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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어떤 사람이 태평양 한가운데서 난파를 당했습니다. 이 사람은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하지만 황량한 무인도에서 혼자 살게 되었습니다. 몇 년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멀리 배가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미친 듯이 손을 흔들며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그를 발견한 배가 섬을 향해 다가왔습니다. 배에서 내린 선장은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질문을 했습니다.
“저기 오두막이 왜 세 채나 됩니까?”
“저쪽에 있는 건 제 집이지요.”
“그럼 그 옆에 있는 건요?”
“그건 제가 다니는 교회랍니다.”
“그렇군요. 그럼, 그 옆에 있는 건요?”
“아, 그건 전에 다니던 교회죠.”
현대 크리스천들이 교회를 얼마나 자주 옮겨 다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미국 메릴랜드대학 사회학 교수인 조지 리처(George Ritzer)의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리처는 ‘맥도날드’로 대표되는 패스트푸드점의 원리가 미국 사회와 그 밖의 세계의 더욱더 많은 부문을 지배하게 되는 과정과 그것이 초래하는 비인간화를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라고 했습니다. 맥도날드에는 3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1. 30초안에 음식을 주문하게 하라. 2.5분 안에 음식이 나오게 하라. 3.15분 안에 먹고 나가게 하라. 직원들은 신속하게 기계처럼 움직이기만 하면 됩니다. 맥드라이브가 있습니다. 빅맥을 주문하기 위해 차에서 내리지 않아도 됩니다. 차에서 바로 음식을 주문할 수 있습니다. 한 바퀴 돌아서 나오면 됩니다. 이용자는 아주 편리합니다. 사업주는 아주 높은 이윤을 남길 수 있습니다. 식탁이 필요 없습니다. 다른 부대시설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공간이 절약됩니다. 쓰레기를 손님이 가져갑니다. 쓰레기 처리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주 편리한 시스템입니다. 이런 맥도날드의 합리적인 시스템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맥도날드 시스템이 은행 병원 등 각종 기업에 퍼져 있습니다. 이것을 맥도날드화라고 합니다. 맥도날드화가 비인간화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맥도날드화가 삶을 패스트푸드처럼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도 맥도날드화 되어 있습니다. 1990년대에 맥처치(Mc Church)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현대의 크리스천들이 오늘은 맥도날드에서 빅맥을 먹고 내일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듯이 교회를 쇼핑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소비자의 취향에 맞추는 소매점이 되었습니다. 교회와 신앙이 스타벅스의 커피처럼 상품이 되어버렸습니다. 현대인들은 교회와 목사를 자주 바꿉니다. 거래 은행이나 단골식료품 가게를 갈아치우듯이 교회를 쉽게 바꿉니다. 맥처치에 맥크리스천 심리입니다. 신앙생활에 나타난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현상입니다. 우리 인생은 패스트푸드가 아닙니다. 우리 신앙은 패스트푸드가 아닙니다.
교회란 무엇일까요? 진정한 교회는 세상을 지배하는 어떠한 원리에도 결코 지배당하지 않는 교회가 아닐까요? 진정한 크리스천은 누구일까요? 진실한 크리스천은 세상의 원리가 아니라 성경의 원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크리스천이 아닐까요? 초대교회는 세상의 힘에 의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움직이는 교회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이런 능력은 어디서 왔을까요? 그것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에서 왔습니다. 첫째 사도들의 가르침, 둘째 교제, 셋째 떡을 뗌, 넷째 기도입니다. 이 네 가지는 교회를 교회답게 했습니다.
1. 가르침이 첫 번째
첫째가 사도들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사도들은 무엇을 가르쳤을까요? 사도들은 복음의 핵심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기반으로 한 예수님의 생애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왜 예수가 구세주이신가?” 이것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여기서 ‘가르침’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디다케’입니다. 디다케는 ‘가르침’, ‘교리’, ‘신조’, ‘교훈’ 등등의 뜻입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가르쳤습니다.
네 가지 중에서 첫째가 가르침입니다. 뒤에 나오는 세 가지는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가르침대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가르침대로 떡을 떼는 것입니다. 가르침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의 교회다움에 대한 초석인 것입니다. 교회는 첫 번째가 가르침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이 신약성경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 안에서 성경 교육은 신자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 교회에서 성경대학을 운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참여율은 2-3프로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4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관심이 없었습니다. 또 여러 강좌를 개설했습니다. 구약반(모세오경, 역사서, 시가서, 선지서), 신약반(복음서, 서신서, 예언서), 교리반을 해봤습니다. 또 주제별로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가장 인기가 없는 과목이 교리반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딱딱하게 생각하는 것이 교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조직신학이 가장 따분한 과목이었습니다. 2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 생각해도 정말 따분했습니다. 그리고 조직신학 교수님들도 따분했습니다. 이런 말을 해서 교수님들께는 너무 죄송합니다. 하지만 사실이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과목인데 정말 따분하게 공부했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교리는 환영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리와 신조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서 뿌리인 것입니다. 가르침은 건물의 기초 공사와 같습니다. 뿌리가 좋아야 나무가 건강합니다. 기초가 단단해야 건물이 튼튼합니다. 기초가 단단하지 않으면 늘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경시험을 보셨습니다. 1번 문제입니다. “내가 누구냐?” 베드로가 대표로 답을 달았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2번 문제입니다. “나는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일만에 살아날 것이다.” 답은 아멘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No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답이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오답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손으로 잡고 비난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은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들은 모두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마지막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 시험입니다. 예수님께서 3년 공생애 사역 기간 중에 계속해서 강조하신 것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졸았습니다.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요? 위기의 순간에 모두가 비굴해졌습니다. 이것이 가르침을 받지 않은 결과입니다.
