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계정
코멘트 작성하려면 SNS계정으로 로그인해야 합니다.
2 == 2 ok!
할렐루야! 오늘은 복된 주일입니다. 오늘, 이 날, 일요일을 우리는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주일은 ‘주의 날’(the Lord’s day)의 줄임말입니다. ‘주의 날’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 모두 네 번 나옵니다. 네 번 중에 세 번은 마지막 심판의 날입니다(살전5:2, 살후2:2, 벧후3:10). 나머지 한 번만 주일을 가리킵니다(계1:10). 따라서 주일을 의미하는 주의 날이라는 말이 신약성경에 딱 한 번 나오는 셈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를까요?
신약 성경에 주일을 지칭하는 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안식 후 첫날’이라는 말입니다. ‘안식 후 첫날’이라는 말은 신약 성경에 모두 6회 나옵니다(마28:1, 막16:2, 막16:9, 눅24:1, 요20:1 요20:19). 이 말은 예수님의 부활이 언제 있었는지 ‘날’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생명의 주인이 되신 날이라 주일이라고 합니다. 주일은 예수님이 주인이 되시는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무엇일까요? 사랑에 대한 기독교적 정의가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11장을 믿음장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의 정의와 믿음의 영웅들의 행적이 히브리서 11장에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은 <성령강림장>이라고 합니다. 2장 1절부터 36절까지는 성령의 오심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37절부터 47절까지는 교회의 탄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 강림 후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행전 2장은 <교회생일장>이기도 합니다. 오순절은 성령강림절입니다. 동시에 교회의 생일입니다.
그런데 오순절이 주일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강림도 주일입니다. 교회 탄생도 주일입니다. 부활도 주일입니다. 성령은 주님 보내신 영이십니다. 주님은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주일은 주님이 주인이신 날입니다. 이 시간 먼저 오순절과 주일의 연관성을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의 성령강림이 어떻게 있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오순날이 이미 이르매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지 꼭 50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승천하신지는 10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습니다.
<1절>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오순절은 다섯 오(五)에 열 순(旬)자를 써서 열 번이 다섯 번이 되는 날에 지키는 절기입니다. 오순절은 헬라어로 펜테코스토스입니다. 펜테코스토스는 ‘50번째, 50번’이라는 뜻입니다. 오순절은 50일째 되는 날에 지키는 절기입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계산해서 50일째일까요? 그것은 초실절입니다. 초실절은 곡식 1단을 베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입니다. 유대인들은 첫 번째 곡식단을 먼저 하나님께 드린 후에 추수한 곡식을 먹었습니다. 초실절은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절기입니다. 초실절은 무교절(1월 15~21일) 기간 중에 있는 안식일 다음날입니다. 무교절 속의 안식일 다음 날부터 세어서 일곱 번의 안식일이 지난 바로 다음 날이 오순절입니다. 즉 초실절부터 50일째 되는 날이 오순절입니다. 보통 오순절을 유월절부터 계수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제가 시중에 나온 책들을 여러 권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에 올라온 자료도 확인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거의 95프로 이상이 오순절을 유월절부터 계수했습니다. 그러면 오순절이 금요일이 됩니다. 주일이 아닙니다. 전부 잘못된 계수입니다. 오순절은 초실절부터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주일입니다.
<레위기23:15-16> 15.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곡식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일곱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16. 일곱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하여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여기 ‘안식일 이튿날’이 초실절입니다. 이날부터 7주가 지난 다음날이 오순절입니다. 7곱하기 7은 49입니다. 일곱 번의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이기 때문에 당연히 오순절은 주일이 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죽으십니다. 안식일에는 무덤에 계십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초실절에 부활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15:20)가 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 후 첫 날인 주일에 부활하셨습니다. 성령님 또한 안식 후 첫날 주일에 강림하셨습니다. 따라서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리고 주일은 성령강림의 날입니다.
왜 성령께서 주일에 강림하셨을까요? 성령은 부활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날에 예배함으로 성령의 감동되기를 소원합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우리 안에 회복과 치료가 있습니다. 여러분! 주일에 성령에 감동되도록 애쓰셔야 합니다. 노력하셔야 합니다. 가만히 계시면 안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며 은혜를 사모하셔야 합니다. 그때 우리 영혼에 성령의 감동이 있습니다.
