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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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1:6~8
주일오전예배 | 2018-01-28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어느 마을에 큰 홍수가 났습니다. 갑자기 물이 불어나자 마을 사람들은 지붕위로 대피 했습니다. 물이 점점 불어 지붕까지 차올랐습니다. 그 마을의 한 크리스천이 지붕에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지금이야 말로 세상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보여줄 절호의 기회입니다. 저에게 기적을 베푸셔서 이 지붕에 있는 저를 구원해주옵소서.” 

잠시 후에 구명보트가 당도했습니다. 지붕 위에 있던 사람들은 구명보트를 타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크리스천이 구명보트에 오르기를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 저는 괜찮아요. 하나님이 저를 구원해주실 거예요. 저를 구원해달라고 기도했거든요.” 

잠시 후에 구명보트 한 대가 또 왔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하나님이 구해주실 것이라며 타기를 거절했습니다. 구명보트가 두 번이나 더 왔지만 크리스천은 여전히 타지 않았습니다. 물은 점점 차올랐습니다. 지붕이 완전히 물에 잠겼습니다. 물이 크리스천의 발부터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헬기가 나타났습니다. 구조대원은 줄사다리를 내려주며 올라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크리스천은 하나님께서 구해주실 것이라며 타지 않았습니다. 물은 허리까지 차올랐습니다. 아주 위태했습니다. 그 때 또 한 대의 헬기 왔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타지 않았습니다. 결국 크리스천은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크리스천은 자신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가자마자 따졌습니다.  

하나님! 제가 기적을 베푸셔서 저를 살려달라고 했는데 왜 저를 살려주지 않으셨습니까?” 

무슨 말이냐? 나는 너에게 여섯 번이나 기적을 베풀었다.” 

! 하나님이 언제 저에게 기적을 베푸셨습니까?”

 나는 너에게 보트를 네 번이나 보냈다. 나중에는 급해서 헬기를 두 번이나 보냈다.”

믿음은 마음에서 생깁니다. 오해는 머리에서 생깁니다. 잘 못된 지식이 오해를 낳습니다. 그 오해가 잘 못된 믿음을 낳습니다. 믿음을 바로 잡으려면 지식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잘 못된 지식을 바뀌기가 쉽지 않습니다. 앞의 이야기가 모두 맞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한 번쯤 새겨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잘 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지식은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이 믿음과 오해 사이에서 갈등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오해하지 마세요. 또 오해를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1. 믿음과 오해 사이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께서라는 표현을 쓰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주께서라는 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구약성경에 주께서라는 표현이 595번 나옵니다. 그 중에서 240번이 시편에 나옵니다. 1/3은 넘고 1/2일 안되는 수치입니다. ‘주께서라는 말이 시편에 몰려 이유가 있습니다. 시편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가감 없이 진솔하게 표현한 책입니다. 시편에 주께서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이유는 인생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욥기는 고난의 책입니다. 욥은 인생이 당할 수 있는 아주 극심한 고난을 당합니다. 그래서 하면 고난을 떠올립니다. 욥기에 주께서라는 표현이 44번이 나옵니다. 인생의 고난을 기록한 책에 주께서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생의 주인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께서라는 표현에는 믿음의 사람들의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예수님을 라고 부릅니다. ‘라는 표현은 다양한 뜻이 있습니다. 주는 주인되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이것은 신앙고백입니다. 하지만 주라는 말에는 단순한 존칭의 뜻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주께서라는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 주께서라는 말이 7회 나옵니다. 그 중에서 1회만 베드로가 사용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주께서라는 말이 4회 나옵니다. 4회 중에 제자들이 사용한 것은 한 번도 없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주께서라는 말이 19회가 나옵니다. 그 중에서 1회만 베드로가 사용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주께서라는 말이 10회 나옵니다. 그 중에 베드로가 2, 도마가 1, 제자들이 1회를 사용했습니다. 3년 동안 제자들은 주께서라는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 후에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에 대해 주께서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신앙 고백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 주께서라는 표현을 사용한 직후에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여기서 회복은 이스라엘 민족의 자주독립을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BC722년에 망했습니다. 남 유다는 BC586년에 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616년 이상을 강대국에 짓밟혔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 메시야의 모형이 다윗입니다. 다윗 같은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을 독립시킬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바라는 메시야 상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다윗 같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천 동안 이스라엘은 잘 못된 메시야관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오해한 것입니다. 잘 못된 지식입니다. 편견입니다.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본 것입니다. 믿음을 정치적으로 본 것입니다. 교회를 정치적으로 본 것입니다. 잘 못된 지식이 잘 못된 믿음을 만들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처럼 예수님께 주께서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와 편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사단은 지식으로 믿음을 오해하게 만듭니다. 

