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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여러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사상가들에게 물어본다면 비전 또는 꿈이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소설가는 사랑이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종교인들은 자비라고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현실주의자들은 돈이라고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긴요하게 느껴지는 게 돈이잖아요. 돈이 있어야 먹을 것도 사고 입을 것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저에게 물어본다면 저는 주저 없이 <성령>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늘의 바람입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기간은 65~70일입니다. 물을 마시지 않고는 4~10일을 살 수 있습니다. 물 없이 5일을 넘기기가 어렵답니다. 그리고 숨을 쉬지 않고는 3분까지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실험을 해보았습니다. 타이머를 놓고 숨을 참아보았습니다. 3분은커녕 1분을 견디기 힘들어요. 1분 30초만 되도 죽을 것 같더라고요. 호흡은 사람들에게 아주 긴요한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는 쉴 새 없이 호흡을 하고 있습니다. 심장이 쉴 새 없이 쿵쿵쿵 펌프질을 하고 있습니다. 잠시라도 호흡이 중단된다면 사람은 죽게 됩니다. 호흡은 사람에게 아주 긴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호흡이 코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이 호흡이 떨어지면 사람은 끝입니다. 그런데 이 코로 하나님은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창세기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의 호흡이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 속에 들어가자 생명이 됐습니다. 하나님의 호흡이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 속에 들어가자 뼈들이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의 호흡이 성경 속으로 들어가자 살아 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호흡이 성경 속에 들어가자 사람을 살리는 책이 됐습니다. 이 호흡이 바로 하나님의 영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한 순간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도 아닙니다. 사랑도 아닙니다. 비전이나 꿈도 아닙니다. 음식이나 물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입니다. 우리에게 하늘의 바람이 불어와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하나님께서 호흡을 코에 두신 이유는 순간순간 이 사실을 잊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성령이 가장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하늘의 바람이 불어오기를 소원합니다. 이 시간에 먼저 오순절에 있었던 말하는 기적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사모함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적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1. 말하는 기적, 듣는 기적
먼저 오순절에 있었던 기적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제자들에게 하늘의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말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말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입에서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언어가 나왔습니다. 한 번도 들어보거나 배운 적이 없는 외국어입니다. 제자들에게 하늘의 바람이 불어오자 말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일어난 첫 번째 기적입니다. 이것과는 다르지만 여러분에게도 말하는 기적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언어인 방언의 은사도 있기를 바랍니다.
더 놀라운 것은 듣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천하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제자들이 하는 말을 자기가 태어난 곳의 언어로 듣게 된 것입니다. 9절부터 11절까지 15개국 나라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15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자기가 온 나라의 말로 제자들이 하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기독교는 신비입니다. 말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듣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말하는 사람도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듣는 사람도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모두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성령의 은혜는 전염되는 것 같습니다. 사무엘과 그 제자들이 라마나욧에 있을 때입니다. 사울이 전령들을 라마나욧으로 보냈습니다. 전령들이 라마나욧에 이르자 예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은 다시 전령들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도 예언했습니다. 세 번째 전령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도 예언했습니다. 이번에는 사울이 직접 갔습니다. 그랬더니 사울도 예언했습니다. 사람들이 라마냐욧에 이르기만 하면 예언을 했습니다. 사무엘과 그 제자들은 은혜를 전염시켰습니다.
생일날 케이크에 꽂은 초에 불을 붙입니다. 처음에는 성냥으로 불을 붙입니다. 성냥이 다 타면 초를 빼서 다른 초에 불을 붙입니다. 그렇게 모든 초에 불을 다 붙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의 불을 붙였습니다. 제자들은 그 불을 다른 사람에게 붙였습니다. 성령의 불이 점점 전염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하늘의 바람이 불어오길 소원합니다. 그 성령의 은혜가 옆 사람에게 전염되길 바랍니다. 내 가족에게 전염되길 바랍니다. 원망 불평 불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나 때문에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전염되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에게 붙은 성령의 불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됐습니다. 하늘의 바람을 체험한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까지 기적을 체험하게 했습니다.
