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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배경락 목사님의 『곧게 난 길은 하나도 없더라』는 책이 있습니다. 배목사님은 서울 은평구 신사동에 있는 <서북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분입니다. 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캐나다 은행에 취직을 했습니다. 같은 과 학생들이 대부분 취직을 못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기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직장생활을 잘 하는 줄 알았더니 어느 날 회사를 옮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직급도 세 단계나 올라갔습니다. 직장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입지를 굳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반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젊은 시절을 뒤돌아보며 아무런 도전 없이 현실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과연 성공적인 삶일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젊었을 때 모험과 도전을 해보지 않는다면 도대체 언제 그것들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 때문에 딸의 이직을 동의했다고 합니다.
때로 실패와 좌절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인생입니다. 여행을 하다 보니 세상에 곧게 난 길은 하다도 없더래요. 흔히 기도할 때 ‘대로와 같은 길’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솔직히 곧게 뻗은 대로는 없습니다. 삶의 길을 걷다보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 때가 참 많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꾸불꾸불한 길을 걸으면서 배우고 경험하고 느끼는 것이 많습니다. 이 구불구불한 길 곳곳에 수많은 보물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웅덩이도 있고 돌부리도 있고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고 방해꾼도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길에서 그 보화를 경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히려 구불구불 울퉁불퉁한 길이 삶에 약이 됩니다. 이런 저런 일이 인생을 인생답게 만듭니다.
교회는 어떤 곳일까요? 성도는 누구일까요?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고 말합니다. 교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곳입니다. 성도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는 네모난 사람, 세모난 사람, 둥근 사람 등등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별의별 일이 다 있습니다. 교회는 천국이 아닙니다. 천사들이 모이는 곳도 아닙니다. 찬성이 있고 반대가 있습니다. 사랑이 있고 다툼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 때문에 실족하지 마세요. 결국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선을 이루는 곳이 교회입니다. 울퉁불퉁한 길을 걸으면서 교회는 교회다워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선을 이루는 복된 인생이 되길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1. 우리 수
베드로는 가룟 유다를 가리켜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했던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 수는 12사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가룟 유다는 12사도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12사도는 하나님 나라 사역을 위해 택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유다는 한 때 하나님 나라 사역에 참여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유다를 하나님 나라 사역에 참여했던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 수 가운데 참여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수>라는 말에 어떤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 수>는 12입니다. 베드로는 왜 12라는 수에 의미를 둘까요? 성경에서 12는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나타내는 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시려고 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습니다. 이삭이 야곱과 에서를 낳습니다. 야곱은 12아들을 낳습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그리고 열 두 아들은 이스라엘 민족 12지파의 기초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이때 모세가 시내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열두 기둥을 세웁니다(출24:4). 그리고 12진을 이루어 가나안으로 행진합니다. 이후에 12는 이스라엘 정치 군사 종교의 중심을 이루는 수가 됩니다. 솔로몬이 이스라엘 통치를 위해 세운 관장이 12명입니다. 성전에 12개의 떡이 있습니다. 또 놋바다가 12개 있습니다. 놋바다를 바치고 있는 소가 12마리입니다. 그 외에 12라는 수가 계속 등장합니다(열두 사자, 번제물을 드릴 때 짐승이 열두 마리). 하나님은 12라는 수로 일을 하십니다. 이것이 신약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시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2사도를 부르셨습니다. 12사도를 이스라엘의 새로운 기초를 삼으려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해를 옷 입은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의 머리에 12개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신약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12라는 수는 천국까지 이어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24장로가 있습니다(계4:4). 24장로는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를 합친 수입니다. 요한계시록21장에 새 예루살렘 성에 문이 12개입니다(계21:12). 12대문에 12천사가 있습니다. 12대문에 12지파의 이름이 있습니다(계21:12). 성곽에 12기초석이 있습니다. 그 기초석에 12사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기초석은 12보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성의 길이 높이 넓이가 12,000스타디온입니다. 성곽은 144규빗입니다. 144는 12에 12를 곱한 수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총수가 144,000명입니다. 144,000명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12,000명씩입니다. 성경에서 12는 신구약 전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직접 관계되는 신성하고 결정적인 숫자입니다. 12는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상징합니다. <우리 수>는 <하나님의 수>입니다. 지금도 이 하나님의 수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6: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여기 ‘수가 차기까지’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라는 의미입니다. ‘수가 차기까지’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을 다하기까지’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에 수가 차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은바 사명을 다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수의 역사는 지금도 이 세상 역사 속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수를 세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모세에게 20세 이상 남자의 수를 세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것도 지파별로 셉니다. 합이 603,550명입니다. 40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은 수를 다시 세라고 하십니다. 601,730명입니다(1,820명 감소). 레위지파를 따로 세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백 마리 양 중에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을 정확하게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수를 세시고 계십니다. 그것도 머리카락까지 세시고 계십니다. ‘나, 한 명쯤이야. 뭐 어때, 별거 아냐! 없어도 돼'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수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하나님의 수에서 이탈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수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가룟 유다는 한 때 <하나님의 수>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수 중에 하나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수 중에 하나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최고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참여했던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아 있었는지 누가는 세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첫째, 우리 수에 참여했던 자(17절, 상반절)라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나라 수에 참여했던 사람입니다. 둘째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17절 하반절)라고 했습니다. 직무는 봉사의 직분입니다.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일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셋째, ‘그 직분’(20절 끝부분)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 직분은 감독의 직분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그 직분’이 ‘영혼을 관리하는 감독’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정말 고귀한 직분입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이 영광스러운 자리를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리를 영광스럽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영적 신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세요.
