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말세가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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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2:14~21
주일오전예배 | 2018-04-22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얼마 전에 친척 중에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혼주에게 인사하고 피로연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피로연장이 너무 좁은 거예요. 반면에 손님은 아주 많아요. 자리가 많이 부족해요.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과 바짝 붙어서 식사를 하게 됐습니다. 식사를 하고 있는데 어떤 남자 분이 앞자리에 와서 앉아요. 그러더니 식사 기도를 하는 거예요. ‘교회 다니나 보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시간이 좀 지난 것 같은데 눈을 뜨지 않는 거예요. 제가 밥을 먹다가 쳐다보았습니다. 식사 기도를 한참 해요. 사람이 많은데 주변 사람을 전혀 신경쓰지 않습니다. 아주 여유가 있어요. 저는 음식점에서 기도를 하면 옆에 사람이 신경이 쓰입니다. 그래서 가급적 빨리 끝냅니다. 그런데 그 남자분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어요. 아주 당당해요. 나이는 저하고 비슷해 보여요. 문득 목사님이신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계속 식사를 했습니다. 옆에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목회자는 아니에요. 그날 그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대중음식점에서 식사하실 때 식사기도는 하십니까?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쑥스러워서 대충 하십니까? 아니면 당당하게 기도하십니다. 어떤 분이 대중음식점에서 기도할 때는 누가 볼까봐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할렐루야!’ 고개를 들면서 아멘한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10:32) 삶의 매 순간 모든 자리에서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고백하시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제자들에게 말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아주 놀랍니다. 그런데 어떤 부류들이 제자들이 술에 취했다며 조롱합니다. 이 때 베드로가 일어나 변론합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베드로의 변론 설교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입니다. 이 시간 먼저 베드로의 설교의 태도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런 다음 설교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베드로의 확신  

먼저 베드로의 설교를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성령 강림 후 베드로는 세 가지 점에서 이전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첫째, 베드로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일어서서 말합니다.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입니다. 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베드로는 멀찍이서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때 베드로의 모습을 성경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26:58), 무리들 중에 끼지 못하고 종들 틈에서 앉아 있습니다.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26:69)라고 했습니다. 안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바깥뜰에 앉아 있습니다. 아주 소심한 모습입니다. 베드로의 두려움은 계속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 문을 꼭 닫고 숨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이전의 모습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후 반전이 일어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 앞에 당당히 서서 변론을 합니다. 예수님 승천 후 베드로는 서서 다른 제자들 앞에서 서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무서워하던 유대인 앞에서 설교를 합니다. 성령 강림 후 베드로는 더 이상 앉아 있지 않습니다. 더 이상 숨지도 않습니다. 담대해졌습니다. 확신에 차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충만 받으세요. 그리고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서 계세요. 세상 앞에서 쪼그리지 마세요. 움츠리지 마세요. 강하고 당당하세요. 이것이 성령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둘째,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아주 큰 소리로 정확하게 말합니다. ‘소리 높여 이르되라는 말이 문자적인 뜻은 소리를 높여 큰 소리로 말하기를라는 뜻입니다. 분명하게 말하다’, ‘선언하다는 뜻입니다. 단순한 말이 아니라 선언입니다(아포프뎅고마이). 베드로는 아주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횡설수설하지 않았습니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머뭇거리며 말하지 않았습니다. 더듬거리지도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아주 큰 소리로 선포하며 말했습니다. 전에 베드로는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을 숨기지 않습니다. 당당하게 선포합니다. 복음은 선포입니다. 복음은 선전이 아닙니다. 복음은 광고가 아닙니다. 복음은 설명이 아닙니다. 복음은 변론이 아닙니다. 복음은 선포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우물쭈물하지 맙시다. 예수님을 강하고 담대하게 선포합시다.  

셋째, 베드로는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구약 성경 요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합니다.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구약 성경에 예언되었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단순히 일어난 초자연적인 기이한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역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들의 삶은 하나님의 장중에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루어집니다. 어떤 일들은 갑자기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당황하지 마세요.  

