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성령이 통치하는 나라

조회수 : 455회

본문 : 사도행전2:43-45
주일오전예배 | 2018-06-24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제가 지난 주간에 머리를 깎았습니다. 머리를 깎고 집에 왔는데 옆에는 깎았는데 위는 그대로인 거예요. 시원하게 깎고 싶었거든요. 머리를 짧게 쳤을 때 시원함이 있잖아요. 제가 가면 사장님이 알아서 많이 쳐주세요. 제가 몇 년째 가는 단골 미용실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깎은 듯 안 깎은 듯 하는 거예요. 왜 그랬을까? 문득 저는 사장님이 이렇게 깎은 이유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요일에 머리를 깎으러 갔는데 한 분이 깎고 있어요. 그런데 그 분이 아는 분이었어요. 바쁜 일이 있어서 기다릴까 말까 하다가 기다렸습니다. 그 분이 머리를 다 깎으셨어요. 저는 머리를 깎으려고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 분이 가시면서 사장님에게 살짝 뭐라고 하시면서 나가세요. 사장님이 제 머리를 깎으면서 금방 가신 분이 비용을 계산하셨다고 하세요. 그러면서 대뜸 목사님이시라면서요.”라고 해요. 그리고 왜 그 동안 목사님이라고 안하셨어요?”라고 해요.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이세요. “제가 전에 목사님 스타일이신데라고 한 것 같은데 그 때 왜 대답 안하셨어요.” 그러더니 머리를 이렇게 깎아 놓으셨어요. 원래는 이것 보다 짧게 치시거든요. 그런데 거의 안 깎으신 거예요. 그리고 평소에 깎는 스타일과 조금 달아요. 그래서 제가 집에 와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게 사장님이 생각하는 목회자의 머리 스타일인가 보다. 목회자는 머리가 너무 짧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사장님이 전에 교회를 다니던 분입니다. 물론 저 혼자의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때 머리를 늘 스포츠로 깎았습니다. 저는 머리가 짧은 것이 좋습니다. 그랬더니 선배 목사님이 전도사님이 머리를 군인처럼 깎으면 되나?”라고 하세요. 그래서 그때부터 조금 길게 깎았습니다.  

제가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평상시에는 양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운동할 때는 추리닝을 입었습니다. 여름에는 반바지도 입었습니다. 또 티셔츠, 등산복도 입었습니다. 교회 집사님이 사주신 레깅스 같이 몸에 착 붙는 등산복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주변에 사는 어떤 분이 제 옷차림에 실족을 했어요. 그분은 목회자는 저런 옷을 입으면 안 된다는 기준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같은 아파트에 사는 저희 교회 집사님이 한참을 설명을 하셨대요. 사람들은 목회자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습니다. 신발, 옷차림, 머리 모양, 말씨, 행동, 삶 등 기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어떤 기준이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란 무엇일까요? 기준입니다. 크리스천이란 무엇일까요? 기준입니다. 기준 안에 있으면 칭찬을 받습니다. “역시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달라!” 하지만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비웃음을 당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뭐 저래여러분은 기준입니다. 비웃음과 조롱이 아니라 칭송과 존경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1. 세상이 두려워하는 크리스천이 되게 하소서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초대 교회 성도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이 두려움은 영적인 두려움입니다. 여기 사람이라는 말이 헬라어 성경에는 영혼’(ψυχή)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라는 말은 영혼마다 두려워하는데또는 모든 영혼이 두려워하는데라는 뜻입니다. 왜 영혼이 두려워한다고 했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두려움이 영적 두려움이었기 때문입니다. 외적 두려움이 아닙니다. 내적인 두려움입니다. 힘에 대한 무서움이 아닙니다.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단지 사람만을 두려워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는 두려움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교회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교회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세상이 하나님께 경외심을 갖게 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신앙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욕을 먹으면 안돼요.  

그러면 왜 사람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두려워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교회를 두려워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데라는 말이 헬라어 성경에는 두려움이 일어났는데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 마음에 두려움이 일어났습니다. 누가 두려움을 일으켰을까요? 하나님이 일으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원주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하도록 두려움을 일으키셨습니다.  

<11:25>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밟는 모든 땅 사람들에게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  

<5:1>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가나안 원주민들의 마음이 녹았습니다.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키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가나안 땅 원주민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키셨습니다.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냥 두려움을 일으키셨을까요? 막 사는데 두려워하게 하셨을까요? 대충 사는 데 두려워하게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습니다. 베드로의 권면대로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하루에 3천이나 더했습니다. 성도들은 계속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교제하고 떡을 뗐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성도들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때 하나님은 세상이 교회를 두려워하게 하십니다.  

