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사모함, 부활의 영광 그리고 평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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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태복음28:1~10
주일오전예배 | 2018-04-01
설교자 : 서요한 목사

미국의 한 대학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수업이 끝나자 교수는 학생들에게 다같이 즐길 놀이를 하면서 호흡을 맞추자고 제안했습니다. 한 여학생이 교탁 앞에 나서자 교수는 칠판에 절친한 사람 20명의 이름을 적으라고 했습니다. 여학생은 가족 친척 이웃 친구의 이름을 적었습니다. 이어서 교수는 여학생에게 중요하지 않은 한 사람의 이름을 지우라고 했습니다. 여학생은 바로 이웃의 이름을 지웠습니다. 교수는 다시 한 사람을 더 지우라고 하였습니다. 여학생은 회사동료를 지웠습니다. 이런 식으로 중요하지 않은 순서대로 이름을 하나씩 지워갔습니다. 이제 칠판에는 부모님과 남편 그리고 아이 네 사람만 남았습니다.  

교실은 아주 조용해졌습니다. 학생들이 교수를 보면서 이게 무슨 놀이냐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때 교수는 조용히 다시 하나를 더 지우라고 했습니다. 여학생은 쭈뼛쭈뼛하면서 아주 어렵게 결정했습니다. 여학생은 부모님의 이름을 지웠습니다. 이어서 교수는 다시 또 하나를 지우라고 했습니다. 여학생은 놀랐습니다. 아주 느리지만 각오가 선듯이 아이의 이름을 지웠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고통스럽게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교수는 여학생이 안정을 되찾자 가장 가까운 사람은 부모와 아이가 아니냐면서 부모는 나를 키워주셨고 아이는 스스로 낳았으나, 남편은 다시 택할 수도 있잖느냐?”면서 왜 남편을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학생들이 조용히 여학생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여학생은 차분하고 천천히 말하기를 시간이 흐르면 부모는 나를 먼저 떠날 것이며 아이도 커서 언젠가는 나를 떠날 테지만 일생을 나와 같이 지낼 사람은 남편뿐이라는 것입니다. 삶은 양파같이 한 꺼풀씩 벗기다보면 마지막에는 코끝이 찡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을 끝까지 아끼고 사랑하세요. 특히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더 잘하세요. 버리지 마세요. 사람에게는 함께 할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마태는 예수님을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결코 떠나지 않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 모두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곁을 끝까지 지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러 명의 여인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여인들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부활의 경이로움을 첫 번째로 경험하는 장면입니다.

 

1. 사모함  

안식 후 첫날 새벽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보려고 갔습니다.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라고 했습니다.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간 여인들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사모함입니다. 그것도 아주 간절한 사모함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여인들의 간절한 사모함은 그들의 행동에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먼저 두 여인은 캄캄할 때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마가복음 16:2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라고 했습니다. 마가는 여인들이 여명이 밝아올 때 무덤으로 간 것처럼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 20:1에는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종합해볼 때 여인들은 아직 캄캄할 때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온 수많은 남자들이 곳곳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숙박할 수 있는 인원이 15만 명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27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세계 각지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여기저기에서 자고 있습니다. 치안이 불안한 때이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새벽에 무슨 일을 만날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여인들은 캄캄한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사모함이라는 말 외에는 캄캄한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의 마음을 설명할 다른 말이 없습니다.  

또 여인들은 무덤의 돌문을 옮겨줄 사람이 없었는데도 무덤으로 갔습니다. 마가복음 16:3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무덤의 돌문을 옮겨줄 사람이 없었음에도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갔습니다. 여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도 무작정 무덤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여인들의 사모함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 여인들은 로마 병정들이 무덤을 굳게 지키고 있었음에도 무덤으로 갔습니다. 마태복음 27:64-66절에 무덤을 굳게 지킨다는 말에 세 번 나옵니다. 굳게 지키다는 말이 헬라어로 아스팔리조(ἀσφλαλίζω)입니다. 아스팔리조는 오늘날 아스팔트라는 말의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경비가 얼마나 삼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틀림없이 여인들은 군병들이 무덤을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여인들이 사정을 해도 군인들은 무덤의 돌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열지 못하도록 인봉(27:66)해놓았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은 무덤에 가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인들은 캄캄한 새벽에 무작정 무덤으로 갔습니다. 여인들의 사모함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인들의 사모함은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여인들은 회심한 후부터 한결같이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누가복음8:1-3> 1.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여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멀리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27:55-56>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자기 무덤에 장사할 때도 여인들은 무덤을 보고 있었습니다.  

