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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이 땅의 모든 데오빌로들에게 영혼의 의사가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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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1:1~2
주일오전예배 | 2018-01-14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유대 설화에 솔로몬 성전이 세워졌던 터에 관한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 터는 두 형제들의 소유였다고 합니다. 형은 가족이 있었고 동생은 가족이 없었습니다. 성전 터는 밀밭이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두 형제는 추수를 늦게 마쳤습니다. 두 형제는 자기의 몫을 서로 다른 곳에 쌓아두었습니다. 집에 돌아간 형이 자기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동생은 하루 종일 곡식단을 나르고 뜨거운 볕을 견뎌내지 못 할 것이요. 내가 동생 몰래 밤에 나가서 내 곡식단을 동생의 곡식단에 가져다 놓겠소.” 동생도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형님은 가족이 있고 나는 없지 않는가? 내가 지금 나가서 형 몰래 내 곡식단을 형님의 곡식 단에 가져다 놓아야지.” 이튿날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밭에 나가서 곡식단을 보았습니다. 이상하게도 곡식단은 조금도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에도 두 사람은 곡식단을 열심히 옮겨 놓았습니다. 하지만 아침에는 그대로였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형제는 밤중에 몰래 숨어 자기 곡식단 지켜보았습니다. 한 동안 망을 보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두 형제는 각기 자기 곡식 단을 한 아름씩 들고 동생은 형의 단으로 형은 동생의 단으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두 형제는 중간에서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형제는 곡식단을 내던지고 와락 부둥켜안았습니다. 둘은 함께 기뻐했습니다.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감격스러운 정경입니다. 형제간의 우애가 넘쳤던 이 아름다운 터 위에 하나님의 성전이 우뚝 세워졌습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 사도행전 11-2절을 읽었습니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탄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다니시죠?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에는 다양한 교회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많은 정의가 있습니다. 저는 사도행전의 말씀을 읽으며 교회를 이렇게 정의해 보았습니다. “교회란 데오빌로다.” 왜 교회가 데오빌로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데오빌로 공동체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후편입니다. 사복음서 전체의 후편과도 같은 책이 사도행전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교회의 탄생을 기록한 책이 사도행전입니다. 이 사도행전에 가장 먼저 나오는 사람이 데오빌로입니다. 데오빌로는 누가복음1장에도 나옵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 데오빌로를 각하라고 했습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깍듯하게 각하라는 존칭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장에서는 각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누가는 친구의 이름을 부르듯이 데오빌로여!”라고 합니다. 누가가 누가복음을 쓴 후 사도행전을 쓰기 전까지 두 사람 사이가 아주 가까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친구 같은 친밀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누가는 의사입니다. 로마시대 의사는 노예입니다. 물론 의사는 일반 노예 보다는 자유로웠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노예입니다. 반면에 데오빌로는 각하라고 불릴 만큼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입니다. 신분의 차이가 많이 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어떻게 이름을 부를 만큼 가까워졌을까요? 이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의 특징입니다. 교회는 사귐의 공동체입니다. 성경은 사귐을 말합니다. 그 사귐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사귐입니다. 그 다음은 성도간의 수평적 사귐입니다. 모든 사람이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한 인격으로 수평적으로 만나는 곳이 교회입니다.  

<요한일서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교회는 사귐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이 사귐은 거룩한 사귐입니다. 함께 예배하며 이루어지는 사귐입니다. 함께 기도하며 이루어지는 사귐입니다. 함께 교회를 섬기며 이루어지는 사귐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사귐을 빛의 사귐이라고 했습니다(요일1:7). 여러분! 우리 가운데 거룩한 사귐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가운데 빛의 사귐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교회를 연애당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옛 사회는 남녀가 어울리기 어려운 구조이었습니다. 남녀구분이 엄격했습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을 말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교회 안에서는 남녀가 자유롭게 만났습니다. 그래서 연애당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비꼬는 말일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여러 사람들이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만남과 사귐이 교회 밖에서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춰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만남이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거룩한 만남이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만남은 빛의 만남입니다.