여쭈어’(6)라는 말의 시제가 현재 능동태 미완료 직설법 3인칭 복수입니다. 제자들 한두 명이 물은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 모두가 물은 것입니다. 상황을 볼 때 한 번만 물은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물은 것 같습니다. 그것도 단도직입적으로 물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자 이제 이스라엘 민족이 자주 독립할 때가 왔다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바로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아주 긴박하게 생각했습니다. 부활을 경험했지만 예수님에 대한 오해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정치적인 속셈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교회에 이런 오해는 없을까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냥 모든 것이 너무 좋아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이건 아닌 것 같은데라는 불신앙이 올라와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잣대로 신앙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순수함이 사라집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세상적인 셈법이 올라와요. 믿음을 가지고 세상적인 욕심을 채우고 싶어 합니다. 교회에서 자기 욕심을 채우고 싶어 합니다. 믿음과 편견 사이의 갈등입니다. 세상적인 관심을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편견 오해 불신 오만 세상적인 관심을 버리고 순수해져야 합니다. 오늘날 종교와 정치가 유착되어 있습니다. 불교, 천주교. 그리고 교회도 정치에 지나치게 유착되어 있습니다. 정경유착 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정교유착입니다. 오늘날 종교가 정치의 터전이 되어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종교를 이용합니다. 종교는 정치를 통해 자신들의 필요를 채웁니다. 정치와 종교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합니다. 교회가 순수함을 잃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 교회는 순수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순수해져야 합니다. 목사는 목사로서 성도는 성도로서 순수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의 구도자로 순수하게 서야 합니다. 그 때 우리 시대 교회는 교회다워질 것입니다.

 

2. 때와 시기 

예수님께서 때와 시기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손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은 자주독립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와 그 시기는 너희들이 알 필요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시간에는 하나님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시간이 있습니다. 시간표에는 하늘의 시간표가 있습니다. 그리고 땅의 시간표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시간은 사람의 시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시간은 하나님의 시간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 땅의 시간표는 하늘의 시간표대로 움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일을 자기 시간표에 맞추려고 합니다. “하나님! 바로 요때 응답해주셔야 합니다.” “주님!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이 적기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응답하십니다. 사람은 시간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또 아무것도 알 수도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시간 안에 있습니다. 시간에 관해서는 하늘의 천사들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때와 시기는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때와 시기에 대해서 할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5:1-2> 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여러분! 때와 시기는 도둑 같이 옵니다. 즉 시간은 하나님이 주장하십니다. 그래서 때와 시기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지루하고 답답합니다. 하지만 참고 견디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시간을 믿음으로 기다리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때와 시기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산에 엄지손가락만큼 굵은 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어찌나 곧게 쭉 뻗어 잘 자라는지.... 장차 큰 재목으로 쓰일 것이 분명했습니다. 한 마을에 사는 네 명의 친구가 마침 이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 네 명의 친구는 모두 직업이 달랐습니다. 한 친구는 밭농사를 많이 경작하는 농사꾼이고, 한 친구는 지게를 만들어 파는 소목이었고, 한 친구는 집을 짓는 큰 목수였습니다. 네 번째 친구는 나무를 베어 장작을 만들어 파는 나무꾼이었습니다. 곧게 자란 나무를 유심히 살피던 네 친구가 각각 한 마디씩 했습니다.  

농삿꾼, "내년 쯤 베어서 도리깨 만들어야지." 

소목(나무를 다듬어 가구나 문방구 따위를 만드는 사람), "10년쯤 후에 베어서 지게 만들어야지." 

큰 목수, "30년쯤 더 자라면 베어서 큰 기둥을 만들어야지" 

나뭇꾼, "올 겨울에 베어서 불쏘시개 해야지."  

모두들 자기의 눈높이 따라 그 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나무는 한 나무이지만 누가 보느냐에 따라 땔감으로...도리깨 자루로...지게 재료로.. 큰 기둥으로.. 섯가래로 그 용도가 정해져서 베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땔감이나 도리깨 자루가 아닌 좀 더 큰 일을 감당하길 원하십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제칠일 안식일 재림교회라고 아십니까? 일명 안식일교라고 합니다. 안식일교회가 왜 이단인지 아십니까? 날짜 때문입니다. 윌리암 밀러라는 사람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밀러는 다니엘서를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그랬더니 다니엘의 예언이 1883321일에 마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날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서를 잘 못 해석한 것입니다. 밀러는 수정했습니다. 오류가 생긴 것은 예수님의 오심을 유대력으로 계산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밀러는 로마력으로 다시 계산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얻은 날짜가 18841022일입니다. 이날에도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밀러의 후계자 히람 에드슨은 18841022일은 예수님이 천상의 성소에 들어가신 날이라고 변호했습니다. 안식교인들은 때와 시기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려다가 이단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그들은 자기들이 이단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때와 시기가 있습니다.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다고 숭늉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실을 바늘허리에 매서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믿음과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3.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령의 임하심은 아주 특별한 임하심입니다. 그냥 임하심이 아닙니다. 앞으로 이 땅에 성령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성령 시대는 성령님께서 세계 역사를 주관하시는 시대입니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을 말씀합니다. 기독교 역사상 교회가 탄생할 때 오순절 예루살렘에 있었던 성령 강림입니다. 이 성령 강림은 오직 한 번뿐인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도 경험할 수 있는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지금은 성령시대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 이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사모해봅시다. 왜 우리는 초대교회처럼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을까요? 우리 교회에 그리고 저와 여러분에게 이 뜨거운 성령의 임하심이 있기를 간절히 소원해봅니다.  