야곱이 세겜에서 살 때의 일입니다. 야곱은 세겜에서 우상을 숭배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신앙을 많이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야곱은 세겜에 살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에게는 벧엘의 서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겜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세겜에서 막 살았습니다. 이때 딸 디나가 세겜 족장 아들에게 어려움을 당합니다. 세겜 족이 이스라엘의 후예들을 만만하게 본 거에요. 자기들과 별다른 것이 없어 보인 거예요. 그래서 막 대한 거예요. 그래서 디나를 가지고 놀은 거예요. 이로 인해 레위와 시므온이 세겜 족 남자들을 다 죽입니다. 이 때문에 야곱은 주변 민족에게 미움을 삽니다. 야곱은 그들에게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떱니다. 세상이 야곱을 보고 두려워 떨어야 하는데 야곱이 세상을 보고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짜증을 냅니다. 그러자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덤비는 거예요. 가정이 콩가루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이스라엘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신앙을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앙개혁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방 신상을 버립니다. 정결하게 합니다. 의복을 바꾸어 입습니다(35:2). 그리고 벧엘로 올라갑니다. 의복을 바꾸었다는 것은 회개했다는 말입니다. 외적 거룩을 상징합니다. 야곱은 신앙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주변 민족들이 야곱을 두려워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야곱을 쫓아오는 자가 없었습니다.  

<35: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성도가 막 살면 세상이 만만하게 봅니다. 마귀가 만만하게 봅니다. 하지만 말씀에 순종하면 세상이 두려워합니다. 마귀가 두려워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말하는 기적(방언)이 일어났습니다. 듣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기적으로 사람들이 놀랍니다.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조롱을 했습니다. 하지만 조롱은 두려움으로 바뀝니다. 여러분! 세상이 우리를 보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보고 놀라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보고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만만하게 보게 하면 안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정말 부끄럽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세상이 교회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비웃습니다. 성도들을 조롱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크리스천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이 세상에서 막살기 때문입니다.  

군 생활할 때의 일입니다. 병사들이 연병장에 모입니다. 지휘관이 맨 앞에 있는 한 병사를 가리키며 기준이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병사는 손을 들고 기준이라고 외칩니다. 총이 있을 때는 총을 높이 들고 기준이라고 외칩니다. 지휘관은 정식간격 우로 나란히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사병들이 일사분란하게 정식간격을 맞춥니다. 이때 기준은 부동자세로 가만히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습니다. 다시 지휘관이 양팔 간격 좌우로 나란히라고 외칩니다. 사병들은 또 일사분란하게 움직입니다. 하지만 기준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기준이 움직이면 모든 병사가 우왕좌왕합니다. 그래서 욕을 먹습니다. 빠따를 맞습니다. 기압을 받습니다, 그래서 기준은 절대로 움직이면 안 됩니다. 이것이 기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너무 움직입니다. 크리스천들이 왔다 갔다 합니다. 기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존심이 없습니다. 교회도 성도도 기준에 못 미칩니다. 그래서 세상의 조롱을 받습니다. 욕을 먹고 있습니다. 이리저리 치이고 있습니다. 세상과 교회가 똑같다면 누가 교회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여러분! 다른 크리스천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이 놀라는 크리스천이 되세요. 세상이 두려워하는 크리스천이 되세요. 그런데 거꾸로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보고 놀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보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고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이 우리를 보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여러분! 저는 세상이 우리 등대교회가 세상이 두려워하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제가 세상이 두려워하는 목사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세상이 깜짝 놀라고 두려워하는 크리스천이 되길 바랍니다. 세상이 두려워하는 교회, 세상이 두려워하는 크리스천.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2. 교회, 하나인 공동체  

최초의 교회는 철저하게 하나인 공동체이었습니다. 44절에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라고 했습니다. 함께 있었다는 말은 함께 모여 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 함께 모여 공동생활을 했다는 말도 아닙니다. 함께 있었다는 말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함께라는 말이 헬라어로 에피’(ἐπί)입니다. 에피는 위에’, ‘가까이에’, ‘가에’, ‘곁에라는 뜻의 전치사입니다. 그러니까 함께 있었다.’는 말은 곁에 있었다.’, ‘가까이에 있었다.’라는 의미입니다. 함께 있어라는 말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하나처럼 늘 가까이 지냈다는 의미입니다. 이 가까움은 마음의 가까움입니다. 장소적인 가까움만이 아닙니다. 가까이 있어도 마음이 멀면 먼 사람입니다. 멀리 있어도 마음이 가까우면 가까운 사람입니다. 초대교회는 마음이 가까웠습니다. 초대 교회는 영적으로 가까웠습니다. 서로서로의 마음과 뜻이 하나로 통했습니다.  