이것이 성령충만을 받은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성령충만 받고 베드로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확신에 차 있습니다. 당당해졌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있을 때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떤지 생각해봅시다. 확신을 가지세요. 당당하게 입으로 고백합시다. 당당하게 삶으로 증거합시다. 예수님에 대해 말할 일이 있다면 담대하게 선포합시다.

 

2. 말세의 시작  

베드로가 설교를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설교를 시작하자마자 이제 말세가 시작됐다고 합니다. 17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라고 했습니다. 말세(末世)의 일반적인 뜻은 세상의 끝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는 다릅니다. 요엘서 228절에 그 후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후에라는 말은 예수님(구세주)이 오신 후에라는 뜻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구세주)이 오셔서 인류 구원 사역을 모두 완성하신 후에라는 뜻입니다. ‘말세는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 사역을 완성하신 때부터 시작됩니다.  

<히브리서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브리서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인류 종말은 예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종말이 끝이 납니다. 예수님이 종말의 시작이자 종말의 끝입니다. 예수님이 종말 자체입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완성하시고 약 2000년이 지났다. 그런데 아직도 말세인가?” 예 지금도 말세입니다. 주님께는 천년이 밤의 한 경점 같습니다. 또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습니다.  

<시편 90: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베드로후서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여러분! 지금이 세상 종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끝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지 2천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끝 중에 끝에 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종말이 끝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때에 주님은 성령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부어주신다는 말은 차고 넘치게 부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조금 부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서 성령은 특정인에게만 부어졌습니다. , 선지자, 제사장, 사사, 특정 직분자들에게만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그런데 말세에는 모든 육체에 부어주십니다. 육체라는 말은 몸을 말합니다.  

제가 가까운 대학 도서관에 종종 갑니다. 도서관이 3층입니다. 위에서 보면 청년들이 왔다 갔다 해요. 보면서 젊음은 정말 아름다운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종종 제복을 입은 청년들이 보여요. 학군단 같아요. ROTC 제복을 입은 청년들이 얼마나 멋진지 몰라요. 집에 와서 아내에게 정말 멋지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내가 그래요. “예쁘면서 위험하죠!” 혈기 왕성한 젊음은 기회입니다. 반면에 위험입니다.  

성령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육체는 아주 연약합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하지만 육체는 기회입니다(20:22,2:38). 육체는 우리가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너희 몸은 거룩한 하나님의 전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육체로 있는 동안 말씀을 받읍시다. 육체로 있는 동안 믿음을 가집시다. 육체로 있는 동안 하나님을 위해서 일합시다. 육체는 성령의 부으심을 받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육체를 떠나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육체의 기회를 잃어버리지 맙시다. 지금은 구원의 날이요 은혜 받을 때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실 준비가 항상 되어 있으십니다. 은혜의 날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읍시다.  

성령이 육체에 부어졌을 때 아주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게 됩니다. 먼저 너희 자녀들이 예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언의 뜻은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다’, ‘알아맞히다’, ‘예고하다’, ‘미래 일을 말하다는 뜻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로 미래를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미래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최고의 예언입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예언입니다. 예수님이 예언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이 성경의 완성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결같이 종말의 심판을 말합니다. 세상 끝을 말합니다. 그래서 선지서를 읽다 보면 여호와의 날, 그 날, 심판, 멸망 등 종말과 관련된 말들이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종말의 테이프를 끊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종말의 시작을 알리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최고의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예언입니다. 성령이 부어졌을 때 우리는 장차 예수님이 가져오실 미래와 친해집니다. 성령받으면 미래의 소망이 넘칩니다.  

심지어 성령은 종들까지 미래를 예언하게 하는 소망의 영입니다. 18절에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왜 갑자가 종들을 언급할까요? 사회의 가장 약자입니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존재입니다. 종은 전혀 소망이 없는 존재입니다. 종은 전혀 미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저 하루살이 같이 사는 인생이 종입니다. 그런데 말세에 성령은 종들에게까지 부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이 미래를 예언하게 합니다. 미래를 노래하게 합니다. 성령은 소망의 영입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 받으세요. 성령은 미래지향적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미래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십니다. 성령받으면 소망이 넘칩니다. 성령받으세요.  