칼빈은 이 기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사람들의 눈앞에 나타나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위엄이 이 이적에서처럼 더 분명하게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칼빈이 사도행전 강해 中에서)
말하는 기적, 듣는 기적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 설명해 주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기적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신비입니다. 오순절에 말하는 기적과 듣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 외국어가 입에서 줄줄 나왔습니다. 기독교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종교를 이해할 수 있다면 이는 그것이 기독교가 아니라 증거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종교를 제어하고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주일 아침 교회에 갈 때면 가방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 놓을 수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기적입니다. 기독교는 경이입니다. 기독교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진정한 기독교』 中에서)
내가 이해하는 순간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기적입니다.
저는 말하는 기적과 듣는 기적을 소통의 기적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이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막힌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언어가 나누어졌습니다. 언어가 나누어지자 사람과 사람이 단절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막힌 것입니다. 불통의 시대가 됐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소통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소통이 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이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를 불통의 시대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소통! 소통!’하며 소통을 말하지만 소통은 안됩니다. 단절, 불통 이것이 이 시대의 아픔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바람이 불어 소통의 기적이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바람이 불어 소통의 기적이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왜 말하는 기적과 듣는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복음은 누룩입니다. 누룩의 본질은 퍼지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세상을 뒤집는 것입니다. 말하는 기적과 듣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복음은 제자들의 말을 알아듣는 유대인들에게만 전파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갈릴리에 갇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하는 기적과 듣는 기적으로 복음이 유대라는 울타리를 넘어 세계로 전파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말하는 기적과 듣는 기적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오늘날 복음이 교회에 갇혀 있습니다. 게다가 세상이 사악해졌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문이 점점 닫히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에 우리 교회에 저와 여러분에게 말하는 기적이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기를 바랍니다.
2. 사모함이 축복
두 번째 사모함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오순절 이전부터 천하 각국에서 경건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5절>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여기 ‘머물다’는 말이 헬라어로 카토이케오(κατοικέω)입니다. 카토이케오는 ‘영원히 안주하다, 살다’는 뜻입니다. 잠시 잠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 도록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성경은 ‘각국으로부터 와서 살았다’라고 했습니다. 킹제임스버즌은 ‘예루살렘에 살았다’(dwell라)고 번역했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오순절 이전부터 예루살렘에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오순절 즈음해서 예루살렘에 와서 살고 있었을까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메시야의 나타나심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가 있었습니다. 매튜핸리라는 성경주석가는 이 때가 다니엘서의 70이레가 끝나는 주간이라는 것입니다.
<다니엘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그래서 유대인들은 곧 메시야가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누가는 유대인들은 당장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19;11>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AD30년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머물며 오랫동안 살고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들이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3대 절기를 지킵니다. 그런데 유월절과 오순절은 50일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유대인들을 유월절을 지킨 후 돌아가지 않고 손을 꼽아가며 오순절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오순절을 지킨 후에 내려갑니다. 약 두달 동안 예루살렘에 머무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오순절은 하나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이 두 가지 해석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가를 간절히 기다리며 사모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적 열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오순절의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이런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초대 교회 일원이 되었습니다. 이런 사모함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짜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예배에 대한 사모함이 없다.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구원을 예배로 정의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사람들은 내게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어떻게 판단하느냐고 묻는다. 관찰만으로는 누가 그리스도인인지 알 수 없다. 어떤 불신자들은 외적으로 도덕적인 삶을 사는 반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눈에 보이게 공공연히 죄를 짓기 때문이다. 하는 말을 들어 봐서도 알 수 없다. 충분히 오래 들어 보면 아마도 진실이 드러나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기 혀를 매우 잘 통제한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그가 바라는 것을 살펴보는 방법이다. 그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예배하기를 갈망한다면 그것은 그의 마음이 변화되었다는 증거다. (『값비싼 기독교』 中에서)
사모함, 갈망이 진짜 그리스도인의 표지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하늘의 바람을 사모합시다. 이 사모함이 우리를 하나님의 축복의 현장에 있게 합니다.