오순절은 하나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초실절이 되면 오순절을 손을 꼽아가며 기다립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라고 했습니다. ‘이미 이르매’라는 말은 헬라어로 쉼플레로오입니다. 쉼플레로오는 ‘가득 차게 하다, 완전히 채우다, 가득 차다, 때가 차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는 문자적으로 ‘오순절 날이 이미 완료되었을 때’라는 의미입니다. 오순절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이 다 지난 오후 늦은 시간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는 초실절부터 오순절까지 50일이라는 기간이 이제 꽉 찼다는 뜻입니다. 모든 날 수가 이제 다 채워졌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기다리던 때가 됐다는 뜻입니다. 레위기23:15-16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레위기23:15-16> 15.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곡식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일곱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16. 일곱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하여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15절에 ‘곡식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라고 했습니다. 곡식단을 가지고 온 날은 초실절입니다. 16절에는 ‘일곱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하여 오십일을 계수하여’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초실절이 되면 날짜를 세기 시작합니다. 1부터 50까지 수를 세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메르 세기(Omer-곡물의 양을 계산하는 성경의 단위)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수를 세라는 것은 그 날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제 아이가 생일이 가까이 오면 날짜를 셉니다. ‘엄마! 내 생일 이제 며칠 남았다’라며 남은 날을 셉니다. 자기 생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날에 맛있는 것을 먹습니다. 또 선물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 날이 좋습니다. 그런데 더 좋은 것은 그 날 먹는 것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다리며 10, 9, 8, 7, 6 … 카운트다운을 합니다. 유대인들은 초실절부터 오순절까지 하루하루를 셉니다. 수를 카운트 하며 그날을 기다립니다. 그 날의 목적은 그 날에 만날 하나님입니다. 그 날도 좋지만 그 날 만나는 하나님은 더 좋습니다. ‘그 날’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이미 이르매’라는 말은 손을 꼽아가며 이 모든 날을 다 채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일을 기다립시다. 하나님 만날 날을 기다립시다. 손을 꼽아가며 기다립시다. 주의 날에 주의 성전에서 만날 주님을 소망합시다. 주일이 소중합니다. 그런데 주일에 만나는 주님은 더 중요합니다. 예배가 소중합니다. 하지만 예배 중에 만나는 하나님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주일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예배가 있는 거예요. 주일을 사모하세요. 하나님을 사모하세요. 다윗은 성전에 올라가는 것을 사모했습니다.
<시편122: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한 곳’에 모였다고 했습니다. 여기 ‘한 곳’을 많은 성경학자들이 마가다락방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늘 예수님과 만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곳’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하마콤입니다. 하마콤은 ‘그 장소’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자기들끼리 통하는 ‘그 장소’가 있었습니다. 그 장소는 어디일까요? 그 장소는 성전입니다. 또 하마콤은 하나님이 오셔서 만나주시는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 곳’이 ‘성전이다’ 또는 ‘마가 다락방이다’라는 분쟁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곳은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만나주시는 곳이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만나주시던 장소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바로 그곳에 모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곳에서 기도를 채웠습니다. 이곳에서 말씀을 채웠습니다. 이곳에서 시간을 채웠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의 빈자리도 채웠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채워졌습니다. 바로 그 때 성령강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등대교회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곳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한 곳’ ‘그곳’이 등대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곳에 기도로 채웁시다. 이곳을 말씀으로 채웁시다. 하나님 앞에 우리 시간을 채웁시다. 우리 믿음을 채웁시다. 우리 인내를 채웁시다. 우리 헌신을 채웁시다. 우리 충성을 채웁시다. 우리 인격을 채웁시다. 우리 사랑을 채웁시다. 우리의 눈물 아픔 고통 상처를 이곳에 채웁시다. 이 모든 것이 다 채워지는 날 주께서 우리에게 임하실 줄 믿습니다.
2. 바람처럼
오순절에 성령 강림은 바람처럼 불처럼 임하셨습니다. 왜 하필 바람과 불일까요? 성령께서 천둥처럼 임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번개, 비, 구름, 무지개, 안개 등 여러 가지 현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은 ‘바람처럼 불처럼’이였습니다.
