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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뉴욕시의 어느 거리에서 풍선 장수가 풍선을 팔고 있습니다. 풍선 장수는 먼저 흰 풍선을 꺼내 가스를 넣어 불고는 실에 달아 공중에 띄웁니다. 그 다음은 빨간 풍선을 만들어 띄웁니다. 그 다음에는 노란 풍선이 올라갑니다. 흰색, 붉은 색, 노란색 풍선이 머리 위에 둥둥 떠 있습니다. 풍선을 본 아이들이 풍선 장수 주위에 몰려들었습니다. 어떤 수줍음 많은 흑인 소년이 그 풍선을 한참 바라보더니 용기를 내어 풍선 장수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검정색 풍선도 공중에 뜨나요?” 풍선 장수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물론이지. 풍선이 공중에 떠 있는 것은 색깔 때문이 아니라 그 풍선 안에 들어 있는 것 때문이란다.” 풍선 안에 가스가 일정한 양 이상이 되지 않으면 풍선은 뜨지 않습니다. 가스가 안에 있지만 풍선을 공중에 뜨게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일정한 양이 넘어가면 풍선은 뜨기 시작합니다. 가스가 많을수록 풍선은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갑니다. 여러분 안에 성령이 계십니까? 그 성령이 여러분을 공중에 띄울 수 있을 만큼 충만하십니까? 아니면 너무 미미해서 여러분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께서 여러분을 더 높이 더 멀리 띄울 수 있도록 충만하길 소원합니다. 안에 계신 성령님에 의해 움직이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바랍니다.
사도행전 2장 14절부터 36절까지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입니다. 이 설교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있었던 베드로의 최초의 설교입니다. 따라서 이 설교는 교회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설교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기적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구원이 완성된 후에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1. 성령을 쏟아부어주시는 예수님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이 33절입니다. 33절은 사도행전 전체를 이해는 열쇠와도 같은 구절입니다. 33절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33절>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베드로는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님을 높이셨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주셨습니다. 셋째, 그 성령을 주실 때 아주 충만하게 부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높이신 분입니다. ‘높이다’는 말이 헬라어로 휲소오(ὑψόω)입니다. 이 말은 높이 들어 올리다는 뜻입니다. 어디까지 올리셨을까요? 하늘까지 올리셨습니다(휩소마, 하늘).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만큼 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정점에 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높이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어디까지 낮추셨을까요? 십자가까지 낮추셨습니다(빌2:8). 십자가는 최고의 수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까지 낮추셨습니다.
<요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여기 ‘듣’, ‘들려야’라는 말이 ‘높이시매’라는 말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당할 수 있는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다 당하셨습니다.
<요8: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여기 ‘인자를 든 후에’라고 했는데 여기 ‘든’이라는 말이 ‘높이시매’라는 말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요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여기도 ‘들리면’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들리면’이라는 말이 ‘높이시매’라는 말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왜 자신을 십자가까지 낮추셨을까요? 인류 구속 사업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낮추면 높아지는 것,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마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여러분! 성도는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것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마귀의 성질입니다. 마귀는 스스로 높이다가 하늘에서 쫓겨났습니다. 이것을 아담이 닮았습니다. 이것을 세상이 닮았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높아지려고 합니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높아지라고 합니다. 높아지는 것이 의미이고 가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높아지려고 합니다. 높아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다툽니다. 남을 밟습니다. 남을 넘어뜨립니다. 그래서 높아지면 불안합니다. 높은 데 올라갈수록 불안합니다.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잃을까 두렵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총리가 됩니다. 어느 날 벨사살 왕이 천명의 귀족들을 불러 술잔치를 벌입니다. 왕은 흥이 났습니다. 이때 벨사살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우상을 찬양합니다. 바로 그때입니다. 커다란 손가락이 나타나 왕궁 석회벽에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아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왕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아무도 그 글을 해석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때 벨사살이 다니엘에게 그 글을 해석하면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어주고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겠다고 합니다. 이때 다니엘이 벨사살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왕의 예물은 왕이 친히 가지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뢰리이다.”
벨사살은 바벨론의 왕입니다. 그 왕에게 다니엘이 한 말입니다. ‘재물은 왕이나 가집시오. 상은 다른 사람에게 주십시오. 저는 필요 없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높인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세상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높이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권세가 두렵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위해 여러분을 낮추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세상 위에 높이실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스스로를 높이지 마세요.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사람이 되세요.