니고데모를 보십시오. 한 밤중입니다. 진리를 배우기 아주 좋은 시간입니다. 이 때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거듭남의 신비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요? 제자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니고데모는 헤롯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순간에도 니고데모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적대시할 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요7:50>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알지도 못하면서 예수님을 심판하겠냐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출교할 때였습니다. 자신의 직분에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변론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르침을 받아들였을 때 생기는 믿음의 견고함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가르침을 받았던 니고데모의 믿음은 더욱 빛이 났습니다. 가르침은 우리의 믿는 바를 더욱 확고하게 합니다.
우리의 삶의 근거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공관복음서를 보세요.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시작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가르치셨습니다. 죽으시기 직전까지 가르치십니다. 부활 후에도 다시 가르치십니다. 승천하시기 직전까지 가르치십니다. 가르침을 쉬지 않으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세요. 사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했습니다. 로마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믿음, 믿음의 대상,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등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장부터 16장까지는 믿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의 축소판입니다. 갈라디아서도 로마서처럼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장부터 4장까지는 믿음으로 얻는 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주제가 이신득의입니다. 그리고 5장과 6장은 삶에 관한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장부터 3장까지는 교리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4장부터 6장까지는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항상 이 순서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바로 가르침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성경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믿음은 가르침에서 나옵니다.
조직신학자인 찰스 핫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기독교에는 항상 신학, 다시 말해 신앙의 내용이 있다. … 아무리 선하게 보이고 성실한 종교 생활을 해도, 자신의 신앙 내용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신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구원의 기본일 뿐만 아니라, 잘못된 교리는 죄의 근원이자, 지옥의 선봉으로 거부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신앙의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부인하든 안하든 교리적 기반을 다 가지고 있다. 교리에 대하여 거부하는 것은 곧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성경은 부단히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생활을 분리시킬 수 없음을 가르친다.” - 「요한일서 강해」 中에서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은 가르침을 교회의 혼이라고 했습니다. 가르침과 교회, 성경과 성도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가르침은 교회의 혼입니다.
2. 교제와 떡을 뗌
초대교회 두 번째 표지는 교제입니다. 교제라는 말이 헬라어로 코이노니아입니다. 코이노니아는 교회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은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 주보에는 없습니다만 주일 예배 순서에 교제의 시간이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목사님이 예배 중에 “이제 교제의 시간입니다. 옆 사람과 인사하시겠습니다.”라고 하며 서로 인사할 것을 주문합니다. 이때 성도들은 인사도 하고 악수도 합니다. 어떤 교회는 교제 시간에 반주가 나옵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돌아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인사합니다. 교회는 교제를 강조합니다. 또 교제를 권장합니다. 어느 날 제 아내가 전에 신앙 생활할 때 예배 중에 인사하는 것이 정말 어색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 교회는 예배 시간에 인사를 안하면 안되냐는 거예요. 아주 어색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고민을 했습니다. 결론은 계속하는 것으로 했습니다. 교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교제는 예배 시간에 간단하게 인사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또 약간의 친분을 쌓는 정도 아닙니다.
코이노니아는 공동체, 밀접한 관계, 친밀한 사이, 교제, 사귐, (형제 같은)단결, 단체정신, 협동심, 숨김없는 것, 참여, 연보, 선물, 기부금 등등의 뜻입니다. 코이노니아의 어근인 코인은 ‘어떤 것에 누구와 함께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분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한 부분을 기쁨으로 나누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주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코이노니아는 세 가지 범주에서 그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제입니다. 교제를 ‘친교’라고도 합니다. 아주 친한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3절에서는 ‘사귐’(요일1:6, 1:7)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깊은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13절에서는 ‘교통’이라고 했습니다. 사도신경에서도 교통이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제라는 말이 피상적이고 외적인 사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교제는 마음, 생각, 뜻이 통하는 <깊은 사귐>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도 간에 깊은 교제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 마음과 뜻이 통하는 코이노니아가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술을 마시며 나눈 인간적인 우정보다 더 깊은 영적 교제가 교회 안에서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 참여입니다. 코이노니아는 어떤 일을 함께 하는 집합적 기독교 생활을 의미합니다. 즉 어떤 공동의 일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코이노니아입니다. 그렇다고 함께 모여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코이노니아의 삶은 산다는 것은 내 삶에 다른 사람을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의 삶에 내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코이노니아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내 인생에 다른 사람의 인생의 때를 묻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인생에 내 때를 묻히는 것입니다.
