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아브라함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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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히브리서11:17-19
주일오전예배 | 2018-07-22
설교자 : 서요한 목사

머피의 법칙(Murphy's law)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머피의 법칙은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반드시 잘못되고야 만다.’는 법칙입니다. 버스가 늘 늦게 와요. 어느 날 급한 일이 생겨 조금 늦게 나갔더니 그날따라 버스가 제 시간에 왔어요. 이미 버스는 가버렸어요. 큰 맘 먹고 세차를 했더니 갑자기 비가 오는 거예요. 택시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급해서 택시를 잡으면 빈 택시는 꼭 길 건너편으로만 와요. 그래서 건너편으로 갑니다. 그러면 빈 택시가 있던 쪽으로 오는 거예요. 은행 자동화 기계에 줄을 섭니다. 짧은 줄에 섰는데 긴 줄이 먼저 줄어들어요. 내 줄은 안 줄어요. 우연히 나쁜 일만 계속해서 일어나는 상황을 머피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안 되는 것은 안 되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식입니다.

머피의 법칙에 반대되는 법칙이 있습니다. 샐리의 법칙입니다. 우연히 나에게 유리한 일만 일어나는 법칙을 말합니다. 2005년에 섬기던 교회에서 교회건축을 마친 후에 그 동안 수고했다고 교역자 전원을 중국으로 수양회를 보내줬습니다. 식당에 가면 제가 않은 자리에 가장 먼저 식사가 나오는 거예요. 항상 제가 먼저 먹는 거예요. 그래서 이쪽에 앉아 보기도 하고 저쪽에 앉아 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항상 제가 앉은 자리에 먼저 나오는 거예요. 민망하기도 하고 좋기도 했습니다. 맑은 날에 우연히 우산을 들고 나왔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져요. 시험 직전에 그냥 펼쳐본 페이지에서 시험문제가 나왔어요. 지각을 했는데 마침 선생님이 자리에 안 계시는 거예요. 나폴레옹이 전쟁 중에 발밑에 있는 네잎클로버를 보고 그걸 주우려고 허리를 굽히는 순간에 총탄이 머리 위쪽을 날아갔습니다. 이때부터 행운의 네잎 클로버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샐리의 법칙은 뭘 해도 되는 것을 말합니다. 머피의 법칙은 뭘 해도 안되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이 머피의 법칙대로 될 때가 있습니다. 일이 계속 꼬여요. 정말 되는 것이 없는 날이 있어요. 그런 때는 아주 속이 상합니다. 반대로 샐리의 법칙대로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는 아주 신이 납니다. 한국적 사고로 말을 한다면 머피의 법칙이 일어나는 날은 재수가 없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샐리의 법칙이 일어나는 날은 재수가 좋은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일까요? 그리스도인은 머피의 법칙, 샐리의 법칙, 재수, 행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은혜에 지배받는 삶을 살 때 성도의 삶은 복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았던 믿음의 영웅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크리스천에게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웁니다. 이 시간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네 가지 동사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1.받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한 설명이 시험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험(test)입니다. 다른 하나는 유혹(temptation)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타락시키기 위해 시험합니다. 이것을 유혹이라고 합니다. 마귀는 유혹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테스트입니다. 테스트(시험)라는 것은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아보는 것입니다. 안에 있는 자질을 밖으로 들어내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보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믿음학교의 시험지를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시험문제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17절 끝에 그 외아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외아들이라는 말이 영어 성경에는 그의 하나 그리고 오직 아들’(his one and only son)로 되어 있습니다. ‘오직 하나 뿐인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은 하나가 아닙니다.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두라에게서 낳은 여섯 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8입니다. 아들이 하나뿐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다른 어떤 아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들입니다. 이삭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설명해주는 말입니다. 창세기 222절에는 이삭을 독자라고 있습니다. 이 독자라는 말은 예수님께 쓰여진 <독생자>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어떤 의미의 아들인지 이 <외아들>이라는 말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직 하나 뿐인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저의 식구는 아이 셋과 저와 제 아내 다섯입니다. 여행 중에 테러범에게 납치가 됐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테러범이 한 명만 죽으면 나머지는 다 살려주겠다고 협박을 해요. 그러면 누가 죽어야 할까요? 당연히 제가 죽는 거예요. 이건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고민할 것도 없습니다. 제가 죽어야 가장 좋습니다. 두 명이 죽어야 한다면 저와 제 아내가 죽는 것입니다. 이것도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고민할 여지도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세 명이 죽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때부터 답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귀한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험문제입니다. 가장 큰 시험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시험을 어떻게 했는지 보세요.

