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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미국 북쪽 지방에서 사는 어떤 흑인 직장인 한 명이 먼 지방으로 출장을 갔습니다. 흑인은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주일 아침에 숙소 근처에 있는 교회를 갔습니다. 예배당 계단으로 올라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문 앞에서 안내를 맡은 백인이 이 흑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여기 들어오지 못합니다.” 흑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왜 들어가지 못합니까?” 그러자 백인이 대답합니다. “여기는 백인들만 모여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흑인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 흑인은 하는 수 없이 계단에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안에서 들려오는 찬송소리를 들으며 혼자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비몽사몽간에 흰 옷을 입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흑인의 어깨를 두드리시며 물으셨습니다. “너는 어째서 여기에 혼자 앉아 있느냐?” 흑인은 예수님의 옷을 붙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예배드리려고 이 교회에 왔는데 제가 얼굴이 검다고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여기 앉아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흑인의 어깨를 다시 두드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그 예배당에 못 들어갔느냐? 나도 그 예배당에 들어가지 못했단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가 최고로 발달한 선진국 중에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기회의 땅입니다. 그래서 가장 많은 나라 사람들이 섞여 사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자유 평등은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입니다. 민주주의가 최고로 발달한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이 짓밟히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2015년에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한 흑인교회에 백인 청년이 난입해 총기를 난사했습니다. 9명이 죽고 3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흑인을 혐오해서 저지른 테러입니다. 민주 자유 평등을 말한다면 흑인 백인 황인의 구분이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흑인 백인 황인이라는 말 자체가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교회는 영적인 곳입니다. 세상에 있는 차별이 교회에서만은 있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평등한 공동체입니다. 가장 평등해야 할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차별은 교회에서도 없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한 야고보의 명령을 항상 기억합시다. 그리고 이웃을 차별 없이 대합시다. 성도를 차별 없이 대합시다. 교회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한 곳입니다.
이 시간 본문을 중심으로 먼저 사도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선택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비뽑기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1.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먼저 사도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가룟 유다가 자기 자리를 이탈했습니다. 그 빈자리를 채울 필요가 생겼습니다. 야고보 사도처럼 순교를 했다면 채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사명을 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순교자가 아닙니다. 사명을 다하지도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배반을 했습니다. <12수>는 절름발이가 됐습니다. 12사도에 구멍이 나게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 빈자리를 채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새 사도가 되는 조건이 하나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제자들과 항상 함께 다니던 사람입니다. 22절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3년 동안 12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12제자만 함께한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주님과 함께 했습니다.
<마가복음4: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누가복음10: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제자들 외에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70인이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사도 자리를 채울 사람은 예수님 공생애 3년 동안 제자들과 항상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시종일관 제자들과 항상 함께 했던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의 유일한 조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조건이 너무 좋습니다. 사도의 자리를 채우는데 학벌을 보지 않았습니다. 재산을 보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지위를 보지 않았습니다. 항상 제자들과 함께 했던 사람들 중에 한 명을 뽑았습니다. 3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기쁜 일, 슬픈 일, 힘든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해야 할 일,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쓴 일, 단 일, 짜증스러운 일 등 별별 일들이 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일들을 제쳐두고 예수님과 12사도와 항상 함께 했습니다. 또 공적으로 기독공동체를 향한 여러 가지 오해가 있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향한 유대인들의 공격이 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미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유대공동체에서 쫓겨났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큰 손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따르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 동안 예수님과 사도들 곁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제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가룟 유다의 빈 자리를 채울 사람은 제자들과 항상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저는 이 조건이 화려한 스펙을 요구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어떤 차별이 존재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이 사도의 요건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실 때 조건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사회는 평등사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평등하지 않은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온갖 차별이 있습니다. 