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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교회, 약속 그리고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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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1:3-5
주일오전예배 | 2018-01-21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어느 사람이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의 천년이 하늘에서는 얼마나 됩니까?” 하나님께서 “1분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 사람이 그러면 이 세상에서의 100억 원은 천국에서는 얼마만한 가치가 있습니까?”라고 묻자 하나님께서 100원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하나님 저에게 100원만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 100억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1분만 기다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성도는 누구일까요?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일까요? 교회는 기다리는 곳입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여서 기다리는 곳이 교회입니다. 성도는 먼저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약속의 성취를 기다립니다. 기도 응답을 기다립니다. 은혜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성도는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기다리는 곳입니다. 대전 중구 유천동에 가면 <기다림교회>가 있습니다. 교회 이름이 기다림입니다. 교회는 기다리는 곳이라는 목사님과 성도님들의 신앙이 담긴 이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참 의미가 있는 이름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중요한 세 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첫째, 40일입니다(3). 둘째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4)는 말씀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8). 오늘 읽은 본문에 이 세 가지 중 두 가지가 나옵니다. 이 시간에 이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40  

먼저 40일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가끔 나타나셨습니다.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나타나사 보이시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시고 다시 보이셨다가 다시 사라지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40일 동안 11번을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물론 더 많이 보이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장소에 500명이 모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11번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여러 번 자신을 보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부활의 증거를 확실히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계심을 나타내사라고 했습니다. 부활의 증거를 제자들에게 확실히 보여주시기 위하여 여러 차례 나타나셨습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가복음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의 증거를 제자들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부활의 증거를 보이신 이유는 제자들의 믿음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제자들은 멘탈이 붕괴됐습니다. ‘예수님은 가짜였나!’, ‘우리는 3년 동안 헛된 일을 한 것인가?’, ‘우리 믿음은 공허한 것인가?’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봤다.’ ‘천사들이 무덤에 나타났다.’ ‘누가 누가 봤다.’ 등등의 소문들이 돕니다. 소문은 점점 커집니다. 하지만 부활을 확신하지 못한 제자들은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입니다. 두 사람은 절망하고 낙심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두 사람에게 나타나십니다. 두 사람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주님은 두 제자에게 말씀을 풀어주십니다. 그때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두 제자는 부활을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낍니다. 그래서 두 제자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도마도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제자들은 점점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합니다. 나중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 영원히 썩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이 됐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마다 예수님에 대한 개념이 바뀝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40일 동안 여러 차례 보이신 이유는 부활의 증거를 확인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가짜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허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진짜입니다. 우리 신앙은 정말입니다. 만약 우리 믿음이 가짜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전서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가 아니라 가장 복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이시며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누가복음 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마태복음에 천국이라는 말이 37번 나옵니다. 그 중에 34번이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쓰신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을 4번 사용하십니다. 또 하늘이라는 말도 여러번 사용하십니다. 마가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14번 나옵니다. 누가복음에는 31(하나님의 나라) 나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전파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 40일일까요? 성경에서 40은 준비의 수입니다. 성경은 어떤 일을 이루기(성취를) 위한 준비하는 기간을 40이라는 수로 나타냅니다. 노아의 홍수 때 비가 40일 동안 쏟아집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진행됩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도자로 준비됩니다. 또 모세는 시내산에서 40일을 금식하며(24;18. 34:28) 하나님께서 세우시고자 하는 제도를 준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을 광야에서 가나안 시대를 준비했습니다.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40일을 금식하며 다음 세대를 준비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40일 중에 회개하여 심판을 면했습니다. 예수님은 40일 금식을 하시며 공생애를 준비하셨습니다. 40은 준비의 수입니다. 40일은 개인이든 국가든 하나님께서 새 일과 새 시대를 시작하시려고 주신 아주 중요한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이 가는 곳에 예수님도 같이 가셨습니다. 제자들이 있는 곳에 예수님도 같이 계셨습니다. 40일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이시며 제자들과 함께 새로 오는 성령의 시대(교회시대)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의미있는 해석을 초대교회 교부들이 했습니다. 존자 베다라는 초대 교회 교부는 40일을 한시적인 현세의 삶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온 세상이나 현세의 모든 기간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수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광야 40년은 우리 현세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이스라엘 광야 40년 생활을 광야교회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영적으로 40이라는 교회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며 가나안을 바라본 것처럼 우리는 교회시대를 지나며 영적 가나안인 천국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40이 주는 영적 교훈입니다. 누구에게나 40일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나안을 바라보세요. 주님이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십니다.

 

2.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두 번째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루살렘은 제자들에게 큰 아픔이 있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무서워 숨어 있던 곳입니다. 유대 광야나 갈릴리도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실까요? 다른 곳에서 기다리면 안될까요? 왜 하필 예루살렘일까요?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는 구약성경에서부터 끊임없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 곳이 모리아 산입니다. 모리아 산의 중심부가 예루살렘 성전의 중심부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린 후에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했습니다.  

