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하나님의 정하신 뜻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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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2:22~24
주일오전예배 | 2018-04-29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됩니다. '역경'을 거꾸로 하면 '경력'이 됩니다. '인연'을 거꾸로 하면 '연인'이 됩니다. '내 힘들다'를 거꾸로 하면 '다들 힘내'가 됩니다. 모든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여기 부흥이라고 써 있습니다. 어느 날 제 막내 아이가 저 뒤에 있는 유아실 유리를 보면서 흥부!” 그러는 거예요. 현수막이 유리에 비춰 단어가 거꾸로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웃었습니다. 제가 흥부가 부흥하는 부자야!”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반전을 기대하며 삽니다. 저도 반전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삶에 반전을 경험한 사람들을 보면 부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반전은 가까운 데에 있습니다. 반전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주 사소한 일을 통해 반전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살아가는 인생 중에 반드시 반전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전후에 베드로는 두려움과 불안 중에 있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제자들에게 반전이 일어납니다. 제자들에게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베드로는 당당하게 변론의 설교를 합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갑자기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압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반전이 생겼을까요? 바로 성령의 은혜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베드로의 설교를 생각해보겠습니다.

 

1. 나사렛 예수  

베드로는 일어서서 이런 말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설교의 첫 번째 요지는 성령이 임하시면 예언 환상 꿈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요지가 끝납니다. 베드로는 두 번째 요지로 넘어갑니다. 두 번째 요지를 시작하면서 베드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아!”라고 외칩니다. 앞에서는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뒤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똑같은 사람들을 먼저는 유대인이라고 부르고 다음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베드로는 이 호칭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유대인이라는 말은 구약 성경 에스더서에 처음 나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BC 930년에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분열됩니다. 지금부터 2948년쯤 전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에 망합니다. 남쪽 유다는 BC 586년에 바벨론에 망합니다. 남 유다와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가 되어 세계 각처로 흩어집니다. 디아스포라가 된 것입니다. 이 포로 시대에 유대인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됩니다(3:6). 여기서 유대인은 남쪽 유다 사람만이 아니라 전 세계 흩어져 있는 북쪽 이스라엘 사람까지 포함한 말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망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70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리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은 회복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야곱과 관련에서 처음 사용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 이스라엘인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 처음 사용됩니다. 모세의 10가지 재앙이 애굽에 내릴 때입니다. 재앙이 애굽에는 내리는 데 이스라엘 민족이 거하는 고센 땅에는 내리지 않습니다.  

<출애굽기9:4>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가축과 애굽의 가축을 구별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이 때 사용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은 구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구별된 민족이었습니다. 그리고 해방을 기다리는 민족입니다. “유대인들아!” 이 말은 회복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은 해방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과 이스라엘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유대인도 아닙니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들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잃어버린 에덴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 구도자들입니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회복을 바란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베드로는 변론 설교를 시작하면서 유대인들아!” “이스라엘 사람들아!”라고 강하고 담대하고 외칩니다. 이전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 같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반전을 기대했습니다. 바로 혁명을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강림으로 전혀 다른 반전을 경험합니다. 성령의 임재로 베드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강림은 우리를 전혀 다른 사람과 같이 되게 합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성령 강림은 우리로 반전을 경험하게 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베푸셨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사렛 예수>라는 말이 19번 나옵니다. 마태복음에 2, 마가복음에 4, 누가복음에 2, 요한복음에 4회 나옵니다. 마가복음은 마가가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베드로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습니다. 베드로전서513절에서 베드로는 마가를 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가가 사용한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베드로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사렛 예수>라는 말이 7번 나옵니다. 그 중에 4번을 베드로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경 인물 중에 나사렛 예수라는 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그냥 예수라고 해도 되는데 왜 나사렛 예수라고 했을까요?  