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모든 사람을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있는 자 없는 자, 높은 자 낮은 자, 배운 자 배우지 못한 자가 평등하게 함께 하는 것! 이것이 참다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라는 말은 주님의 통치와 인도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21절 하반절에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들어오시고 우리로부터 나가시고’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가운데 들어오시기도 하고 나가시기도 하셨다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역대하1:10> 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 하니
솔로몬이 백성 앞에서 출입한다는 말은 솔로몬이 백성을 통치한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왕을 목자로 표현했습니다(왕상22:17, 대하18:16). 양은 목자의 다스림과 인도를 받습니다. 목자는 양 가운데로 들어가기도 하고 양으로부터 나가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요 목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로 들어오시기도 하고 나가시기도 하십니다. 사도되는 조건은 우리 가운데로 출입하시는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주님과 항상 함께 한다는 말은 주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도의 조건은 아주 기본적인 것입니다. 사도는 주님과 항상 함께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항상 함께 해야 합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쓰거나 달거나 바쁘나 바쁘지 않거나 변함없이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사도의 조건이 아니라 성도의 조건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함께 함을 요청하십니다. 주님은 사회적 지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출세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재물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모두가 차별 없이 하나 되는 공동체!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 우리 교회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어떤 대형교회에 담임목사님을 모시기 위하여 담임목사 청빙위원회가 조직이 되었습니다. 위원장 되는 장로님이 교인들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정말 훌륭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분에게는 몇 가지 흠이 있습니다. 첫째, 그 분은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시는 분입니다. 둘째, 그 분은 목회하다가 돈이 떨어지면 돈을 벌기 위해 나가십니다. 셋째, 그 분은 감옥에도 몇 번 갔다 온 적이 있는 전과자입니다. 넷째, 그 분은 외모가 아주 못생겼습니다. 다섯째, 그 분은 간질병을 갖고 있어 가끔 발작도 하십니다. 여섯째, 그분은 말이 어눌하여 설교를 잘 못하십니다. 일곱째, 그 분은 설교를 하실 때도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십니다. 여덟째, 그 분은 한 교회에 오래 계신 적이 없고 자꾸 교회를 옮겨 다니십니다. 아홉째, 그 분은 지금 현재 조그만 개척교회를 담임하고 계십니다. 열번째, 그 분은 신학대학교도 나오지 않은 분이라 당연히 박사학위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교인들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질 나쁘고 수준이 낮은 목사님은 우리교회에 모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 위원장 장로님이 말했습니다. “제가 예로 든 목사님은 여러분들이 그렇게도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도 바울 목사님입니다.” 오늘 현대 교회는 학력차별이 얼마나 심한지 사도 바울 같은 목회자가 와도 이력서를 낼 수 없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사역할 때의 일입니다. 강남에서 나오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강남 중에서도 부자 동네에서 나오시는 분입니다. 명문대를 나오셨어요. 아주 인텔리세요. 사석에서 제가 유학을 가려다고 못 가게 되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고 했습니다. 제 말에 그 집사님이 아주 의외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 여동생이 어느 교회를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 동생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왜 유학을 가? 유학가면 믿음이 좋아져?” 오해하지 마세요. 유학도 가야합니다. 좋은 대학도 가야 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공부도 해야 합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공부 열심히 하세요.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더 땀을 흘려야 합니다. 하지만 차별은 안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해야 합니다. 교회는 아주 평등한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서 있는 곳입니다.
2. 하나님의 선택
두번째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새 사도의 후보로 요셉과 맛디아 두 사람이 천거됩니다.
<23절>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요셉은 ‘바사바’(Barsabbas)라고도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바’(bar)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바요나 시몬(마16:17)이라고 부르신 적이 있습니다. ‘바요나 시몬’은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바돌로매가 있습니다. 바돌로매는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바돌로매는 이름이 아닙니다. 사바(Sabbas)는 안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사바는 ‘안식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요셉이 안식일에 태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바사바는 ‘평온의 아들’ 또는 ‘맹세의 아들’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요셉에게는 유스도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유스도’는 ‘의로운 자’라는 뜻입니다. 유스도는 로마식 이름입니다. 요셉은 히브리식 이름과 로마식 이름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지체 있는 가문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사바와 유스도라는 말에서 요셉이 얼마나 훌륭한 인격을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스도가 불신자의 도전을 받고 독을 마신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셉은 당대에 유력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맛디아(Mathias)는 ‘여호와의 선물’, ‘여호와가 주신 자’라는 뜻입니다.