17절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라고 했습니다. 여기 받다라는 말이 헬라어로 아나데코마이(άναδέχομαι)입니다. 아나데코마이는 영접하다, 환영하다, 승낙하다, 맞아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아나데코마이는 아나()라는 전치사와 데코마이(환영하다, 영접하다)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위에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는 문자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어떤 성도님 가정을 심방한 적이 있습니다. 성도님이 사는 집이 단독 주택이었습니다. 집 근처까지 갔습니다. 집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성도님이 단정하게 옷을 입고 문 밖에 나와 계셔요. 파킹을 하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문이 모두 열려 있어요. 대문, 현관 바깥문 그리고 현관 안쪽 문까지 모두 열려 있어요. 그냥 논스톱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신을 환영한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영접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환영하듯 맞이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귀한 손님을 맞이하듯 시험을 맞이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신 시험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것은 떡이 아닙니다. 돈도 아닙니다. 집이 아닙니다. 금 은 보석이 아닙니다.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듣도 보도 못한 시험입니다. 아들을 짐승제사처럼 각을 떠서 번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이 되나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마치 돈을 받듯이 기꺼이 받았습니다. 귀중품을 받듯이 귀하게 맞아들였습니다. 성경은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고 합니다.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왜 성경은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고 할까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시험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누구나 시험이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시험을 기쁨으로 받아들입시다. 시험을 잘 참읍시다.

2. 드리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드리다라는 단어입니다.

17절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믿음으로 이삭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여기 드리다는 말이 헬라어로 프로스페로(προσφερω)입니다. 프로스페로는 ‘~에게, ~를 향하여라는 뜻의 접두어 프로스(προς)운반하다, 데려가다, 가져오다, 지고 가다, 부담하다등의 뜻인 페로(φερω)의 합성어입니다. 프로스페로의 문자적인 의미는 누구에게 무언가를 가져다가 준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앞에 있는 누구에게 물건을 건네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것을 받을 사람이 있는 곳까지 가지고 가서 정중하게 건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로스페로에는 제물이라는 뜻도 있지만 선물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기꺼이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삼일 길을 걸어가서 귀한 선물을 드리듯 이삭을 하나님께 정성껏 드린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사업을 하다가 실패했습니다. 집과 재산을 다 날렸습니다. 살던 곳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서 제가 있는 곳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부부가 공장에 다니며 힘들게 돈을 조금 모았습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집이 필요했어요. 그런데 돈이 부족해요. 경매로 집을 사게 됐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안 넘겨주려고 하는 거예요. 주기는 줘야겠는데 주기 싫은 거예요. 나가면서 그냥 나간 것이 아니라 집을 왕창 망가뜨리고 나갔어요. 한 겨울인데 보일러를 터뜨려 버렸어요. 집 여기저기를 부숴버렸어요. 집을 사서 좋아해야 하는데 오히려 울상이 됐어요. ‘내가 못 먹으면 너도 못 먹는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종종 정말 주기 싫은 것을 상대에게 줘야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합니까? 내가 갔다가 상대에게 줍니까? 아니요. “와서 가져가라고 해! 내가 왜 거기까지 갔다 주냐?”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이렇게 드린 것이 아닙니다. 아주 정성껏 드린 것입니다. 삼일 길을 꼬박 걸어가서 정중하게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가져가시려면 가져가시고 마음대로 하세요.” 이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사흘 길을 갔습니다. 모리아 산에 올라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 제단에 이삭을 묶었습니다. 죽이기 위해 칼을 들어 올렸습니다. 그때 멈추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순간까지 사흘 동안 아브라함이 이삭을 마음속에서 몇 번이나 죽였을까요? 제사장이 하나님께 드릴 짐승을 잡을 때 매뉴얼이 있습니다. 그냥 막 잡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부분을 칼로 찌르면 동물의 숨이 끊어질 것이다. 그러면 목을 따서 피를 양푼에 받자. 그런 다음 가죽을 벗기고 뼈마디를 자르자.’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어떠했을까요? 사흘 길을 아들과 함께 가는 동안 아들을 마음 속에 얼마나 많이 죽였을까요? 마음으로 아들 이삭을 칼로 잡는 일을 수없이 반복했을 것입니다.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저리고 아팠을까요?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아픔입니다.

