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회개 세례 죄사함 그리고 성령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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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2:37~38
주일오전예배 | 2018-05-27
설교자 : 서요한 목사

돈이 다 떨어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디든지 들어가서 돈을 조금이라도 벌어야 했습니다. 일자리를 찾다가 동물원에 취업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동물원에서 동물들을 사육하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동물원 매니저는 그 사람을 보더니 사육사가 아닌 다른 일을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체격이 워낙 크니까 다른 일을 시킨 것입니다. 동물원 매니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고릴라가 엊그제 죽었습니다. 당신한테 고릴라와 비슷한 특수한 옷을 줄 테니, 며칠만이라도 고릴라 옷을 입고 고릴라 행세 좀 해 주세요. 돈은 일한 만큼 드릴 테니 진짜 고릴라가 들어올 때까지만 부탁해요.”  

무슨 일이든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던 그 사람은 그 일을 하겠다고 성큼 나섰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했습니다. 하지만 점차 익숙해졌습니다. 진짜처럼 손으로 가슴을 치기도 하고 울타리를 잡아 흔들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그 사람은 이것도 나쁘지 않네.’라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중에 매달린 그네를 타고 몸을 흔들다가 그만 잡고 있던 줄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순간 그는 쇠고랑으로 쳐 놓은 울타리를 휙 넘어가서 사자 굴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사자가 고릴라를 보고 사납게 포효하기 시작했습니다. 관중은 그 포효에 매료되어 눈을 번쩍 뜨고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릴라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일 고릴라가 사람 살려!”라고 소리를 지르면 정체가 들통이 날 판국입니다. 그 사람은 천천히 사자에게서 뒷걸음을 쳐서 울타리를 넘어 고릴라 집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자가 얼굴에 굶주린 표정을 지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고릴라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다급해진 고릴라가 그 때 사람 살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순간 사자도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 입 다물어! 입을 열면 우리 둘 다 해고야!”  

고릴라는 가짜 고릴라였습니다. 겉은 고릴라인데 속은 사람이었습니다. 무늬만 고릴라였습니다. 가짜 고릴라가 진짜 고릴라 행세를 한 것입니다. 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은 사자이고 속은 사람이었습니다. 무늬만 사자이었습니다. 가짜 사자가 사자 흉내를 낸 것입니다. 오늘날 가짜가 참 많습니다. 그럴지라도 교회만은 진짜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도 가짜가 많습니다. 가짜 집사, 가짜 권사, 가짜 장로, 가짜 목사.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진짜 크리스천입니까? 겉만 크리스천이신가요? 아니면 속까지 크리스천이신가요? 겉도 크리스천이고 속도 크리스천이길 바랍니다.  

14절부터 36절까지는 오순절의 베드로 설교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첫 번째 설교입니다. 이 설교에는 오순절 성령강림에 관한 정확한 해석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대한 베드로만의 해석과 적용이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오직 이 설교에만 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아주 깊고 심오한 명설교입니다. 설교자는 아주 확신에 차 있습니다. 이 설교를 읽다 보면 무식쟁이 베드로가 어떻게 이런 명설교를 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감동과 능력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이렇게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령을 받자 베드로가 진짜 사도가 됐습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아야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세례 받고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1. 어찌 할꼬?   

베드로의 설교에 청중들이 보인 반응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마음이 찔렸습니다. 37절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라고 했습니다. 여기 찔려라는 말이 헬라어로 카타뉫소입니다. 카타뉫소는 꿰찌르다’, ‘찔러 관통하다’, ‘날카롭게 후벼 파다’, ‘따끔하게 찌르다’, ‘때려눕히다는 뜻입니다. 아주 날카롭고 예리한 칼이나 침 같은 것으로 찌르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것도 관통하는 것입니다. 간혹 날카로운 종이에 손을 베는 경우가 있습니다. 순간 따끔합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피가 나오면서 점차 아려옵니다. 또 아주 예리한 가시나 바늘에 찔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순간 움찔합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피가 나면서 아려옵니다. 속살이 아릴 때가 있습니다. ‘찔려라는 말은 심장이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것에 베이거나 찔린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도 관통된 상태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아주 심하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의 마음을 찌른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은 면도칼보다도 더 예리한 영혼의 칼입니다. 말씀은 영혼의 심장을 찌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러면 어떤 말씀에 찔렸을까요? 그것은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을 죽였다고 생각했습니다. 빌라도가 죽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은 예수님이 죽을 때 십자가 근처에 있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과 자기들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유대인들은 면도칼로 심장을 자르는 듯한 찔림을 받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은 유대인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것은 로마 병정이 아닙니다. 빌라도가 아닙니다. 바로 나입니다. 바로 우리입니다. 가룟 유다만 예수님을 판 것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판 것입니다. 우리가 가룟 유다입니다. 로마 병정이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을 박은 것이 아닙니다. 로마 병정만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 죽인 것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찔러 죽인 것입니다.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  