요셉과 맛디아 두 사람은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했던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이 추천했다면 두 사람은 틀림없이 신앙이나 인격적인 면에서 흠이 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요셉이라는 사람에 강조점을 둔 것 같습니다. 요셉에게 바사바와 유스도라는 말로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요셉은 출생 배경 인품 등 빠지는 것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에 맛디아는 아무 설명이 없습니다. 맛디아는 덧붙여 설명할 것이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요셉을 앞에 두고 맛디아는 뒤에 두었습니다. 사람들은 요셉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요셉을 유력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셉이 아니라 맛디아를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어 합니다. 또 자기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저 사람 실력 있어”, “똑똑해”, “일 잘 해”, “저 사람 좋은 사람이야!” 등등의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인정은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고 해서 우쭐할 것 없습니다. 세상에서 잘 나간다고 해서 잘난 체 할 것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는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두 사람을 세우고 주님을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 중심을 보시고 선택해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겉을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사무엘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가끔 어렸을 때 마을 우물 옆에 있는 공터에서 어느 해 설에 마을 어른들과 윷놀이 하던 생각이 납니다. 제가 5학년 정도 되었을 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저씨들과 큰 형들 사이에 끼어서 함께 윷놀이를 했습니다. 제 팀에 엄기웅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저 보다 두 살이 아래입니다. 좀 어리버리해 보이는 친구입니다. 행동도 그랬습니다. 말이 거의 다 돌았습니다. 윷놀이가 막판에 이르렀습니다. 저의 팀이 거의 지고 있었습니다. 상대팀이 한두 번 던지면 끝나는 상황입니다. 제가 한 번 던지고 상대팀이 던진 후 기웅이 차례이었습니다. 제가 모가 한번 나오면 경기가 뒤집힐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아저씨들 아주머니들이 제 이름을 불러가며 파이팅을 외치는 거예요. 요한이라면 할 만하다는 거예요. 뒤집을 수 있다는 거예요. 굉장히 부담스럽더라고요. 던졌는데 도인가 개인가 나왔던 것 같아요. 김이 확 빠졌습니다. 제가 얼마나 민망하던지... 이어서 상대팀이 던졌어요. 이제 상대팀이 한 번만 더 던지면 끝나는 상황이 됐어요. 이제 뭐 소망이 없어졌어요. 그리고 기웅이 차례가 됐어요.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한 마디씩 해요. 그 때 기억에 남는 말이 이거예요. “요한이라면 몰라도 기웅이는 안돼 졌어! 졌어!” 사람들이 기웅이를 어리버리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반면에 저는 똑똑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제가 속은 별 볼일이 없는데 겉은 뭐가 있어보이게 생겼잖아요. 그 때 제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윷이 사람을 가려서 엎어지고 뒤집어지나? 그냥 던져서 재수 좋으면 잘 나오는 거 아닌가?’ 우리 팀이 윷놀이를 포기한 상태에서 기웅이가 윷을 던졌어요. 그런데 모가 나온 거예요. 모두 놀랐죠. 그리고 모가 한 번 더 나온 거예요. 경기가 갑자기 뒤집어졌어요. 사람들이 어리버리하게 생각한 기웅이가 경기를 거의 막판에 뒤집었어요.
여러분! 이것이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윷놀이를 주관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기 보다는 사람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3. 더 이상 제비는 뽑지 마세요
셋째, 제비뽑기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새 사도 선출 과정에서 교회의 아주 이상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선출 과정에 전혀 불협화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아주 매끄럽게 진행됩니다. 다락방에 120명이 모였습니다.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견을 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뽑는 방법이 좋지 않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후보를 더 추천하자는 사람도 없습니다. 뽑힌 후에 이 사람은 아니라고 반대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 사람이 좋다”고 이해관계에 따라 가까운 사람을 미는 사람도 없습니다. 전혀 다툼이 없습니다. 또 인간적인 모습도 없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 때문입니다. 120명 모두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20명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동일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동일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저는 오늘 이 시대 교회가 바로 이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잡음이 얼마나 많아요. 여러분! 우리 교회가 이렇게 되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성령충만한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모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을까요? 첫째, 120명이 하나 됐습니다(14절). 바울은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엡4:5)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한 주인, 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한 세례를 받았습니다.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120명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없습니다. 셋째, 말씀에서 뜻을 발견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모두가 어떻게 할지 모를 때 말씀에서 길을 찾았습니다. 상황을 철저하게 말씀으로 해석했습니다. 성경을 열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넷째, 다시 기도했습니다. 말씀에서 길을 찾은 베드로는 다시 기도합니다. 말씀과 기도는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히브리어로 성령에 숨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성령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팀 켈러의 기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켈러는 기도는 세상을 거스른다고 했습니다. 마귀를 거스르는 것이 기도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거스르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이끌리어 가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이끌리어 갈 때 교회는 교회답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이끌리어 갈 때 우리는 우리 본래의 이상적인 모습이 회복됩니다. 켈러는 ‘기도는 인간을 처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숨결이다’라고 했습니다.