코이노니아의 아주 좋은 예는 결혼입니다. 결혼 서약을 할 때 주례가 신랑 신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신랑은 신부를 괴로우나 즐거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랑하겠습니까?” 또 주례는 신랑 신부에게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신랑은 자신의 삶에 신부의 때를 묻힙니다. 신부는 자신의 삶에 신랑의 때를 묻힙니다. 조금 힘들고 어렵다고 갈라서는 것은 코이노니아가 아닙니다.
셋째, 관대(후함)입니다. 초대교회는 재산과 소유를 팔아 서로 통용했습니다. 자신의 물질을 빈궁에 처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13절에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여기 ‘연보’라는 말이 코이노니아입니다. 여기서 코이노니아가 기증물 기부금 헌금 등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이때 코이노니아가 갖는 의미는 관대함 또는 후함입니다. 고린도교회는 후한 연보로 가난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로마서 15:26에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연보라는 말도 코이노니아입니다.
초대교회는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영적으로 깊은 사귐이 있었습니다. 삶을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연약한 자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것도 아낌없이 주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코이노니아입니다. 코이노니아의 삶에 전형적인 예는 구약 성경 룻기에 나옵니다. 룻기에는 세 명의 과부가 나옵니다. 시어머니가 과부가 되었습니다. 두 며느리가 과부가 되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두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가 새 삶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둘째 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첫째 며느리는 어머니를 따라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1:16).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1:17).”
이 때 룻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이 말을 새번역 성경은 ‘룻은 오히려 시어머니 곁에 더 달라붙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부모 공경의 삶을 뛰어넘습니다. 룻은 자신의 인생에 시어머니의 인생의 때를 묻히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코이노니아의 삶입니다.
코이노니아의 절정은 떡을 뗌입니다. ‘떡을 뗌’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애찬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매일 저녁을 함께 먹었습니다. 이것을 아가페, 애찬이라고 불렀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찬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애찬을 한 후에 성찬을 했습니다. 떡을 뗌의 절정은 성찬입니다. 떡과 잔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합니다. 떡과 잔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떡과 잔을 먹고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눈에 보이는 증거입니다.
오늘날 우리와 초대교회는 상황이 다릅니다. 저녁 마다 애찬과 성찬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납니다. 한번 점심을 같이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코이노니아의 삶을 사는 매개체가 되길 바랍니다. 진정한 애찬이 되길 바랍니다. 또 매일 성찬을 하지 못하지만 주일날 함께 말씀의 떡을 먹으면서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3. 기도
초대교회의 네 번째 특징은 기도입니다. 기도에 관해서는 앞에서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생략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 한두 가지만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기도라는 말이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가르침, 교제, 떡을 떼는 것 세 가지는 모두 단수입니다. 그런데 기도만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는 반드시 개인기도가 필요합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개인기도만으로 부족합니다. 공동체의 기도, 합심기도가 필요합니다. 여러 명이 함께 모여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기도는 한 번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복적인 기도, 계속적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여기 힘썼다는 말이 헬라어로 프로스카르테레오입니다. 프로스카르테레오(προσκαρτερέω)는 ‘꽉 쥐고 있다’. ‘고집하다’, ‘충실하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는 기도를 꽉 쥐고 있었습니다. 성령 받기 전에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성령 받은 후에도 기도했습니다. 초대교회는 계속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능력의 근원입니다. 우리 마음의 손으로 기도를 꽉 주고 있어야 합니다. 시종일관 기도를 쥐고 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손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기도를 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손을 놓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를 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놓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를 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놓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놓아서는 안됩니다. 성도의 힘은 기도에 있습니다.
우리는 간혹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말을 합니다. 그것은 초대 교회 신앙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교회사에 모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가르침, 교제, 떡을 뗌 그리고 기도의 습관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수했기 때문입니다. 이 네 가지가 교회는 교회답게 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성경과 성령의 가르침을 받읍시다. 코이노니아의 삶을 삽시다. 사랑의 떡을 뗍시다. 그리고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합시다. 그래서 등대교회를 교회답게 합시다.
주석가들은 이 네 가지 원시 교회의 요소들을 가리켜 “첫째, 사도들의 교훈이 없었다면 믿음이 허무해지고, 둘째, 그리스도인들 상호간 친교가 없다면 사랑이 식어질 것이며, 셋째, 성찬식이 없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과 그와의 신비적 연합이 무산되고, 넷째, 끊임없이 드리는 기도가 없다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고 말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평소 친분이 있던 어떤 사람과 이야기 하면서 요즘은 믿음 생활을 잘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지금 다니는 교회가 좋지 않아서 믿음이 생기지 않고, 교회다니기 점점 싫어지는데 어디 정말로 좋은 교회가 있으면 추천 좀 해 주세요. 그런데 가면 믿음 생활을 더욱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말을 들은 웨슬리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그런 교회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그런 교회가 있다면 당신은 그 교회에 절대로 나가지 마세요.” “왜요?” “그 교회라도 좋은 교회로 남아 있기를 바라니까요.”
여러분! 좋은 교회를 찾지 마시고 우리가 좋은 교회를 만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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