나사렛은 예수님이 30세까지 살던 곳입니다. 그래서 나사렛은 예수님의 고향 같은 곳입니다. 나사렛(Nazareth)은 갈릴리 바다에서 남서쪽으로 19km 떨어져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북쪽으로 91km 떨어진 외딴 마을입니다. 나사렛을 포함한 갈릴리 지방은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그래서 풍요롭고 아름다운 곳입니다. 하지만 로마의 수탈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지역이었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이방처럼 취급되던 곳이 갈릴리입니다. 반면에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도시였습니다. 종교적 정통성이 있었습니다. 또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남유다 사람들은 종교적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사람들은 경멸했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보다 더 무시 받는 지역이었습니다. 요즘도 시골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골스럽다’, ‘촌티난다’, ‘촌스럽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가서 인류의 구세주를 만났다고 합니다. 나다나엘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때 빌립이 나사렛 예수라고 합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합니다. 나사렛 같은 곳에서 어떻게 구세주가 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따라서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예수님을 비하하는 의도가 담겨진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사렛 출신 예수님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사렛 예수를 자랑스럽게 외칩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입니다. 지금은 오순절입니다. 유대 땅에 사는 남자들이 대부분 예루살렘에 올라와 있습니다. 세계 각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세계의 센터인 로마에서도 사람들이 왔습니다. 지금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있습니다. 그 사람들 앞에서 갈릴리 어부 출신 베드로가 나사렛 출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것도 당당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조금의 주저함이나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여러분! 어떠십니까? 오늘날 별의별 사건이 다 있습니다. 만민중앙성결교회 이재록 씨 성추문 사건으로 세간이 시끄럽습니다. 이재록 씨는 기독교계에서 이미 출교된 사람입니다. 이단으로 정죄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언론은 꼭 목사라고 합니다. 의도적으로 기독교를 조롱합니다. 세상의 이런 시선 앞에서 나사렛 예수를 당당히 외칠 수 있으십니까?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당당히 외칩시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세 가지 단어로 표현합니다. 큰 권능, 기사, 표적이라는 말입니다. 권능은 권세와 능력입니다. 그냥 능력이 아닙니다. 권세가 있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입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위로부터 오는 능력입니다. 이 권능은 성령이 임하실 때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권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성령 받읍시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성령 받으면 깜짝 놀라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적을 기사(奇事 - 기이한 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3년 공생애 기간 동안에 이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왜 기사를 행하셨을까요? 기사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초청장입니다. 왜 성경에 수 없이 많은 예수님의 기적을 기록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초청장입니다. 여러분! 기적을 읽으시며 여러분을 부르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초청장에는 하나님의 싸인이 있었습니다. 이 초청장을 들고 계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적을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표적이라는 말은 표시, 신호라는 의미입니다. 기사를 일으키시는 분이 구세주라는 표입니다. 왜 하나님이 초청장에 싸인을 해주셨을까요?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66권입니다. 복음서에만 기적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일으킨 이적을 보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표적을 주신 이유는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세요. 의심하지 마세요. 온전히 믿으세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나사렛 예수를 증거하셨습니다. 증거라는 말은 보여주다는 뜻입니다. <나사렛 예수> 이 이름에 큰 권능이 있습니다. 이 이름에 기사와 표적이 있습니다. 이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이름을 의지하여 살았습니다. 여러분! 나사렛 예수로 사세요. 나사렛 예수 이름을 붙들고 사세요.

 

2. 베드로의 구원 역사 이해  

오늘 본문에 기독교적 역사 이해에서 아주 중요한 두 어구가 나옵니다. 그것은 <정하신 뜻><미리 아심>이라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라고 했습니다. 정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오리조(ὁρίζω)입니다. 오리조는 결정하다’, ‘정하다’, ‘지정하다는 뜻입니다. 뜻은 헬라어로 불레(βουλή)입니다. 불레는 계획’, ‘의도’, ‘생각’, ‘결의라는 뜻입니다. ‘정하신 뜻결정되어진 계획’, ‘결정되어진 결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언제 결정한 계획일까요? 그것은 창세전입니다.  

<에베소서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십자가의 구원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작정되어진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십자가는 천지창조가 있기 영원 전에 세워진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 ‘계획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두 개 있습니다. 델레마와 불레입니다. 델레마는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계획이나 뜻입니다. 사람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변개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불레는 바꿀 수 없는 뜻입니다. 이것을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불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대적인 뜻입니다. 결코 변개가 되지 않습니다.  