이사야 선지자는 그를 찌른 것은 바로 우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도 우리가 예수님을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찔림이 없습니다. 회개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찌른 것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운전자가 속도위반을 하면 범칙금을 냅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살인, 강간, 도적질 같은 죄는 인정합니다. 눈에 보이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나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로마병정들이 죽였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이 죽였다고 생각합니다. 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능력이 없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신과 연결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찔림을 가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유대인들의 사건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바로 나의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간접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직접적인 사건입니다. 십자가를 볼 때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찌른 거예요. 예수님은 내가 죽인 거예요.  

두 번째 반응은 우리가 어찌 할꼬?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어찌 할꼬?”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적인 어찌 할꼬?가 있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수 없이 많은 문제에 부딪칩니다. 그런데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 때는 발을 동동 구릅니다. 안절부절합니다. 초조해합니다. 얼굴색이 변합니다. 탄식을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육적인 어찌 할꼬?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인 어찌 할꼬?입니다. 이것은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생기는 감정입니다. 유다의 12대 왕인 웃시야가 죽던 해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순간 이사야의 입에서 터저 나온 말이 이것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6:5)라고 합니다. 이것이 영적 어찌 할꼬?’입니다. 영적인 탄식입니다.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지금부터 2천 년 전에는 투명 그물이 없었습니다. 그물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래서 낮에 고기를 잡으면 고기들이 그물을 보고 다 도망갔습니다. 낮에 고기를 잡으면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밤에 고기를 잡았습니다. 아침입니다. 그물이 다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낮에 그물을 던지라는 것입니다. 보나마나 잡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던집니다. 그랬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다. 그때 베드로는 생각합니다. ‘바다 속을 지배하시는 이 분을 누굴까?’ 하나님 외에는 없었습니다. 이 생각이 들자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5:8)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어찌 할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영적 어찌 할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이런 탄식과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빌립보 감옥에 지진이 났습니다. 감옥의 문이 열렸습니다. 간수가 자다가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고 소리 지릅니다. 그때 간수가 엎드려 이렇게 소리 지릅니다. “선생님들!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제가 기도할 때 가장 많이 생각이 나는 것은 죄입니다. 연약한 인간성입니다. 못난 인간성입니다. 어떤 때는 무릎을 꿇으면 제가 지은 죄가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그러면 탄식이 나옵니다. 우리는 주님 앞 설 때 지은 죄 때문에 어찌 할꼬?하는 영적인 탄식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죄 때문에 탄식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돈이 없으면 탄식합니다. 직장 때문에 탄식합니다. 그런데 정말 탄식해야 할 문제는 죄입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탄식해야 합니다.  

세 번째 반응은 받아들임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받다라는 말이 헬라어로 아포데코마이’(ἀποδέχομαι)입니다. 아포데코마이는 환영하다’, ‘(호의적으로)받아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베드로의 말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으세요. 말씀을 환영하세요.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집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다 듣고자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10:33).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을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다고 했습니다(살전2:13). 은혜는 말씀을 기쁨으로 받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며 주변 분들에게 교회에 좀 나오세요.”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대답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 내가 죄가 너무 많아 교회에 못나가요.” 저는 이런 분들의 태도가 아주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이름 앞에서 자신의 죄를 생각한 것입니다. 정말 좋은 태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탄식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탄식에서 끝나면 안됩니다. 가인은 동생을 죽인 것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판 후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찔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찌 할꼬? 탄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찔림에서 끝나면 안됩니다. 탄식에서 끝나면 안됩니다. 반드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멈추면 안됩니다.  