<4: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래서 요한 칼빈은 함께 있어라는 말을 하나로또는 하나가 되어라고 해석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철저하게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오직 하나인 공동체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셋이 아닙니다. 모든 교회는 하나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교회가 하나임을 말합니다.  

<고전12:12-14, 20>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바울은 교회가 하나임을 한 몸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몸이 하나인 것처럼 교회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4:4-5>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여러분! 교회는 하나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철저하게 마귀의 노림수입니다. 마귀는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게 합니다. 교회가 찢어지게 합니다. 성도가 갈라서게 합니다. 사탄이 헬라어로 사타나스입니다. 사타나스는 대적자, 반역자라는 뜻입니다. 사타나스라는 말이 신약성경에 49절에 56회가 사용됩니다. 마귀라는 말이 헬라어로 디아볼로스입니다. 디아볼로스는 비방자, 참소하는 자, 중상하는 자, 모함하는 자, 이간질하는 자, 시험하는 자, 거짓 고소하는 자, 분쟁을 일으키는 자라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에 디아볼로스라는 말이 106절에 123번 사용됩니다. 마귀라는 말이 사탄이라는 말 보다 두 배 이상이 되고 있습니다. 마귀의 최대의 무기는 이간질입니다. 하나님과 성도를 이간질합니다. 말씀과 성도를 이간질합니다. 목사와 성도를 이간질합니다. 성도와 성도를 이간질합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본성입니다. 마귀는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그래서 교회가 무너지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가 하나된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여러분! 하나된 것을 굳게 지킵시다. 하나가 되도록 애씁시다. 하나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교회는 하나입니다.

 

3. 성령이 통치하는 나라  

초대교회의 하나됨이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것을 필요에 따라 형제에게 나누어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형제를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최초의 교회는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통용했다는 말은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공동으로 소유했다는 말은 자신의 것을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사용했다는 뜻입니다. 아주 뜨거운 형제애입니다. 공동체에 대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초대교회는 언제든지 가난한 형제를 위해 자신의 소유를 팔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소유를 포기한 것입니다. 사람은 소유욕이 있습니다. 뭐든 가지고 싶어 합니다. , 세상, 권력, , , , 명품, , 신발, 가방 등등 사람은 뭐든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소유욕에 노예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자 자기의 소유를 포기했습니다. 공동의 소유라는 말은 공산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공산사회가 아닙니다. 공산사회는 강요가 있습니다. 혁명이 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뜨거운 형제애에서 비롯된 자발적인 배품의 사회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성령의 사회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임하실 때 이 땅에 가장 이상적인 나라가 건설될 것을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성령이 이끄시는 가정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께서 통치하시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이 땅에 성령이 통치하시는 나라가 임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이 이끄시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유토피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토피아는 1516년에 영국의 사상가인 토마스 모어에 의해 만들어진 말입니다. 토마스모어는 부조리한 세상에 살면서 이상향을 동경했습니다. 모어는 자신의 이상향을 유토피아라는 말에 투영합니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라입니다. 이것은 유토피아라는 말 자체가 증거합니다. ‘없다’(no)는 뜻입니다. ‘토피아장소’, ‘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유토피아는 없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실재하지 않은 나라’, ‘실재하지 않는 땅’, ‘어디에도 없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유토피아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이상적인 나라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합니다. 정치인들 공약을 보십시오. 자기들이 당선이 되면 나라가 뒤바뀔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이상적인 나라가 올 것처럼 떠들어댑니다. 하지만 되는 것이 있습니까? 변하는 것이 있습니까? 개혁이 되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결코 사람의 힘으로는 이 땅에 이상 사회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1830년대 어느 날 독일 트리어(Trier)에 살던 한 유대인 소년이 법률가인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우리는 유대인인데 왜 유대인 회당에 안가고 루터교회에 나가요?”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아들아,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따돌림당하지 않고 이 땅에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단다.” 아버지의 대답은 신앙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본래 그의 할아버지는 유대인 랍비였습니다. 그의 큰아버지도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랍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실 감각이 빠르고 이재(理財)에 밝았던 소년의 아버지는 유대인들에 대한 사회적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루터 교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소년의 아버지에게는 진정한 회심의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기 아들에게 아무런 신앙적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소년이 여섯 살 되던 해에 유아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하지만 소년이 믿음으로 자라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자란 이 소년은 대학에 들어가면서 교회를 완전히 떠났습니다. 그리고 소년의 나이 서른 살이 되던 1847년에 엥겔스라는 사람과 영국 런던에서 유명한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그가 바로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입니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말하는 이상향은 무엇일까요?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계급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무상통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공동의 소유를 만드는 것입니다. 최고의 이론입니다. 마르크스는 성경에서 유무상통하는 세상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역사를 몰랐습니다. 한 번도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을 쏙 뺐습니다. 형제애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형제애를 뺐습니다. 성령의 자리에 혁명을 집어넣었습니다. 형제애 자리에 혁명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래서 공산사회는 자발적인 헌신이 없습니다. 혁명으로 유무상통이 가능할까요? 아닙니다. 공산주의는 끝났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실 때만 이 세상에 이상적인 나라가 건설이 가능합니다.  