젊은이들이 환상을 본다고 했습니다. ‘젊다는 말은 김장할 때 배추가 소금에 절여지듯 <세상살이에 찌들어 절여진 것>을 의미합니다. ‘어리다는 말은 사실을 가감하거나 감추지 못하고 완전히 노출한다는 의미입니다. 젊은이는 사실을 그대로 노출하지 않고 가감하여 반쯤 노출하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속임수를 쓰기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니까 젊은이란 말은 <세파에 한창 시달려서 속임수를 쓰기 시작한 어른>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젊은이는 세파에 찌드는 시기입니다. 힘들어지는 시기입니다. 젊은이라는 말의 뜻이 이 시대 젊은이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3, 5, 7포 시대입니다. 그런데 한 쪽에는 쾌락에 빠져 있습니다. 술에 담배에 이성에 정신이 절어있어요. 저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이미지가 있어요. 어떤 대학에 갔습니다. 교문 앞 길바닥에 대낮인데 여학생이 누워있어요.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어 있어요. 남학생에게 업혀가요. 길옆에서 여학생은 토하고 남학생이 등을 두드리고 있어요.  

젊음의 특징은 열정입니다. 힘입니다. 패기입니다. 활기입니다. 젊음은 꿈과 환상의 시기입니다. 그런데 세파에 찌들고 육체 쾌락에 빠져 꿈도 환상도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부어지면 이 세파로 잃었던 환상을 다시 보게 됩니다. 성령의 부으심을 받으면 젊음에 환상이 더해집니다. 환상은 헬라어로 호라시스입니다. 호라시스는 움직이는 꿈’, ‘살아 있는 행동이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은 젊은이들에게 움직이는 꿈을 주십니다. 살아 있는 꿈을 주십니다.  

그리고 늙은이가 꿈을 꾼다고 했습니다. 늙은이는 나이 많은 어른을 말합니다. 늙은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봤습니다. 그랬더니 늙은이는 나이가 많아 중년이 지난 사람이라고 했어요. 백과사전을 찾아봤습니다. 그랬더니 고령자 노인이라고 했어요. 늙은이는 인생의 종점에 있는 사람입니다. 미래가 없습니다.  

늙은이와 젊은이의 차이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미래를 이야기 합니다. 젊은이들은 앞으로 무얼 할 건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이야기 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 합니다. 젊은이는 끊임없이 미래를 생각하고 미래를 이야기 합니다.  

반면에 늙은이는 과거를 이야기합니다. 늙은이들의 대화 내용의 대부분이 과거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잘 나갔다는 것입니다. 한 가닥 했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 했다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좋았다는 것입니다. 미래 이야기는 없고 전부 옛날이야기뿐입니다. 옛날이야기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삶을 정리하며 뒤돌아보는 것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늙은이는 옛날이야기가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늙은이는 끊임없이 과거를 생각하고 과거를 말하는 말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부어지면 늙은이가 미래를 말하게 됩니다.  

성령은 늙은이의 잃어버린 꿈을 부활시켜줍니다. 꿈이 히브리어로 예체르입니다. 예체르는 머리 속에 생성된 의도나 계획을 의미합니다. 또 예차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차르는 상상,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야차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야차르는 창조하다 조성하다 짓다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말할 때 야차르라는 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꿈 상상 생각 창조이라는 말이 똑같은 단어입니다. 창조는 꿈에서 출발 합니다. 꿈은 상상하는 미래를 상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꿈은 무엇을 하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75세에 고향 아버지 집 친척을 떠납니다. 75세에 하늘의 별을 바라봅니다. 바닷가의 모래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인생을 새롭게 시작합니다. 99세가 되었습니다. 내년 이맘 때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나이 상관 없이 계속 새로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80세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꿈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모세는 80세에 인생을 다시 시작합니다.  