2. 회개 세례 죄사함  

그러면 유대인들은 베드로의 어떤 권면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을까요? 베드로의 권면은 세 가지입니다.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첫 번째가 회개입니다. 베드로는 회개를 첫 번째로 꼽고 있습니다. 왜 베드로는 회개를 강조할까요? 회개는 기독교 최고의 메시지입니다. 세례 요한의 첫 번째 메시지가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가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종교는 참선종교입니다 또는 명상종교입니다. 참선이라는 선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 선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수행을 통해 고요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명상이라는 것은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는 대부분 명상의 종교입니다. 참선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명상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회개의 종교입니다. 회개는 뉘우칠 회()자에 고칠 개()자를 씁니다. 잘 못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이 회개입니다. 잘 못을 뉘우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까지 고치는 것입니다. 회개를 헬라어로는 메타노이아라고 합니다. 메타노이아는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 가고 있는 방향에서 180도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한 후에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그리고 마귀에게 걸어갔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마귀를 등지고 하나님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만이 우리가 사는 방법입니다. 그래야 은혜가 있습니다. 회개 없는 은혜는 없습니다. 회개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회개 없는 하나님 나라는 없습니다. 회개 없는 성령의 임재는 없습니다. 회개 없는 은사는 없습니다. 기독교는 회개의 종교입니다. 회개는 기독교 최고의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마귀를 등지고 하나님께 똑바로 나아갑시다.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폴 존슨의 <코뿔소 이론>(The Rhino Principle)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존슨은 코뿔소를 노아 홍수 이전부터 존재했던 네발 달린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육중한 갑옷을 몸에 두르고도 살아남은 존재로 규정했습니다. 코뿔소는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일찌감치 사라졌어야 할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생태계를 해쳐나갈 수 있는 야수 같은 공격성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코뿔소는 빙하기를 관통하며 수천 년의 세월을 멀쩡히 살아남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존슨은 코뿔소의 우직 단순성에 주목했습니다. 코뿔소는 무엇이든 눈 앞에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돌격할지 말지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일단 돌격하면 온몸을 던집니다. 결과는 둘 중 하나입니다. 공격 대상이 납작해지거나 아주 멀리 도망가 버립니다. 그러면 코뿔소는 다시 풀을 뜯습니다. 코뿔소는 일단 목표를 정하면 전력을 다해 돌격하는 것입니다. 돌격할 때는 오직 돌격에만 몰두하는 특성이 코뿔소를 살렸다는 것입니다. 평소엔 느려 터진 코뿔소지만 위기를 맞아 돌격할 때 최고 속도는 시속 40를 웃돕니다. 최대 중량 3.5t을 넘는 생물체가 이 정도의 순간속도를 내는 것은 불가사의에 가깝습니다. 이런 기세 앞에서는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라 하더라도 짓뭉개지거나, 아니면 줄행랑을 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마귀냐?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코뿔소처럼 우직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두 번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원래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성부와 성령의 이름을 생략했습니다. 왜 베드로는 <예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말하고 있을까요? 세례는 목사가 물로 씻는 예식입니다. 하지만 효력은 목사나 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효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있습니다. 물은 외적인 표입니다. 죄를 씨는 것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례의 효과는 예수님의 피에 있습니다.  

학창 시절에 교회에서 친구들이 세례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례가 끝나면 친구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내 머리에 물을 흠뻑 부었다는 것입니다. 앞 사람에게는 조금 뿌렸는데 자기에는 많이 뿌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몸이 다 젖었다는 거예요. 물의 양에 감격하는 거예요. 물의 양을 자랑해요. 하지만 물의 적고 많음은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기분일 뿐입니다. 물은 외적인 상징일 뿐입니다. 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례 목사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짜는 예수님의 피입니다. 능력은 예수님의 피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습니다. 효력은 예수 이름에 있습니다.  

셋째, 죄사함입니다. 죄사함은 죄의 용서입니다. 복음은 회개와 죄사함이라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회개와 죄사함은 신앙생활 시작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계속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계속 죄사함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생활에 회개와 죄사함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회개 없는 신앙 생활합니다. 이것이 오늘 교회의 비극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회개와 죄사함이 없는 가짜 크리스천이 크리스천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없습니다. 그래서 능력이 없습니다. 회개합시다. 그리고 죄사함받읍시다. 그래서 능력있는 그리스도인 됩시다.  

