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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모두 번역성경입니다. 성경이 각 나라 언어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또 지금도 번역이 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번역할 때 그 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표현방식 때문에 생기는 비화가 있습니다.
서부 아프리카의 맛시족은 슬픔을 “못쓰게 된 마음”이라 합니다. 그 인접한 빰바라족은 슬픔을 “눈을 검정빛 나게 하는 것”이라 표현합니다. 여기서 검정빛은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슬픔은 사람의 감정을 검정빛이 나게 합니다. 마태복음 18:9에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범죄케 한다’는 말이 원래 헬라어로 넘어지다는 뜻입니다(스칸달리조). 그래서 마태복음 5:29은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씀을 케냐의 킾시기어로 『만일 네 눈이 너로 치이게 될 덫을 놓거든』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뭔가에 쳐 넘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눈이 무언가의 유혹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넘어지게 된 배후가 유혹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의미심장한 번역입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존재는 사탄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존재입니다.
중앙아프리카에 카레족(Kare)이 있습니다. 에스텔라 마이어즈(Estella Meyers)라는 여자 선교사가 카레 족에게 선교할 때의 일입니다. 선교사님이 카레족에게 보혜사에 대해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보혜사는 번역이 어려운 단어 중에 하나입니다. 선교사님은 카레족에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쭉 설명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안위하시며 권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때로 책망도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아, 그 분은 우리 옆에서 구부리시는 분이시군요?”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카레 족은 대개 여행객들의 짐꾼으로 일을 했습니다. 긴 사막을 왕래하다보면 보통 2~3개월이 걸립니다. 그래서 여행 중에 이질이나 학질 같은 병에 걸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행렬에서 낙오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 대개는 짐승의 밥이 된다고 합니다. 목숨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지나가던 사람들 중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쓰러진 사람의 옆에서 허리를 구부려 그를 어깨에 메어 일으킨 다음 동네까지 데려다준다고 합니다. 카레 족은 그 도와준 사람을 “우리 옆에서 구부리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선교사님이 성령님을 ‘당신들 옆에 구부리시는 분’으로 설명을 하자 모두 알아듣더랍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넘어지면 우리 옆에서 허리를 구부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그래서 다음 마을까지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오늘 말씀에 베드로가 형제들 가운데서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여기 일어났다는 말에 쓰인 헬라어 단어가 다시 소생됐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실족했다가 다시 일어선 사람입니다. 이 시간 이 말씀을 중심으로 세 가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 베드로가 일어설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둘째, 베드로가 일어서서 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책임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1. 일으키시는 예수님
먼저 베드로가 일어설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예루살렘의 어느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제자 120여명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마가 다락방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물론 마가 다락방이라는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어쨌든 120여명이 아버지의 약속한 것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 중에 베드로가 일어섭니다. 그리고 설교를 시작합니다.
<15절>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여기 일어서다는 말이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단어입니다. 헬라어 아니스테미는 ‘일으켜 세우다’(타), ‘소생시키다’, ‘깨어나다’, ‘되살리다’, ‘일어서다’(자)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위로’, ‘다시’, ‘새롭게’(아나)라는 접두어와 서다(히스테미)라는 동사의 합성어입니다. 즉 ‘새롭게 서다’라는 문자적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부활(ἀνάστασις)이라는 단어가 이 말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 일어서다(아니스테미)는 단어가 신약성경에 108번 정도 사용됩니다. 그 중에 70번 이상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을 실족한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분으로 또는 다시 회복시키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형제들 가운데 일어섰습니다.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세우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행적을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승승장구했습니다. 사도로 부름을 받습니다. 권능을 받습니다. 물위를 걷습니다. 변화산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예수님은 사역 중에 주로 베드로의 집에서 묵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늘 곁에 두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 땅에서 대제사장의 여종도 알아볼 만큼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완전히 무너집니다. 최후의 만찬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늘 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셨습니다(마26:31). 그러자 베드로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주를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되는지 보고 싶어 거리를 두고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의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당신도 저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지요?”라고 합니다(마26:69). 깜짝 놀란 베드로가 “네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라고 대답합니다. 잠시 후에 다른 여종 한명이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말합니다(마26:71).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맹세하며 대답합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조금 뒤에 사람들이 다가와서 베드로에게 다시 말합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그들과 한패요. 당신의 말씨를 보니 확실하오.” 그러자 베드로는 저주하면서 맹세합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그러자 닭이 곧 울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통곡하며 웁니다. 베드로는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무너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한 달 전쯤에도 베드로는 심하게 무너졌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안 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우리 성경에 “항변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성경에는 ‘예수를 붙들고 거칠게 소리 높였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표준새번역성경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영어성경은 rebuke(힐책하다 비난하다 꾸짖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상황을 볼 때 베드로가 굉장히 흥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좀 함부로 대한 것 같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고 합니다. 