27: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여인들은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그것도 한결같이 사모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사모했습니다. 그 많던 사람들이 예수님 곁을 하나 둘씩 떠나는 순간에도 그 사모함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은 사모함과 성실함으로 예수님을 한결같이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여인들의 마음은 시냇물을 찾는 사슴과 같았습니다.  

<시편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시편 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2. 영광 그리고 두려움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했던 두 여인은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을 체험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부활의 순간을 아주 자세하게 증언합니다. 첫째, 큰 지진이 났습니다. 둘째, 천사가 내려왔습니다. 셋째, 천사가 무덤의 돌을 굴려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의하면 여인들이 도착한 무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돌이 굴려져 있었습니다(16:4, 24:2). 넷째, 천사가 돌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가 즉시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섯째, 천사의 모습입니다.  

천사의 형상은 번개 같았습니다. 옷은 눈처럼 흰색이었습니다. 여섯째, 부활에 대한 천사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은 인류 역사에 단 한번 밖에 없는 사건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빼놓고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 사도들입니다. 그런 사도들도 부활의 순간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두 여인은 부활의 영광을 체험합니다. 예수님을 찾고 또 찾은 여인들에게 주님은 부활의 영광으로 답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한 여인들에게 주신 특별한 은총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세요. 간절히 사모하는 자에게 주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모하는 마음에 비례합니다.  

그런데 여인들은 부활의 영광을 경험했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얼마나 두려웠는지 무덤을 지키던 군병들은 무서워하며 떨며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부활의 순간에 무서웠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지진 때문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큰 지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순간입니다. 얼마나 큰 지진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무덤 주위만 흔들렸는지 아니면 예루살렘 전체가 흔들렸는지 또 유대 땅 전체가 흔들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성경은 부활의 순간에 큰 지진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몇 달 전입니다. 제가 기도하려고 교회에 왔습니다. 저 뒤에서 두 번째 의자에 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의자가 흔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설마 지진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계속 흔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의자 위에 누웠습니다. 지진이 온 몸으로 느껴졌습니다. 정말 지진이 맞았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재난안전본부에서 천안 지진 문자가 왔습니다. ‘큰 지진이 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는 큰 지진이 있었습니다. 지진으로 사람들은 공포감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지진은 꼭 두려워할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시기 위해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지진이 있었습니다(19:18). 여리고성이 무너질 때도 지진이 있었습니다(6:20).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여호수아 시대에 여리고에 6.0의 지진이 있었다고 합니다. 라합의 집은 성벽 위나 아니면 성벽에 딸려 있었을 것입니다. 지진이 나면 아주 취약한 지역입니다. 그런데 라합의 집은 안전했습니다. 신비한 일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지진이 있었습니다(16:26). 지진이 감옥의 문을 열었습니다. 지진이 바울의 몸의 쇠사슬을 풀었습니다. 참으로 신비한 일입니다. 지진 때문에 간수와 그 가족이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도 지진이 있었습니다(27:54). 사도들이 모여 기도를 마치자 지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리가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다(4:31).  

<사도행전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성령이 임하실 때 지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시에도 지진이 있을 것입니다(24:7, 11:13,19). 여러분! 틀림없이 지진은 두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지진은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림하실 때 지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새롭게 하실 때 지진이 있었습니다. 부활시에 있었던 지진은 이 땅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울림입니다. 지진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징표입니다. 그래서 지진의 한편은 두려움이지만 다른 한편은 소망입니다. 따라서 지진은 꼭 두려워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 성도에게는 지진도 은혜입니다.  

둘째, 천사의 모습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천사의 형상이 번개 같았습니다. 옷은 눈처럼 흰색이었습니다.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사람들은 천사들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천사는 두려워할 존재가 아닙니다. 천사는 구원받은 자를 섬기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시편103:21>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히브리서1: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 외에 어떤 영적인 존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강하고 담대하세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셋째, 천사가 한 일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천사는 무덤의 돌문을 굴려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가 무덤의 돌을 굴려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돌 위에 앉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돌을 굴린 후 바로 하늘로 올라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덤 입구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오시도록 하기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시 공간을 초월하시는 존재가 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오실 때 벽을 뚫고 오셨습니다. 천사가 무덤의 돌문을 굴려버린 이유는 여인들의 믿음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안장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돌문이 닫히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돌문이 열렸습니다.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도 없습니다. 이제 무덤은 빈 무덤이 되었습니다. 천사가 돌 위에 앉아 있었던 이유는 내가 이 돌을 굴려버렸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천사들이 돌문을 굴린 후에 바로 하늘로 올라가지 않은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을 여인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천사는 우리를 섬기기 위해 보내진 존재입니다.  