3. 성령의 선물  

회개와 죄사함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성령의 선물을 받습니다. 성령의 선물이라는 말은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내 앞에 놓여 있는 죄라는 장애물을 제거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여러분! 회개합시다. 그래서 죄사함을 받읍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선물을 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성령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살아야 인생을 인생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살아야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열매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 주일학교에 슬러시 기계가 있습니다. 교회 공사할 때 아래층 학원에 빌려줬습니다. 그런데 교회 공사를 하다 보니 물건이 여기 저기 섞여 버려서 슬러시 기계에 바르는 구리스가 보이지 않는 거예요. 슬러시 기계에만 바르는 먹을 수 있는 구리스가 있습니다. 이 구리스를 발라야 기계가 부드럽게 돌아갑니다. 학원 선생님에게 혹시 구리스를 못 찾으면 들기름을 발라 보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슬러시에 기름이 뜨지 않을까요?”라고 해요. 냄새도 나지 않을까요?”라고 해요. 맞는 말 같아요. 그래서 꼭 찾아서 드린다고 했습니다. 구리스를 찾아 갔다 주었습니다. 사무실에서 앉아 있는데 학원 선생님이 급하게 뛰어 올라와요. “목사님! 슬러시 기계가 난리가 났어요.” 그래서 따라 내려갔습니다. 문제를 해결해주고 기계를 다시 돌렸어요. 그랬더니 뻐어억 뻐어억 소리가 나는 거예요. 기계를 얼른 껐습니다. 구리스를 바르지 않았을 때 나는 소리입니다. 구리스를 발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발랐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돌렸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뻐어억 소리가 나는 거예요. 기계가 고장이 날까 싶어 빨리 껐습니다. 그리고 열어봤더니 구리스가 아주 조금 발라져 있어요. 그래서 제가 구리스를 조금 더 발랐습니다. 그리고 기계를 다시 돌렸습니다. 그랬더니 소리가 나지 않아요. 부드럽게 돌아가는 거예요. 모든 기계가 기름을 바르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습니다. 기름 없이 돌아가지 않아요. 돌아가더라도 금방 망가집니다. 삐걱거립니다. 기름 없이 돌아가는 기계는 없어요. 기름 없이 돌아가는 기계는 금방 망가집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기름 없이 신앙생활하면 삐걱 거려요. 성경은 성령을 기름에 비유할 때가 있습니다. 성령의 기름이 있어야 우리의 삶이 부드럽게 돌아갑니다. 그래야 고장이 나지 않아요. 성령의 기름이 없으면 삐거덕 거려요. 성령의 기름이 있어야 우리 인생이 제대로 돌아가요. 오늘날 크리스천들은 신앙에 능력이 없어요.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에 힘이 없어요. 왜 그럴까요? 대부분의 크리스천이 성령을 잘 모르고 있어요. 성령의 체험이 없어요.  

15-6년 전에 시중에 유사휘발유가 유통된 적이 있습니다. 가격이 아주 저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애용했습니다. 하지만 법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차에 좋지 않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용을 꺼려했습니다. 그러다가 합법화 되었습니다. 주유소까지 생겼습니다. 저도 몇 번 사용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운전을 하고 가는데 차의 온도계가 빨간색까지 올라갔어요. “무슨 일이지?” 차를 세워 놓고 물을 보충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운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똑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정비소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라디에이터의 물과 엔진 오일이 섞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물을 보충해도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이야기하는 중에 유사휘발유를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기사분이 유사휘발유 쓰지 말라는 거예요. 고장의 원인이 된다는 거예요. 가짜 휘발유를 넣은 차는 엔진이 제대로 연소를 하지 않아서 출력이 저하된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피스톤과 밸브같이 중요한 부품이 손상되고, 연비의 저하를 가져오며 이는 엔진 성능에 악영향을 미쳐 자동차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연소과정을 거치지 않아 이로 인한 배출 가스는 환경오염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사람들이 영혼에 가짜 기름을 사용하고 있어요. 가짜 기름을 진짜로 착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세상에서 기름을 충전해요. 하지만 우리는 진짜 기름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의 진짜 기름은 성령입니다. 성령 받아야 사람은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 받아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성령 받아야 그리스도인답게 살 있습니다. 여러분! 회개합시다. 죄사함 받읍시다. 그래서 성령을 선물로 받읍시다. 그때 우리는 우리 인생을 인생답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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