아주 심한 꾸중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 앞에서 아주 철저하게 무너집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 예수님의 수제자로서의 자격 뿐 아니라 제자로서의 자격까지 상실 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에 베드로는 자책하며 갈릴리 바다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여섯 명의 제자들과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새벽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습니다. 그때 제자 중에 하나가 “주님이시다.”라고 외칩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베드로는 물로 뛰어듭니다. 베드로가 회복되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해변에 오자 예수님께서 아침을 준비해두셨습니다. 아침 식사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내 양을 치라고 세 번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의 사도직이 회복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며 무너진 베드로를 예수님은 다시 세우십니다. 갈릴리 북서쪽의 타브가(Tabgha)에 가면 베드로 회복교회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회복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2. 일으키는 자가 된 베드로
무너진 자리에서 회복이 된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사람이 됩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예수 공동체에 아주 큰 상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한 복판에서 배신이 일어났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고도 괴이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을 부르셨을까?’ ‘우리 중에 어떻게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이 있었을까?’ ‘우리는 가룟 유다와 다른가?’ 제자들에게 아주 큰 혼란이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가룟 유다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었을 것입니다. 끔찍한 이름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응어리진 아픔을 가슴에 그대로 묻어둔 채 기도하고 있습니다. 누구 하나 입을 떼는 사람이 없습니다. 입에 올리기조차 싫은 일이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 내용의 골자는 모든 일들이 성경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16절>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성경이 응하였다는 말은 성경대로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성경의 예언대로 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아주 혼란스러운 상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 때문에 생긴 제자들의 아픔을 말씀으로 싸매고 있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만납니다. 예측불허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도대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그 일이 성경대로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책하고 원망해도 해결방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말씀은 성경 시대에 베드로 같은 사람에게만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늘 이 시대에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우리에게 베드로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졌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베드로에게 주목해봅시다. 베드로는 실족했던 사람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베드로처럼 무너진 사람이 있었을까요? 베드로는 무너져도 아주 철저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났습니다.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이제 다른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태어나면서 걷지 못하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40년 동안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그 사람에게 일어나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9장에 애니아라는 사람이 중풍병으로 8년 동안 누워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애니아에게 일어나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9장에 애니아라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죽어 누워 있는 애니아에게 일어나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일어서서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베드로가 옥에 갇혀 자고 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의 옆구리를 치며 일어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어나길 원하십니다. 일어나서 베드로처럼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시대 은혜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마크 레이저라는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마크는 전문 상담가입니다. 그런데 마크는 한 때 성중독에 걸려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마크가 어렸을 때입니다. 아버지는 마크에게 성경을 읽어주면서 마크를 성폭행했습니다. 그래서 그마크는 성스러운 것과 성적인 것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혼동에 빠졌다고 합니다. 마크의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무뚝뚝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가정에서 마크는 친밀함을 전혀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마크는 중학생 때부터 성인 잡지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마크는 사진 속의 여인이 언제나 자기를 향해 웃고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성인 잡지를 계속 보았습니다. 언제나 화가 난 표정의 어머니와는 너무 다르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는 점점 성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윤락가를 들락거렸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그가 박사학위를 받고 전문상담가가 되어서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기와 상담하기 위해 찾아온 내담자들과 관계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것이 드러나 모든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아내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마크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치유하셔서 완전히 회복시켰습니다. 성중독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마크는 성 중독에 걸린 사람들을 돕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성중독에 걸린 사람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치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중독자이었던 사람이 성중독자를 치료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크는 하나님에 의해 놀랍게 쓰임받고 있습니다(회복의 은혜, 이재기).
조니 에릭슨 타다는 10대 초반 가족들과 해변에 소풍을 갔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습니다. 깊은 곳인 줄 알고 다이빙을 했는데 물은 아주 얕았고 그는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습니다. 예쁘고 발랄했던 조니는 이 불행한 사고로 인해 전신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좌절과 분노와 자기 연민에 빠져 평생을 낭비할 수 있었던 그녀를 하나님은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소녀에게 사랑의 손길을 뻗치셨고 삶의 새로운 의미와 사명을 허락하셨습니다. 비록 몸은 여전히 마비상태로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지만 그녀의 상처난 마음은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그녀는 노래를 하고 입으로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며 글을 쓰기도 하고 미국 전역에 나가는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녀는 세상의 수많은 장애우에게 소망을 주는 큰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회복의 은혜, 이재기).