요즘 창궐하는 이단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들이 강조하는 것이 144,000입니다. 144,000이 차면 신천신지가 경기도 과천의 청계산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144,000이라는 수에 참여한 사람은 제사장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제사장권을 받으면 남편이나 자식 등 자신의 가족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44,000명에 들어가려고 남편도 버리고 자식도 버리고 출가를 합니다. 지금은 조금 가슴 아파도 제사장권만 따면 됩니다. 나중에 자기 가족을 구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44,00명에 들어가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인천공항이 크게 건축된 이유는 청계산에 신천신지가 이루어지면 전세계 사람들이 과천으로 몰려들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과거부터 이단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이 수 운동입니다. 그것도 144,000을 말합니다. 이단들은 이 수를 아주 중요히 해왔습니다. 수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리스도인들은 이 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수를 귀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수입니다.
2. 우리 수의 방해자
가룟 유다는 <우리 수>의 방해자가 되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수>의 배반자가 되었습니다. 유다는 우리 수에서 이탈했습니다.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팝니다. 누가는 가룟 유다가 받은 은 30을 ‘불의의 삯’이라고 합니다. 불의의 삯이라는 말은 마귀가 준 대가라는 뜻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16절에서 유다를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라고 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를 잡는 자들의 앞잡이였습니다. 예수님을 잡는 자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마귀가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을 팔도록 유혹한 것은 마귀입니다. 이 유혹에 굴복한 사람이 유다입니다. 따라서 가룟 유다는 마귀의 앞잡이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돈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돈을 받은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받은 돈은 마귀에게 받은 것이기 때문에 불의의 삯인 것입니다. 유다는 단순히 예수님만을 판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사도직을 판 것입니다. 동시에 12라는 하나님의 나라의 기초가 되는 수를 판 것입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팔았습니다. 그래서 12이라는 수를 절름발이가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받은 은 30은 불의의 삯인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면서 자신이 받은 은혜를 팔지 마세요. 믿음을 팔지 마세요. 그것은 예수님을 파는 것입니다. 눈앞의 잠깐의 이익 때문에 예수님을 팔지 마세요. 그래서 하나님의 수의 방해자가 되지 마세요.
은혜를 판 사람들의 결말이 피밭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고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유다는 은 30을 돌려줍니다. 그리고 목을 매어 자살합니다. 이 사건을 마태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마태복음27:4-5>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태는 가룟 유다가 목을 매고 자살한 것까지만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가룟 유다가 죽을 때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 나와 죽은 것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18절>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가룟 유다가 죽은 지역은 바위로 된 낭떠러지라고 합니다. 가룟 유다가 목을 맨 줄이 끊어지면서 아래로 곤두박질쳐 몸이 뾰족한 바위에 떨어져 창자가 모두 흘러나와 죽은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 이 땅은 아겔다마, 피밭으로 불립니다. 이 사실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는 이방인에게까지 알려진 것 같습니다. 누가는 이방인입니다. 가룟 유다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 자세한 내용이 이방인에게까지 알려졌습니다. 가룟 유다의 죽음은 그 시대 이방인에게까지만 알려진 것이 아닙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까지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가룟 유다와 그 행위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가룟 유다의 처참한 죽음과 그 배신의 행위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민수기의 발람 선지자는 받은바 은혜를 팔다가 멸망당한 대표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발람은 신비에 쌓인 인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이방민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것도 선지자였습니다. 사람들이 발람이 복을 빌면 복을 받고 저주를 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알정도로 뛰어난 영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장차 이방 나라들이 망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의 입에는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그리스도가 일어나실 것도 알았습니다(민24:17). 발람은 정말 놀라운 은혜를 받은 이방인 선지자이었습니다. 그런데 발람이 불의의 삯에 넘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팔았습니다. 모압왕 발락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달라고 합니다.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발락이 보낸 재물을 갖고 싶었습니다. 눈 딱 감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주 한 마디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정말 많은 재물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못하시게 하시는 거예요.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게 되자 꾀를 부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간음하게 한 것입니다(계2:15). 불의의 삯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을 우상에게 팔았습니다. 베드로는 발람이 불의의 삯을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2:15-16>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결국 발람은 칼에 죽습니다.
