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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철 씨의 『감정은 습관이다』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978년에 심리학자 필립 브릭먼은 행복감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연구합니다. 서로 다른 두 집단에서 행복감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관찰한 것입니다. 한 집단은 얼마 전 복권에 당첨되어 일순간에 큰 부자가 된 사람들로 다른 집단은 최근에 사고를 당해 몸이 마비된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누구나 예상했겠지만 복권에 당첨된 집단의 행복도는 당첨되기 이전과 비교해 크게 증가했고 반대로 사고가 난 사람들의 행복도는 사고 전에 비해 큰 폭으로 감소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조사해 봤더니 예상외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복권 당첨자들의 행복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복권에 당첨되기 이전 수준으로 낮아졌지만 사고가 난 사람들의 행복도는 시간이 지나자 사고가 나기 전과 비슷한 정도로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격하게 좋은 일이 있어도, 혹은 아주 나쁜 일이 있어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본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감정 상태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뇌는 익숙한 것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원래 익숙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요요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뇌 때문입니다. 뇌가 다이어트 이전의 체중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몸과 마음에 강하게 명령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뇌는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건강에 좋은 체중으로 만들어 놓았음에도 이전의 비만 상태로 돌아가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뇌는 무의식적으로 나에게 이로운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평소에 유지했던 익숙한 상태를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박성철 씨는 뇌는 나의 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모두에게 익숙하면서 공통된 감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 내가 더 힘들다고 힘듬을 자랑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못해먹겠어, 때려 쳐야겠어, 죽겠어, 먹고 살기 힘들어, 짜증나, 공부하기 힘들어, 죽지 못해 사는 거야.’ 힘듬이 우리 사회 공통된 감정이 되었습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주된 소식들은 힘들다는 것입니다. 힘듬이 모두에게 익숙한 감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만나면 “힘드시죠? 얼마나 힘드세요?”라고 묻는 것이 인사말이 되었습니다. 힘듬으로 우리 사회가 하나가 됐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뇌가 힘듬에 하나같이 익숙해져 있습니다. 꼭 모든 사람들의 뇌가 불행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문득 저는 ‘힘듬으로 하나가 되는 사회가 바람직한가?’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곳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곳입니다. 성령은 기쁨의 영입니다. 성령은 소망의 영입니다. 성령은 능력의 영입니다. 성령님에게서 기쁨과 소망과 능력이 한 없이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됨의 영입니다. 교회가 성령으로 하나될 때 힘듬으로 하나되어 있는 우리 사회를 이길 수 있습니다. ‘어려워’, ‘힘들어’, ‘죽겠어’가 아니라 ‘좋아’, ‘됐어’, ‘잘 될거야’로 하나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하나 되는 방법이 기도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기도와 성령으로 하나 되길 소원합니다. 2018년 교회를 향해 우리 모두가 같은 소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에 뜨거운 성령의 임재가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힘듬으로 힘들어하기 보다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또 세상의 힘듬이 아니라 성령님의 기쁨에 익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길 바랍니다.
1. 나의 감람원을 가꾸라
예수님의 승천 후 제자들이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12절>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감람산은 올리브산입니다. 올리브나무로 뒤덮여 있어서 올리브산(Mount of Olives)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무덤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중국에 감람나무가 있습니다. 감람나무 열매와 올리브 열매가 비슷해서 번역할 때 감람나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는 두 나무가 전혀 다릅니다. 우리말 성경이 중국어 성경에 영향을 받아 감람나무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승천하셨을까요? 승천하시는 장소로 감람산 보다는 예루살렘 성전이 훨씬 멋집니다. 승천의 영광을 생각한다면 예루살렘 성전처럼 좋은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감람산에서 승천하십니다. 왜 감람산일까요? 감람산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산에서 쉬셨습니다(눅21:37).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며 우시기도 하셨습니다(눅19:41).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베다니가 감람산의 인근 마을입니다.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감람원에서 나귀를 타셨습니다(눅19:29~40). 최후의 만찬 후에 찬미하시며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마26:30). 마지막 밤 최후의 기도를 감람산에서 하셨습니다. 감람산은 예수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신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배반을 당하고 잡히신 겟세마네가 감람산 바로 아래입니다. 예수님은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셨습니다(눅22:39).