존 메이나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의 유효수요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케인즈는 20세기 영국의 경제학자입니다. 1999년에 타임지가 뽑은 20세기 인류 역사에 공헌한 100인 중에 한 사람입니다. 유효수요이론은 <giving and flowing> 이론으로 불립니다. 주어서 흐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다른 경제학자들의 논리와 매우 다릅니다. 다른 경제학자들은 이윤을 극대화하는 투자이론입니다. 반면에 케인즈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것이 넘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공산주의와 비슷한 이론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로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시골 마을에 가난한 사람들이 몇 백 가구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를 백 마리 정도 가지고 있는 돈 많은 목장주가 운영하는 목장이 하나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일반적인 경제 이론을 따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시골 마을에서 쇠고기나 우유, 치즈 등을 사려면 이 목장에서 살 수밖에 없으니 독점적 상황입니다. 극대 경제 효과를 누리려면 값을 올려야 하고 공급을 조절하여 최대의 이윤을 창출해야 합니다. 그러나 케인즈는 목장의 생산물을 싼값으로 혹은 무상으로 베푸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큰 부를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더 많이 주어서 넘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소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 데 이것을 높은 가격으로 책정해 버리면 사람들이 우유나 고기가 먹고 싶어도 못 먹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점점 우유와 쇠고기의 맛을 잊어버릴 것이고 나중에는 우유나 쇠고기 먹을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 관심을 돌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행사를 통해 무상으로 나눠 주거나 싼 값에 공급하면 마을 사람들이 그 목장에서 생산하는 유제품이나 쇠고기에 익숙해집니다. 그러면 더 많은 수요가 생기기 때문에 소수를 상대로 비싸게 파는 것보다 다수를 상대로 많이 팔아서 시장의 규모를 키우는 것이 생산자에게 더 유익하다는 이론입니다. 결과적으로 그 마을의 경제가 발전하게 되고 고기를 먹고 일을 하게 되니 힘을 내어 일을 더 잘하게 될 것입니다. 경제가 활성화되니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고 따라서 고기 수요가 늘어나게 됩니다. 사람이 많아지면 길을 넓혀야 하고 집을 지어야 하니 인력도 많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고기를 먹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니 소를 많이 들여오게 되고 그 만큼 소를 기를 사람이 필요하게 되면서 이것이 부의 창출에 도움이 됩니다. 상대방의 호주머니 돈을 끄집어내서 내 호주머니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호주머니에 돈을 많이 채우므로 그 돈이 넘쳐 을러서 내게로 오게 하라는 이론입니다. 이 땅에서 사람의 힘으로 giving and flowing 이론이 가능할까요? 안됩니다. 결코 사람의 힘으로 안됩니다. 사람은 주머니를 채워주면 더 채우려고 합니다. 소유욕 때문에 giving and flowing 이론은 결코 이루어지지가 않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이 땅에 이상사회를 만들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통치하실 때만이 이 땅에 이상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가운데 성령의 임재를 구합시다. 회개합시다. 죄사함 받읍시다. 말씀을 붙듭시다. 성령의 선물을 받읍시다. 우리 등대교회를 모범적인 교회로 만듭시다. 성령이 통치하는 교회가 되게 합시다. 그래서 세상이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인, 세상이 두려워하는 교회가 되게 합시다. 오직 성령님이 역사만이 이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전글 기적을 일으킨 여호사밧의 찬양과 감사
다음글 초대 교회 능력의 네 가지 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