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예수님, 다윗, 베드로 그리고 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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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2:25~32
주일오전예배 | 2018-05-06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여러분! 성경은 영감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영감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감화와 감동을 말합니다. 성령의 감화를 받은 사람 중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성경영감설에는 몇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첫째, 기계적 영감설이 있습니다(필로). 성경 저자가 하나님이 불러주시는 것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는 영감설입니다. 이 이론은 하나님의 계시를 그대로 기록했다는 면에서 좋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인격성을 무시했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기계처럼 부리시지 않습니다. 인격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인격을 무시하시지 않습니다. 기계적 영감설과 비슷한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이 있습니다. 성경의 한 글자 한 글자, 그리고 구절 하나하나가 모두 하나님의 영감에 따라 기록되었다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전혀 오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기계적 영감설의 변형에 불과합니다. 성경 기록은 문자의 영감도 필요하지만 기록자의 영감도 필요합니다.

 

둘째, 유기적 영감설이 있습니다. 유기적 영감설은 성령께서 성경을 기록케 하실 때 인간 기자들을 유기적인 방법으로 감동시키셨다는 이론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기자들의 내적 인간성, 재능, 교양, 용어, 문체를 최대한 활용하셨습니다. 또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모든 것이 아름답게 조화되는 중에 성경이 완성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을 '유기적 영감설'이라고 합니다.

 

유기적이라는 말은 생명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organic입니다. organic은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 제 손이 있습니다. 손바닥에 손가락이 붙어 있습니다. 또 반대쪽으로 팔이 붙어 있습니다. 중간에 손목이 있습니다. 그리고 팔은 어깨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손 팔 어깨는 정확한 구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가 하나가 됩니다. 따로따로 놀지 않아요. 하나로 움직여요. 이것을 유기체라고 해요. 살아 있어요. 저는 이 연결이 참 신기합니다. 피부가 있습니다. 속에 힘줄이 있습니다. 근육이 있습니다. 핏줄이 있습니다. 피가 흐릅니다. 뼈가 있습니다. 모두 정확한 구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입니다. 이런 연결을 유기적 연결 또는 유기적 연합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저자가 유기체처럼 신비롭게 하나가 되어 기록한 말씀이 성경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저자의 유기체적 연합에 역사하신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베드로는 베드로 방식으로 받아들입니다. 다윗은 다윗의 방식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베드로식의 스타일로 성경을 기록합니다. 다윗은 다윗의 스타일로 성경을 기록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냄새가 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유기적 연합이 이루어져서 인간적인 냄새는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만이 온전히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우리가 잘 났든 못났든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질 때 우리 모습 그대로 쓰임 받습니다. 심지어 상처 아픔 눈물까지도 쓰임 받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쓰임받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재능 인격 환경 모습 고난 아픔 이 모든 것을 사용하고 싶어 하십니다. 왜요?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습 그대로 사용하고 싶어 하십니다. 단 하나님과 유기적 연합이 있어야 합니다.

 

1. 선지자의 영감을 소유하라

 

오늘 본문에는 다윗의 예언이 나옵니다.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입니다. ‘가리켜’(ες)라는 말은 ‘~ 대하여또는 ‘~관하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예수님을 관해 말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BC 1,010년부터 BC 970년까지 4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린 왕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천 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앞으로 천년 후에 오실 예수님에 관해 말을 한 것입니다. 즉 예언을 한 것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천년 후에 오실 예수님에 관하여 예언했을까요? 이에 대한 답이 30절에 있습니다.