<2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성령강림이 바람처럼 홀연히 임했습니다. ‘홀연히’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갑작스럽게’라는 뜻입니다. 성령 강림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께서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에 성령강림 예언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약속한 것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성령강림의 방법도 몰랐습니다. 성령강림의 양상도 몰랐습니다.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령강림은 돌연한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저 약속만 믿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홀연히 임하십니다. 재림도 홀연히 있을 것입니다(고전15:51). 재림의 약속이 있습니다. 구름타고 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사건을 예측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약속만 믿고 기다라는 것입니다. 재림은 허구가 아닙니다. 재림은 반드시 있습니다. 예수님은 홀연히 임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홀연히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는 밤이었습니다. 들판에 목자들이 있습니다. 천군과 천사들이 홀연히 찬양했습니다. 한 밤 중에 양을 지키던 목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홀연히 임합니다. 사도 바울도 은혜를 홀연히 경험합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 있을 때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바울은 이 때의 일을 회상하며 주님이 자신에게 홀연히 나타나셨다고 간증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혔습니다. 그들은 슬퍼하지도 않았습니다. 낙심하지도 않았습니다.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 밤 중에 찬송을 드렸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했습니다. 그때 홀연히(행16:26, 갑자기) 지진이 났습니다. 홀연히 옥터가 흔들렸습니다. 홀연히 옥문이 열렸습니다. 홀연히 그들을 묶은 쇠사슬이 풀러졌습니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때 누가 지진을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옥문이 열릴 것을 누가 상상했겠습니까? 쇠사슬이 벗겨질 것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은혜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 방법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 시와 그 때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은혜는 반드시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주님을 믿고 그 은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삶이 곤고하고 답답합니다. 변화되지 않습니다. 항상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합니다. 답답합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마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의 은혜는 반드시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도 홀연히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 마치 허공에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중단하지 마세요. 계속 기도하세요. 주님의 눈물 병에 우리의 기도의 눈물이 다 차는 순간 주님의 응답하심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날 것입니다.
성령이 바람처럼 임했습니다. 성령이 히브리어로 루하흐라고 합니다. 루하흐는 ‘영, 숨, 호흡, 바람, 생기’라는 뜻입니다.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때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령이라는 말은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생기가 있어야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창세기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흙’이라는 말은 ‘티끌’입니다. 사람은 티끌(먼지)로 만들어졌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생기가 없으면 먼지입니다. 하나님은 먼지 같은 존재에게 자신의 숨을 나누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제자들이 무서워 숨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벽을 뚫고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은 자신의 숨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의 완성이 오순절입니다. 오순절은 티끌 같은 존재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임한 사건입니다. 오순절은 하나님의 생기의 바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늘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하지만 바람은 아닙니다. 바람 소리도 아닙니다. 바람과 같은 소리입니다. 그것은 신비한 소리입니다. 영적인 소리입니다.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한 사람만 들은 것이 아닙니다. 120명 모두가 들은 것입니다. 환청이 아닙니다. 분명한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숨소리입니다. 하늘 호흡의 소리입니다. 하늘의 생기의 소리입니다. 이것이 오순절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생기였습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는 생기의 소리입니다.
에스겔 37장에 에스겔 골짜기에 바른 뼈들이 있었습니다. 언제 죽은지 모르는 뼈들입니다. 얼마나 말랐는지 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뼈들입니다. 부러지고 부서지고 소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인자야 생기를 대언하라” 에스겔이 생기를 대언했습니다. 그러자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생기가 들어갔을 때 죽은 영혼이 살아났습니다.
바람은 위에서 불어왔습니다. 바람이라는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부는 것입니다. 바람은 동에서 서로 붑니다. 북에서 남으로 붑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한쪽으로 몰아갑니다. 그런데 성령의 바람은 하늘로부터 불어왔습니다. 위에서 불어왔습니다. 출처가 하늘입니다. 성령의 바람은 제자들을 축복하기 위해서 부는 바람입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은 파괴적입니다. 나무를 부러뜨립니다. 때로 집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은 파괴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바람은 파괴적이지 않습니다. 집을 무너뜨리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몸을 날려버리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집을 가득하게 채워줬습니다. 모인 장소를 생기로 충만하게 했습니다. 하늘의 바람은 부족한 것을 채워줍니다. 이곳에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오길 소원합니다. 여러분 위에 하나님의 생기의 바람이 불어오길 축복합니다.