<창세기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이레는 히브리어로 이르에입니다. 이르에의 원형은 라아입니다. 라아는 보다’, ‘나타나다’, ‘준비하다’, ‘조망하다’, ‘정탐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르에는 그가 보일 것이다’, ‘그가 나타날 것이다’, ‘그가 준비할 것이다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가 보일 것이다’, ‘여호와가 나타날 것이다’, ‘여호와가 준비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나타나실 곳이 모리아입니다. 이 모리아산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이 모리아 산에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합니다(대하 3:1).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 후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다윗왕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 7만 명이 전염병으로 죽습니다. 이때 다윗이 아라우나(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그러자 재앙이 그쳤습니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 예루살렘 동편 언덕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2: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야 합니다. 왜 하필 예루살렘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교회가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예루살렘은 어디일까요? 기본적으로 우리의 예루살렘은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떠나면 안됩니다. 이것이 기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너무 쉽게 떠납니다. 그 다음에 예루살렘이 가정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예루살렘이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예루살렘이 일일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예루살렘을 결코 떠나지 마세요. 여러분의 예루살렘을 지키세요.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됩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은혜가 있습니다. 힘들고 어렵고 답답해도 예루살렘을 떠나면 안됩니다.

 

3. 기독교는 기다림  

마지막으로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을 합니다. 종종 기독교를 <자비의 종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관계의 종교>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기독교를 <겸손의 종교>라고 했습니다.  

저는 기독교를 <기다림의 종교>라고 하고 싶습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약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자기 백성들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이루어가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하여 이루어져가는 과정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약속은 기다림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언약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입니다.  

성경에는 35천 가지의 복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 약속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구원자의 약속입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입니다. 셋째, 성령 임재의 약속입니다. 제자들은 구원자를 만났습니다. 구원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첫째와 둘째를 경험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약속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 번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다리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의 약속은 기다림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세례라는 말은 잠긴다(baptize, βαπτίζω)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성령 속에 잠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공기 중에 잠겨 있습니다. 우리는 공기 중에 잠겨 있어야 마음 놓고 호흡을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스킨스쿠버를 해본 적이 있습니다. 산소통을 매고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규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입으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코로 호흡하면 안돼요. 그래서 아주 불편해요. 그래도 물속에 들어가면 어느 정도 적응이 됩니다. 할 만해요. 재밌어요. 한 참 후에 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살 것 같아요. 얼마나 자유로운지 몰라요. 물고기는 물에 잠겨야 자유롭습니다. 사람은 공기에 잠겨야 자유롭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에 잠겨야 합니다. 성령에 잠긴다는 말은 성령 안에 머무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을 성령 충만이라고 합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님께서 주도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면 성령세례를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면 될까요? 성령세례를 기다리는 사람이 반드시 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기도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십니다(11:13).  

<사도행전1: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둘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막연히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정확하게 성경에 근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기다리는 사람은 말씀과 기도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기다림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교회는 기다리는 곳입니다. 성도는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40일이라는 교회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것을 바라보며 기다립시다.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희망입니다. 어떤 분에게 기독교는 기다림이 종교라는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는 거예요. , 정말 기다림은 지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희망으로 기다립시다. 천국을 기쁨으로 기다립시다.  

군대에서 제일 기다리는 것은 휴가와 제대입니다. 군대에서 휴가는 정말 좋습니다. 군인들은 옷 두벌, 군화 두벌이 지급됩니다. 한 벌은 평상시 입습니다. 나머지 한 벌은 휴가갈 때만 입습니다. A급 군복입니다. 군대에서 A급 군복을 일계장이라고 부릅니다. 휴가 전 한 달 정도 되면 아주 좋아요. 슬슬 휴가 준비를 합니다. 1-2주 전에 이발을 합니다. 1주일 정도 남으면 일계장을 깨끗하게 빱니다. 더 일찍 빠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옷을 빨아서 걸어 놓고 휴가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3-4, 2~3일 전에 다립니다. 정말 신이 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군화에 광을 냅니다. 정말 좋아요. 마음이 막 설렙니다. 잘 때도 행복합니다. 여러분! 기다림은 희망입니다.  

기독교는 기다림의 신앙입니다. 답답하게 느껴질지라도 기다립시다. 우리에게는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천국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계십니다. 아우슈비츠 죽음의 포로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시리라는 것을 믿는다오. 그러나 조금 늦게 오신다오. 나는 믿는다오, 나는 믿는다오. 영원한 평화의 그 날이 땅위에 오리라 나는 믿는다오. 그 때가 다가오고 있으며 더딜지라도 오리라 나는 믿는다오.’  

죽음의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공부 잘하고 돈 있고 백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소망 중에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팡세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기다림을 상실하면서 정말 귀중한 것을 잃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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