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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순전한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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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2:46
주일오전예배 | 2018-07-15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저는 깨끗함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5월에 개봉한 <챔피언>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마동석 씨가 주연입니다. 팔씨름 액션입니다. <챔피언>은 힘이 어디서 비롯하며, 그리고 그 힘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마크(마동석)은 어렸을 때 미국으로 입양이 됩니다. 하지만 파양되어 의지할 곳이 없어집니다. 아주 힘들고 외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이때 마크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하게 된 것이 팔씨름입니다. 마크는 미국 팔씨름 대회에서 챔피언까지 올라갑니다. 하지만 부당한 일에 연루돼 협회에서 제명이 됩니다. 그러다가 진기(권율)를 만납니다. 진기는 스포츠 에이전트입니다. 진기는 마크의 에이전트가 됩니다. 그래서 다시 팔씨름을 하게 됩니다. 진기는 큰 자본을 얻으려고 조폭을 스폰서로 섭외합니다. 그래서 마크는 도박 게임 팔씨름을 하게 됩니다. 조폭은 돈을 벌려는 욕심으로 마크에게 자꾸 부당한 요구를 합니다. 마크는 고민을 하다가 조폭과의 관계를 청산합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마크는 한국에서 다시 팔씨름을 하게 됩니다. 1등을 하면 미국에서 하는 팔씨름 대회를 출전할 수 있습니다. 마크는 팔씨름 대회에서 승승장구합니다. 그래서 결승까지 올라갔습니다. 마크는 결승을 앞두고 갑자기 상대편 스폰서로부터 매수된 진기로부터 제안을 받습니다. 결승 경기에서 상대에게 져주면 거액의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입입다. 그동안 돈 때문에 살아왔던 진기에게는 그야말로 단숨에 거액의 돈을 벌 기회였고, 그래서 그는 돈에 매수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크를 설득할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에 마크는 진기의 제안을 거부하며 자신이 왜 정당하게 팔씨름을 해야 하는 이유를 밝힙니다. 정정당당하게 시합에 임해야 하는 까닭은, 이 세상에 의지할 혈육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자신이 다른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 진실한 삶을 살 수 있음을 입증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마크는 자신의 삶의 의미가 자신이 떳떳하게 경기에 임하는 것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의 힘은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며 또한 욕망도 아니고 오직 자신의 삶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한 것에서 비롯함을 밝힌 것입니다(최성 교수). 만약 마크가 부정한 돈을 받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이길 수 있어도 이기지 못합니다. 힘이 있어도 쓸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깨끗함을 잃을 때 힘도 잃은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의 아주 큰 특징 중에 하나는 순전함입니다. 순전은 순수하고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2-30년 전만 해도 순수하다또는 순결하다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또 순결을 강조했습니다. 교회 중고등부 청년부 수련에서 <순결서약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적 순결을 지키겠다는 서약입니다. 하지만 현재는 순수니 순결이니 하는 말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순결을 지키는 것을 비웃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는 순결이라는 이미지를 상실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순전해야 합니다. 교회는 깨끗해야 합니다. 깨끗함이 교회의 힘입니다. 교회의 힘은 깨끗함에 있습니다. 본문에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이 시간 교회의 순전함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순전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아펠로테스입니다. 아펠로테스는 단순’, ‘순진’, ‘순박이라는 뜻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오직 여기에만 유일하게 딱 한 번 나오는 헬라어입니다.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돌멩이가 없는’, ‘바위가 없는’, ‘매끄러운입니다. 따라서 순전한 마음이라는 말은 돌멩이가 없는 마음또는 바위가 없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매끄러운 마음입니다. 평탄한 마음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온갖 종류의 돌멩이가 있습니다. 살다보면 누구나 마음에 돌멩이가 생깁니다. 나중에는 커다란 돌멩이 산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생각하다가 저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제 마음에도 돌멩이가 있었습니다. 상처의 돌멩이, 내가 잘 못해서 생긴 실수의 돌멩이, 미움의 돌멩이, 분노의 돌멩이, 뭔가를 이루지 못해서 생긴 아쉬움의 돌멩이, 미련의 돌멩이, 한의 돌멩이 그리고 모든 돌멩이의 근원이 되는 죄악의 돌멩이가 있었습니다. 아마 저만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대부분의 분들이 그럴 것 같아요.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돌멩이를 가슴에 품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돌멩이가 삶에 거치는 돌이 됩니다. 이 돌멩이 때문에 삶이 복잡해요. 어지러워요. 아파요. 삶이 평탄하지 않아요. 그리고 돌멩이를 타인에게 던지기도 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돌멩이에 거치고 때로 남의 돌멩이에 맞으며 살아갑니다.  