건물을 지으려면 설계도가 있어야 합니다. 설계도대로 건물을 짓습니다.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설계도는 창세전에 만들어졌습니다. 여기 건물이 있습니다. 이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기둥입니다. 벽이 아닙니다. 이 기둥은 절대로 움직이면 안됩니다. 이 기둥을 움직이면 건물이 무너집니다. 기둥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둥 외에 다른 것은 변경이 가능합니다. 벽을 허물 수 있습니다. 문을 다른 곳에 낼 수 있습니다. 창문을 없앨 수 있습니다. 다른 곳에 창문을 낼 수 있습니다. 기둥 외에 나머지는 얼마든지 변경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기둥은 고정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결코 바뀔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성경의 속의 진리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서 결코 바뀔 수 없는 뼈대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종교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세상 역사를 떠받치고 있는 들보입니다. 세상 역사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는 커다란 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갑자기 된 일이 아닙니다. 우연히 이루어진 일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구원할 능력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된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죽으려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으려고 오셨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열심히 사세요. 끝까지 사세요. 우리는 바동거리며 열심히 사는 거예요. 그런데 죽으려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으려고 사셨습니다. 죽으시려고 33년을 사셨습니다. 죽으려고 서른 살까지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죽으시기 위해 영원 전부터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정하신 뜻입니다.  

개인의 운명은 바뀔 수 있습니다. 나라의 운명도 바뀔 수 있습니다.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나라들이 생겼다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창세 이후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십자가를 붙드세요. 십자가를 붙들어야 우리의 삶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붙들어야 우리의 삶이 영원합니다. 십자가 없는 삶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습니다.  

미리 아심을 신학적 용어로 예지라고 합니다. 예지라는 말이 성경에 처음 나오는 곳이 사도행전 2:23입니다. 예지는 하나님의 역사가 사랑에 기초해 있음을 알려주는 말입니다. 이 말에는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미리 안다는 말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안다는 말은 여러 번 나옵니다.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33:17).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옴으로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 하였느니라”(9:24).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1:5).

저희가 방백들을 세웠으나 나의 모르는 바며”(8:4).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3:2).  

이 구절들에서 안다는 것은 사랑을 받거나 택함 받음을 의미합니다. ‘안다는 단어는 또한 신약에서도 자주 쓰이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구약과 동일합니다(아더 핑크).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7:23).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10:14).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전 8:3).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딤후 2:19)

 

다시 말해서 안다는 말은 사랑에 기초한 단어입니다. 스코틀랜드 조직신학자 존 머레이 박사(1898.10.14.-1975.5.8)미리 아심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했습니다. ‘미리 아신 대로 내어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의지에 따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역사를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리셨을 때 꼭 마귀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자유의지에 따라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 반항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훼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뜻은 뜻대로 진행됩니다.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다고 했습니다. ‘법 없는 자율법이 없는 자라는 뜻입니다. 문자적인 뜻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1차적으로는 빌라도와 로마병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의미상으로 볼 때 법 없는 자는 예수님을 조롱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법 없는 자입니까? 아니면 법 있는 자입니까? 사탄의 도구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도구입니까? 예수님은 작정된 대로 가십니다. 하지만 사탄의 도구에게는 심판이 있습니다.  

<누가복음22: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여러분! 오늘도 예수님을 여전이 십자가에 못 박는 이 시대의 빌라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위한 의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내어준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어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24절 상반절>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부활은 성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고통(ὠδίν)이라는 말은 사냥꾼의 덫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망은 모든 사람들이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사탄의 덫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망의 덫을 풀어버리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사탄이 더 이상 죽음의 덫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24절 하반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사망에라는 말은 사망 아래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망 아래에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사망 위에 계신 분이십니다. NASB사망에라는 말을 사망의 힘 안에’(Him to be held in its power)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망 안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망 밖에 계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사망 아래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사망 안에 갇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망 위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망 밖에 계십니다.  

칼빈은 이 부분을 이렇게 설교 했습니다.  

     여기서 누가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섭리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울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온 세상을 두루 비추지만 특히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우리에게 비춰준다.  

그리스도 사역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부활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합니다. 하지만 고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부활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을 굳게 붙들고 있는 한 사탄은 어떤 것으로도 우리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은 이제 모두 끝이 났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은 계속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은 우리를 통해 계속 진행될 것입니다.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할 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스캇 펙은 이렇게 말합니다.  

     삶이란 문제의 연속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고통스러운 삶의 문제를 계속 안고 살아가야만 할까? 아니면 이 문제들을 극복할 것인가? 과연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의 아들딸에게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삶의 지혜를 가르쳐 줄 수 있을까? 훈련이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방법 중에 하나이다. 이런 과정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해결 할 수 없다.  

삶이라는 문제의 연속입니다. 문제없는 삶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만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계속됩니다.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하신 뜻도 계속됩니다.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은 중단하지 않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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