누가와 데오빌로 두 사람 사이에는 사귐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났습니다. 동등한 인격으로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친구 같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사귐은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데오빌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도 있습니다. 데오빌로는 본명이 아닙니다. 당시 도미티안 황제의 조카이었던 클레멘스라는 사람으로 추정을 합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없던 시대에 누가는 신분의 보호를 위해 클레멘스를 데오빌로라고 불렀습니다. 동시에 누가는 클레멘스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을 데오빌로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는 클레멘스뿐만 아니라 예수님 이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데오빌로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2천 년전 어느 특정인에게 보내진 편지가 아니라 오늘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데오빌로들에게 보내진 편지입니다.

누가가 클레멘스를 가리켜 데오빌로여!’라고 부른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향해 데오빌로여!’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함께 신앙생활하며 서로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을 향해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도 요한은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우레의 아들이라고 했겠습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을 하늘에서 불을 내려 죽이고 싶어 했던 사람이 요한입니다(9:54). 그런데 그가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요한일서는 5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책입니다. 그런데 이 짧은 책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53번 나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에게 사랑하는 형제여!” “데오빌로여!”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가 가진 영적 사귐이었습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가 가진 영적 능력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 이후 모든 데오빌로들에게 영혼의 의사였던 누가가 보내는 편지입니다. 누가는 교회의 탄생을 기록하는 사도행전 첫 머리에 데오빌로라는 사람을 기록하면서 교회 공동체가 어떠해야 함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세 겹 중에 두 겹은 너와 나입니다. 두 겹은 우리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겹은 주님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함께 묶여 있는 세겹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나와 너 그리고 주님이 함께 묶여 있는 데오빌로입니다. 사도행전은 주님과 함께 세 겹으로 묶인 데오빌로들의 행전입니다.

2. 데오빌로가 해야 할 일

그러면 이 땅에서 데오빌로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글을 쓰는 일입니다. ‘내가 먼저 쓴 글에는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먼저 쓴 글은 누가복음입니다. 이 시대의 데오빌로가 해야 할 일은 누가처럼 글을 쓰는 일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전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전해야 할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행적입니다.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행하심 가르치심 택하심 명하심 그리고 승천하심 이 다섯 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지상사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후 데오빌로들의 행적입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다시 사도행전을 기록합니다. 왜 성경이 기록되어야 할까요? 그것은 믿음이 바로 기록된 말씀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기록된 말씀과 선포된 말씀입니다. 기록된 말씀은 성경입니다. 선포된 말씀을 설교입니다. 사람들은 선포되는 말씀을 들을 때에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전하는 자가 없는데 누가 듣겠습니까? 전해야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포되는 말씀은 기록된 말씀에서 출발합니다. 따라서 믿음은 기록된 말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는 바로 이 사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더 가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이전에 누가는 사람을 살리는 의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영혼을 살리는 영혼의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혼을 살리는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느 날 헬렌 켈러가 숲에서 놀다가 온 꼬마 아이를 만났습니다. 그 아이는 숲 속에서 한 참을 뛰어놀다가 왔습니다. 헬렌 켈러가 꼬마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숲에서 무엇을 보았니?”

……, 별로 본 게 없는 데요.” 

헬렌 켈러는 깜짝 놀랐습니다. 숲을 이리저리 다니고 와서 별로 본 게 없다니요.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100년을 산다고 생각해봅시다. 100년을 살고 세상을 떠날 때 우리의 기억 속에는 무엇이 남을까요? 하나님께서 너는 100년 동안 세상에서 무엇을 보고 왔니?”라고 물으신다면 무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저는 지금도 그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 별로 본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50년을 살았지만 지난 50년을 돌아보면 남은 것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육신의 장막을 벗고 이 세상을 완전히 떠날 때는 더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정말 가치 있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알프레드 아들러의 삶의 의미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들러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 가지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개인이나 집단의 움직임은 어떤 것이든 영원을 위해 인류 전체가 보다 높은 발달을 성취할 수 있도록 가치를 창조할 때에만 중요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점이다.