히브리서12:26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늘과 땅은 지진이 나야 새 하늘과 새 땅이 됩니다. 사람도 지진이 나야 새로워집니다. 우리 영혼에 지진이 나야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상속받습니다. 여러분! 지진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는 결코 지진이 나지 않는 천국을 상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12:28).

 

3. 평안함과 소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마음은 평안함과 소망입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첫 번째로 한 말이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을 보여줍니다.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천사들의 격려와 증거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은 여전히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이제 큰 기쁨이 생겼습니다.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여인들은 무섭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무서움과 기쁨이 섞여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거룩한 두려움에는 기쁨이 따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온전한 상태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온전한 기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인들의 두려움을 완전히 제거해주십니다.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예수님은 여인들이 가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들을 만나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 평안하냐?’입니다. ‘평안하냐?’는 말은 헬라어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식으로 표현하면 평안할지어다.’입니다. 평안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은 여인들을 만나자 마자 평안을 선포하십니다. 유대인들이 무서워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도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 평안입니다. 그런데 평안의 문자적인 뜻은 기쁨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에는 평안이 있습니다. 기쁨이 없는 평안은 진짜 평안이 아닙니다. 평안이 없는 기쁨은 진짜 기쁨이 아닙니다. 기쁨에 평안이 없으면 씁쓸한 기쁨입니다. 이상한 기쁨입니다. 평안에 기쁨이 없으면 씁쓸한 평안입니다. 이상한 평안입니다. 평안과 기쁨은 함께 있어야 온전한 평안이 되고 온전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평안을 선포하신 주님은 여인들의 두려움을 제거하십니다.  

<10절 상반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그리고 소망을 주십니다.  

<10절 하반절>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지도 못했습니다. 심지어 배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르십니다. 거기서 다시 만나자는 것입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또 갈릴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난 곳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역의 터전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수 없이 많은 에피소드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에게 가슴이 벅찬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만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남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평안함합니다. 그리고 소망입니다.  

신시아 라일런트의 그리운 메이 아줌마라는 책이 있습니다. 서머라는 여자 아이는 부모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서머는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늘 주눅이 들어있었습니다. 서머가 메이 아줌마와 오브 아저씨를 만난 것은 6살 때입니다. 불쌍한 서머를 메이 아줌마와 오브 아저씨는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하지만 메이 아줌마네 집은 녹슨 트레일러이었습니다. 게다가 두 사람 다 서머를 맡기에는 힘겨워 보일 정도로 가난하고 나이도 많고 몸도 건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메이와 오브의 깊고 넉넉한 사랑으로 서머는 마침내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자라게 됩니다. 서머는 가난하지만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행복도 잠시 서머가 12살이 되던 어느날 메이 아줌마는 갑자스럽게 죽습니다. 오브 아저씨와 서머는 너무 큰 상실감에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서머는 아줌마가 살아 있을 때 남긴 글을 읽게 됩니다.  

한때는 하나님이 왜 너를 이제야 주셨을까 의아해하기도 했지.

왜 이렇게 다 늙어서야 너를 만났을까 하고...

나는 집안이 좁을 만큼 뚱뚱한 데다 당뇨병으로 고생하고 있고,

아저씨는 해골처럼 바싹 마르고 관절염까지 앓고 있으니 말이야.

3, 40년 전에 너를 만났다면 쉽게 해 줄 수 있었던 일들도 이제는 해주지 못하잖니.

하지만, 어느 날 답이 떠오르더구나.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간절해지기를 기다리신 거야.

아저씨와 내가 젊고 튼튼했으면, 넌 아마도 네가 우리한테

얼마나 필요한 아이인지 깨닫지 못했을 테지.

넌 우리가 너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늙어서 너한테 많이 의지하고,

그런 우리를 보면서 너도 마음 편하게 우리한테 의지할 수 있게 해 주신 거야.

우리는 모두 가족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었어.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꼭 붙잡았고 하나가 되었지. 그렇게 단순한 거였어."  

여러분! 우리 모두는 틀림없이 무언가를 이루고 싶고, 하고 싶고, 갖고 싶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이루지도 갖지도 하지도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간절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없이 기도를 하지만 응답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을 모른 체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간절함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픈 시대가 아닙니다. 마음이 허전한 시대입니다. 영혼이 허한 시대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가져야 할 마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모함입니다. 사모함에는 반드시 응답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모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합시다. 주님의 응답을 사모합시다. 주님의 역사를 사모합시다.  

<잠언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시편 34: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예레미야 29: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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