제가 어떤 교회에서 있을 때입니다. 집사님 한 분이 예배를 드리다가 말고 갑자기 얼굴이 검정색이 돼서 급히 뛰어나가요. 쫓아나갔어요. “갑자기 왜 그러냐고?” 예배실이 무너질 것 같다는 거예요. 그래서 무섭고 가슴이 답답해서 나왔다는 거예요. 가만히 있으면 숨이 막힐 것 같다는 거예요. 그 집사님이 공화장애이었어요. 이유 없이 가슴이 뛰어요. 호흡이 곤란해요. 가슴이 답답해요. 어지러워요. 갑자기 죽을 것 같아요. 저는 그 집사님이 공황장애라는 것이 이해가 안 갔어요. 지금도 이해가 안돼요. 남편 착해요. 아이들 잘 커요. 성격 명랑해요. 부족함이 없어요. 그냥 평탄한 삶이에요. 그런데 공황장애예요. 남모르는 돌멩이가 마음에 쌓여갔던 거예요. 그 돌멩이가 매끄러운 삶을 아주 거칠게 했어요.  

이 돌멩이는 다른 사람도 해칩니다. 사람은 고슴도치와 같습니다. 고슴도치는 날씨가 추워지면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면 찔립니다. 체온을 얻지만 상처를 입는 거예요.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고슴도치 딜레마(Porcupine’s dilemma)’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는 고슴도치 딜레마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을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찌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사나운 고슴도치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돌멩이가 없었습니다. 가시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돌멩이가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돌멩이를 제거했습니다. 그래서 순전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매끄러운 마음을 가진 교회입니다. 십자가는 마음의 돌멩이를 제거합니다. 십자가를 의지합시다. 복음을 의지합시다. 그래서 마음의 돌멩이를 제거합시다. 그래서 서로에게 거치는 돌멩이가 되지 맙시다. 이웃에게 돌멩이를 던지지 맙시다. 순전한 마음을 가집시다. 돌멩이가 없는 마음을 가집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고전10:32>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 여러분은 거치는 돌이 되지 마십시오.(현대인의성경)  

개울에 가면 징검다리가 있습니다. 징검다리 돌 하나하나를 징검돌이라고 합니다. 징검돌이 여러 개가 모여 징검다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징검돌이 됩시다. 상대를 넘어뜨리는 거치는 돌이 되지 맙시다. 초대교회는 마음에서 거치는 돌을 제거한 순전한 공동체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징검돌이 되는 공동체였습니다.  

또 순전하다는 말은 순수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순전함을 누룩 없는 떡에 비유하셨습니다.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떡입니다.  

<고전 5: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여기서 순전함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에일리크리네이아(고후2:17)입니다. 에일리크리네이아는 순수하다는 뜻입니다. 에일리크리네이아는 도덕적으로 더럽히지 않은 깨끗함입니다. 여기서 누룩이 의미하는 것은 죄입니다. 누룩은 효모라는 미생물입니다. 곰팡이가 아니라 뜸팡이라고 불리는 균입니다. 곰팡이가 얼마나 무서운지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경기도 일산에 산 적이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벽에 습기가 찼습니다. 단열이 잘 안된 집이었습니다. 날이 추울수록 습기가 많이 차요. 나중에는 곰팡이가 올라왔습니다. 곰팡이가 얼마나 심하게 올라오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닦아야 했습니다. 셋째가 태어나기 전입니다. 두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입니다. 어느 날 아이가 아픈 거예요. 참다못해 집주인에게 말을 했어요. 그래서 단열처리를 하려고 벽지를 뜯었습니다. 그랬더니 벽이 온통 곰팡이예요. 벽지 위로 스미어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심지어 장판 밑에까지 곰팡이로 꽉 찼어요. 아주 깜짝 놀랐습니다. 벽에 곰팡이가 얼마나 많은지 곰팡이 속에서 살았던 거예요. 얼마나 더럽던지. 그러니 아이가 안 아파요. 죄는 곰팡이와 같습니다. 세상에는 죄악의 곰팡이가 끊임없이 퍼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곰팡이가 피는 세상에서 곰팡이에 오염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순수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순수함을 잃지 맙시다. 초대교회는 순수한 교회이었습니다.  