권능은 헬라어로 뒤나미스입니다. 뒤나미스는 권능’, ‘능력’, ‘’, ‘세력’ ‘병력’ ‘기적등등의 뜻입니다. 안에 있는 힘이 폭발해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노벨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라는 폭약의 유래가 되는 말입니다. 뒤나미스는 약 1톤 정도의 폭약이 터지는 힘입니다. 산을 무너뜨리고 바위를 깨뜨리는 힘입니다. 어떤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아도 무너뜨리고 나아가는 힘입니다. 이것이 권능(뒤나미스)입니다. 성령의 특별한 임하심이 있을 때 그 힘이 밖으로 터져 나옵니다. 

증인이라는 말은 사건의 목격자입니다.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사실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증인이라는 말이 나중에는 순교자를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증인은 어떠한 희생을 당하더라도 자기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여종 앞에서 나는 도무지 예수라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사람들이 무서워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임하시자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자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자 베드로가 바뀌었습니다.  

A L 윌리엄스의 인생을 뜨겁게 살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성공학에 관한 책입니다. 윌리엄스는 이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은 먼저 인생에 대한 소극적인 자세를 진취적이며 적극적인 자세로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정신적인 허약성을 철저히 씻어 버리고 불굴의 마음을 가짐을 몸에 지녀야 한다. 우유부단한 자신을 행동력이 철철 넘쳐흐르는 인간으로 변혁시켜야 한다.

윌리엄스의 말처럼 우리 스스로 자신의 허약한 정신을 철저히 씻을 수 있을까요? 우리 스스로 불굴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책의 제목이 너무 공감이 갑니다. 저는 인생을 정말 뜨겁게 살고 싶습니다. 열정적으로 살고 싶어요. 그런데 잘 안되요. 내 스스로 행동력이 철철 넘쳐흐르는 인간으로 변혁이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은 스스로 변혁이 되는지. 하지만 저는 안되는 것 같아요. 뜨거워지려고 노력하는데 안돼요. 사람이 뜨겁게 살려면 오직 성령의 특별하신 임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임재하셔야 사람이 변혁이 됩니다. 성령께서 임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뜨겁게 살 수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성령의 특별한 임하심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시자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18절을 중심으로 3구분할 수 있습니다. 1장부터 7장까지는 예루살렘의 복음화입니다. 예루살렘은 기독교를 가장 핍박했던 곳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곳입니다. 복음화는 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일어났습니다. 8장부터 12장까지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복음화입니다. 13장부터 28장까지는 땅 끝입니다. 성령이 임하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예루살렘을 복음으로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서쪽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복음이 로마 제국의 심장부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가장 찬란한 문화의 중심지,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로마로 복음이 전진해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철의 제국 로마를 무너뜨립니다. 복음은 로마를 통해 유럽 전역에 전파됩니다. 그리고 영국을 복음화시킵니다. 복음은 17세기 이후에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갑니다. 복음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 한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그 복음은 중국을 거쳐 다시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복음의 서진 운동 즉 사도행전의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 성령의 역사에 쓰임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브라질 상 파울루에 데오르 디 아모르 교회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상 파울루는 브라질에서 가장 큰 도시입니다(11,150,249(2008)). 미린다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입니다. 미린다 목사님은 신유은사가 있는 분입니다. 신유은사 하나로 100만 명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미린다 목사님 서재에 가면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합니다.  

목사가 불이 있어야 성도가 불구경 온다.’

성도가 불이 있어야 불신자가 불구경 온다.’

사도행전 1장부터 8장까지는 베드로가 썼고, 9장부터 28장까지는 바울이 썼는데 사도행전 29장부터는 내가 쓴다.’ 

저와 여러분이 이 시대에 복음을 위하여 한 점이라도 사용되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세요. 성령 하나님을 묵상하세요. 그리고 성령 하나님을 갈망하세요. 그래서 성령 임재의 뜨거움을 경험하세요. 그러면 우리 인생이 행복해질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풍성해질 것입니다. 우리 삶에 진정한 변혁이 있습니다.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아주 큰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행복추구입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합니다. 사람들의 주된 관심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 교육의 핵심도 행복 추구입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는 이유 그것은 돈을 벌어서 행복하게 잘 살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목표는 틀렸습니다. 그것도 아주 잘 못됐습니다. 우리 사회가 행복을 추구하고 있지만 행복합니까? 초등학교 때부터 자아실현에 대해 배우지만 자아실현을 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삶의 목표는 행복에 있다. 종교를 믿든 안 믿든 또는 어떤 종교를 믿든 우리 모두는 언제나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삶은 근본적으로 행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행복은 각자의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이 나의 변함없는 믿음이다.  

인간의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미움 분노 시기는 행복에 아주 해롭다는 거예요. 죄송합니다만 이것을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다 알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아요. 사람은 행복을 추구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오해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추구할 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왜요? 원래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성령세례 받을 때 사람이 사람다워집니다. 성령세례 받을 때 성도가 성도다워집니다. 성령세례 받아 성도에게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인생의 참된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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