<민수기31:8>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
중부 유럽 어느 외진 곳에서 어머니와 딸이 여인숙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여인숙이 있는 곳은 너무도 외진 곳이라서 인적이 드물었습니다. 두 모녀는 무척 가난했고 외로웠습니다. 두 사람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 본 기억이 희미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줄지도 몰랐습니다. 딸의 이름은 마르타였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이 쓸쓸한 어머니와 딸은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합니다. 여인숙에 머물렀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모녀는 기분이 나빴지만 그 시체를 가까운 곳에 묻어 주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짐을 정리하던 중에 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들은 혼자 여행하는 사람 중에 돈이 있어 보이는 여행자들이 여인숙에 오면 독약을 먹이고 그의 가방을 털었습니다. 그리고 시체는 여인숙 옆 강물에 내다 버렸습니다. 그들은 돈만이 그들에게 사랑과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르타에겐 쟝이란 오빠가 있었습니다. 오빠는 돈을 벌어 오겠다고 가난한 집을 떠났습니다. 쟝은 성공해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어머니와 동생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장은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어 아내는 놔두고 혼자서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그 여인숙에 투숙하였습니다. 어머니와 딸은 그 손님이 자신의 아들이자 오빠인 장인 줄도 모르고 평상시와 같이 범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그에게 독약을 먹이고 시체를 강물에 내다 버렸습니다. 그의 짐을 뒤지다가 그 사람이 바로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이며 오빠라는 사실에 통곡합니다. 오직 돈을 모으는 것만이 행복을 얻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불의도 마다 않던 그들은 귀한 아들과 오빠를 잃었던 것입니다. 절망한 어머니는 아들의 시체를 내던진 강물에 빠져 자살해버렸습니다. 동생 마르타도 자신이 저지른 엄청난 비극에 전율하며 강물에 뛰어듭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6:7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둡니다. 불의는 반드시 불의를 그 값으로 낳습니다. 그래서 불의한 자는 반드시 그 불의로 망합니다. 의를 심고 그 의의 열매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3. 그래도 역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된다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수를 절름발이가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꼭 마귀가 승리한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꼭 불의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마귀는 꼭 불의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됩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어 집니다.
AD 1세기 유대지역에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등 3대 종파가 있었습니다. 또 자유의 투사로 불리는 열심당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일어나 기독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이중에 기독공동체는 가장 뜨거운 그룹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굉장한 일들이 기독공동체를 통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기독공동체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기독공동체의 핵심 멤버 열 둘 중에 한 명이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아마도 가룟 유다를 비롯한 나머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뭔가를 보여주실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정부를 뒤집어엎고 혁명을 일으킬 것을 예상한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 말 없이 십자가로 그냥 걸어가십니다. 말 없이 십자가를 지십니다. 예수님을 판 유다는 그 충격으로 자살합니다. 기독공동체에게 아주 치명적인 사건처럼 보였습니다. 아마도 이 사실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소문을 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문제만 생기면 달려드는 기자들처럼 대제사장들은 기독공동체를 공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공동체를 제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모두에게 큰 위기였습니다. 마귀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진 것을 발견합니다.
<20절>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이 말씀은 시편 69편 25절과 시편109편8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기록하였으되’라는 말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십니다. 그 때 사용하신 문구가 ‘기록되었으되’입니다. 주님은 세 번 시험을 받으시며 세 번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록되었으되’(게그랖타이)와 베드로의 ‘기록하였으되’라는 말은 똑같은 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처럼 합시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합시다. 세상 역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며 세상 역사이 성경대로 되고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성경대로 되고 있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가룟 유다의 사건이 성경대로 된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가 만든 걸림돌을 제거합니다. 여러분!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말씀에서 답을 찾으세요. 성경에 답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 수 없이 많은 걸림돌이 있습니다. 그 걸림돌은 말씀으로 제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마귀는 우리의 수를 방해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미혹합니다. 하지 하나님의 수 운동은 멈추지 않습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수는 계속됩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씨가 길가밭 돌밭 가시밭 좋은 땅에 떨어집니다. 그런데 길가밭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악한 자가 와서 말씀을 빼앗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악한 자가 누구입니까? 사탄입니다. 마귀는 말씀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사탄은 가룟 유다가 받은 주님의 말씀을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수의 방해자가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방해로 마치 하나님의 수가 중지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수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수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 수는 계속 될 것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됩니다.
<열왕기하 15:12>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 자손이 사 대 동안 이스라엘 왕위에 있으리라 하신 그 말씀대로 과연 그렇게 되니라
<열왕기하 23:16>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무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무덤에서 해골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그 제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고린도전서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린도전서 15: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마태복음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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