     (중략)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지면 이같은 사실이 더욱 명확해지지는 않아도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인류의 전반적인 행복에 전혀 아무것도기여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모두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들의 육체와 영혼은 그냥 흩어져 버렸다. 흙이 그들을 삼켜버렸다. 우주의 사실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멸종된 동물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비밀의 포고령 같은 것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마치 심문하는 우주가 이런 명령을 내린 것처럼 말이다. ‘그대는 사라지거라!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으니 그대는 미래로 들어갈 자격이 없느니라!

 

이 시대 데오빌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누가처럼 글을 쓰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일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없는데 누가 듣겠습니까? 들을 수 없는데 어떻게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들어야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쓴 글이라고 했습니다. 과거에 글을 썼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쓰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살리세요. 영혼을 살리는 일을 하세요. 이것이 이 시대 데오빌로가 해야 할 일입니다.

 

3. 성령에 감동된 데오빌로 공동체

그렇다면 데오빌로는 무엇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까요? 성령으로 전해야 합니다.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2)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셨습니다. 성령으로 명하셨다는 말은 성령을 통하여 명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성령의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1:20).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시험도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받으셨습니다.

<누가복음 4:1-2>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사탄의 시험이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로 돌아가셨습니다.

<누가복음4: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그래서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셨습니다. 복음은 성령을 통하여 전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누가는 성령의 역사하심과 능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령이라는 말이 마태복음에 12(성령 11, 1), 마가복음에 6, 요한복음에 10번이 나옵니다. 누가복음에는 17번이 나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는 55(성령 50, 5)이 나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70회 이상 성령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강조했습니다.

누가는 성령의 감동으로 누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성령의 감동이 되어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천상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승천 이후 천상에서 성령을 통하여 이 땅에 사역을 계속하셨습니다. 이 때 사용된 인물들이 베드로 바울 야고보 빌립 마가 실라 데모데 디도 바나바 같은 인물들입니다. 누가도 예수님의 천상의 사역에 성령으로 쓰임 받은 인물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성령에 감동될 때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데오빌로는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데오빌로 공동체는 성령에 감동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령의 감동된 데오빌로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성령님을 통하여 당신이 쓰실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낙타는 사막 생활에 가장 중요한 가축입니다. 등에 혹 모양의 육봉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봉이 하나인 단봉낙타와 두 개인 쌍봉낙타가 있습니다. 낙타는 며칠 씩 물을 마시지 않고도 살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육봉 속에 저장되어 있는 기름을 분해시켜 필요한 수분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양분을 다시 보충하지 못하면 육봉은 점점 작아져 결국 없어지고 맙니다. 영양이 충분한 낙타일수록 육봉이 아주 높습니다.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처럼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반드시 성령의 기름이 필요합니다. 모래바람 몰아치는 험악한 사막이나 좁은 길에 비유되는 믿음의 길을 걷자면 성령의 공급이 없이는 능력있는 삶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감동된 데오빌로가 됩니다. 성령에 감동돼야 교회가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에 감동돼야 성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겨울 저녁에 아궁이에 불을 지피시는 아버지 옆에 앉아 있곤 했습니다. 장작을 쌓아야 불이 타오릅니다. 따로 하나씩 떼어 놓으면 불이 붙지 않습니다. 떼어 놓으면 타는 불도 꺼집니다. 교회는 장작처럼 함께 쌓아있어야 성령의 불이 타오릅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바벨론의 포로였습니다. 그들은 포로 생활 중에 거룩한 만남을 가졌습니다. 함께 기도했습니다. 함께 고민을 나눴습니다. 그러던 중에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니엘의 세 친구는 7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풀무불이 세 사람을 태우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풀무불 속에서 세 사람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느부갓네살은 풀무불 속에서 세 사람과 함께 하셨던 주님을 가리켜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했습니다(3:25). 풀무불 속에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공동체! 이것이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요? 여러분! 교회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세겹 공동체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실 때 데오빌로 공동체는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전도서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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