린 채 자기 품에서 숨져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었습니다. 애슐리는 고통을 이기기 위해 마약에 손을 댔습니다. 그리고 다섯 살 난 딸이 있습니다. 애슐리는 딸을 고모에게 맡기고, 재활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브라이언에게 납치를 당합니다. 애슐리는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처절하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사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애슐리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도저히 마약을 끊지 못하고 있음을 하나님께 행동으로 보여 드렸고, 어쩌면 오늘 밤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를 영원히 데려가는 것이 페이지를 위해 가장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볼 자격이 없을 것이다. ', 제발! 다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완전히 변하고 싶어. 이제 깨달았는데. 나는 변하고 싶은데!’  

그 순간 애슐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마음에 말할 수 없는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강도와 말문을 텄습니다. 자기를 죽이게 되면 아이는 고아로 살아가게 된다고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면서,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애슐리는 강도에게 고등학교 때 백화점에서 물건을 훔쳤다가 감옥에 간 이야기, 남편이 살해당한 이야기, 자신이 마약중독으로 자동차 사고가 나서 죽다가 살아난 이야기 등을 숨김없이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이야기를 합니다. 애슐리는 침착하게 자신을 소개하며, 자신을 인질로 잡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으며, 그가 살인행위로 교도소로 가더라도 당신을 통해서 전도를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탈주자가 법원에서 도망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다고 하면서, 거기에는 사명이 따른다는 것도 일러주었습니다. 그 사명은 다름 아니라 감옥으로 가서 그 곳 모든 죄수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눠야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강도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릭 워렌 목사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The Purpose-driven Life, 2002)>을 인질범에게 차분히 읽어주었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은 2300만부가 팔린 책입니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가장 오래 머문 책 중에 하나입니다. 그녀는 얼마든지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남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첫 구절로부터 읽어내려 갔습니다. 책의 내용이 강도의 가슴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애슐리는 도망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기다렸습니다.  

7시간이 지난 후 강도는 애슐리를 집 밖으로 나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순순히 투항했습니다. 사건 종료 직후 인질로 잡혔던 여인이 기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누이이고 그는 나의 형제이고, 하나님이 그를 내게 보내신 것이다고 했다고 합니다. 애슐리는 TV 인터뷰를 통해 "니콜스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며 나를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내준 천사라고 생각했다"고 울먹였습니다.  

애슐리 스미스와 니콜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때 그 대화 중에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눈은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졌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마약중독자와 강도를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본래의 모습을 찾게 합니다. 매스컴에서 애슐리를 '영웅'이라고 불립니다. 그때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일을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도와주셨어요. 나는 하나님의 공을 가로채고 싶지 않아요." 인생이 온갖 상처로 얼룩져 있는 애슐리가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을 찬미(영광)한 것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2장에 초대교회가 찬미하게 된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어찌할꼬?’하며 탄식하기 시작했습니다. 탄식하는 유대인들에게 베드로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유대인들은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회개가 가장 먼저입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회개에서 시작합니다.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세례를 받은 후에 유대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교제하며 떡을 뗐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그 모임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순전한 기독교를 만들었습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맨 마지막에 찬미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초대교회가 갖는 여러 가지 특징이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누가는 초대 교회 여러 가지 특징 중 찬미를 왜 맨 마지막에 놓고 있을까요? 찬송은 신앙생활의 꽃입니다. 찬송은 단순히 노래가 아닙니다. 찬송은 단순히 음악이 아닙니다. 찬송은 신앙생활의 열매입니다.  