 

30절에 그는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다윗을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선지자가 아닙니다. 왕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평신도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시편 중 많은 부분이 메시아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아니었지만 선지자처럼 메시아를 예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선지자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선지자가 아닌데 선지자처럼 예수님을 예언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영감입니다. 다윗에게는 선지자들에게 있었던 영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윗을 선지자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영감은 어떻게 얻어질까요?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귀에 음성으로 들려주실까요? 하나님께서 미래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베드로야! 받아써라고 하실까요? 아닙니다. 영감은 두 가지를 통해서 얻어집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30절 앞부분에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라고 했습니다. 맹세라는 말이 헬라어로 호르코스(ὅρκος)입니다. 맹세라는 뜻의 호르코스는 약속한 후에 도장을 찍고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신격을 두고 서약한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바로 맹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에 도장을 찍고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약한 책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6: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성경은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은 영감을 주는 책입니다. 선지자들은 성경을 통해 영감을 얻었습니다. 다윗의 영감은 성경에서 온 것입니다. 다윗은 약속의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영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영감은 성경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영감은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영감입니다.

 

둘째, 성령입니다. 30절 끝부분에 알고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알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사람의 지혜와 지식이 성경을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을 경험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체험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성령님이 아니시면 우리는 말씀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알다는 말에 두 단어가 사용됩니다. 하나는 기노스코입니다. 기노스코는 객관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또 이론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객관적으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또 이론적으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머물면 안됩니다. 이론적으로만 알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말씀을 경험해 봐야 합니다. 주관적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생깁니다. ‘알다는 말에 쓰이는 또 다른 헬라어는 오이다입니다. 오이다는 주관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경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알다는 말은 후자입니다. 주관적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다윗이 묵상하는 중에 성령께서 예수님을 체험하도록 했습니다. 천년 후를 경험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감동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미래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과거를 깹니다. 마귀는 과거로 우리를 괴롭힙니다. 세상은 과거적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미래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감동은 그냥 생길까요? 아닙니다.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묵상, 기도, 성령의 감동으로 다윗은 선지자들이 가졌던 희소하고 특별한 지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와 같은 영감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천년 후를 예언했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감동으로 선지자들만이 소유한 영감을 가진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시편 25:14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하나님은 말세에 성령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예언자의 영감을 소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칼빈은 예언을 희소하고 특별한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말세에 모두가 다윗처럼 특별하고 희소한 지식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민수기11: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성경 말씀을 봅시다. 기도합시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을 받읍시다. 말씀과 기도에 선지자의 영감이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에 미래의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영감과 소망을 갖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2. 예수님, 다윗, 베드로 그리고 나의 이야기

 

25절부터 28절까지는 의미가 3중적 혹은 4중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등장인물이 중첩되는 느낌입니다. 또 시간이 겹칩니다. 그래서 아주 헛갈리는 부분입니다.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뜻을 알면 심오한 말씀입니다.

 

25절부터 28절까지는 다윗의 시입니다. 이것은 시편 168절에서 11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시편 16편은 다윗이 위기 중에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위기 중에서 항상 주님을 자기 앞에 모십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라는 말씀이 시편 18편에는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항상 마음에 둔다는 뜻입니다. 주님께 항상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주님을 항상 자신의 앞에 모심으로 네 가지 축복을 경험합니다. 첫째, 요동하지 않는 축복입니다. ‘요동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살루오(σαλεύω)입니다. 살루오의 뜻은 흔들다’, ‘이리저리 움직이게 하다’, ‘비틀거리게 하다입니다. 세상은 다윗을 흔들었습니다. 비틀거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다윗은 흔들리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주님이 다윗의 오른편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오른편은 힘과 권능의 자리의 상징입니다. 오른쪽은 하나님의 축복이 오는 쪽입니다. 출애굽기 15:6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왼쪽은 형편 없음, 약함, 기만, 살의 등을 뜻합니다. 사사기 3장에 왼손잡이 사사 에훗이 나옵니다. 에훗이 칼을 몰래 차고 들어가 모압 왕 에글론을 죽입니다. 이 사건은 에훗처럼 형편없는 왼손잡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능히 모압 왕을 죽일 수 있었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오른 손을 쓰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오른쪽은 능력과 힘과 영광과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내 오른 편에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이 내 힘과 능력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위기 중에 다윗이 비틀거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다윗의 오른쪽에서 힘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오른쪽에서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되십니다. 세상이 흔들어도 흔들리지 마세요. 주님이 우리 오른쪽에 계십니다.