<누가복음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감람산으로 가시는 것은 예수님께 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감람산에 가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있었습니다. 감람산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곳이 아니라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것은 바로 자신이 하신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마태복음24:40-41>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두 사람이 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때 오셨습니다. 두 사람이 맷돌질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때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보고 있을 때 다시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늘 다니시던 곳에서 승천하셨습니다. 다른 곳에서 승천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공생애를 마치기 위해 특별한 곳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늘 계시던 곳에서 제자들과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하시다가 올라가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죽기 전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우리가 늘 일을 보던 곳에서 예수님처럼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터에서 올라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운전하다가 올라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트에서 쇼핑하다가 올라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잠을 자다가 올라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설거지 하다가 올라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화장실에 있다가 올라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어때야 할까요?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 맞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삶의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삶의 매 순간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시는 것이 생활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삶의 자리를 기도의 자리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자리를 기도의 자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순간순간 예수님을 의지하세요. 1초에 한 번씩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세요. 답답하고 곤고할 때 예수님을 의지하세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세요. 그래서 삶을 영적 감람산으로 만드세요.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영적 감람산에서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
여러분! ‘승천’, ‘재림’ 이런 만들이 너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실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재림에 대한 소망은 사람을 참 사람답게 만듭니다. 승천에 대한 소망은 그리스도인들을 참 그리스도인답게 합니다. 지금 사회에 Me too캠페인이 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 집단 중에 하나인 검찰에서 성추행 사건이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그동안 쉬쉬 하고 있었습니다. 정치계에서 Me too 캠페인이 불고 있습니다. 문단에서 Me too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지난 2월 7일에는 롭 포터(40) 미국 백악관 선임비서관이 사임했습니다. 호프 힉스(29)라는 모델 출신의 백악관 공보국장과의 스캔들 때문입니다. 포터는 두 번을 이혼했습니다. 첫 번째 아내였던 콜비 홀더니스는 포터가 “말로, 감정으로, 물리적으로 괴롭혀서” 결혼 생활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콜비는 포터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철저히 이중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포터는 하버드 대학의 로스쿨을 졸업했습니다. 세계 최고 학부에서 공부했습니다. 그 학벌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학벌이 사람을 사람답게 할까요? 권력이 사람을 사람답게 할까요? 돈이 사람을 사람답게 할까요? 돈도 교육도 힘도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돈 있어야 합니다. 교육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진정으로 사람답게 하는 것은 재림과 승천에 대한 소망입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내가 하늘로 올라간다고 생각해보세요. 내 삶에 자리에서 일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는다고 생각해보세요. 함부로 살 수 있습니까?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돈도 힘도 아닙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재림에 대한 소망입니다. 여러분의 감람원을 아름답게 가꾸세요. 내 가정, 내 일터, 내 자리가 바로 나의 감람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여러분의 감람원으로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람원에서 올라갈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감람원에서 나를 부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2. 12사도
예수님은 사역 초기에 12사도를 임명하셨습니다. 12사도의 명단이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는 ‘어떤 특별한 임무를 받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로 보내다는 단어에 펨포(πεμπω)와 아포스텔로(αποστελλω)가 쓰입니다. 펨포는 일반적인 보냄입니다. 아포스텔로는 특별한 임무를 줘서 보내는 것입니다. 사도는 아포스텔로라는 단어에서 온 말입니다. 12제자는 예수님께 특별한 임무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12사도는 교회사에 없어서는 안될 위치에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12사도가 십자가 앞에서 사라져버립니다. 가룟 유다는 자살했습니다. 열 한 명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12라는 수의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 부활 후 사도들은 다시 모입니다. 40일을 예수님과 함께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합니다. 사도들은 새로워졌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승천 후 11명 사도의 명단을 다시 언급합니다. 그것이 13절 말씀입니다.
<13절>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언급한 순서가 복음서와 조금 다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 사도 명단을 새롭게 정립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사도들의 기록 순서는 가족 혹은 나이순으로 보여 집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나이나 가족이 아니라 사역적인 의미에서 기록되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나이도 가족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복음서에 있는 사도들의 명단과 사도행전에 있는 사도들의 명단을 비교하며 성경이 주는 메시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12사도의 명단은 네 명씩 3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그룹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입니다. 둘째 그룹은 빌립 도마 바돌로매 마태입니다. 셋째 그룹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입니다.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가룟 유다는 다른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은 가룟인이 아닌 유다라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룹에서 종종 이탈한 것 같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 때도 사도 그룹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유다는 사도 그룹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기는 똑똑한데 다른 사도들이 무식쟁이라서 그랬을까요? 이유는 모릅니다. 어쨌든 자기 그룹을 중요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아주 비참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그룹을 중요시 여기시기 바랍니다. 건강한 그룹에 속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건강한 그룹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믿음의 그룹이 우스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우스운 것이 아닙니다.
