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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귀향(눅15:11~24)
1. 떠나가는 작은 아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재산 중에서 제가 받을 몫을 주십시오.’ 이 지역 사람들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결코 요구할 수 없다고 합니다. 만약 요구한다면 맞아 죽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둘째 아들은 두 가지 점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격적인 행동을 한 것입니다. 첫째, 자신이 태어나고 양육 받은 가정에 대한 거부 반응입니다. 가족과 공동체의 소중한 가치들에 대한 경시의 차원을 넘어서 그것들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 먼 지방은 가정에서 거룩하게 여겨졌던 모든 것들을 경시하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작은 아들이 간 곳은 바로 아버지 집을 경시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바로 세상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가정을 경시합니다. 둘째, 자신이 소속된 보다 큰 공동체가 지켜오던 가장 소중한 전통을 파괴하는 행동입니다. 13절에 “제 것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서”라는 말은 보다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하는 단순한 청년의 야심 그 이상의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조상에서부터 자신에게까지 성스러운 규범으로 전수되어진 생활방식, 사고방식, 행동방식을 모두 끊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에 대한 둘째 아들의 재산 요구와 행동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수 천 년 역사 동안 이 지역에서 둘째 아들과 같은 행동을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왜 일까요?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집을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시공의 제한을 받는 역사적인 사건을 훨씬 넘어서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영적인 사실에 대한 부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인 사실이란 내 존재의 모든 면에 있어서 내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은 내 존재의 중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큰 비극입니다. 이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우리 시대 우리들이 탕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큰 비극입니다.
2. 돌아오는 작은 아들
작은 아들은 자기만의 인생을 위해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원대한 포부와 꿈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돈, 건강, 명예, 행복, 자신감, 평판 ……. 그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최소한의 관심조차 가져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돼지 먹이조차 먹을 수 없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자신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철저하게 이방인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고독함을 느낍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죽음의 길에 아주 깊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약 그 길을 계속 가면 거기에는 파멸 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그 위기의 순간에 탕자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합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길입니다. 그 순간에 둘째 아들이 생명을 선택하도록 이끌어주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기억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변하지 않는 진리, 이 진리가 작은 아들로 다시 생명의 길을 가게 했습니다. 작은 아들은 죽음의 순간에 자신이 돼지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그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죽음 대신 생명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우리 앞에는 항상 생명의 길과 사망의 두 길이 있습니다. 그 갈래 길에서 어떤 사람은 사망의 길을 어떤 사람은 생명의 길을 선택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 둘은 모두 잃어버린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팔아버린 유다는 목을 맸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임을 기억하고 돌아왔습니다. 유다는 사망을 선택했고 베드로는 생명을 선택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이 항상 거기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집에 항상 아버지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믿음이란 그 가정이 항상 거기에 있어 왔으며 언제나 거기에 있을 것이라는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믿음이란 아버지가 항상 거기 계시다는 것을 언제나 믿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이 믿음의 단검을 허리에 차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왔습니다. 탕자가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적입니다. 어거스틴은 “한 사람의 삶에 있어서의 절정은 순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과거의 위험으로부터 뉘우치고 돌아서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기를 항상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에서 다시 살기를 원하십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시다. 거기서 아버지와 함께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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