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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저는 지난 주간 말씀을 준비하는 중에 문득 어린이 동화인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 1937)가 생각이 났습니다. 저의 집 아이들이 어렸을 때 디즈니에서 만든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 애니매이션을 즐겨 봤습니다. 수십 번은 족히 본 것 같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아이들이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를 보고 있어요. 집에서 왔다 갔다 하며 대사도 듣고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부르는 노래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일곱 난쟁이의 직업은 보석을 캐는 광부입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숲 속에서 일곱 난쟁이는 아주 열심히 일을 합니다. 5시가 되자 종이 울립니다. 퇴근 시간이 된 것입니다. 일곱 난쟁이는 일렬로 줄을 서서 숲 속 길을 걸어갑니다. 그들은 길을 걸으면서 아주 흥겹게 노래를 합니다. 노래 가사가 이것입니다.
I hope I hope I hope I hope(나는 희망한다 나는 기대한다 나는 바란다)
소망의 노래를 부르며 일곱 난쟁이는 퇴근을 합니다. 그 숲은 아무도 살지 않습니다. 사람도 거의 오지 않습니다. 일곱 난쟁이와 동물들 외에는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일곱 난쟁이는 그 숲에서 보석을 캡니다. 보석을 캐서 마땅히 쓸 곳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일합니다. 그리고 소망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것도 아주 흥겹게 노래를 합니다.
백설공주의 어머니가 죽습니다. 나쁜 마녀가 새 엄마로 왔습니다. 마녀는 백설공주를 시녀로 부렸습니다. 누더기 옷을 입히고 힘든 허드렛일을 시킵니다. 공주가 일하는 곳에 우물이 있습니다. 그 우물의 이름이 소원(wish)입니다. 소원의 우물입니다. 백설공주가 지은 이름 같습니다. 백설공주가 우물 속에 소원(wish)이라고 외치면 우물이 소원(wish) 소원(wish) 소원(wish)이라고 응답합니다.
엄마 왕비가 돌아가셨습니다. 새 엄마가 마녀입니다. 마녀가 백설공주에게 누더기 옷을 입혔습니다. 아주 힘든 일을 시킵니다.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백설공주는 소망을 노래합니다. 우물을 향해 소망을 외칩니다. 그러면 우물은 백설공주에게 소망을 응답합니다.
구약 성경에 많은 선지자들이 나옵니다. 선지자들에게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절망 중에서 소망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아주 극한의 절망 중에서 뜨거운 소망의 노래를 부릅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하박국 선지자의 소망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함께 살펴봅시다. 그리고 우리도 하박국 선지자처럼 2018년 소망의 노래를 부릅시다.
1. 절망 중에 소망을 노래하라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소리에 절망합니다. 하박국은 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절망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소리가 복의 소리가 아니라 심판의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아주 처참하게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하박국 선지자는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16절>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창자가 흔들렸다고 했습니다. 창자는 내장을 말합니다. 내장은 몸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중심이 흔들렸다는 의미입니다. 간장이 서늘해지는 느낌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소리에 간장이 서늘해졌습니다.
또 입술이 떨렸습니다. 이 말은 너무 무서워 말문이 막혔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이가 부딪치고 입술이 떨립니다. 그리고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박국은 너무 놀라 입술이 떨리고 말문이 막혔습니다.
또 썩이는 것이 뼈에 들어왔습니다. 무언가가 뼈 속에 들어가서 뼈를 아프게 하고 썩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박국은 두려움으로 뼈가 썩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하박국은 하체를 부르르 떨었습니다.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처소’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아래 부분’이라는 뜻의 명사입니다. 이 단어는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NIV는 ‘내 두 다리가 떨렸다’(my legs trembled)고 했습니다. 김희보 교수는 ‘내 아랫도리가 선 그대로 발을 뗄 수 없는 상태에서 크게 떨린다.’고 번역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심판의 소리로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창자가 흔들렸습니다. 입술이 떨리고 말문이 막혔습니다. 뼈가 썩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몸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체가 떨렸습니다. 하박국은 공포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심판을 작정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유다의 죄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소리가 심판이 아니라 복이 되도록 늘 깨어 있어야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소리가 내 교회와 내 가정에 복이 되도록 깨어 있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님의 소리가 우리 사회와 우리 민족에 복이 되도록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소리가 심판의 소리가 아니라 복의 소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소리로 떨던 하박국에게 아주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그 극한 절망 앞에서 갑자기 소망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17-18절)
하박국은 절망과 공포 중에 갑자기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선지자에게 두 가지 감정이 교차됩니다. 그것도 정반대의 감정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감정의 교차로입니다. 끊임없이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되는 곳이 우리 마음입니다.