또한 순전하다는 말은 순결하다는 말입니다. 순결하다는 말은 깨끗하다는 말입니다. 순수와 순결은 거의 같은 개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깨끗함, 순결함, 순수함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깨끗해야 해요. 예수님은 순결을 말씀하시면서 비둘기를 예로 드셨습니다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여기서 순결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케라이오스입니다. 아케라이오스는 섞이지 않은, 순진한, 순수한, 거짓과 섞이지 않은, 교활한 꾀를 부리지 않은등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비둘기는 순결한 새입니다. 아주 깨끗한 새입니다. 성도는 순결한 비둘기이어야 합니다. 성도가 순결함을 잃을 때 천덕꾸러기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들로 산으로 다니며 물고기, , 개구리, 메뚜기 같은 것들을 잡아먹으며 자랐습니다. 여름에는 산열매를 따먹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이 주 먹거리이었습니다. 새 중에서는 참새, , 오리, 비둘기를 주로 잡아먹었습니다. 그 중에서 비둘기를 가장 많이 구워 먹었습니다. 그때 느낀 것이 있습니다. 비둘기는 정말 깨끗한 동물이라는 거예요. 깃털이 정말 깨끗해요. 어떤 것은 윤이 날 정도로 깨끗해요. 옛날에 저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서울 사람들은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둘기가 주변에 많이 날아다녀서요.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서울 사람들은 비둘기를 안 잡아먹나?’ 이런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제 수준에서 했던 생각입니다. 그런데 서울 사람들이 비둘기를 안 잡아먹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제가 서울에 살게 되었습니다. 집에 비둘기가 수 없이 날아와요. 지붕에 마당에 비둘기가 정말 많아요. 그런데 얼마나 지저분한지 몰라요. 마당에 똥을 쌉니다. 차에 똥을 쌉니다. 손에 뭐 먹을 거라도 쥐고 있으면 막 덤벼듭니다. 위로 앞으로 옆으로 뒤로 휙휙 날아다닙니다. 근처에서 날갯짓하면 호흡기 질환이 생길 것 같아요. 무슨 악성 균을 옮길 것 같아요. 정말 지저분합니다. 구워먹기는커녕 주변에 오는 것도 싫어요. 왜 비둘기가 이렇게 더러워졌을까요? 인간과 함께 살면서 이렇게 됐습니다. 인간이 주는 과자를 먹게 되었어요. 영향의 불균형이 왔습니다. 그렇지만 잘 먹었습니다. 그래서 개체수가 급격하게 늘었습니다. 반면에 서울이 개발되면서 서식처는 줄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기 관리가 안돼요. 그래서 이제 비둘기는 사람들의 천덕꾸러기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크리스천의 가치는 깨끗함에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세상에 사는 순결한 비둘기입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이 먹고 똑같이 입고 똑같이 살면 순전함을 세상에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천덕꾸러기 크리스천이 됩니다. 세상에 살아도 크리스천의 순결함을 지켜야 합니다. 김광섭 씨의 성북동 비둘기’(1968)라는 시가 있습니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나님의 광장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중략)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平和)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김광섭 - '성북동 비둘기' 중에서 )

 

비둘기는 사랑의 상징이었습니다. 평화의 상징이었습니다. 깨끗함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비둘기는 사랑도 평화도 깨끗함도 상징하지 않습니다. 한 마리의 더러운 새일 뿐입니다. 이제 비둘기는 천덕꾸러기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서울 사람들은 비둘기가 너무 귀찮아 비둘기 쫓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왜 필요하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왜 교회가 비둘기처럼 천덕꾸러기가 되었을까요? 깨끗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에게 우리 교회가 사람들에게 필요로 하는 교회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 시대 꼭 필요한 크리스천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깨끗해야 합니다. 순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순전한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마음입니다(로이드 존스). 오직 하나인 마음입니다. KJV순전한 마음이라는 말을 ‘singleness of heart’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놀라운 연합을 이루었습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교회 속에 녹아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하나를 이루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연합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복음 안에서 순전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오직 하나만을 보게 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복잡한 것들을 제거합니다. 지저분한 것들을 제거 합니다. 불필요한 것을 제거합니다. 삶을 단순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을 하나에 고정시킵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게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단순함이 힘입니다.  