하나님은 넘어진 자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넘어진 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다른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실족했다가 다시 일어서서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실족한 사람이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무너진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일어나길 원하십니다. 다시 회복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제2의 베드로가 되길 원하십니다.
3. 멸망자 가룟 유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지는 미리 앎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는 자신의 전지하신 능력으로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밝히 아십니다. 미래에 될 일까지 미리 아십니다. 그것도 흐릿하게 아시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아십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 베드로는 구약 성경의 예언을 가룟 유다에게 적용합니다.
<16절>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베드로는 가룟 유다의 배신이 미리 성경에 예언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예언된 말씀은 시편 109편 8절입니다.
<시편109:8>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이 말씀은 원수에 대한 다윗의 기도입니다. 그 원수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틀림없는 것은 그 원수는 다윗의 배신자입니다. 베드로는 다윗의 배신자를 예수님의 배신자인 가룟 유다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께서 미리 아시고 다윗의 입을 통해 예수님의 배신자를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룟 유다를 예수님을 파는 사람으로 미리 작정해 놓으신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팔 사람으로 작정된 사람이구나!’, ‘처음부터 하나님은 가룟 유다를 배신자로 작정하셨구나!’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책임이 없지 않을까?’, ‘예수님은 왜 가룟 유다를 막지 않으셨을까?’ 등등의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미리 아셨다는 말이 하나님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도록 모든 상황을 몰아가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 가룟 유다의 자유의지까지 조종하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룟 유다의 자유의지를 전혀 침범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모두 스스로의 계획이었고 스스로의 결정입니다. 만약 가룟 유다가 없었다면 사탄은 다른 사람을 유혹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로 작정하기 전부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은 모두 자신의 결단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탄의 음모를 피하지 않고 그 음모 속으로 유유히 걸어가신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하지만 막지 않으셨습니다.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잡하시기 전날 밤까지 가룟 유다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따사로운 손길에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마26:2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가룟 유다는 백번 천번 회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자유 의지로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따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판 죄악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가룟 유다에게 있습니다.
21세기 최고의 기업가 중에 한 사람인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를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됐죠. 스티브 잡스는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에게 버림받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친부모는 대학에서 만납니다. 두 사람은 23살의 어린 나이에 예상치 못한 임신을 합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의 외할아버지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ㄱ결국 두 사람은 결혼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는 입양 보내집니다.
스티브 잡스의 양부모는 루터교 교회 교인이었습니다. 어린 잡스는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니게 됩니다. 그런데 잡스가 열세 살이 되었을 때에 더 이상 교회를 가지 않게 되는 사건이 생깁니다. 어느 날 잡스는 목사님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만약 지금 제가 이렇게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린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옛날부터 이 시간 이 때에 내가 손가락 하나를 이렇게 들어 올릴 것을 아시고 계셨나요?” 그때 목사님이 “그렇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단다.” 라고 말했을 때 스티브잡스는 또 하나를 물었습니다. 그때 그는 라이프지(Life)라는 잡지를 들고 갔는데 거기에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의 고통스러운 모습들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목사님, 그러면 이 어린아이들의 이 모습과 이 아이들의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하나님께서는 아시겠네요?” 그랬더니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하나님도 그것을 알고 계신단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잡스는 신앙을 포기합니다. 하나님께 더 이상 예배를 드리지 않고 하나님과는 어떤 관련도 맺기 싫다고 선언하면서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됩니다.
목사님은 교리적으로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신학적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안 가르쳐 주었을까요? 하나님의 아픔과 하나님의 슬픔, 하나님의 눈물이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설명하는 아주 중요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숙명주의의 하나님, 운명주의의 하나님으로 추락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결정해 놓지 않으셨어요. 결정은 지금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자유 의지에 따라 결정하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일반은총입니다.
주님은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사람은 넘어지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연약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실족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넘어진 후입니다. 다시 일어나느냐? 다시 일어나지 못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베드로는 다시 일어났지만 가룟 유다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악한 날에 사탄에게 악하게 쓰임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악의 길, 멸망의 길! 이것이 가룟 유다에게 적당한 길이 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악인에 관한 예언이 가룟 유다에게 그대로 적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에게는 의로운 예언이 적용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쓰임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넘어진 자를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수 없이 넘어집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납시다. 좌절하지 맙시다.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는 주님을 소망합시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시 일어나 우리처럼 넘어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됩시다. 하나님의 의의 도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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