 

둘째, 큰 기쁨의 축복입니다.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여기 즐거워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아갈리아오(ἀγαλλιάω)기뻐하다’, ‘기뻐 날뛰다’, ‘기뻐 미칠 지경이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시면 큰 기쁨이 있습니다. 기뻐 미칠 지경이 됩니다.

 

셋째, 희망의 축복입니다. 그것도 영원한 희망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썩고 영혼은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육체가 희망에 거하리니라고 했습니다. 희망이 헬라어로 엘피스입니다. 엘피스는 영원한 구원에 대한 즐거운 확신에 찬 기대를 의미합니다. 헬라어 희망이라는 말에 영원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체가 희망에 거하리니라는 말은 육체가 영원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육체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육체는 죽으면 썩습니다. 육체는 죽으면 끝입니다. 그런데 육체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이 부활의 소망입니다. 다윗은 예수님 오시기 천 년 전에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았습니다.

 

넷째, 생명의 길을 알게 되는 축복입니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보이셨다는 말이 알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내 앞에 모시면 길이 보입니다. 생명의 길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길을 가는 방법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가게 하십니다. 주님을 내 앞에 모시면 우리에게 생명의 길이 보입니다.

 

다윗은 주님을 항상 자기 앞에 모심으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영원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길을 갑니다. 그런데 이것은 원래 다윗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베드로가 25절에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입니다. 다윗은 지금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16편은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다윗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섭리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예수님에게서 일어날 일을 천 년 전에 경험합니다. 천 년 전에 예수님의 부활을 미리 보았습니다(31). 그리고 그리스도의 소망이 나의 소망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시에는 가 계속 반복됩니다. ‘라는 말이 7번 나옵니다. 예수님의 소망이 나의 소망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25절부터 28절까지를 가만히 읽어보세요. ‘는 다윗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는 다윗과 예수님을 설교하고 있는 베드로이어야 합니다. 다윗은 고난 중에 천년 후에 부활하실 예수님에게서 소망을 발견합니다. 다윗의 소망은 베드로의 소망이어야 합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소망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을 대하고 있는 우리의 소망이어야 합니다. 여기 는 예수님입니다. ‘는 다윗입니다. ‘는 베드로입니다. 그리고 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에서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어떤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나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윗의 시에 계속해서 나, , 나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의 소망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도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며 나의 소망을 고백해야 합니다.

 

문동학 목사님의 성경에서 나를 만나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성경은 나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남의 이야기로 읽습니다. 아담, 하와, 가인, 아벨은 나입니다. 노아, , 모세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자기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커밍아웃은 동성애자들이 고백해야 할 슬로건이 아닙니다. 커밍아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읽으며 고백해야 할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나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더 핑크는 성경은 거울과 같다.”고 했습니다. 칼빈은 성경을 성령의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를 발견해야 합니다.

 

이솝 우화 중에 <욕심 많은 개>(greedy dog)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개 한 마리가 길에서 뼈다귀를 하나 줍습니다. 맛있게 먹고 싶은 마음에 개는 부지런히 길을 갑니다. 길을 가는 중에 냇가를 지나게 됩니다. 개는 냇가를 지나가다가 문득 물을 쳐다봅니다. 그런데 물 속에서 어떤 개 한 마리가 뼈다귀를 물고 있습니다. 그 뼈는 자기 뼈 보다 먹음직스러워 보였습니다. 크기도 더 커 보였습니다. 욕심이 생긴 개는 물 속의 개를 향해 멍멍하고 짖었습니다. 그 순간 물고 있던 뼈다귀가 냇가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개는 뼈다귀를 잃고 말았습니다. 이 개는 물 속에 비친 개가 자기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물 속에 비친 뼈가 자기의 것이라는 몰랐습니다. 결국 다 잃어버렸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성경을 읽어도 나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가진 것을 잃게 합니다. 성령님은 나를 보게 합니다. 다윗의 은혜가 너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에게 주신 믿음이 네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소망이 너의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윗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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