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어린 나귀를 타고 가는 왕의 길

조회수 : 439회

본문 : 요한복음12:12~19
주일오전예배 | 2018-03-25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쟈크 엘룰의 뒤틀려진 기독교라는 책이 있습니다. 쟈크 엘룰은 20세기 중반에 사회학자, 신학자, 철학자로 활동한 프랑스의 사상가입니다. 쟈크 엘룰은 이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이 책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문제는, 어떻게 기독교 사회와 교회의 발달이 성경본문의 생각과 다른, 즉 율법과 선지자와 예수와 바울의 생각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하나의 사회 · 문화 · 문명을 탄생시켰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모순은 한 가지 면에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그러했다.  

기독교는 성경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바람직한 기독교는 성경적인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나온 기독교가 성경의 정신과는 상관없는 기독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쟈크 엘룰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된 기독교는 반인간적이어서 우리들로서는 쉽게 용납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는 상관없는 기독교를 만들어서 인간이 쉽게 호의적으로 용납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치장을 하였다. 교회는 스스로 자축하고 자랑하고 있으나 왜곡된 기독교에 대한 책임은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성경 말씀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아주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기독교는 사람들이 성경을 받아들이기 쉽게 치장을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에 100%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한 주간 동안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며 우리 신앙을 다시 한 번 점검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이 시간 함께 읽은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에 대한 무리들의 요청, 그리고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증거자들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1. 무리들의 요청  

본문의 시간적 배경은 유대력으로 AD 3019일 종려주일입니다. 지금부터 꼭 1988년 전의 오늘입니다. 인류 최초의 종려주일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종려주일이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5일 후, 114일은 유월절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와 있습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이때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호로 맞이했습니다.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님에 대한 무리들의 환호를 셋으로 나누어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무리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뽕나무도 있고 감람나무도 있는데 왜 종려나무일까요? 종려나무는 부활과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종려나무가 헬라어로 포이닉스(φοίνιξ 또는 φοινιξ)입니다. 영어로 불사조라는 말이 피닉스입니다. 피닉스(불사조)는 헬라어 포이닉스(종려나무)에서 왔습니다. 종려나무의 학명은 ‘Phoenix dactylifera’입니다. 학명에 불멸을 뜻하는 피닉스라는 말이 들어갑니다. 종려나무에 포이닉스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가 있습니다. 종려나무는 다 자른 후에 그루터기를 불로 태워도 다시 싹이 납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종려나무는 부활과 승리를 상징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승리의 주이십니다. 따라서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것은 매우 합당한 일입니다. 사도 요한은 장차 나타날 새 예루살렘 성에서 흰 옷을 입은 무리들이 하나님과 어린 양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있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따라서 예수님을 향한 무리들의 행동은 아주 신앙적인 것입니다. 칭찬받을 만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속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종려나무는 로마 시대에 유대인들의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나무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무궁화에 견줄 수 있는 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고 지고 또 피는 무궁화.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불사조처럼 이스라엘을 다시 부활시키기를 바랐습니다. 혁명을 원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향한 유대인들의 요청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리들의 마음은 돌변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순식간에 돌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마음이 수시로 바뀌시는 것은 아닙니까?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마음이 한결 같기를 바랍니다.  

둘째, 무리들은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히브리어로 호쉬아 나입니다. 히브리어 호쉬아 나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 호산나’(ὡσαννά)입니다. 호쉬아는 호세아나 여호수아라는 이름과 같은 어원에서 온 말입니다. ‘호세아여호수아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지금’, ‘이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구하옵나니,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호세아와 여호수아의 신약적인 이름이 예수입니다. 호세아, 여호수아, 예수는 모두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라고 외친 것은 아주 놀라운 신앙의 고백입니다. 하지만 무리들의 외침에는 세상적인 욕망과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자주독립을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처럼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길 바랐습니다. 민족의 자주독립, 해방, 광복. 이것이 호산나라는 말에 들어 있는 무리들의 요청입니다. 하지만 자기들의 뜻하는 대로 되지 않자 무리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여러분! 세상 일이 여러분들의 뜻대로 되지 않아도 여러분의 마음에서 예수님을 죽이지 마세요. 조금 더 기다리세요. 조금 더 가세요. 예수님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알라딘의 램프의 요정이 아닙니다.  