이삭은 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그 마음 속에서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완전히 드린 것입니다. 여기 드렸다는 말은 드리려고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완전히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기꺼운 마음으로 드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175세를 살았습니다. 75세에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그 이전부터 신앙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은 적어도 100년 동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100년의 신앙생활 중에 최고의 믿음의 행위는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 것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린 것은 아브라함 신앙생활 중에 백미입니다.

성경 역사에서 최고의 희생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헌신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헌신은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희생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희생에 비유되는 헌신이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 것입니다. 다니엘은 믿음으로 사자의 입을 막았습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홍해 바다를 갈랐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불속을 걸어갔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역사 스토리를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11:32). 성경에는 수 없이 많은 믿음의 영웅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의 행위가 나옵니다. 그 중에서 최고의 믿음의 행위를 꼽으라면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요?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헌신은 모든 믿음의 선진들의 행위 가운데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기독교인들에게 믿음의 아버지라고 불리 웁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거기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행한 일보다 구약에 더 기념될 만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영원히 기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동안의 제 신앙생활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내 믿음의 행위의 최고봉은 무엇일까?’ 저는 30년 정도 신앙생활한 것 같습니다. 마땅한 것이 없었습니다. 참 미지근하게 신앙생활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내 생애 가운데 한 번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믿음의 행위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믿음의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 가운데 적어도 한 번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믿음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생각하다

아브라함이 구약 성경에서 최고의 믿음의 행위를 한 배경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주 논리적인 사고입니다. 19절에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고 했습니다. 여기 생각하다는 말은 헬라어의 로기조마이(λογίζομαι)입니다. 로기조마이는 심사숙고하다’ ‘깊이 생각하다’ ‘계산하다’ ‘판단하다는 뜻입니다. 형용사가 로기코스(λογικός)입니다. 로기코스는 합리적인’ ‘이성적인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영어의 로직(logic, 합리적인 이성적인)이 왔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생각했다는 말은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깊이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아주 이성적으로 계산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맹목적으로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재리에 아주 밝은 사람입니다. 자기 아내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속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의 장사를 위해 조카 롯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롯은 회계와 법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수치에 아주 민감한 사람이엇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만 좋고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맹신자가 아닙니다.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따져가며 아주 정확하게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심사숙고에서 왔습니다.