말씀 기도 찬송을 예배의 3요소라고 합니다. 말씀은 씨앗과 같은 것입니다. 설교는 씨앗인 말씀을 사람들의 심령에 심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심겨진 말씀의 씨앗을 틔우는 작업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찬송은 그 말씀의 싹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열매에 비유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찬송은 단순히 음악이나 소리가 아닙니다. 찬송은 생활의 열매인 믿음으로 형식화 된 가사 즉 의미의 형식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깊은 숲에 들어가 보십시오. 온갖 나무 가지들이 얽히고설키어 있습니다. 모두 녹색입니다. 잎이 비슷합니다.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열매는 말합니다. “나는 사과나무야!” “나는 복숭아야!”라고 증거합니다. 나무는 열매로 아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열매로 아는 것입니다. 이파리가 아닙니다. 열매입니다. 그 열매가 바로 찬미입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지속적으로 사도들과 교제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과 교제한다는 것이 반드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이런 일들을 대부분 위조할 수 있습니다. 성찬식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교회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귀는 기쁨조차 위조할 수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들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술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마약도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행복해!” “나는 지금 기뻐라는 말이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해주는 것은 아닙니다(로이드 존스).  

그러나 제가 알기로 마귀가 위조할 수 없는 것이 꼭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절대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마귀는 심지어 믿음도 위조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219절에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2:19)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하나님을 믿게 합니다.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기만 하면 마귀는 광명의 천사로도 가장해 하나님을 믿고 신앙이 깊어지도록 사람들을 독려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에게 대한 위조된 지적인 관심, 성찬식에 대한 위조된 관심, 기도에 대한 위조된 관심, 위조된 기쁨과 즐거움을 여러분에게 심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지는 않습니다(로이드 존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모든 신앙고백에 대한 궁극적인 시험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믿는가, 그분을 예배하려고 노력하는가, 기도하려고 애쓰는가 하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께 간구하는가 묻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오직 하나를 묻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할 때, 찬양은 언제나 교회의 두드러진 특징이었습니다. 슬픔에 잠긴 기독교는 말 자체가 모순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찬양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찬송가를 그리스도인의 찬양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이유는 단 하나뿐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로이드 존스). 찬송은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와 축복을 받은 성도가 감사와 찬양과 기도와 간구를 노래에 담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래합시다. 노래는 말에다 곡조를 실은 것이어서 말보다 더 큰 영향력이 있습니다. 밝고 힘찬 노래를 부릅시다.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맙시다. 슬픈 노래는 복이 나가는 노래입니다. 밝고 신나는 노래를 합시다. 사람의 운명은 노래대로 됩니다. 노래 중의 노래는 찬미입니다.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립시다. 우리의 삶은 찬송대로 됩니다. 워치만 리는 찬송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며 성도들이 보여 준 가장 고상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생활의 최고의 표현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스펄전은 매일 아침 찬양의 욕조에서 세수하라.”고 했습니다. 에드워드 영은 찬양은 기도보다 더 거룩하다. 기도는 하늘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나 찬양은 이미 그곳에 먼저 가 있다.”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에 적을 두고 있는 어떤 교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부터인 가 그 교수님의 모습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길을 걸어갈 때나 책상에 앉아 있을 때 무엇인가 계속해서 입으로 흥얼흥얼대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이상한 모습에 학생들 이 대표를 몇 명 뽑아서 한번 그 사연을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교수님은 학생들의 방문한 목적 을 듣고서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러한 사연을 말해 주었습니다. 얼마 전에 자신이 꿈을 꾸었다고 했습니다. 하늘나라의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쭉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천사들이 줄을 선 사람들의 자격을 심사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수님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천사가 나타나서 이러한 질문을 했습니다. "찬송가에 이러이러한 것 있지? 어디 그것 한번 불러 봐!" 그러나 늘 책과 씨름만 했지 언제 찬송가를 제대로 불러 보았겠는가? 우물우물 몇 소절하다가 는 끝내지도 못하고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천사가 호통을 쳤습니다. “이 사람 정말 형편없는 신자구먼! 찬송도 못 부르면서 어떻게 천국에 올려고 그래?” 천사가 호통을 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는 것입니다. 꿈속에서 너무도 혼이 난 이 교수는 그 이후부터 시간이 있는 대로 계속해서 찬송을 부르며 자신의 마음에 찬송이 충만하도록 애를 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전글 영원히 남을 것을 붙잡으라
다음글 아브라함의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