갈렙은 광야에서 모세와 40년 동안 함께 했습니다. 갈렙은 7년 동안 여호수아와 가나안 정복 전쟁을 했습니다. 이제 85세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분배하려고 합니다. 좋은 땅에서 나머지 여생을 편안하게 쉴 나이입니다. 그런데 갈렙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수아14:11-12>

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40세 때나 지금 85세나 힘이 똑같다는 뜻입니다. 갈렙은 40세 때나 85세 때는 열정이 똑같았습니다. 얼마나 멋진 패기입니까? 갈렙은 85세에 새로 시작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축복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성령의 부으심을 받으면 꿈이 있는 늙은이가 됩니다.  

그런데 예언 환상 꿈 이 세 가지는 동일한 의미입니다. 예언이라는 것은 희귀하면서 어떤 특별한 지식의 은사를 말합니다(칼빈). 하나님께서 특별한 지식을 주실 때 사용하신 두 가지 방법이 꿈과 환상입니다.  

<민수기12: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따라서 예언을 한다.’, ‘환상을 본다.’, ‘꿈을 꾼다.’는 말은 동일한 표현입니다. 자녀들은 예언만 하고 환상과 꿈을 꾸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은 예언도 하고 환상도 보고 꿈도 꾸는 것입니다. 젊은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환상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도 하고 꿈도 꾸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늙은이도 예언도 하고 환상도 보고 꿈도 꾸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의 요지는 성령이 충만하게 부어지면 모두가 선지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선지자들에게 버금가는 특별하고 희귀한 지식의 은사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세에 성령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준비가 항상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그래서 성령의 부으심을 받읍시다.

 

3. 말세의 끝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의 서론은 말세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의 결론은 말세의 끝입니다. 서론은 오순절 강림이고 결론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성령의 강림은 말세를 알리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베드로는 세상의 끝을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은 재림의 날입니다. 재림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될 것입니다. 천지가 개벽하는 것입니다. 재림 전에 세상에는 전무후무한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전무후무한 공포에 떨 것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이 재앙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이적과 표징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피와 불과 연기입니다. 피와 불과 연기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입니다. 피를 예수님의 피로 보기도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피입니다. 반면에 어떤 학자는 애굽에 내린 첫 번째 피의 재앙으로 보기도 합니다. 심판을 상징하는 피라는 것입니다. 학자들마다 해석이 상반됩니다. 불은 하나님의 임재로 봅니다. 하지만 불을 심판으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연기라는 말이 요엘서에는 연기 기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연기를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로 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한 연기기둥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연기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기도 합니다. 피와 불과 연기는 학자들마다 해석이 다릅니다. 베드로도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는 무엇이고 불은 무엇이라고 정의하기 보다는 영적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그것은 재림 전에 세상이 혼란과 두려움으로 가득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끝으로 갈수록 점점 혼란해집니다. 그래서 점점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기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점점 세상은 더 혼란해질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구원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적과 표징이 있을 것입니다. 이 말세에 주님의 이름을 부릅시다. 그래서 주님이 준비한 은혜를 받으십니다.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놀고 있었습니다. 저녁 때가 됩니다.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말을 합니다.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만나자.” 그 때 하루살이가 묻습니다. “내일이 뭔데?” 그러자 메뚜기가 대답을 합니다. “이제 곧 캄캄한 밤이 다가올 거야. 그것이 지나면 저 태양이 다시 떠오르는 밝은 날이 오는데 그 때가 내일이란다. 그러니까 내일 만나자.” 하루살이는 도무지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메뚜기와 개구리가 함께 놀게 되었습니다. 가을이 되었습니다. 개구리가 말합니다. “내년에 다시 만나서 놀자.” 메뚜기가 묻습니다. “내년이 뭔데?” 개구리가 대답을 합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다시 따뜻한 봄이 오는 게 내년이란다.” 메뚜기는 도무지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살이는 하루의 꿈만 꿀 수 있습니다. 메뚜기는 일 년의 꿈만 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말세가 시작됐습니다. 우리는 지금 말세를 살고 있습니다. 현재의 삶이 끝이 아닙니다. 현재의 고난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습니다. 내년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 미래가 있습니다. 믿으면 영적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면 영적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혼란하고 어두운 시대에 성령의 은혜로 미래를 소망하며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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