미국 셔우드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마이클 캣 목사님의 『절망은 강력한 힘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마이클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절망의 힘은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힘 있는 자가 칭송 받는 세상에서 우리는 깨어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기치 않은 힘을 얻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마이클 캣 목사님은 이 책에서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의 <그리스도의 변형>이라는 그림 이야기를 합니다.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리고 라파엘로를 꼽습니다. <그리스도의 변형>이라는 그림은 여러분들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이 그림에는 두 개의 세계가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림의 상단에는 산 위에서 펼쳐지는 광경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 상단 중앙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신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의 좌우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있습니다. 그 밑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있습니다. 금방 자다가 깬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모습에 너무 눈이 부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산 위에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는 환상적인 광경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림 하단에는 정반대의 광경이 그려져 있습니다. 아래의 오른쪽 부분에는 귀신들린 아이가 있습니다. 소년은 입을 아주 크게 벌리고 있습니다. 너무 괴로워서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아이 뒤에는 아버지인 듯한 남자가 서 있습니다. 옆에는 엄마처럼 보이는 여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주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라파엘은 산 위의 세상과 산 아래의 세상을 아주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마태복음 17장의 두 사건을 오버랩 시켜 그린 것입니다.
이 그림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은 두 가지가 뚜렷이 대조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충만합니다. 그래서 황홀합니다. 어떤 때는 삶의 여러 가지 약한 모습으로 아주 힘이 듭니다.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우리 인생에는 수 많은 교차로가 있습니다. 소망과 절망의 교차로. 희망과 고통의 교차로. 환희와 낙심의 교차로. 우리는 이 교차로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아파합니다. 갈등해요. 여러분! 이 교차로에서 절망이 아니라 소망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서 소망의 노래를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변형>이라는 그림에 예수님의 제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산 밑에서 변화하신 예수님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산 밑에서 일어나는 혼란을 예수님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습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 모두 예수님께 나아가자고 소리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절망과 하나님이라는 교차로에서 하박국은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소망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믿음의 백성들에게 절망은 강력한 힘입니다. 여러분! 절망과 소망의 교차로를 만나시거든 절망으로 나가지 마세요. 소망으로 나가세요. 거기서 소망의 노래를 부르세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망이 아니라 소망으로 부르십니다.
2. 주님 안에서 소망을 노래하라
하박국이 절망의 꼭짓점에서 소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때문입니다.
<18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말미암아’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뻬입니다. 뻬는 ‘안에서’라는 뜻의 전치사입니다. 하박국은 절망 앞에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했습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절대적인 기쁨입니다.
무화과와 포도열매와 감람열매는 가나안 땅의 3대 과실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복을 상징합니다. 이 세 나무에 열매가 없다는 것은 가나안 땅의 복이 모두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런데 밭에 소출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축을 했습니다. 그런데 양과 소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가나안 땅은 축복의 땅이 아닙니다. 절망의 땅이 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박국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기쁨의 서신인 빌립보서를 감옥에서 썼습니다. 감옥에서 쓴 편지가 기쁨의 서신인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기쁨의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주님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립소서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바울은 감옥에서 절대적인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의 기쁨은 어떤 특정한 시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우리들이 삶을 살펴보면 기쁨을 누리는 적기가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손실을 당했을 때입니다. 많이 아플 때입니다.
지난 주간에 저의 집 막내가 아팠어요. 아내가 아이를 씻겨 달래요. 먼저 머리를 감겨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목욕을 시켰습니다. 몸을 씻어주는 데 아이가 으실으실 떨어요. 몸에 물이 다니까 추운 거예요. 그래서 서둘러서 씻어주었습니다. 그 때 아이가 대뜸 “감사합니다.” 그래요. 제가 깜짝 놀라서 “뭐가?”라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다시 말해요. “씻겨줘서 감사합니다.” 그것도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해요. 아이의 감사하다는 말에 제가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지... 여러분! 평상시에는 감사하다는 말을 안했어요. 잘 먹고 잘 놀 때는 감사한지 몰라요. 그런데 몸을 으실으실 떨면서 이가 따다다다 부딪치는 소리로 감사하다는 거예요. 참 아이러니입니다. 사람은 아파야 감사할 줄 압니다. 사람은 아프지 않고 건강하면 자기가 잘난 줄 알아요. 아주 교만합니다.