셋째, 무리들은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중에 자신이 시온의 왕이심을 암암리에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님께서 시온의 왕이심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참 임금이심을 세상에 공포하신 날입니다. 이것이 종려주일의 의미입니다. ‘주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으로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십니다. 찬탈한 왕위가 아닙니다. 쿠데타를 일으켜 빼앗은 왕위가 아닙니다. 오리지널 왕이십니다. 따라서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 왕이라는 고백은 매우 합당한 것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리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만들어주신 떡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저는 종종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이 되도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뿐일까요? 대부분이 그래요. 오늘날 가장 시급한 문제가 먹는 거예요. 예수님 시대에도 먹는 문제가 가장 시급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었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께 바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자주 독립입니다. 광복, 해방, 민족 혁명입니다. 그리고 먹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십니까? 유대인들처럼 세상적인 것을 구하십니까? ,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저도 세상적인 것을 주님께 구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요청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은 영혼의 자주독립입니다. 영혼의 혁명입니다. 영혼의 광복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양식입니다. 여러분! 먼저 영혼의 자유를 구하세요. 영혼의 떡을 구하세요. 영혼의 충만한 은혜를 구하세요. 그 속에 육신의 자유와 육신의 양식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영적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속에 주님이 일으키시는 영혼의 혁명이 있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의 대답  

두 번째로 무리들의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께 민족의 혁명과 먹을 것을 요청했습니다. 무리들의 요청에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십니다. 이것은 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무리들이 생각하는 예수님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예수님이 다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회와 예수님이 생각하는 교회가 다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생각하는 예수님은 예수님이 생각하는 예수님과 같은 예수님이십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과 일치되길 바랍니다.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왕은 말을 타야 합니다. 그것도 최고의 명마를 타야 합니다. 왕의 신분에는 말이 어울립니다. 왕의 신분에는 나귀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나귀는 봇짐장수에게 어울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것도 나귀의 새끼를 타셨습니다. 얼마나 우스꽝스럽습니까? 요즘 말로 말하면 벤츠나 롤스로이스 같은 고급차가 아니라 아주 작은 티코 같은 소형차를 타신 것입니다. 대통령이 벤츠가 아니라 티고에서 내린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안 어울려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왕의 카퍼레이드에 티코를 타신 거예요.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왕의 모습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길은 성경에 정해져 있었습니다.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철저하게 성경에 묶으셨습니다. 여기 보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휴리스코(ερισκω)입니다. 휴리스코는 발견하다 찾아내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휴리스코는 무엇을 찾는 행위를 한 후에 찾아냈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나귀를 보신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시켜 나귀를 가져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자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말을 타고 가는 정복자의 길이 아닙니다. 혁명가의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길은 나귀를 타고 가시는 겸손과 온유의 길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길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말하는 믿음의 길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길을 가세요.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3. 증거자  

그러면 무리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환호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증거자들 때문입니다.  

<17-18>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예수님께서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시는 모든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사로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증거자가 됐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증거자들의 증거는 사탄의 음모를 무효케 했습니다. 사탄은 모든 사람을 예수님으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때로는 협박을 했습니다. 때로는 회유했습니다. 하지만 사탄의 계획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바리새인들은 온갖 술수를 다 동원해서 백성들을 그리스도에게 떼어놓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을 협박하고 회유했지만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결코 막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또 그리스도를 반대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증거자들은 사탄의 계획을 무효케 했습니다.  

오늘날 사탄은 교회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을 떼어내려고 합니다. 성도를 유혹합니다. 협박합니다. 회유합니다. 사탄은 교회에서 우리를 세상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잘 못된 길을 가게 합니다. 죄악의 길을 가게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교회를 향한 사탄의 음모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증거자가 되세요.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사탄의 음모를 무효케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사탄의 음모를 무효케 하는 주님의 증거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시온의 딸아!’라고 했습니다. 시온의 딸이라는 말은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여기에 시온의 딸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무리들이 당하는 고통과 아픔을 공감하시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들의 환호와 찬양을 거절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통 중에 외치는 우리의 부르짖음을 받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쟈크 엘룰은 뒤틀려진 기독교라는 책의 결론을 이렇게 맺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계시며 세계사의 한 부분에 우뚝 솟은 십자가는 제거할 수 없다. 그래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래도 성령은 은밀히, 무한히 인내로 활동을 하신다. 교회는 끊임없이 태어나고 다시 태어난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그래도 이 부서지고, 찢기고, 거짓되고, 배반적인 교회는 여전히 존재한다. 교회가 존재하되 그 교회는 제도나 조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인 참된 교회로서 존재한다. 이 복음, 이 계시는 비록 그것들이 배반당하고 망신당하며, 독점되고 왜곡되고 곡해되었어도, 여전히 유일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의 계시로서 존재하며 진리 안에서 계속 전달되고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참된 것으로 인정하는 삶을 계속 고무시키는 것이다.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음모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사탄의 유혹이 있습니다. 또 우리들의 믿음이 온전치 않습니다. 세상적입니다. 정욕적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우리 슬픔을 통감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시고 왕의 길을 가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겸손하게 주님을 따라갑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야할 길입니다.

이전글 사모함, 부활의 영광 그리고 평안함
다음글 바람처럼 불처럼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