둘째, 선두 그룹은 항상 선두그룹에 있습니다. 베드로 빌립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세 사람은 자기가 속한 그룹에서 항상 맨 앞에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적어도 한 번 이상 자신의 위치가 바뀝니다. 하지만 세 사람은 항상 제 자리에 있습니다. 가능하면 자리를 지키시는 그리스도인이 되세요. 자기 자리를 별 것 아닌 것으로 무시하지 마세요. 그 자리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셋째, 앞으로 나간 사도가 있고 뒤로 나간 사도가 있습니다. 요한은 항상 세 번째 아니면 네 번째였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두 번째가 되었습니다. 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마는 두 번째 그룹에서 세 번째 아니면 네 번째였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두 번째가 되었습니다. 열심당원인 시몬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세 번째였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두 번째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간 사도가 있는 반면 뒤로 간 사도들도 있습니다. 안드레는 두 번째 혹은 세 번째에 언급이 되다가 최후에는 네 번째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바돌로매도 마차가지입니다. 항상 두 번째 언급이 되다가 마지막에는 세 번째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넷째, 베드로는 열 둘 중에 항상 첫 번째입니다. 반면에 가룟 항상 꼴찌입니다. 그러다가 가룟 유다는 최종명단에서는 사라져버립니다. 고등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너 학교에서 어디 앉니? 이유는 무엇이니?” 맨 앞, 두 번째 줄, 가운데에 앉는 학생들의 대답입니다. 첫째, 집중이 잘되고, 긴장하면서 수업을 할 수 있다. 둘째, 수업환경이 좋고 가운데 자리가 선생님과 마주할 수 있다. 셋째, 사이드나 뒤쪽은 선생님과 거리가 멀어져 심리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떨어진다. 넷째, 칠판이 잘 보이지 않는다. 교실의 뒤쪽이나 사이드에 앉는 학생들의 대답입니다. 첫째, 뒤쪽이 편하고 공부하기 싫을 때 잠도 잘 수 있다. 둘째, 선생님이 잘 보이는 앞은 부담이 된다. 여러분! 어디에 앉는 학생들의 성적이 이 상위권일까요? 물어보나 마나입니다. 영적인 자리에서 앞으로 나오세요. 뒤로 가지마세요. 하나님 앞으로 바짝 나오세요. 세상에서는 뒤에 있으셔도 하나님 앞에서는 뒤로 가지 마세요.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오세요.
3명은 항상 선두 있습니다. 8명은 앞으로 뒤로 조금씩 이동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11명의 사도는 사도의 자리를 굳게 지켰습니다. 후에 추가된 맛디아도 자기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12사도 명단에서 사라져버립니다. 꼴찌, 꼴찌, 꼴찌, 사라짐! 이것이 가룟 유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자리를 굳게 지키세요. 뒤로 물러나지 마세요. 우리는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닙니다. 내가 내 자리를 굳게 지킬 때 내가 가정, 우리 사회 그리고 우리 교회에 은혜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 후 그들이 거하는 다락방에 다 모였습니다. 그 다락방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은혜의 자리입니다. 그 다락방은 예수님의 약속이 있는 믿음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제자들은 모두가 하나 돼서 기도에 힘썼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오순절 성령세례를 기다린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승천 후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제자들이 하나 돼서 자리를 지킬 때 제자들의 영적 감람원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시인이자 평화운동가로 알려진 대니얼 베리건은 ‘믿음이란 머리에도, 마음에도 없으며, 엉덩이가 있는 곳에 있다.’라고 했습니다. 머리로는 생각할 때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마음 속으로 이 자리에 있어야 할 당위성을 절절히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나를 지금 이 자리에 붙들어 두고 있는 무엇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게 하는 무엇이 있습니다. 그 자리는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지키세요. 그 자리를 귀히 여기세요.