3. 기적에 대한 세 가지 반응
마지막으로 오순절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 말하는 기적과 듣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말하는 기적과 듣는 기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7절 앞부분에 ‘다 놀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놀라’라는 말이 아주 깜짝 놀랐다는 의미입니다. 오순절 기적으로 사람들은 아주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놀란 사람들의 반응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7절>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여기 ‘신기하게 여겨’라는 말이 헬라어로 다우마조(θαυμάζω)입니다. 다우마조는 ‘놀라다, 기이하게 생각하다, 칭찬하다, 찬양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신기하게 여겼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을 감지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하게 됩니다. 신비감이 없어지면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기독교의 신비를 경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그 신비의 중앙에 갈릴리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 갈릴리 사람들은 촌사람들입니다. 말씨가 아주 투박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나라 어떤 지방 사람들은 ‘쌀’이라는 발음이 되지 않아 ‘살’이라고 합니다. 며칠 전 어떤 분과 통화하는데 ‘~의’라는 발음이 안돼 ‘~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방 사투리 때문에 잘 안되는 발음이 있습니다. 연습하고 연습을 해도 잘 안됩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천하각국에서 예루살렘에 올라온 유대인들은 갈릴리 촌사람들에게 압도당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압도당했을까요? 그것은 말하는 기적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비의 중앙에 갈릴리 촌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신비가 갈릴리 촌사람들로 사람들을 압도하게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신비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반응은 당황입니다.
<12절>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당황하여’라는 말이 헬라어로 디아포레오(διαποέω)입니다. 디아포레오는 ‘크게 당황하다, 어쩔 줄을 몰라 하다’는 뜻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어안이 벙벙하여’라고 번역했습니다. 개역성경은 ‘의혹하여’라고 번역했습니다. 의혹이라는 말은 ‘어떤 사실 따위를 믿을 수가 없어 수상하게 여기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왜 기적을 믿지 않고 수상하게 여겼을까요? 왜 어안이 벙벙했을까요? 기적의 출발점을 하나님에게서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답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도 답이 없습니다. 답이 없는 세상에서 답이 없는 사람들끼리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이라는 배는 산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닭이 먼저일까요? 아니면 알이 먼저 일까요?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닭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이 닭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닭이 알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문제입니다. 인생에는 답이 없습니다. 세상은 요지경입니다. 그래서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하나님에게서 답을 찾으세요. 하나님께 답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답이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께 답을 구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 반응은 조롱입니다. 사람들은 조롱하며 제자들이 새로운 술에 취했다고 했습니다.
<13절>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여기 ‘새 술’이라는 말이 헬라오로 글루코스(γλευκος)입니다. 글루코스는 ‘아주 달콤한 새 포도주’입니다. 오순절 축제 기간에 달콤한 새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정신없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횡설수설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말입니다. 어떻게 술을 마시고 정신없이 말을 하는데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외국어가 나올 수 있을까요? 조금만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놀라운 기적 앞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것입니다. 그런데 술을 마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을 믿지 않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한 것입니다. 눈으로 봤습니다. 귀로 들었습니다. 그것도 혼자 들고 본 것이 아닙니다. 수만의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습니다. 함께 듣고 함께 봤습니다. 증인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여줘도 믿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왜 강퍅할까요? 성령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고 사탄의 농간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이 나타나 눈앞에 있어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유대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학대가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돈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왜요? 성령이 가장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주셨습니다. 밥을 굶고 있는 자에게도 성령이 가장 필요합니다. 실패한 사람에게도 성령이 가장 필요합니다. 아픈 자에게도 성령이 가장 필요합니다. 갇힌 자에게도 성령이 가장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도 출세도 아닙니다. 성령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길 소원합니다. 그래서 말하는 기적이 있기를 바랍니다. 듣는 기적도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목회자가 되려고 서원했습니다. 목회자에게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돼서 보니 필요한 것이 많아요.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해요. 필요한 것이 많아요. 그런데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 제게는 그런 것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성령의 역사이었습니다. 성령 안에 하늘에 신령한 것이 다 있습니다. 물론 성령님이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하지만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가 다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역사를 구합시다. 성령의 역사를 사모합시다. 그래서 우리에게 신령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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