여러분! 인생을 사시다가 아프게 되면 ‘아! 하나님께서 나 보고 기뻐하라고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시고 기뻐하세요. ‘내가 교만했구나!’ ‘내가 은혜를 몰랐구나!’라고 생각하세요. 인생을 사시다가 뭔가를 잊어버리면 ‘아! 하나님이 나 보고 감사하라고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시고 감사하세요.
베드로 사도가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로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전서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베드로 사도는 고통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는 거예요. 그냥 즐거움과 기쁨이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즐거움과 기쁨입니다.
하박국은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 안에서 소망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러분! 이 시대는 어려운 때입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맙시다. 오히려 주님 안에서 기뻐합시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소망의 노래를 부릅시다. 우리가 절망의 시대를 만난 것은 절망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 중에 소망을 노래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3. 인생을 노래하라
하박국은 소망의 노래 끝부분에 자신의 인생을 노래합니다. 3장 1절에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고 했습니다. 2절부터 19절까지가 선지자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2절 딱 한 절뿐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노래입니다. 그리고 3장 19절 끝에는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시작할 때는 기도였습니다. 마칠 때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기도가 노래로 바뀌었습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중간에서는 절망스러운 상황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인생을 노래합니다.
노래 끝부분인 18-19절에 나라는 말이 7번 나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9번이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두 번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하박국은 노래 끝에 자신의 인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근거가 철저하게 하나님입니다. ‘나의 여호와’ ‘나의 구원의 하나님’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라고 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근거한 나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근거한 나의 노래를 부릅니다. 내게 노래를 주신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19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발이 사슴과 같다고 했습니다. 높은 곳에 다닌다고 했습니다. 높은 곳은 세상을 내려다보는 자리입니다.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초월자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높은 곳은 승리자의 자리입니다. 그 높은 곳에서 하박국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생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여러분의 인생을 노래할 노래가 있기를 바랍니다.
백설공주가 마녀의 음모에 빠져 숲에서 죽을 뻔합니다. 그리고 한 밤 중에 숲속을 헤맵니다. 겨우 목숨을 건진 백설공주는 숲 속에서 노래합니다. 그 노래 첫 가사가 이렇습니다.
“미소와 노래가 있다면 인생은 화창한 날과 같지”
죽다가 살아났습니다. 갈 곳도 없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백설공주는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미소와 노래가 있다면 인생은 화창한 날과 같지!’라고 말입니다. 저는 애니매이션을 보면서 ‘백설공주는 백설공주가 아니라 소망공주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소망을 노래하는 소망의 사람이 됩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절망을 노래합니다. 이제 헬조선이라는 말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죽겠다! 죽겠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절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절망을 노래하는 세상에서 절망을 노래하지 맙시다. 소망을 노래합시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죽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내 주는 강한 성이요(찬송가 585장) 찬송시에는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에 유폐되어 있는 동안 많은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가 있던 방의 벽과 기둥에는 지금까지도 잉크 자국이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이 괴롭고 답답한 유폐생활을 청산하고 차라리 타협해서 여생을 편안히 지낼까?’하는 사탄의 유혹을 받을 때마다 “사탄아, 물러가라”를 외치며 잉크병을 벽이나 기둥에 던진 자국입니다. 루터는 재판정에 나가기 전날 밤, 성경을 묵상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들어 주시고 승리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시편 46편 내용을 기초해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시를 써내려갔습니다.
또 다른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과의 오랜 싸움으로 고통과 실의에 빠져 몸져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가 검은 상복을 입고 남편의 방으로 들어 왔습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서 “아니, 누가 죽었소?”하고 묻자 카타리나는 “하나님이 돌아가셨어요.”라고 슬피 울며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다음과 같이 나무랐습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감히 그런 말을 하시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영원무궁토록 돌아가시지 않소.”
그러자 카타리나는 이렇게 맞받아치며 말했습니다.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당신의 오늘 이 모습은 무엇입니까? 마치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같이 맥이 빠져 누워 있지 않습니까?”
이 말에 루터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시를 써 내려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허 헌 씨의 <절망을 노래할 순 없다>는 시가 있습니다. 시의 끝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죽음마저 습관일 수 없다면
어찌 내 절망을
노래하랴.
슬픔 속에 모은 내 기쁨과
절망 속에 피어난 구겨진 희망의 향기는
아직 살아 있는데.
여러분! 소망은 죽지 않았습니다. 소망은 살아있습니다. 고린도전서13:13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라고 했습니다. 소망은 항상 있습니다. 절망의 시대라고 해서 소망이 죽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은 살아 있습니다. 새로 다가오는 2018년 한해 소망을 노래하는 한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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