마태복음 622절에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여기 성하면이라는 말을 KJV‘single’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눈이 하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눈이 순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필요한 것 하나만 볼 수 있는 눈을 말합니다. 주변에 필요 없는 산만한 것들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습니다(10:40). ‘분주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페리스파오(περισπάω, περί + σπάω)입니다. 페리스파오는 마음이 흩어지다, 끌려가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재미있습니다. 페리스파오의 문자적인 의미는 사방에서 끌어당기다’, ‘주변을 끌어당기다입니다. 주변에 있는 것을 다 끌어당겨보세요. 마음이 여기저기 흩어집니다. 분주하다는 것은 주변의 것에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의 분주함입니다. 마르다는 온갖 것에 신경을 다 썼습니다. 주변의 것에 끌려 다녔어요. 중요하지 않은 것에 끌려 다녔어요. 그래서 분주했어요.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있어요. 속이 상한 마르다가 예수님께 마리아가 제 일 좀 도와주게 하세요.”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41-42>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마르다야 네 마음이 나누어져 있구나! 하지만 마리아는 생각이 하나다. 필요한 것은 하나다. 오직 하나뿐이다.” 마르다는 정신이 없어요. 그래서 중요한 것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이것이 마르다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중요한 것을 하나 붙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을 붙들면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아요. 하지만 중요한 것을 붙들지 않으면 다 빼앗겨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8:36) 이 말씀은 다 있는데 중요한 것이 없으면 무엇 하니?”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21세기 백과사전 시대의 비극입니다(로이드 존스). 아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텔레비전, 컴퓨터, 스마트폰으로 어디서든지 최고의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물어보면 대답해주는 시대입니다.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을 볼 수 있는 성한 눈이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학교와 학원에서 삶에 필요한 수많은 계략과 방법을 익힙니다. 천수로 무장합니다. 만수로 무장합니다. 그런데 왜 실패할까요? 중요한 것을 볼 수 있는 순전한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중요한 것을 볼 수 있는 순전한 눈이 있었습니다. 순전한 교회이었습니다. 오직 하나인 교회이었습니다.  

볼링은 13~14세기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 볼링은 게임이 아니었습니다. 종교상의 의식이나 점을 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케겔(곤봉)을 악마로 간주하고 복도의 한 구석에 세워놓습니다. 그리고 일정한 거리에서 둥근 물체를 굴려 넘어뜨렸습니다. 케겔을 잘 넘어지게 하는 신도는 신앙심이 두텁고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잘 넘어뜨리지 못하는 사람은 신앙심이 부족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종교 개혁 후에 생명의 위협을 받습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 피해 다녔습니다. 그때 많은 유혹과 회유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루터는 사탄으로 명명한 케겔(곤봉)을 세워놓고 공을 굴려 케겔을 넘어뜨리는 규칙을 정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볼링은 수도원 밖에서도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볼링은 10개의 핀을 넘어뜨리는 게임입니다. 10개의 핀을 모두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맨 앞에 1번을 넘어뜨려야 합니다. 1번 핀을 킹핀이라고 합니다. 10개를 쓰러뜨리기 위해 하나를 조준하는 게임이 볼링입니다.  

구약에는 수많은 전쟁이 나옵니다. 구약성경은 전쟁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전쟁이 나옵니다. 수많은 적들이 나옵니다. 무기와 전략이 다양합니다. 시대가 발전되면서 무기도 발전합니다. 첨단무기와 온갖 전략으로 다가오는 적군을 다루는 하나님의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적들이 쳐들어오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찬송합니다. 굳게 닫힌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방법은 찬양입니다. 얼마나 미련합니까? 얼마나 단순합니까? 가공할 무기로 무장한 적들 앞에서 하나님만 붙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단순함에는 가장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실타래 얽히듯 꼬일 때가 있습니다. 삶이 복잡해집니다. 해결방법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킹핀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킹핀을 붙들면 나머지 아홉은 저절로 잡을 수 있습니다. 이 핀 저 핀 생각하면 모두 놓칩니다. 킹핀을 붙잡는 단순함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의 근원은 오직 하나에서 시작합니다. 그것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이때부터 삶이 가시와 엉겅퀴가 된 것입니다. 삶이 복잡해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만 바로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인생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열쇠는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는 킹핀 되신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라고 했습니다. 크리스천의 힘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크리스천의 문제 해결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한분 킹핀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삼상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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