바람은 한 곳에서 불어 한 곳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바람은 잠시도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멈추는 순간 바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순절의 성령의 바람은 온 집안에 가득했습니다. 참으로 신비한 일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신비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됩니다. 바람이 가득한 방, 생기가 가득한 집이 되었습니다. 하늘의 바람을 경험해야 우리 삶이 생기로 충만합니다. 활력이 넘칩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람과 같습니다. 공기라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 미미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이었던 것 같습니다. 과학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공기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공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만져지지 않습니다.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기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얼마나 당돌해요. 하지만 얼마나 무식해요. 공기가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니요. 선생님께서 얼마나 기가 막히셨을까요? 그때 선생님이 예를 들은 것이 바람입니다. 공기가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치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움직이기 시작하면 살아 있는 존재가 됩니다. 공기 움직임이 가속화 되어보십시오. 아주 강력한 바람이 됩니다. 세상에 바람보다 센 것이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세상을 뒤집어 놓습니다. 이것이 바람의 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람과 같습니다. 성령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힘이 없어 보입니다.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없다고 말합니다. 성령을 무시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급하고 강한 바람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은 강력한 존재가 됩니다. 의욕이 생깁니다. 거룩한 열심이 솟아오릅니다. 강한 힘에 붙들립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여러분! 하늘의 바람을 경험하세요. 그래서 바람처럼 사세요.
여성은 참으로 약합니다. 이 세상에 여성처럼 약한 존재가 있을까요? 성적인 비하 발언은 아니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여성은 정말 작은 것에도 놀랍니다. 개미 한 마리에도 비명을 질러댑니다. 정말 여성처럼 약한 존재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성처럼 강한 존재도 없습니다. 제 아내와 연애할 때입니다. 얼마나 연약한지! 결혼했습니다. 왜 그렇게 약한지요? 정말 너무 약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았습니다. 엄마가 되었습니다. 아주 강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주 오래된 빌라에서 산 적이 있습니다. 교회 사택이었습니다. 바퀴벌레가 얼마나 많은지! 대낮에 거실에 누워 있으면 바퀴벌레가 옆으로 기어 다닙니다. 사람이 있어도 나와요. 얼마나 징그러운지 몰라요. 저는 정말 기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손바닥으로 잡더라고요.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저런 여자가 아닌데! 여자는 약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강합니다. 여성 안에 강력한 무언가가 생기나 봐요.
생기의 바람을 경험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약합니다. 정말 아무 무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바람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강합니다. 여러분! 성령의 바람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주일입니다. 주일은 부활의 날입니다. 주일은 성령강림의 날입니다. 그리고 주일은 교회의 생일날입니다. 주일은 생기의 날입니다. 주일은 생기의 날로 시작되었습니다. 주일은 하늘의 바람으로 시작됐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일에 왜 이곳에 있어야 할까요? 하나님의 생기가 이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하늘의 바람, 하늘의 생기를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매튜 헨리라는 주석가는 오순절이 우연하게도 안식 후 첫날과 겹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일을 더욱 귀하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정말 오순절이 우연히 안식 후 첫날과 겹쳤을까요? 그러면 우리가 주일에 받는 은혜가 어쩌다가 받는 은혜입니까? 주일의 은혜는 우연한 은혜가 아닙니다. 생기의 은혜는 어쩌다가 생긴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안식 후 첫 날에 자기를 찾는 백성들에게 자신의 생기를 나누어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이곳에 우리의 기도를 채웁시다. 이곳에 우리의 믿음을 채웁시다. 이곳에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충성을 채웁시다. 이것이 모두 채워지는 그날 주님은 바람처럼 우리 가운데 홀연히 임하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기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전글 | 바람처럼 불처럼② |
---|---|
다음글 |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
코멘트 작성하려면 SNS계정으로 로그인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