제가 군 생활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동기들에게 나는 앞으로 목사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가깝게 지낸 동기가 한명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기 친구에게 저를 손으로 가리키며 웃으면서 기독교 환자야!”라고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친구가 장남삼아 한 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뼈있는 말이 아니었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이 아닐까요?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오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를 반지성적인 종교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을 반이성적인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크리스천을 사이비 종교의 맹신도들을 바라보듯 바라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반이성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아주 이성적인 종교입니다. “닥치고 믿어!”라는 말을 합니다. 덮어 놓고 믿어!”라는 말을 합니다. 교회 안에 덮어 높고 무조건 믿는 것을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기독교는 맹신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아주 지성적인 종교입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가 증거합니다. 철학, 과학, 미술, 문학, 음악 등을 이끌어온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입니다. 뉴턴, 근대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전자기학을 최초로 시도한 멕스웰 천문학자 케플러, 파스칼, 헨델, 발명왕 에디슨 미켈란젤로 등등 기독교인을 제외하고 인류의 지성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신앙은 지성에 반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앙과 지성은 역사적으로 한 번도 대립된 적이 없습니다. 신앙은 오히려 더 많은 지성적인 욕구를 촉진시켰습니다. 지성에 발달은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믿으려면 반드시 따져보고 믿어야 합니다. “덮어 놓고 믿어!” 아닙니다. 이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믿으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따져보고 싶으세요. 닥치고 믿지 마세요. 덮어 놓고 믿지 마세요. 합리적으로 생각하며 믿으세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따지면서 믿으세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계산했습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합리적인 종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믿음을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합리적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학교 선생님이 1 더하기 12라고 하면 아이들은 믿습니다. 믿지 않는다면 학문이 될까요? 안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가정이 이루어질까요? 안됩니다. 남편을 의심해보세요. 그것을 의부증이라고 합니다. 아내를 의심해보세요. 의처증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되요. 모든 것은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음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생각에서 왔습니다. 합리적인 사고에서 왔습니다. 심사숙고에서 왔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맹신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행하실 것을 정확하게 계산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계산한 것은 바로 부활입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아브라함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을 믿었습니다.

4. 받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론을 나타내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도로 받았다는 말입니다.

<19b>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도로 받은 것이니라어디에서 돌려받았습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돌려받았습니다. 완전히 잃어버린 것을 돌려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앞에 비유컨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유라는 말은 상징 예시 유형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NASB. ‘예표로서(as a type)’라고 번역했습니다. KJV비유 안에서(in a figure)’라고 번역했습니다. NIV비유적으로 말하자면(figuratively speaking)’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비유하고 있는 것일까요? 랑게라는 성경학자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예시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삭의 상황과 예수님의 상황은 너무나 다릅니다. 단지 이삭을 돌려받은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돌려받았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돌려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돌려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두 번이나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두 번이나 빼앗겼습니다. 빼앗긴 날 밤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땠을 까요? 정말 비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내를 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돌려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얻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축복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돌려받는 삶이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살다보면 잃어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잃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 행복, 직장, 친구, 가족, 명예 등등. 사람은 얻는 것보다 잃어버리는 것을 아주 크게 생각합니다. 마음에 아주 큰 상처로 남는 것입니다. 그것이 병이 되기도 합니다. 또 잃은 것을 결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잃은 것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잃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는 돌려받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어떻게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믿음으로 살 때 가능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 앞에 돌려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지막에 도로 받았습니다. 완전히 잃어버린 것을 돌려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를 받을 때 우리는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산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은 해피엔딩입니다. 행복한 결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생활의 결론은 해피엔딩입니다. 여러분! 끝은 반드시 행복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은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괴로운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이 행복해야 합니다. 과정은 느낌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음표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끝이 좋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끝이 좋은 사람입니다.

좋은 영화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좋은 노래는 끝 소절이 매력적입니다.

좋은 소설은 결말이 멋집니다.

좋은 드라마는 끝이 아름답습니다.

좋은 물건은 마감처리가 깔끔합니다.

좋은 기술자는 마무리가 완벽합니다.

좋은 경기는 최후의 몇 분이 드라마틱합니다.

좋은 사람은 끝까지 좋습니다.

좋은 사랑은 끝까지 아름답습니다.

일도, 사랑도, 물건도, 작품도, 사람도, 기업도

끝이 좋아야 정말 좋습니다.

끝이 좋아야 명품이 되고 명작이 됩니다.

명인이 되고 명가가 됩니다.

끝이 좋은 삶은 재수가 좋아서도 아니고 샐리의 법칙 때문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은혜 아래 있으려면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전무후무한 시험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들 이삭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끝이 좋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은혜 아래 있을 때 결말이 좋습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아>(All's Well That Ends Well)라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있습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습니다. 믿음으로 삽시다.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를 받읍시다. 그래서 끝이 좋은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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