뉴욕 과학협회 회장이었던 A.크레시 모리슨은 하나님을 믿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구는 한 시간당 1천 마일의 속도로 자전하고 있습니다. 만약 1백마일로 감속한다면 우리의 밤낮은 지금보다 열배나 길어져,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모든 식물을 태워버릴 것이며 기나긴 밤 동안의 추위는 모든 것들을 얼려 버릴 것입니다. 표면온도가 화씨 12,000℃나 되는 태양과 지구가 조금만 더 가까우면 우리는 타 죽을 것이고, 조금만 멀면 우리는 얼어 죽었을 겁니다. 지구와 달이 조금만 더 가까우면 거대한 조수로 인해 하루에 두 번 모든 대륙이 바닷물에 잠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 대기권이 조금만 더 엷었으면 하루에도 수 백만개의 별똥별이 지구 위를 덮칠 것입니다." 태양이 지금 위치에 정확하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얼어 죽거나 타지 않는 것입니다. 달이 지금 위치에 정확하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물에 빠져죽지 않습니다. 여러분! 해처럼 우리의 자리를 굳게 지킵시다. 하나님 앞에서 달처럼 내 자리에 지킵시다.
3. 같은 마음, 같은 기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제자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14절>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누가는 두 가지 기도의 요소를 말합니다. 첫째, 끈질긴 기도입니다. 오로지 힘쓴다는 말이 헬라어로 붙들어 매다는 뜻입니다(προσκαρτερεω). 기도를 집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어려운 것이 응답이 지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만 두어서는 안됩니다. 누가는 끝까지 하는 기도를 강조합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한결 같이 포기하지 않는 기도를 강조합니다.
둘째, 한 마음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라는 말이 문자적으로는 ‘같은 마음으로’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같은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을 가만히 읽어보세요. 기도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이시며 기도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단지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만 하십니다(4절). 또 누구 하나 기도하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같은 마음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기도입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이제 기도해야 함을 마음에서마음으로 통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 모두가 같은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됨의 기도를 아주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보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 우리 죄를 사하여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 주기도는 아주 짧은 기도입니다. 이 짧은 기도에 우리라는 말이 여섯 번 들어갑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은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잡히시기 전 날 밤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십니다. 겟세마네는 ‘기름통’ 또는 ‘기름 짜는 기계’라는 뜻입니다. 올리브 나무가 많아서 지어진 이름 같습니다. 예수님은 올리브 열매를 짜서 기름을 만들 듯이 자신의 모든 것을 짜내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짜내셨는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됐습니다. 그 기도 내용 중에 하나가 교회의 하나됨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 성도가 하나 되는 것은 예수님은 소원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을 때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었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기도했을 때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마음을 같이 하다는 말이 12번 나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였습니다(행2:46). 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행4:24). 초대교회 성령의 역사는 교회가 하나 되었을 때 일어났습니다.
2018년 우리 모두 우리 등대교회 공동체에 성령의 뜨겁고 특별한 임재하심을 간절히 소원합시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 소원이 있습니다. 각자의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예, 좋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 첫 번째를 성령의 특별하신 임재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같은 마음으로 기도해주세요. 여러분의 감람원이 있습니다. 가정, 직장, 생활 터전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도로 가꾸세요. 믿음으로 가꾸세요. 그런데 교회를 위해 먼저 기도로 가꿔주세요. 우리 교회 공동체에 성령의 뜨거운 강림하심이 있기를 기도해주세요. 그래서 우리가 기도와 성령으로 하나 됩시다. 우리 사회는 힘듬이 익숙합니다. 우리 사회는 힘듬으로 하나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뇌에 박혀 있습니다.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힘듬으로 하나된 이 세상을 성령의 하나됨으로 이깁시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나 하나만 충만해서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충만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감람원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승천은 최고의 영광입니다. 승천은 아픔의 자리를 영광의 자리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감람산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신 곳입니다. 또 배신의 아픔이 있는 곳입니다. 가룟 유다가 이곳에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예수님은 아픔의 자리를 승천으로 영광의 자리로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의 살리십니다. 이 사건은 내가 이곳을 영광의 장소로 바꾸겠다는 암시입니다. 나의 감람원을 기도와 성령으로 아름답게 가꿉시다. 스가랴 14:4에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날에 메시야가 감람산에 서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감람산을 공동묘지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감람산은 감람나무가 아니라 무덤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수많은 무덤으로 회색빛이 나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맞이하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예수님은 감람산에 서셨다가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감람산이 아니라 우리 삶의 감람원으로 오실 것입니다. 여러분! 감람산을 무덤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기도와 성령으로 아름답게 가꿉시다. 힘듬으로 하나 되고 힘듬으로 익숙한 이 사회를 기도와 성령으로 이깁시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승리의 기쁨 가운데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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