<벧전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높아지신 예수님은 아버지께 성령을 받으셨습니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아주 짧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어디에서 오시는 분이신지 가장 정확한 기원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성경 66권 중에 유일한 표현입니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이것을 동시발출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십니다. 세상의 영이 아닙니다. 귀신의 영이 아닙니다. 더러운 영이 아닙니다. 추한 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영광스러운 영이십니다. 능력의 영이십니다. 권세의 영이십니다. 거룩한 영이십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거룩한 전입니다. 움츠리지 마세요. 비굴하지 마세요. 세상에 무릎 꿇지 마세요. 물질에 무릎 꿇지 마세요. 세상 유혹에 무릎 꿇지 마세요. 어깨를 펴세요. 쫄지 마세요. 고개를 드세요. 당당하세요. 하나님 자녀답게 담대하세요. 우리 안에 영광의 영이신 성령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주시되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여기 ‘부어주셨다’는 말이 헬라어로 엑케오(ἐκχέω)입니다. 엑케오는 ‘쏟아 붓다’, ‘쏟아 비우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자기의 것을 완전히 쏟아 붓는다는 의미입니다. 헌신의 의미입니다. 조금 붓는 것이 아닙니다. 흠뻑 적시도록 쏟아 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이 표현은 구약 성경 요엘서에 1번 나오고 사도행전에 처음으로 나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요엘서에는 미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쏟아 부어주셨다’는 말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표현입니다. 구약 성경에 단 한 번도 성령을 쏟아 부어주셨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기간에도 이 표현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되 완전히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되 쏟아 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저의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성령을 우리는 왜 충만하게 경험하지 못할까?’하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기도하고 나름대로 성경 보는데 왜 안될까?’ ‘나는 왜 베드로처럼 안될까?’ ‘왜 나는 더 은혜 충만하지 못할까?’ ‘은혜를 강처럼 경험할 수 없을까?’ 이것이 제 고민입니다. 또 이런 고민도 듭니다. ‘우리 시대는 왜 이렇게 은혜에 말라 있을까?’ 저만 은혜에 말라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이 은혜에 말라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성경은 충만한 은혜를 말하는데 충만해 보이는 사람이 잘 없습니다. 이것이 제 고민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떠났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더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를 위하여 매우 위대한 무엇을 성취하시려면 에스겔 36장 37절에서 명백하게 나타나듯이 그 일보다 자기 백성들의 기도를 선행시키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이한 기도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는 먼저 은총과 간구의 영(슥12:10)을 놀랍게 부어주시기 시작하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사모함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충만하게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기도도 하지 않고 사모함도 없을까요? 그것은 세상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미국의 미디어 생태학 교수인 데이비드 고든(T. David Gordon)의 「우리 목사님은 왜 설교를 못할까?」(홍성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데이비드 고든은 어느 날 결장직장암 3기 판정을 받습니다. 그는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주일마다 여러 교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 목사님들의 다양한 설교를 듣습니다. 그때마다 저자는 느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목사님들이 한결같이 설교를 못하더랍니다. 데이비드 고든은 학자로서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원인을 분석합니다. 그리고 대안을 제시합니다. 목사로서 정말 민망한 책입니다. 늘 설교 때문에 고민이거든요. 고민을 넘어 스트레스입니다. 데이비드 고든은 목사님들이 설교를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를 TV와 핸드폰을 들었습니다. 오늘날 TV와 핸드폰이 일상을 점령했습니다. TV는 오늘날 전자 미디어의 우두머리입니다. 고든은 TV를 “가치 없는 것을 위한 매체”라고 정의합니다. 화면은 움직이는 물체를 포착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 소망, 믿음, 예배 등 중요한 가치는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TV는 무의미하고 대수롭지 않은 문제를 보여주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끕니다. 전화는 잡담을 하기 좋은 매체로 전락했습니다. 무슨 말부터 할까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짜임새 있는 설교를 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미디어의 영향이 설교에 드러난 결과 통일성 구성 운율이 있는 설교는 오늘날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만 그럴까요?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세상은 TV 핸드폰 컴퓨터가 접수했습니다. 우리는 그 영향력 아래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기도하지도 않게 합니다. 성령의 부어주심을 사모하지 않게 합니다. 여러분! 세상의 영향력에서 벗어납시다. 세상의 영향력을 이깁시다. 그리고 은혜를 사모합시다. 영적인 것을 사모합시다. 기도합시다. 그래서 주님이 높이시는 사람이 됩시다.