새 사도를 뽑는 방법이 제비뽑기입니다. 제비뽑기는 구약 시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제비뽑기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잠언16:33>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그러나 신약시대는 새 사도를 뽑는 일 외에는 더 이상 제비뽑기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더 이상 제비뽑기는 역사 속에서 사라집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 믿는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성령이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이제 제비뽑기는 하지 마세요. 제비는 고대에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입니다. 이제 성령이 인도하심을 받으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될대로 되라 모르겠다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것도 제비뽑기입니다. 어떻게 우리 인생을 운에 맞길 수 있습니다. 운이 좋으면 되고 운이 나쁘면 말아라는 식은 제비뽑기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세요. 제비뽑기는 이제 우리에게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비뽑기가 성행하고 있어요.
어렸을 때 친구들과 놀다보면 두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생겼습니다. 그러면 이게 좋다 저게 좋다 다툽니다. 의견이 안 맞아요. 이 때 우리는 침 뱉기를 했습니다. 한쪽 손바닥에 침을 뱉은 다음 다른 손의 손가락 두 개로 침을 내려칩니다. 그러면 침이 사방으로 튀어요. 그때 침이 많이 튄 쪽으로 결정합니다. 얼마나 더러워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놀았나 싶어요.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제비뽑기가 습관화되어 있어요. 하지만 이제 제비뽑기는 끝났습니다. 이제 성령시대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가룟 유다를 가리켜 ‘제 곳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제 곳으로 갔다’라는 말을 우리말 성경은 ‘자기 자리로 갔다’라고 번역했습니다. KJV는 ‘그 자신의 장소로 갔다’(he might go to his own place)라고 했습니다. 표준새번역성경은 ‘제가 갈 곳으로 갔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가룟 유다는 자기에게 적합한 장소로 갔다는 의미입니다. 그 적합한 장소가 어디일까요? 지옥입니다. 멸망입니다. 은혜를 저버린 자의 갈 곳은 지옥이 적당한 곳입니다. 가룟 유다는 마귀의 인도에 따라 자신에게 알맞은 곳으로 갔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적합한 곳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가룟 유다가 간 곳이 우리에게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알맞은 곳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는 곳입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으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가운데 가톨릭 수녀들이 교회 안에서 노예와 비슷한 상태에서 허드렛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수녀들은 추기경, 주교 등 고위 성직자들과 지역 교구를 위해 요리와 청소, 다림질과 같은 일들로 착취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위 성직자들에게 아침을 준비해주려 새벽에 일어나고, 저녁을 차려준 후에야 잠을 잘 수 있으며, 청소와 세탁물 다림질까지 도맡고 있습니다. 또 수녀들은 추기경과 주교들을 위해 항상 대기해야 합니다. 장시간 고된 일을 하면서도 식탁에 같이 앉아 빵을 나누자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거의 공짜 노동이라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하나 하나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벧전2:9). 교회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 모여 만들어진 공동체입니다. 루터는 성직자가 평신도보다 우월하며, 영적 엘리트라거나 안수 받은 이후 어떤 특별한 ‘불멸의 인격’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오직 주님은 은혜로 모두가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서열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가진 자 없는 자, 높은 자 낮은 자를 나눌 수 없습니다. 모두가 주님 안에서 함께 하는 평등공동체입니다.
리처드 윌킨슨 의 《평등해야 건강하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리처드 윌킨슨은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환경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한다고 했습니다. 불평등이 스트레스성 질병과 사회적 갈등, 우울증과 같은 병을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평등하면 모두가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세실 앤드류스의 『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드북: 행복은 타인으로부터 온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세실 앤드류스는 불평등은 억울함이나 두려움, 시기심을 유발한다고 지적합니다. 반면에 공동체가 서로 평등할 때 서로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서로서로를 동일하게 대합시다. 여기에 교회의 생명이 있습니다. 여기에 교회의 평안함이 있습니다. 평등공동체 이것이 우리가 만들어야 할 교회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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