2.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
34절에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했습니다. ‘주’가 두 번 나옵니다. 앞의 ‘주’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뒤의 ‘주’는 예수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시편110편 1절에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 대신에 ‘주’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도 주, 예수님도 주라고 동일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구약 성경에 부르고 찾고 기다리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찾고 기다리고 만나고 싶어 하는 그 하나님이 바로 이 예수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예수님관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베드로가 바뀌었습니다. 사람은 성령 받아야 바뀝니다. 여러분! 성령 받으세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성령 받고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35절에 원수가 예수님의 발등상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원수는 사탄입니다. 발등상은 발을 올려놓는 받침대(footstool) 입니다. 발등상은 고대 시대에 왕이나 귀족들이 사용했습니다. 요즘은 집, 사무실에서 많이 쓰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의 발등상이라는 말입니다. 발등상은 굴복, 항복을 의미합니다. 사탄이 날고 기어봤자 예수님의 발바닥 밑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사탄이 대단해도 예수님 발밑에서 노는 미물 정도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탄을 ‘세상의 신’이라고 했습니다(고후4:4). 예수님은 마귀를 ‘세상의 임금’이라고 하셨습니다(요12:31). 그래서 사탄이 세상을 쥐락펴락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탄에게 놀아납니다. 세상을 가지고 놉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정말 화가 나요. 정말 억울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속이 상해요. 하지만 사탄은 예수님의 발등상에 불과합니다. 사탄이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됩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발 밑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분이십니다. 오른편은 힘과 능력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통치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우주의 최고 통수권을 가지셨다는 뜻입니다.
군 생활할 때의 일입니다. 부대장은 종종 병사들의 사열을 받습니다. 사열이라는 것은 국군의 날 행하는 열병식 같은 것입니다. 군인들의 위상, 군기의 점검, 군 전력의 증강 등의 이유로 사열을 합니다. 사열은 병사들이 연병장 밖에서 연병장 안으로 들어가 부대장의 앞을 지나 부대장 앞에 도열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병사들이 부대장의 앞을 지날 때 병사들은 반드시 부대장을 오른쪽에 두고 지나갑니다. 절대로 부대장을 왼편에 두고 행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모든 군부대가 동일합니다. 부대장 앞을 지날 때 사열 진행자는 “우로 봤”을 외칩니다. 그러면 병사들은 “충성”을 외치며 고개를 일제히 오른쪽으로 ‘휙’하고 돌립니다. 부대 최고 통수권자에게 경례를 하는 것입니다. 최고 통수권자는 항상 오른쪽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주 최고의 통수권자이십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이 움직이십니다. 혹시 속상하고 답답하고 억울한 일이 생길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기다립시다. 우주의 최고 통수권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3. 이스라엘 집의 주와 그리스도이신 예수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를 마칩니다. 36절은 설교의 결론입니다. 베드로는 설교를 마치면서 ‘이스라엘 온 집’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36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성경은 이스라엘을 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집으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이 집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집의 자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스라엘 집은 하나님이 아버지시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녀인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이스라엘은 우리의 집>이라는 정당이 있습니다. 1999년에 만들어진 정당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의 집이라는 의미로 세워진 정당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우리의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집>은 하나님이 아버지인 집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입니다. 이 이름 보다 더 위대한 이름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이름을 감히 부를 수 없어서 ‘주’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주’는 더 이상 높일 수 없는 최상급 칭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를 이스라엘 집의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 이름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온 집의 주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을 우리의 영혼의 집으로 삼아야 합니다. 교회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집입니다. 이 집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자녀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집으로 삼으세요. 교회가 바로 이스라엘 집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11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말씀이 누가복음 11장 13절에는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그 중에 가장 좋은 것은 성령입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겸손한 시도」(An Humble Attempt,1747)>라는 책에서 ‘성령은 모든 축복 중의 최고의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축복의 총화’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아주 충만하게 쏟아부어주셨습니다. 넘치도록 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사모하는 자에게 부어 주십니다. 성령의 부어주심을 구합시다. 더 기도합시다. 더 사모합시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부어주심을 구합시다. 성령의 역사는 오늘도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성령을 경험합시다. 그래서 우리도 사도들처럼 세상을 변하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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